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새로운 문학사, 어떻게 쓸 것인가
왜 지금 문학사인가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저서 『민족문학의 논리』 『한국근대설사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 『문학의 귀환』 『제국 이후의 동아시아』 『문학과 진보』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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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의 귀환
『창작과비평』 지난호 특집은 3·1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새로이 드러낸 점만으로도 보람이었다. 촛불 이후 첫 마중한 3·1 백년이라는 때가 운동을 재해석하고 재발명할 데로 이끈바, 나로서는 조선이 일제에 병탄된 사건을 다시 읽을 묘처에 눈뜬 게 고맙다. 신해혁명(1911)과 5·4운동(1919)을 “제1, 2차 공화혁명의 연속체”로 파악한 민두기(閔斗基)의 견해1는 망국(1910)과 3·1운동(1919)의 관계를 괄목하게 한다. 일제(와 그 의식적·무의식적 추종자)는 ‘합방’으로 부르고 우리는 ‘국치’라고 지칭한 그 사건을 새롭게 해석한 처음은 아마도 상해에서 배포된 「대동단결의 선언」(1917, 이하 「선언」)일 것이다. 이 기념비적인 격문의 백미는 ‘제권(帝權) 소멸의 때가 민권(民權) 발생의 때’라는 대목이다.
융희(隆熙)황제가 삼보(三寶)를 포기한 8월 29일은 즉 오인(吾人)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기간(其間)에 순간도 정식(停息)이 무(無)함이라. 오인 동지난 완전한 상속자니 피(彼) 제권 소멸의 시(時)가 즉 민권 발생의 시(時)오, 구한(舊韓) 최종의 일일은 즉 신한(新韓) 최초의 일일이니 (…) 고로 경술(庚戌)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난 즉 아(我)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니 아(我) 동지난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야 통치할 특권이 잇고 ꥢᅩ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유(有)하도다. 고로 이천만의 생령과 삼천리의 구강(舊疆)과 사천년의 주권은 오인 동지가 상속하엿고 상속하난 중이오 상속할 터이니, 오인 동지난 차(此)에 대하야 불가분의 무한책임이 중대하도다.2
국치를 국경(國慶)으로 바꾼 대문자다. 1910년 8월 29일은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세 보물, 즉 “이천만의 생령과 삼천리의 구강과 사천년의 주권”을 일제가 아니라 “아 국민동지”에게 선위한 날이매, ‘구한’(대한제국)이 ‘신한’(대한민국)으로 혁명되었다는 논리가 상쾌하기 짝이 없다. 주권을 행사함으로써 국민과 영토를 온전히 회복할 “유일무이의 최고기관”(11면) 곧 정부를 조직해 대처한다는 대의를 천명한 이 문서는 기존의 모든 운동을 일거에 뛰어넘는 것이거니와, 국민주권을 명쾌히 했다는 점에서 「3·1독립선언서」를 초과하는 바가 없지 않다.
무엇이 이 놀라운 발상을 가능케 했을까? 단서는 안에 있다. “피(彼)(슬나부)의 혁명”(8면)에 먼저 주목하자. 러시아혁명의 파급을 증거할 첫 문서로도 주목할 「선언」이 인포(印布)된 날이 “단제(檀帝)3기원 4250년 7월”(12면)임을 감안컨대 러시아 2월혁명을 가리킬바, 짜르체제의 붕괴가 핀란드와 유태와 폴란드의 독립을 불러올 것을 예측하면서 러시아혁명을 “반한(半韓)의 복”(8면)이라고 기린다. 과연 자결권을 존중한 볼셰비끼정부의 출범 속에 핀란드는 1917년 12월, 폴란드는 이듬해 11월 차례로 독립했다. “연합국의 산환(散渙)”(8면)에도 유의한다. 1차대전의 승리를 앞둔 시점에서 연합국이 이익 따라 뿔뿔이 흩어지는 양상을 날카롭게 관찰하면서 열강의 각축 사이로 전승국 식민지에도 해방의 길이 열릴 수 있다는 희망을 두던 것이다. 또한 「선언」은 “강권 타파와 민권 신장의 대운동에 착수”한 ‘민권연합회’와 “계절존망(繼絶存亡)의 대의를 선포”한 ‘만국사회당’에도 주목한다.(9면) ‘민권연합회’는 아마도 한국의 독립을 적극 지원한 “불란서인권협회”4로 추정되는데, ‘만국사회당’은 무엇을 가리킬까? 이 문서의 끝에 서명한 14인의 대표5 가운데 신정(申檉)과 조용은(趙鏞殷)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로 이름을 올린 신정은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의 개명(改名)이다. 일찍이 신해혁명의 신호탄 무창(武昌)의거에 참여한6 고매한 애국자 예관은 이 선언을 주도했고 두번째로 서명한 소앙(素昻) 조용은(1887~1958)은 그 충실한 동지였다. 소앙 연보에 가로되, “한국독립의 역사적인 「주권불멸론」 「주권민유(民有)론」 「최고기관 창조의 필요론」을 골자로 한 취지서를 작성. 이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하는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문제의 의제로 제출하고 통과시켜 세계의 이목을 경동케 함.”7 만국사회당은 바로 스톡홀름대회일 터인데, 제3차 치머발트회의(Third Zimmerwald Conference, 1917.9.5~12)라고도 불린 이 대회는 반전(反戰)에서 돌아선 제2인터내셔널 주류에 반대하고 스위스의 치머발트에서 첫 모임을 가진 반전파의 세번째 회동이었으니, 바로 이 대회를 위해 예관은 8월에 조선사회당을 서둘러 조직하고 소앙을 대표로 파견한바, 소앙이 「선언」의 기초자였다.8 2월혁명과 치머발트 인터내셔널의 이상주의를 호흡하면서 “성국(聖國) 건립”을 위해 “자강회일(自彊會一)”을 기필하자는(9면) 「선언」의 다짐이 다시금 생생하다. 촛불이 3·1운동을 재발견·재발명으로 이끌고 있듯이, 혁명이 국치를 재해석·재발명으로 인도한 것이다.
