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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승은 李承恩
1980년 서울 출생. 2014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소설집 『오늘 밤에 어울리는』 등이 있음.
vinoshy101@gmail.com
공포가 우리를 지킨다
잔디는 밟으면 안 돼.
노란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가 잔디밭에 박힌 돌 위를 깡충깡충 뛰었다. 여자아이보다 일년 반 늦게 태어난 남자아이는 돌 사이를 건너다가 잔디를 밟고 말았다.
그러면 바다에 빠지는 거야.
여자아이가 말했다.
얘들아, 이제 그만 뛰어. 그늘로 들어와.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까페테라스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지영과 현우 사이에 섰다. 여섯살인 유민은 엄마를, 다섯살인 유석은 아빠를 쏙 빼닮았다.
그사이에 꼬마 숙녀가 되었네요.
윤주가 유민을 보며 말했다.
윤주와 영진은 결혼식장에서 나오는 길에 지영의 가족과 마주쳤다. 일년 만의 만남이었다. 처음에 영진은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다가 많이 컸구나, 하며 멜빵바지를 입은 유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른들이 안부를 나누는 동안 유석이 초콜릿 케이크를 유민의 원피스에 묻혔다. 어머, 내가 미쳐, 하며 지영이 물티슈를 꺼냈다. 유민은 유석의 머리를 한대 때렸다. 현우가 발버둥 치며 우는 유석을 들어 안았다.
제시는 좀 나아졌나요?
영진이 제시의 안부를 물었다. 지영과 현우는 교외 주택에서 아이 둘과 제시를 키우며 지냈다.
집에 한번 놀러 오세요.
현우가 턱을 목 가까이 당기며 영진과 윤주를 쳐다보았다.
집까지 십오분이면 가요.
정말 가깝다고,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 까페로 자주 나온다며 지영이 환하게 웃었다.
부동산 박실장의 말대로 남자는 무뚝뚝하지만, 여자는 상냥했다. 세입자 중 개를 한마리 키우고 싶어하는 가족이 있다며 박실장이 윤주에게 지영 부부를 소개해주었다. 윤주는 서운한 기색은 없는지 지영의 얼굴을 살폈다. 제시의 몸이 좋지 않다며 지영은 여러번 연락을 해왔다. 지난겨울에 윤주는 약을 더 보냈다. 한이사가 보내준 제시의 심장약은 집에 몇 박스나 있었다. 올봄에 제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이 왔을 때는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다. 연락도 하지 못했다. 케이크를 먹는 아이들을 보며 영진과 윤주는 언제 한번 가자, 제시를 보러 가야지, 하는 말을 주고받았다. 헤어지기 전 영진은 아이들에게 주려고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그러자 현우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들 버릇 나빠지는 걸 염려한다며 거절했다.
영진과 윤주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은색 승용차는 그늘에서 멀리 벗어나 주차되어 있었다. 달궈진 차 안은 열기로 후끈했다. 좌석도 델 것처럼 뜨거웠다.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윤주는 차에 시동이 걸리자마자 에어컨을 틀었다. 제시를 보낸 지 벌써 일년이라니. 지난 일년을 생각하면 아직도 누군가 목줄을 단단히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민석이?
꺾었던 핸들을 바로 잡으며 영진이 물었다. 차는 사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지영씨 가족 말이야.
윤주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녀는 결혼식 내내 눈살을 찌푸렸다. 새하얀 차양막 아래에서도 반사된 햇빛에 눈이 부셨다. 야외 결혼식을 하기에는 뜨거운 날씨였다. 한여름의 파란 하늘과 초록 잔디 위로 현악사중주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신랑과 신부가 입장했다. 그때 영진이 윤주의 손을 잡아끌었다. 민석을 봤다고 했다. 둘은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윤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도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었다. 윤주는 서울 근교를 벗어나 해안가 도로를 달리고 싶었다. 3킬로도 가지 못해 영진이 차를 세웠다. 서울 방향 진입로 갓길에 현우가 서 있었다.
우리를 봤어.
윤주는 그냥 가자고 했는데 영진이 말했다.
지영과 아이들도 도로에 나와 있었다. 계기판 경고등이 계속 깜빡인다고 현우가 말했다. 전자제어 문제일 거라고 영진이 조언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한대요?
견인차가 언제 오는지 영진이 물었다. 갓길에서 노는 아이들 옆으로 차가 쌩쌩 지나갔다.
