촌평
최원식 『문학과 진보』, 창비 2018
연옥의 지혜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poetica7@hanmail.net
2001년 초에 김수영을 대상으로 석사논문을 궁리할 때 최원식의 글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백낙청의 김수영론이 한국비평사에서 어떤 역사철학적 중요성을 갖는지 몰랐고, 김현의 김수영론이 어떤 대타적 긴장 속에서 쓰였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성마른 열정에다 시야도 좁아서 그저 양쪽 모두 편향돼 있다고 편리하게 결론 내린 뒤 그 대립을 넘어서겠다며 혼자 비장해져 있었다. 그 무렵 최원식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1999)을 읽었으니 독후감이 짜릿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작품들이 생산되는 그 장소에서는 이미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회통의 경지에 이른 것”(『문학의 귀환』, 창비 2001, 58면)이라는 단언을 접하며 이토록 옳은 말이 왜 이제야 발설됐나 의아해지기까지 했다. 민족문학진영 이론가로서의 그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그의 유연함을 먼저 만나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후로 그의 글에는 늘 촉각을 세우게 됐다. 대가들의 글이 대개 그렇거니와, 규모있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독자를 주눅 들게 하는 법이 없고, 특유의 미려한 수사 덕분에 일단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출간된 정규 평론집 『문학과 진보』에서도 그게 여전하고 그래서 반갑다.
최원식은 모순의 사상가다. 분열과 대립의 담론 현장에 개입할 때 특히 위력을 발한다. 다투고 제압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모순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어서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이라는 해묵은 대립이든, 또 ‘문학’에서 ‘문’(심미성)과 ‘학’(정치성)의 분열 현상이든(「문학의 귀환」 1999), 그가 개입하면 모순의 각 항들은 한 차원 깊은 수준에서 재정립되고, 모순의 관계 구조마저 새롭게 정렬된다. 계속 헤겔식으로 말해보자면, 분열과 대립은 세계 편에서 생겨나 의식에 부딪쳐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식 스스로도 발견·산출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한데, 바로 그런 운동 속에 자신을 내던질 때에만 의식은 감히 ‘주체’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의 헤겔 번역자인 하세가와 히로시(長谷川宏)는 “내용이 빈곤해져서 불행이 해소되는 경우보다 내용이 풍부한 불행을 살아가는 쪽이 훨씬 좋다고 생각하는 것”(『헤겔 정신현상학 입문』, 도서출판b 2013, 47면)이 『정신현상학』의 주인공인 ‘의식’의 선택이라고 적고 있는데, ‘내용이 풍부한 불행’이라는 말의 여운이 나는 최원식 비평의 여운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떤 종류의 의식이 그와 같은 일에 나서는가. 현실의 모든 분열과 대립이 언제나 발전적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앞서 인용한 헤겔 연구자는 이것이 ‘앎에 관계하는 의식’의 몫이라고 단언한다. 앎을 추구하는 의식이어서 ‘내용이 풍부한 불행’을 기꺼이 떠맡는 것이다. 최원식의 모든 열정의 아래에는 진리에 대한 애착이 있을 뿐, 진영논리와 뒤섞인 어떤 정념은 애초에 있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황종연은 최원식의 ‘회통’ 담론에도 민족문학론의 자기동일성으로 회귀하는 구조가 내장돼 있음을 지적하는 서늘한 행간 읽기를 시도한 바 있지만(「살아 있는 혼돈을 위하여」 2001, 『탕아를 위한 비평』, 문학동네 2012), 나는 최원식 자신이 『백년의 고독』을 읽다 포기할 정도로 리얼리즘에 중독된 자임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모더니즘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대목에서 일단 감동을 받고 마는 독자에 속한다. 언젠가 ‘창비시선(詩選)’의 역사를 두고 ‘정치적 진보성이 미학적 보수성을 고집하는 기이한 현상’을 문제 삼는 글을 발표했을 때, 면식도 없는 먼 후배를 격려하는 그의 전화를 받고서도 나는 역시 감동했는데, 그것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라면 좌우와 상하를 무람없이 넘나들며 대화하는, 생동하는 의식이 선사하는 감동이었다.