「선언」은 1년 반 만에 3·1운동으로 시현된다. “소학교 선생님이 사아벨(환도)을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9, 그 무단(武斷)의 어둠을 뚫고 ‘다비데군(群)들’이 신화처럼 나타났다.10 청(淸)에서 시작하여 러시아, 오스트리아, 오스만튀르크에 이른 제국들의 황혼을 배경으로 고종(高宗)의 인산(因山)날 봉기한 인민 하나하나가 나라가 된 기적이 각별하다. 왕은 아우라를 둘러쓴 존재다. 지배계급의 상징조작의 결과라 해도 인민에게 왕은 최후의 귀의처, 최후의 구원자였음을 감안할 때 고종이 붕어하자 인민들이 삼보를 몸받아 왕의 공위를 순식간에 국민으로 대체한 기적이 꿈결이다.
2. 문학사적 문제
“우리의 3·1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다.”11 촛불이 초대한 3·1운동 백주년으로 역사가 귀환하고 있다. “상속하엿고 상속하난 중이오 상속할 터”라고 「선언」이 예언했던 국민적 상속의 영구혁명이 나날이 새롭다. 이 역사적 전환 앞에서 국문학도는 문학사가 새삼 숙제다. 이 묵은 숙제를 어떻게, 가능한 한 새롭게 풀 것인가?
단군신화(또는 이해조)부터 최은영까지 한국문학사(또는 현대문학사)의 흐름을 요령있게 짚는 문학사라면 그런 류는 급하지 않다고도 하겠다. 사실 이 말에 어폐가 있다. 자료창고 같은 방대한 문학사, 독자를 오히려 한국문학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그런 유형 말고 높은 문학적 안목으로 씌어진 간명한 한국문학사 또는 한국현대문학사가 한권이라도 있었다면, 그래서 그 책을 대학 1학년 때 필수교양처럼 읽힐 수 있는 행복한 일이 발생했더라면, 아마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탈한국문학 바람을 일정하게 회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예전에는 그런 안내서들이 쏠쏠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태준(李泰俊)의 『문장강화』, 김기림(金起林)의 『시론』, 최재서(崔載瑞)의 『문학원론』 등등을 구해 문학의 대강을 짐작했을 테고, 더 나아가 이병기(李秉岐)·백철(白鐵)의 『국문학전사(全史)』만 해도 우리 문학의 전 과정을 꿸 수 있었다. 이런 지도(地圖)들 덕에 단절론의 경종이 높았어도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현대문학의 유산도 당대문학과 일정하게 조응한바, 말하자면 문필가를 포함한 독서층 또는 독서계가 엄연했던 것이다. 1970년대에 한 정점에 이른 민족문학 또는 민중문학의 전개에서 김지하와 황석영으로 대표되는 작가들을 둥그렇게 감싸고 돈 독자층의 성좌를 상기할 때 본격문학 생산의 바탕으로 될 적정 규모의 진지한 독자층은 관건적이다. 우리도 진즉 5·4 이후 신문학의 성과를 처음으로 정리한 1935년부터 지금까지 때맞춰 나오는 ‘중국신문학대계’와 같은 작업을 축적할 수 있었더라면, 이와 함께 옛 개론서들을 혁신한 새 지도들을 마련하는 일에 나섰더라면, 문학사에 대한 종작없는 소리들이 요즘처럼 어지럽지는 아니했을 터다. 서점에 갈 때마다 실감하는 바이지만 우리가 자초하기도 한 일본(대중)소설의 포위 속에 한국문학은 여위었다. 교과서 밖에서는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현대문학 유산과도 거의 소외된바, 남성 독자의 가출로 달라진 문학생태계의 확대 속에서도 한강을 비롯한 젊은 (여성)작가들이 세월호에서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성장한 성찰적 젊은 독자층의 호위 속에 본격문학의 다른 얼굴을 구축하고 있는 점이야말로 간신한 희망이다. 국문학도의 맹성이 요구된다. 역사는 귀환의 도정에 올랐는데 독자들과 대화하고 작가들과 토론할 지도들을 작성할 책임을 언제까지 방기할 것인가?
현대문학사의 길을 연 임화는 일찍이 “금일에 있어 문학사적 문제란 실로 완전한 한 개의 실천적 과제”12라고 침통히 말했다. 이 발언은 지금 유효한가? 사실 이런 한가한 질문이나 던질 때가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잃어버린 독자 문제 하나만으로도 국문학도는 심각해야 마땅하다. 해야 할 일이라면 가불가(可不可)를 떠나 착수하는 것이 도리이거니와, 물론 문학사 구성과 독자의 귀환 사이에 걸린 낙관의 다리는 없다. 그럼에도 현재의 위기에서 발동된 문학사적 감각의 새로운 획득 과정이란 납작해진 독서계의 끊어진 고리들을 알아챔으로써 한국문학으로의 연통(聯通)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는 점만으로도 보람이 없지 않을 터다. 1939년 신문학사를 연재하기 전, 그 착수의 변(辯)을 논증한 임화의 「조선신문학사론 서설(序說)」(이하 「서설」)은 현대문학사 최고의 방법서설(方法敍說)이다. 임화로 잠간 소급하자.
“이 글은 신경향파문학의 역사에 대한 전혀 부당한 수삼數三의 논문을 비판의 대상으로 하는 국한된 목적으로 기초된 것”(373면)—첫 문장부터 대뜸 논쟁적이다. 천황제 군국주의의 무정한 진군과 함께 조선문학의 멸망(곧 조선의 실질적 해체)이 우울하게 예견되는 1930년대 중엽의 불길한 그림자 속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운명”(375면)을 응시한다. “자연주의문학의 쇠미 이후 올 민족적 문학의 진실한 길을 걷고 있던 그 유일의 예술적 사상적 지주”(375면)인 프로문학이 멸망하면 조선문학도 멸망한다는 절박성이 임화 문학사의 긴절한 화두였던 것이다.