아빠 차는 검은색인데.
유석이 영진에게 다가왔다.
은색 차 한번 타볼래?
영진이 유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작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빙긋이 웃었다. 뒷좌석 문을 열자 유석이 올라탔다. 지영과 유민도 은색 차에 올랐다. 현우 혼자 남아 견인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은색 승용차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 건물을 지나 외진 골목에 들어섰다. 언덕을 넘어 정원과 뒤뜰이 있는 이층 주택 앞에 도착했다. 주변보다 낮은 지대의 이층집은 시간을 되돌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원에 핀 주홍빛 능소화와 한쪽으로 기울어진 정자가 한때는 아름다운 전원주택이었음을 드러냈지만 수리나 보수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제시는 뒤뜰에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서 지낸 거예요? 밥은 잘 먹어요?
영진이 물었다. 제시는 임시로 세운 철망 우리 안에 목줄을 매고 있었다.
처음엔 밥도 제때 먹고 잘 지냈어요. 아이들과도 잘 지냈는데 어느날 유석이가 실수로 밥통을 건드렸더니 으르렁거리는 거예요.
지영이 말했다.
영진이 철망 사이로 제시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그게 올봄이에요. 그때부터 여기서 지내요.
미친개 제시.
지영이 말을 마치자마자 유민이 흥얼거리듯 말했다. 유석도 따라 했다.
제시는 미친 게 아니야. 아픈 거야.
지영이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현우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려고 몇걸음 떨어졌다. 영진은 제시를 살펴보다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윤주는 영진 뒤에 서 있었다. 제시 가까이 가지 못했다. 제시의 눈은 초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귀는 축 처지고 곱슬곱슬하던 털도 힘없이 푸석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제시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신랑은 공업소래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지영이 현우의 소식을 전했다. 그녀는 빛바랜 플라스틱 의자와 찢어진 우산 옆에서 발장난을 하며 노는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는 동안 영진과 윤주는 거실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애들 아빠는 무슨 일을 했었대?
영진이 집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안쪽에 주방이 들어선 구조였다. 주방 옆으로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고동색 나무 계단이 이어졌다. 윤주는 거실 한켠을 보고 있었다. 새하얀 벽지가 찢겨 있었다. 그 사이로 빛바랜 벽지가 보였다. 이 집에 살던 노부부 중 한 사람이 먼저 죽고 남은 사람은 자살을 했다. 그래서 한동안 세입자가 들지 않았다고 했다.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 급히 집을 구했대.
윤주는 이런 이야기를 모두 박실장에게 들었다.
이 더위에 두분 아니었으면 길 한복판에서 정말 고생했을 거예요.
지영이 주방에서 다홍빛 음료를 내왔다. 직접 만든 자몽청이라고 했다.
영진은 서랍장 앞을 기웃거렸다. 서랍장 위에 검은 유선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회전 다이얼식 몸체 위에 수화기를 가로로 얹는, 골동품 가게에서나 볼 법한 전화기였다.
선이 살아 있었는데 결국 망가졌죠. 아이들 장난감이 되었어요.
지영이 아이들에게 음료를 주며 말했다.
이거 우리 아빠 자동차 킨데.
유석이 식탁 위에 올려둔 영진의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아빠 키랑 똑같다.
유민이 키를 빼앗아 들었다. 키를 되찾으려고 유석이 유민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자몽청이 든 음료를 흘렸다. 아이들은 또 옷을 갈아입었다.
춤추자.
유민이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석을 불렀다.
아주머니 아저씨께 여쭤봐. 시끄러우실 수도 있잖아.
지영은 아이들이 거실 바닥에 흘린 음료를 닦았다.
춤추면 귀신이 도망가요.
유석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귀신이 있어?
영진이 묻자 유석은 손가락 하나를 입에 가져다 댔다.
음악이 나오자 아이들은 춤추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의 동요에 맞춰 팔다리를 멋대로 움직이는 괴상한 춤이었다. 노래가 끝난 후에는 스티커 조각, 플라스틱 물고기와 장난감 자동차 여러개를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사진도 몇장 있었다. 유민이 영진과 윤주에게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이게 저예요.