모순의 사상가이자 대화의 사상가인 그는 낙관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가 분열과 대립의 장에 개입해 한국문학사의 정신현상학을 펼쳐나갈 때면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발언들은 한 개인의 의견 표명이기를 넘어서 어떤 초개인적 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그 여정의 끝에는(그가 자주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종요로운 종합의 경지가 도래할 것이라는 전망이 거의 언제나 고수된다. 그에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회통은, 혹은 ‘문’과 ‘학’의 분열 넘어서기는, 가능한 일이고 가능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의 비평적 내러티브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낙관성에 골똘해져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흔히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과 비교해 헤겔의 그것을 긍정의 변증법이라고들 하지만, 이 긍정의 변증법을 이미 존재하는 긍정성에 가담하는 손쉬운 것으로, 또는 끝없이 거듭되어야 할 부정의 운동을 중지시켜버리려는 보수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적어도 이 경우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가 어떤 식으로건 절대 버리지 못하는(않는)이 낙관성이 내게는 한국문학에 대한 그의 책임감과 간절함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그의 낙관성은 항용 ‘지성의 비관주의’와 짝을 이루는 ‘의지의 낙관주의’에 속하는 것이겠고,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복사씨와 살구씨가 미쳐 날뛸 날이 꼭 올 것’이라는 믿음의 산물일 것이다.
신간을 앞에 놓고도 그의 비평 전반에 대한 인상기를 늘어놓은 것은 이번 책에서도 이 특장(特長)이 무엇보다 강력해서다. 2006년 친일 청산 논쟁 당시에 쓰인 글에서 그는 소위 변호론과 청산론의 가장 섬세한 취지를 샅샅이 음미한 다음, “최소의 배제를 통한 최대의 통합”(57면)이라는 원칙을 제안하면서, 현대의 심판자들에게 “시험받지 않은 몸으로 식민지시대를 통과한 누더기 몸들을 판단한다는 실존적 감각”(61면)을 부단히 가다듬을 것을 간곡히 주문한다. 그답고도 마땅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시기에 논란을 일으킨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책세상 2006)에 대한 독후감에서도 그는 논적들을 이데올로그로 몰아붙이고 제압하려는 태도와는 가장 먼 곳에서 이 저작의 성취를 자상히 짚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언제나 진영보다는 진리가 우선이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쓰인 신경숙의 「전설」 관련 글에서도 그의 균형과 절도는 돋보이는데, 문제가 된 대목을 표절로 적시하고 평단의 과오를 앞장서 반성하면서도, 두 작품 전체의 방향성은 오히려 극과 극임을 입증하는 자신의 독법을 당당히 제안했다. 결론이야 각양각색일지언정 일단은 성실한 읽기가 비평의 제1윤리라는 뜻이다.
이 글들에 기대어 그에 대한 내 인상기에 추가해본다면, 극단에 있는 입장이란 반드시 오류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의 강박에 가까운 믿음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간 그의 스탠스에 대해 황종연은 “중도통합 정치”(앞의 글 351면)라고 하였고 또 김명인은 “민족협동전선론”(「민족문학론과 최원식」, 『민족문학론에서 동아시아론까지』, 창비 2015, 179면)이라고 한 바도 있지만, 근래의 글에서도 그의 이런 면모는 이론적 입장의 문제이기 이전에 거의 기질적인 선택처럼 관철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용법을 따라 ‘중용’(mesotēs)이라 불러도 그만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저 매사의 가운데에 서서 어중간해지는 일이 아니다. 각 사안의 구체성을 최대한 존중할 때에만 발명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 바로 그것에 힘입어야만 가닿을 수 있는 경지가 중용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가 성급한 판단을 경계하고 진실에 섬세해지기 위한 대화를 “연옥(煉獄)의 토론”(63면)이라 부르며 높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무엇보다 그의 글이 매번 그 일을 해낸다고 말해도 좋다. 적어도 문학의 언어로 진리를 말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감히 천국이나 지옥을 말하는 이들의 기세에 현혹되지 말고, 언제나 이곳을 연옥으로서 살아내고 또 버텨내야 한다. 『신곡』의 주인공에게 그의 스승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최원식의 비평이 있어 가능할 수도 있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