프로문학이 처한 곤경을 분석함으로써 부활의 길을 꿈꾸는 임화는 무엇에 촉발돼 이 글을 초하게 되었는가? “박영희朴英熙, 이형림李荊林에 의하여 대표되는 신장新裝한 예술지상주의”(380면), 곧 카프 전향파의 준동이 빌미다. 임화는 물론 극단에서 극단으로 요동하는 부류로 치부하며 가볍게 치웠지만, 1934년에 튀어나온 그들의 전향선언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카프 해체를 최초로 제의한 이형림(이갑기)도 이형림이지만, ‘병도 없이 신음하는’ 낭만주의에서 돌연 카프 급진파의 선봉에 섰다 또 돌연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 자신”13이란 ‘유명한’ 어록으로 이탈한 회월(懷月) 박영희가 끼친 바는 간단치 않았다. 그럼에도 임화는 전향파가 아니라 동지들을 비판한다. 늦깎이 회월에 의해 어이없는 공격을 당한 프로문학의 개척자 팔봉(八峰) 김기진(金基鎭)과 경성제대 철학과 출신의 신예 신남철(申南澈)의 평론에 대해 “박영희적 이원론의 비판자라는 점에서 한개의 공통점”을 지닌 그들 또한 “문예사관의 신이원론新二元論”(381면)자란 점에서 박영희와 쌍둥이라고 냉정히 명토 박던 것이다.
과연 팔봉과 신남철은 사상과 예술의 분리에 기초한 회월의 이원론을 다시 단장한 신이원론자였을까? 신남철은 단순한 이원론자가 아니다. 사상성과 예술성의 변증법적 통일과정에서 획득될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은 예술, 문학의 본무”14라는 데 입각하여, “문학적 창작을 현실적 통일적 관점하에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방에서는 ‘사상성’ ‘정치성’을 장탄식하고 타방에서는 그것을 지상(至上)한 것으로 주장하는”(371면) 오류에 빠졌다고 회월의 전향선언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팔봉도 물론 신이원론자가 아니다. 임화가 문제 삼은 글은 1934년에 발표된 「조선 문학 현재의 수준」과 「프로 문학의 현재 수준」인데, 팔봉은 왜 새삼 조선문학 또는 프로문학의 계보학에 주목했는가? “상해로부터 돌아와 변×자의 지칭을 들으면서부터 종국을 고”15한 이광수(李光洙)시대의 단명이 상징하듯 건설 도중에 분화된 조선 민족문학의 현상을 세밀히 관찰한 것이 전자라면, 그 대안으로 등장한 프로문학이 “초기의 ‘신경향 문학’적 범주”16를 넘어 어디까지 진전했는가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글이 후자다. 그런데 후자에 회월이 직접 언급된다. “요사이 박영희는 이때의 상태를 회고하면서 말하기를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자살한 것은 예술 자신이었다’고 탄식하였으나 나는 박군의 이같은 의견에 반대한다.”(383면) 팔봉은 이 발언이 “전면적인 현실 가운데서 전개되는 산 인간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여오지 못한 죄과를 ‘정치의식’ ‘슬로건’에 전체적으로 전가하려는 태도”(389면)에서 말미암은 오류임을 명쾌하게 짚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 초기 평론 「감각의 변혁」(1925)에서 예술의 깊은 심급으로서 “‘감각한다’는 것”(17면)에 주목하고 그 혁명을 주창한바, 어떤 점에서는 임화보다 더 근본적이었다.17 임화가 (신)이원론과 대결한 충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과연 일원론이 꼭 만능의 해결책인가는 다시 따져봐야 하거니와, 우리가 이 논쟁에서 진정으로 유의할 바는 임화에 앞서 팔봉과 신남철이 회월의 전향선언에 프로문학을 다시 볼 역사적 전환을 발동한 점이다. 임화의 문학사적 문제는 그 비판적 계승이었던 것이다.
임화의 질문은 전진한다. “오직 이곳에는 하등의 문학적 또는 예술사적 교양을 상반相伴치 않고 관념형태와 생산관계와의 복잡다기한 관계를 죽은 변증법의 경화 硬化한 유물사관의 공식을 가지고 요리하는 독단론의 칼이 준비되여 있는 데 불과하다. (…) 이러한 이원사관은 과거 카프의 조직적 와해를 촉진시킨 변질주의의 이론적 무기였다는 점을 날카롭게 기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380면) 그는 “사상성과 예술성에 대한 통일된 과학적 견지” 대신 “정치 급及 사상에의 직접의 봉사주의”(383면)라는 오류로 인도한/하는 모든 이원론의 청산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프로문학의 계보학을 본격적으로 점검한다. 우선 춘원(春園) 이광수를 “신경향파 문학의 직접의 선행자로”(388면) 놓은 신남철을 비판한다. 춘원의 진보성이란 “정치적 사회적인 일면을 제거한 문화적 자유의 반신상半身像”의 “문화적 축도에 불외不外”(399면)하매, “이해조, 이인직으로부터의 진화의 결과”(390면)인 춘원을 프로문학의 앞에 둘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기미己未 이후에 개화된 자연주의와 (…) 낭만주의”(388면)를 프로문학과 직접적 관계로 묶는다. “조선사람의 역사적 생활의 용모와 내용이 현저히 변화한” “기미라는 한 개의 분수령”을 축으로 출현한 ‘신문학’ 또는 ‘민족문학’은 “기미 이후 새롭게 추이된 조선의 역사적·사회적 생활의 소산”인바, 이로써 “춘원의 인도주의와 이상주의적 귀결의 낭만적 환상”(402면)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이륙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에서는 “『고향』의 작자 이기영을 발견하기까지 조선문학사상 최대의 작가” 염상섭을 비롯한 자연주의 소설의 대표작들을 “프로문학에 물려준 최량最良한 문학적 유산”(409면)으로 기리고, 시에서는 특별히 거론한 이상화(李尙火)를 비롯한 낭만주의를 경향시의 개척으로 높이 평가한다. 그럼에도 프로문학 시기에 와서야 “조선문학사상 최초로 비평다운 비평”(428면)이 출현한 점이 가리키듯 조선 근대문학은 “얕低고 빈약한”(429면) 한계를 노정했으매, “당연히 조선의 시민적 문학이 해결해야 할 것을 미해결 채로 남긴 과제까지 계승받아 실로 모든 영역의 개척자로서의 운명을 가지고 출발”(430면)한 신경향파가 신문학의 유일한 정통 상속자로 인증된다는 것이다. 신경향파문학을 양분하는 ‘박영희적 경향’과 ‘최서해적 경향’에 대한 분석도 각별하다. 특히 전자에 대해 “신경향파의 작가 비평가로서의 박영희, 김기진은 가장 먼저이고 또 지극히 큰 존재”(432면)임을 환기함으로써 근대문학과 프로문학의 고리를 다시 확인하는 점이 인상적이거니와, 그 미숙성을 인정하면서도 결정적 진보성을 변증한 임화의 논리는 더욱 인상적이다. “조선문학은 한번도 자기의 ‘낭만적인 것’을 신경향파의 그것과 같이 정당한 역사적 필연의 길에서 체현한 일이 없었으며, 또한 자연주의의 여하한 작가도 신경향파 〓서해에 있어서와 같이 (…) 개인으로 사회적 전체성의 견지에서 파악하지 못했었다.” 이런 고투를 거듭한 프로문학에 대해 “사상적 본질만을 평가하고 그 예술적 진화 달성을 방기하는”(436면) (신)이원론, 또는 ‘프리체(Friche)적 상대주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신경향파문학과 그 계승자인 신흥문학 10년의 역사를 지키”는 “동시에 이러한 평가 밑에서 현재의 문학을 발전시켜 나”갈 것을(438~39면) 다짐하며 맺는바, “을해(乙亥) 10월 마산 병석에서”가 웅변이다.