아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진 속 유민은 분홍 드레스를 입고 양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었다. 상 위에는 과일과 떡, 케이크가 올려져 있고 베란다 커튼 봉에 숫자 5 모양의 금색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아이들이 지내기엔 주택이 좋은 것 같아요. 그 집에선 정말 힘들었어요. 애들을 씻기고 잠만 재우는 날도 시끄럽다고 아래층에서 항의를 해왔거든요.
지영은 시선을 허공에 잠시 두었다가 이어 말했다.
여기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으니 좋아요.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도 적응을 잘하고 하원 도우미도 믿을 만한 사람을 구했다고, 신기하게도 이 집에서는 일이 잘 풀린다며 지영은 활짝 웃었다.
그렇죠. 이맘때 아이들한테는 그게 중요하죠.
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윤주는 어깨를 움츠렸다. 제시가 갑자기 크게 짖어댔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동요하지 않고 자석 달린 낚싯대와 플라스틱 물고기를 가지고 놀았다. 윤주와 영진만 그 소리에 놀라 뒤뜰로 난 창을 바라보았다. 윤주는 개가 이렇게 크게 짖는 걸 가까이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개가 바로 옆에서 짖는 것 같았다.
심하게 짖을 때가 있어요. 예민해지고 경계심이 많아진 거예요.
지영도 뒤뜰로 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진은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릴 뻔했던 일을 떠올렸다. 같이 있던 사촌 형은 손등에 뼈가 보일 정도로 물려 일곱바늘을 꿰맸다. 꿰맨 후에는 염증이 생겨 며칠간 입원을 했다.
저 녀석이 왜 저러지.
영진은 뒤뜰로 나가보려고 했다. 컹컹 짖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두통이 생길 것 같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조용해졌다. 개는 더이상 짖지 않았다.
제시를 언제부터 키우셨죠? 제 생각에 제시는 어렸을 때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것 같아요. 아마 그래서……
속삭이듯 말하던 지영이 다시 창밖을 봤다. 차바퀴가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 아빠다, 하며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공업소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왔어요.
현우가 유석을 안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차를 맡기고 가든지 직영점으로 가보라는 거예요.
영진과 현우는 거실에 서서 자동차 공업소에서의 불쾌한 경험을 나누었다.
맞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나 몰라라 하더라구요.
현우가 유석을 내려놓고 말했다. 대화는 거기서 잠시 끊겼다.
제시가 약은 잘 먹던가요?
영진이 먼저 제시 이야기를 꺼냈다.
한이사는 제시를 맡기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한 편이지만 심장약은 챙겨 먹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영진은 아무리 바빠도 제시에게 약 먹이는 일은 거르지 않았다.
제시가 저렇게 된 건 심장병 때문이 아니에요.
현우가 제시의 상태를 설명했다. 처음엔 적응을 잘했지만 삼개월 전부터는 같은 자리를 빙빙 돌거나 맹견처럼 난폭해질 때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연락을 드렸던 거예요. 제시는 치매예요. 이미 진행이 많이 된 상태입니다.
현우는 영진과 윤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시는 여덟살인걸요.
영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랑이 제시를 데리고 병원에 여러번 다녀왔어요.
지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다.
영진은 목덜미에 한 손을 올렸고 윤주는 헛기침을 한번 했다. 현우는 그럴듯한 설명이나 사과를 기대했지만, 그 어떤 것도 돌아오지 않아 실망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작년 이맘때 한이사가 영진에게 연락을 해왔다. 한대표의 집에 놀러 왔을 때 제시를 귀여워하던 걸 기억한다며 여덟살짜리 개, 제시를 며칠 맡아달라고 했다. 영진은 그런 기억이 없었지만, 제시를 집으로 데려왔다. 뇌출혈로 쓰러진 한대표는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한이사의 아버지인 한대표가 생전에 연명치료 거부를 등록해두었다는 사실은 장례식에서 알게 되었다. 장례식 후 한이사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제시를 계속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여의치 않다면 유기견 센터에 맡겨달라고 했다. 윤주가 알아본 바로는 센터에서 기간 내에 입양되는 유기견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제시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한다고, 한이사는 내키지 않는 일을 우리한테 떠넘긴 거라고 윤주는 화를 냈다. 하지만 윤주도 제시를 한이사에게 데려다주라고 하지는 못했다. 한대표의 회사는 제때 대금을 처리해주는 몇 안 되는 거래처였다. 제시는 영진과 윤주의 집에 머무는 보름 동안 산책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작년 여름 모델하우스 시공을 맡으면서 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잘 때 말고는 집에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수소문한 지 열흘 만에 박실장에게 연락이 왔을 때 영진과 윤주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제시를 보내며 박실장에게도 지영에게도 한이사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제시는 온순하고 건강했다.