3. 임화 이후
결핵 요양 중에 이처럼 날카로운 계보학을 통찰한 임화의 안목이 놀랍다. 오늘날, 사실의 차원은 차치하고 ‘자본주의 근대/사회주의 현대’라는 근본 도식에 입각한 「서설」을 비판하기는 어렵지 않다. 가령 조선의 맑스주의가 기본적으로 메이지 일본을 모델로 한 급진개화파의 후예라는 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임화의 한계는 오늘날 더욱 궁리되어야 할 바이지만, 그럼에도 속류 유물론을 넘어 신문학의 실상에 즉해 프로문학이 앞 시기의 문학과 맺은 복합적 관계를 한눈에 포착한 이 글의 수준은 발군이다. 그는 또 전진한다. 조선문학가동맹이 서울에서 개최한 제1회 조선문학자대회(1946.2.8~9)에서 총론으로 발표된 「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대한 일반보고」(이하 「보고」)는 「서설」을 다시 수정한 임화 최후의 사론이다. 계급문학론에서 근대문학론을 거쳐 민족문학론에 도착한 「보고」의 열쇳말은 “진정한 의미의 조선 민족문학 수립의 과제”(492면)다. 이는 당시 한반도의 정세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로 조정한 조선공산당의 8월테제와 일정하게 호응하는 것임에도 문학 내적 논리 또한 충실했다. 무엇보다 먼저 프로문학에 대한 자기비판이 전경화한다. “조선 시민계급의 문학적 단명”(498면)이란 교조적 꼬리가 아직도 비치지만, “수입된 사조의 모방으로 기인되는 공식주의적 약점”으로 “신문학 가운데 들어있는 긍정될 요소”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여 부정하는 과오에 빠”짐으로써 “민주적인 민족문학의 수립이 부단히 현실적 과제로 살아있”다는 “역사적 자각이 부족했음”을 솔직히 반성한다.(500~501면) 이 바탕에서 프로문학의 위상이 변화한다. 프로문학을 신문학 “그 모든 것의 전면적 종합적 계승표繼承表”(419면), 즉 유일의 상속자로 들어올린 「서설」에 대해 「보고」에서는 부르주아 민족문학에 대립한 한 경향으로 물린 것이다. 이 견지에서 카프와 국민문학 또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분열시대가 새로이 파악된다. “양파의 분열과 대립에도 불구하고 조선문학의 발전은 쉬지 않았고”(500면) 파시즘의 압박이 강화됨에 따라 ‘합리정신’을 주축으로 한 ‘조선어의 수호’와 ‘예술성의 옹호’라는 최저강령으로 “신문학 이래 처음으로 공동노선에 협동”(503면)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반파시즘 민주연합을 위한 통일전선을 염두에 둔바, ‘공동노선’이란 용어에 주목하자. 신간회(新幹會)식 협동전선에 준할 것인데, 통전 안에서 좌익 헤게모니를 견지한 「서설」과 달리 「보고」에서는 프로문학의 헤게모니를 유보 내지 포기한다.18 그리하여 “종래에는 민족적이냐 계급적이냐, 또는 진보적이냐 반동적이냐 하는 방법으로 생각되던 문제가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민족적이냐 비민족적이냐, 혹은 친일적이냐 반일적이냐 하는 형식으로 제기되기에 이른”(503면)바, 「보고」는 일제 말에 이룩된 공동노선의 소중한 경험에 기초하여 “조국의 민주주의적 국가 건설”에 이바지할 “민주주의적 민족문학의 건설”로 대단원을 이룬다.
「서설」에 기초한 신문학사는 신소설시대도 마치지 못한 채 1941년 중단되고, 「서설」을 수정한 문학사는 착수조차 못했다. 임화의 문학사는 이후 어떤 행로를 걸었던가? 『조선신문학사조사(朝鮮新文學思潮史)』 근대편(수선사 1948)과 현대편(백양당 1949)을 은둔 중에 완성한 중간파 백철은 특히 초판본에서 임화의 계승자다. ‘신문학’ ‘근대/현대’와 같은 핵심개념뿐만 아니라 ‘사상’에 준하는 ‘사조’에도 임화의 영향은 감지된다. 그럼에도 신문학을 서구 사조의 모자란 모방사로 파악함으로써 임화의 ‘이식문학론’을 속류화한 과(過)는 두고두고 말썽인 중, ‘동학란’을 “근대적 민중운동”으로 홀로 주목한 것은, 비록 문학사적 맥락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공(功)이다.19 조연현(趙演鉉)의 『한국현대문학사(韓國現代文學史)』(현대문학사 1956)는 문단사다. 임화를 머금은 백철의 신문학사 대신 순수문학 중심의 문학사를 구성하려는 임무에 충성한 조연현은 임화의 핵심어들, ‘조선’과 ‘신문학’을 ‘한국’과 ‘현대문학’으로 대체한다. 사상과 이념에 휘둘리는 우리 문학사를 모더니즘의 현대성을 축으로 재편하려는 그의 시도 또한 미완으로 그쳤거니와, 그럼에도 이식문학론의 속류화는 백철을 계승한다. ‘신문학’ ‘근대문학’ ‘현대문학’을 모두 폐기하고 ‘한국문학’이란 용어를 새롭게 선택한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민음사 1973)는 임화를 이식문학론자로 비판하면서 근대문학 기점을 18세기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임화는 이미 밝혀졌듯이 이식론자도 아닐뿐더러,20 우리 근대문학을 영정조(英正祖)시대로 앞당긴다고 해서 김현이 강조한 “한국문화의 주변성”이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이 무리한 구도는 4월세대의 분화과정에서 민족문학론과 거리를 둔 신중간파의 자의식에서 비롯되었거니와,21 순수문학 -신중간파-민족문학의 정립(鼎立)이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암울 속에서 유례없는 70년대 문예부흥을 불러온 역사의 간지가 종요롭다.
그럼에도 문학에서 이념을 추방하려는 비평적 기도의 표적이 된 임화의 문학사는 불우를 면치 못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방축되어 휴전선을 방황하는 처지에 몰린지라 그 경향은 더욱 조장되기 마련이었다. ‘현대문학’을 열쇳말로 은연중에 임화로 대표되는 프로문학, 인민문학, 민족문학을 무장해제하려 한 조연현 이래 공개적으로 임화를 이식론자로 비판한 김윤식·김현을 거쳐 임화를 직간접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논변은 단속(斷續)된바, 그 최후를 장식한 것이 아마도 21세기 벽두에 횡행한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을 빙자한 종언론 소동일 것이다.
일본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절망 또는 체념에 기초한 그(카라따니 코오진—인용자)의 근대문학종언론이란 의상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난 프로문학해소론이다. 한국으로부터 전해진 풍문을 통해 완성된 신판 해소론이 다시 한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기이한 형국이 가엾다. 요컨대 종언론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후신 민족문학작가회의, 그리고 창비가 주도한 한국의 민족문학운동 또는 민중문학운동의 해체를 촉진하는 나팔로 활용되고 있으니, 종언론을 둘러싼 저간의 소동이란 가라타니를 빙자한 신판 해소론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22
4. 쟁점들
나의 문학사적 문제는 야누스다. 한쪽으로는 과거를, 또 한쪽으로는 미래를 본다. 살아 있는 과거가 70년대 민족문학의 향방이라면, 살아 있을 미래는 촛불 이후의 문학이다. 해방 직후 임화가 도달한 민족문학론과 70년대 민족문학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선차적인데, 우선 주목할 바는 후자가 당 없는 시대의 민족문학이란 점이다. 전자가 신주처럼 위하던 좌익 헤게모니조차 유보한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정치 복무에 견인되어 실패의 길을 걷게 된 일도 결국 상황의 엄중함으로 더욱 강화된 당의 현전에 말미암은 바 적지 않을 터다. 어떤 의미에서는 해방 직후가 당의 지속성이 불안했던 식민지시대보다 문학적으로는 한결 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카프가 해체될 즈음 시작된 임화의 탈교조주의적 탐색이 가능했던 것도 공식적으로는 당이 거의 해체된 상태에 있었다는 점과도 연관될진대, 70년대 민족문학론이 임화의 민족문학론과 기본적으로는 비연속이라는 대목은 주목할 일이다. 70년대 민족문학의 기원은 바로 4월혁명을 원점으로 삼는 60년대 참여문학이다. 국망 9년 만에 봉기한 3·1운동처럼 휴전 7년 만에 폭발한 4월혁명도 기적이다. 이 혁명으로 우리 사회의 남한적 성격이 본격화했듯이 우리 문학의 한국적 내재성도 착근한바, 혁명과 쿠데타의 독한 각성 속에서 태어난 김승옥은 60년대 참여문학과 70년대 민족문학의 ‘반보기’다. 3·1 이후 신문학운동의 총결산이 해방 직후 임화의 민족문학론이라면 4월 이후의 한 결산이자 새 출발이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이매, 양자를 가르는 지표는 분단체제의 성립이다.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교정된 채 마무리됨으로써 불안정한 안정을 내재화한 분단체제의 출범 속에 새로이 도래한 남한의 현실에 뿌리를 둔 덕에 명예로운 비연속을 이뤘음에도 70년대 민족문학이 앞 시기와 완벽히 비연속인 것은 물론 아니다. 아무리 분단이라는 깊은 강이 개재하더라도 남한문학 역시 신문학 전체와 국민적 상속 관계에 있기도 했지만, 가까이로는 해방 직후 민족문학과의 비공식적 접속이 은밀하지만 활발했다. 고서점을 통한 (준)지하유통뿐만 아니라, 인적 연계도 적지 않았다. 남에서 북으로 다시 남으로 귀환한 험난한 여정 끝에 가파른 시적 모험을 사양하지 않음으로써 이후 한국문학의 통합 기도처로 떠오른 김수영을 비롯해 경계에서 살아온 작가들이 살아 있는 전승(傳承)이었다. 한편 북의 문학적 주류/비주류로 섭수된 해방 직후 민족문학의 월북이야말로 분단시대 남북문학사의 비접속적 접속을 드러낸 소중한 불씨라는 점 또한 종요롭다.
요컨대 60년대 참여문학을 모태로 한 70년대 민족문학의 향방이 열쇳말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신중간파와 민족문학은 협동적이면서 비협동적인 관계 속에서 70년대 문학을 추동한바, 그럼에도 순수문학 또한 70년대 민족문학과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김동리조차 때로는 ‘리얼리즘의 승리’에 준하는 작품을 생산한 점에도 유의할 일이지만, 70년대 민족문학운동에 투신한 작가 중 이문구를 비롯한 ‘문단’ 출신이 적지 않았다. 이 또한 그 내발성의 또 하나의 징표다. 이처럼 전후 한국문학과 총합적 계승관계에 놓인 70년대 민족문학이 해방 직후 민족문학과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점은 민중성이다. 임화의 민족문학론은 인민문학론을 실질로 한다. 그런데 인민문학론 또한 분단의 요술로 공동노선적 의의를 급속히 상실해가는 과정에서 숨은 당-정치가 노골화하기도 한바, 전후 한국에서 ‘인민’이란 말 자체가 금기시된 데서 뚜렷하다. 70년대 민족문학의 민중성은 인민문학과 근본적으로 비연속이다.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 국민이라는 정치적 무의식이 발견한 침통한 현실로부터 길어올린 내발적 민중성이 모더니즘의 세례조차 껴안고 넘어선 그 형질이 빛나던 것인데, 한편 그 민중성도 꼭 비연속인 것만은 아니다. 카프도 길게 보면 엘리트 중심 신문학운동의 민중성을 심화하는, 요란하지만 필연적 진화단계이거니와 어떤 점에서는 프로문학과 모더니즘은 그 신문학을 ‘현대화’한 두 쌍생아일지도 모른다. 70년대 문학의 민중성은 바로 30년대 공동노선 시절에 격세유전적으로 연계되는데, 80년대 문학을 볼 한 관점일 수도 있다. 카프가 신문학의 민중적 진화이듯, 80년대 급진문학 또한 70년대 민족문학의 계급적 심화이기도 한 때문이다. 카프 때보다 더 소란한 활기로 가득한 80년대 문학의 탈중심적 반란이 밖으로 소련의 해체, 안으로 문민정부의 출범이란 변화 속에서 정치성의 위기에 함몰한 것은 극적인데, 이 어름에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를 고민한 회통론(1999)은 앞에서 거론한 조선문학가동맹 내부의 대립을 타산지석으로 삼은바, 그 전철을 교훈으로 민족문학의 주도성을 협동전선 안에서 가능한 한 방(放)함으로써 신판 해소론에 대처할 공동노선의 견지가 요점이었다.
나의 문학사적 문제는 한편 촛불 이후의 문학과 연통한다. 한국의 운동 또는 혁명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폭발이었다. 3·1운동이 우리가 지금도 영위하는 현대적 문학제도를 생산한 신문학운동의 위대한 어머니였듯, 4월혁명은 민족문학/민중문학은 물론 모더니즘으로 대표될 신중간파의 문학까지도 경배하는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30년대 문학에 버금가는 위의를 자랑한 70년대 문학의 한 시기가 저물 즈음에 타오른 촛불은 앞 시기 운동의 총체적 계승이요 그 새로운 계단이다. “그동안 우리 운동, 우리 혁명은 ‘나’를 건너뛰었다. 그 ‘나’가, 그 ‘현재’가 귀환했다. 이제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계몽주의는 끝이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저 혼자’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는 상호교육의 대화 속에서 도산(島山)의 애기애타(愛己愛他) 민주주의가 한국사회를 일찍이 가보지 않은 명예혁명의 길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23 소문자 ‘나’의 직접정치를 머금은 촛불은 과연 어떤 문학을 낳을까. 촛불에 감전된 또는 탈감전된 새로운 문학의 도래가 아마도 한국문학 또는 한반도문학의 21세기적 성격을 근본적으로 조형할진대, 여기가 로도스다. “촛불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막 태동하는 이 ‘고귀한 나라’의 향방에 나의 귀를 열고 ‘더불어 저 혼자의 완성’을 깊이깊이 궁리할 문학의 호시절이 도래했다.”(같은 글) ‘최초의 악수’(윤동주)일 촛불도 자유롭지 않은 요즘, 호시절은 또 어떤 사건으로 모양 지을 것인가.
여러모로 우리 문학의 경계가 술렁거리는 때다. 바야흐로 한국어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문학의 변경이 흔들리고 있다. 춘원의 「조선문학의 개념」(1929)은 이 논의의 선편이다. 경성제대 조문과에서 율곡(栗谷)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문학교재로 사용한다는 데 격분한 춘원의 질문이 날카롭다. “(一) <격몽요결>은 문학인가? (二) <격몽요결>은 조선문학인가?”24 춘원은 이 책이 “일종의 수신서·처세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문학이 아니고, 한문으로 저술되었으므로 조선문학이 아니라고 분간하면서, “문학의 국적은 속지(屬地)가 아니요, 속인(屬人, 작자)도 아니요, 속문(屬文, 국문)”(450면)임을 명쾌히 하였다. 이 선구적이지만 편협한 논의는 그뒤 자연스럽게 교정되었다. 춘원에 의해 방축된 한국한문학이 한국문학의 재보(財寶)로 여겨지는 일이 대표적이겠다. 그런데 이 글의 더 큰 문제는 문학을 근대 서양에서 기원한 순문학으로 축소한 데 있다. 『격몽요결』은 춘원이 생각하듯 철지난 처세서가 결코 아니다. 초학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적 성격을 지님에도 이 책은 깊다. ‘중인(衆人)’과 ‘성인(聖人)’이 둘이 아니라는 신유학적 계몽주의에 입각해 “반드시 스스로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한개의 터럭만큼도 자신의 능력을 낮게 보고 그 목표로부터 물러서거나 다른 일로 미루려는 생각을 지녀서는 안된다”25고 용맹정진을 격려하는 데서 시작되는 이 책은 무릇 학인들의 필독서로 상기도 손색이 없는 고전이다. 물론 모국어는 무궁히 더 연마되어야 할 미래이기에 속문주의 원칙은 소중히 새겨져야 하지만, 자발적·비자발적 신(新)이주자들이 세계 도처에서 현지어 또는 한글로 뛰어난 문학을 속속 생산하는 오늘의 상황에 즉하매 속지·속인·속문이 모두 문제적으로 되고 있는 데 유의하여 임계점에 이른 한국문학의 변경들을 미리미리 점검할 필요가 없지 않을 것이다. 이 기회에 한글 또는 외국어로 창작된 디아스포라문학 전체를 풍문이 아니라 문학으로 대접하는 비평적 개입을 행사할 마당을 마련하는 일도 검토함직하겠다.
끝으로 이 문학사에 붙일 이름에 대해 잠깐 생각하자. 먼저 한국, 조선, 한반도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이 중 19세기 말 계몽주의시대부터 바로 촛불에 이르는 시기를 온전히 대표할 이름은 없다. 조선, 대한제국, 식민지조선, 군정하의 남과 북, 그리고 분단된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르는 이름들의 복잡함을 상기하건대 현재로서는 차선이 최선이다. Korea의 대유로서 한국을 택하겠다. 북조선문학사를 섣불리 이에 편입하는 일은 회피되어야 하거니와, 그렇다고 비평적 개입을 포기해서도 아니되매, 이 문제는 따로 준비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으로는 신문학, 근대문학/현대문학, 현대문학. ‘자본주의 근대/사회주의 현대’란 도식은 이미 폐기되었기에 신경향파의 대두 즈음해 근대문학/현대문학으로 나누는 것도 의미가 적다. 이 시기 전체를 현대문학사라고 해도 괜치 않다. 조연현은 1930년대 모더니즘을 앞 시기와 뒤 시기가 접합하는 결절점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미 애국계몽기에도 현대성이 선듯 비친다. ‘20세기’로 마무리한 신채호의 『이순신』 결사는 대표적이다. “상천(上天)이 20세기의 태평양을 장엄ᄒᆞ고 제2 이순신을 대(待)ᄒᆞ나니라.”(대한매일신보 1908.8.18) 예언적이기조차 한 고전과 현대의 조숙한 스파크가 날카롭거니와, 자연주의와 낭만주의로 규정되곤 한 1920년대 신문학은 더욱이 현대를 호흡했다. 한국근대소설의 이정표 염상섭의 『만세전』(1922~24)에 『이방인』(1942)의 뫼르소적 현대성이 얼비치는 점이나, 3·1운동 직후 발랄하게 전개되던 신문학이 20년대 중반 신경향파로 경사된 점이나, 프로문학과 모더니즘이 신문학의 현대화 기획으로서 거의 동시에 발생한 점 역시 우리 신문학사에서 근대성과 현대성이 단계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었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신문학을 선택한다. 이미 임화가 누누이 지적했듯이 우리 문학은 첨단의 현대성 속에서도 어떤 후진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니, 미적 공정성을 온전히 발휘하는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학적 과제다. 자본주의 근대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조선이 겪은 압축적 혼종과 반파시즘 민주연합의 승리에 의거해 해방(=분단)된 이래 한국이 경험한 압축성장의 인과를 돌아보고, 목하 해체의 단계에 들어선 분단체제가 다른 차원에서 마성을 발휘하는 복잡계를 상기할 때, 우리 문학이 그렇지 않은 나라의 문학 같기를 바라는 자체가 비현실적일 것이다. 그 모든 복합성을 요약건대 ‘한국신문학사’26가 잠정적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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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영서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계속 학습되는 혁명」,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40면. ↩
- 「선언」 4~5면. 표지에 ‘宣言’이라 제(題)하고 1면에는 ‘大同團結의宣言’으로 명기한 이 문서는 모두 12면에 달한다. 국한문혼용으로 붙여쓰기한 원문을 내가 띄어쓰기하고 구두점만 찍었다.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 ↩
- ‘단제’는 물론 단군(檀君)이다. 왕의 공위(空位)로 특징되는 1910년대에 혁명가들은 공위시대에 대처할 상징군주로 단군을 상상했다. 대종교(大倧敎)가 1910년대 해방운동의 이념적 거처로 된 까닭이다. ↩
- 민필호 편저 『한국혼(韓國魂)』(4판본), 보신각 1971, 63면. ↩
- 서명자 중 신규식 조소앙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윤세복(尹世復) 등 6인이 알려진 분인데 ‘3·1독립선언서’와는 달리 ‘민족대표’라고 자칭하지 않았다. 이 점 때문에 이기훈은 「선언」의 대표성에 회의적이지만(이기훈 기획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창비 2019, 58면), 나는 조금 다르다. 친러파, 친일파, 친중파, 친미파에다 실력양성파와 무장투쟁파, 기호파와 서북파의 갈등까지 얽힌 데서 일종의 탕평을 모색한 「선언」은 대표 구성에도 세심했다. 가령 선언을 주도한 신규식과 조소앙은 기호 출신의 대동단결파요 문무겸전론자인데, 강원 출신 박용만은 하와이를 근거지로 한 대표적 무장파고 박은식은 서북파/대동단결파고 신채호는 기호파/무장파고 경남 출신 윤세복은 대종교 3세 교주다. “제1차의 통일기관은 제2차 통일국가의 연원이 되고 제2차 통일국가적 의제(擬制)난 구경(究竟) 원만한 국가의 전신(前身)”(8면)이라고 주장한 데 유의하면 14인을 민족대표의 ‘연원’으로 삼지 못할 바 없다고 하겠다. ↩
- 민필호 편저, 앞의 책 127면. ↩
- 강만길 편 『조소앙(趙素昻)』, 한길사 1982, 302면. ↩
- 그런데 「선언」에는 소앙만이 아니라 예관도 관여한 듯싶다. 예관은 불굴의 무인이었지만 일류의 사상가요 문장가였다. 유저(遺著) 『한국혼』의 한 대목만 인용해둔다. “나는 원컨대 우리의 동포들이 다시는 큰소리로 떠들지만 말기를 바란다. 극단의 이상주의라거나 극단의 사회주의 같은 것은 잠간 덮어두기로 하자.—요컨대 오늘의 세기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경쟁하는 하나의 철혈(鐵血)세계인 것이다. (…) 요는 현실주의로 우리들의 머리를 채워야 할 것이다.”(민필호 편저, 앞의 책 46면) ↩
- 염상섭 『만세전(萬歲前)』, 수선사 1948, 201면. 최근 브루스 커밍스는 “1910년 이후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일반적인 제국주의-식민지의 관계가 아니라, 침략 국가와 피침략 국가의 관계로 봐야 합니다”라고 지적한바(한겨레 2019.4.3), 일찍이 임화(林和)가 정복설을 주장했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근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라느니보다도 고대에서 볼 수 있는 강한 민족에 의한 약한 민족의 정복의 성질을 다분히 가지고 있었다”(「조선 민족문학 건설의 기본과제에 대한 일반보고」(1946), 『임화문학예술전집 2: 문학사』, 소명출판 2009, 490면). ↩
- 이는 신동문(辛東門) 시인이 4월혁명에 봉기한 대중을 “아-神話같이/나타난 다비데群들”이라고 노래한 데서 따온 것이다. 신동문 「아! 神話같이 다비데群들: 4·19의 한낮에」, 교육평론사 편 『학생혁명시집(學生革命詩集)』, 효성문화사 1960, 236면. ↩
- 2대째 자전거 판매·수리점을 운영하면서 충북 영동의 3·1운동 기념비를 아버지에 이어 돌보고 있는 신달식씨의 말이다. 「“독도- 위안부 망언 일삼는 日… 3·1운동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아일보 2019. 2.27. ↩
- 임화 「조선신문학사론 서설: 이인직(李人稙)부터 최서해(崔曙海)까지」(1935), 『임화문학예술전집 2: 문학사』, 377면.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 ↩
-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韓國近代文藝批評史硏究)』, 한얼문고 1973, 185면에서 재인용. ↩
- 신남철 「최근 조선문학 사조의 변천: ‘신경향파’의 대두와 그 내면적 관련에 대한 한개의 소묘」(1935), 정종현 엮음 『신남철 문장선집 I: 식민지 시기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3, 372면. 이하 이 글의 인용도 본문에 면수만 표시. ↩
- 김기진 「조선 문학 현재의 수준」, 홍정선 엮음 『金八峰文學全集 I: 이론과 비평』, 문학과지성사 1988, 368면. ↩
- 김기진 「프로 문학의 현재 수준」, 같은 책 380면. 이하 이 글의 인용도 본문에 면수만 표시. ↩
- 임화는 팔봉에 야박했다. 1927년의 ‘소설건축논쟁’에서 형식론을 부정한 회월과 내용-형식 통일론으로 대립한 팔봉 사이에서 전자를 지지한 카프 주류의 지난 과오에 임화가 민감한 탓일지도 모르거니와, 이 대목은 두고두고 유감이다. ↩
- 바로 이 점 때문에 프로문학의 헤게모니를 통전 안에서 견지해야 한다는 ‘조선프로문학동맹’계는 임화를 비롯한 ‘조선문학가동맹’ 지도부와 불화했다. 이 갈등이 분단과 중첩되면서 일찍이 월북의 길을 택한 전자와 뒤늦게 월북한 후자의 위상이 전도된바, 6·25의 발발과 전후 수습과정에서 파탄에 이르게 된 대목에 대해서는 졸고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1991)와 「한국문학의 근대성을 다시 생각한다」(1994), 『생산적 대화를 위하여』,창작과비평사 1997, 114~15면과 32면을 참고. ↩
-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그(본명 백세철白世哲)의 각별한 주목에는 집안의 영향이 크다. ‘계대(繼代)교인’으로 지목될 만큼 뿌리있는 평안도 천도교 집안으로 교단의 유수한 지도자 백세명(白世明)이 형이다. 맑스주의로 시작하여 전향한 ‘국민문학파’로 해방 직후에는 중간파로 변신을 거듭한 백철의 비평적 행보에서 천도교 관련이 앞으로 더욱 깊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
- 두루 인정되다시피, 임화는 조선의 신문학이 그 비내발성으로 말미암아 전통문학의 비판적 승계가 아니라 서구 및 일본 근대문학의 이식적 성격이 두드러짐을 강조하면서 그 극복을 내다봤다. 그는 숙명론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개벽파’에 대한 감각의 결여가 보이듯 근본적으로는 ‘개화파’의 후예라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
- 임화, 백철, 조연현, 김윤식·김현 문학사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졸고 「민족문학의 근대적 전환: 근대문학기점론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소 엮음 『새 민족문학사 강좌 2』, 창비 2009, 21~31면을 참조. ↩
- 졸고 「근대문학의 종언, 또는 신판 해소론」, 한겨레 2007.10.27. 이 논란에 간접적으로 연계된 김종철은 그후 이에 대해 주목할 발언을 남겼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말했을 때, 그는 사실상 문학다운 문학은 이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그가 이시무레(『슬픈 미나마타』의 작가 이시무레 미찌꼬—인용자)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 문학의 역사적·문명사적 의의를 간파할 시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좀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문학의 종언이다 뭐다 그런 데 신경 쓰지 말고,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우선 그런 얘기들을 기록하는 데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김종철 『대지(大地)의 상상력』, 녹색평론사 2019, 318면과 327면. ↩
- 졸고 「우리 문학은 촛불에 어떻게 응답할까?」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신년사, 2017.1. ↩
- 『이광수전집(李光洙全集) 10』, 우신사 1979, 449면. 이하 이 글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시. ↩
- 이이(李珥) 『격몽요결: 올바른 공부의 길잡이』, 김학주 옮김, 연암서가 2017, 17면. ↩
- 한국신문학사는 실제로는 한국근대문학사다. 근대문학의 완성/극복은 여전히 살아 있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신문학이란 특수한 이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특히 사회주의 현대(카프)와 비사회주의 현대(모더니즘)를 겪은 이후의 근대문학은 그냥 근대문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단체제가 작동하는 해방 이후까지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