제시는 여덟살이 아니에요. 적어도 열두살은 넘었을 거라고 합니다. 열다섯살일 수도 있구요.
현우가 영진을 보며 말했다. 현우의 목소리가 커지자 지영은 볼륨을 낮추려는 것처럼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이상하네요. 저희는 여덟살로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윤주는 피로를 느꼈다. 영진은 현우와 공업소 얘기를 나누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유석이가 물릴 뻔했다구요. 다른 병원에 데려가보시겠습니까?
현우의 말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상대방을 뒤로 밀어붙이는 듯했다.
저희가 데려갈게요.
윤주가 영진을 보며 말했다.
현우와 영진은 뒤뜰로 나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한 하늘은 옅은 주홍빛이었다. 현우가 제시를 이동장에 넣겠다고 했지만 영진은 직접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십여분 후에 영진은 빈 이동장을 들고 돌아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영진을 보고 지영이 구급약 상자를 꺼내왔다. 팔에 난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소독약이 닿을 때마다 영진은 움찔거렸다.
영진은 우리 안으로 들어갈 때부터 겁에 질려 있었다. 충혈된 눈과 날카로운 이빨, 길게 늘어진 붉은 혀가 그를 겁에 질리게 했다. 영진이 조금만 움직여도 제시는 으르렁거렸다. 입마개를 씌우려 다가간 영진은 뒷걸음질 치다가 철망에 걸려 넘어졌다. 으르렁거리던 제시는 열린 철망 사이로 뛰쳐나갔다. 다시 우리 안으로 끌려들어가기 전까지 제시는 다리 하나를 절며 뒤뜰을 뛰어다녔다.
윤주가 거즈를 붙이는 동안 지영과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진은 약간 멍한 상태가 되었다. 만화영화를 보던 아이들만 배가 고프다며 칭얼거렸다.
가자구. 집에 가야겠어.
영진이 벌떡 일어섰다. 윤주도 따라 일어섰다.
지금 바로 가시겠어요?
구급약 상자를 정리하던 지영이 물었다.
얘들아, 인사드리자. 아저씨 아주머니 가실 거야.
지영이 아이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현관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던 영진이 뒤돌았다.
당신이 키 가지고 있어? 키가 어디 있지?
바지 주머니를 뒤지며 그가 물었다.
아이들이 놀던 식탁 주변과 서랍장, 소파 아래와 욕실, 큰방과 작은방까지 전부 뒤졌지만, 키는 나오지 않았다.
아까 유석이가 만졌어요.
아니야. 누나가 가져갔어.
아이들은 서로 키를 가져갔다고 우겼다. 현우와 지영은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영진과 윤주는 거실에 남았다. 둘은 열쇠 수리공에게 연락하거나 택시를 부르자는 얘기를 나누다가 윤주의 가방뿐 아니라 영진의 지갑과 스마트폰 모두 차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울 좀 보고 와. 당신 머리랑 옷이 엉망이야.
윤주가 말했다. 영진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셔츠는 구겨졌다. 흙이 묻어 있는 곳도 있었다.
영진이 화장실로 간 후에 지영이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왔다.
어쩌죠. 죄송해요. 아이들 저녁 먹이고 키를 더 찾아볼게요.
아이들을 혼내는 현우의 목소리가 방에서 새어 나왔다.
유석아, 똑바로 서. 둘이 계속 싸우기만 하면 내일 놀이공원도 못 가는 거야. 정말이야.
이어 아이들의 울음이 터졌다.
아이들 혼내는 걸 전 못 보겠어요. 신랑 성격이 불같은 면이 좀 있어요.
지영도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곧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숙일 것 같았다. 윤주는 지영을 위해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듯한 것을 생각해내지는 못했다. 동물병원에 연락해놓을 테니 그리로 제시를 데려다달라는 말만 전했다.
사정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연락을 못 주셨던 거잖아요. 두분이 회사를 꾸려가시다니 정말 대단해요.
지영은 애써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윤주는 제시가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랐다고, 제시의 나이를 속이거나 숨길 생각은 없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한대표의 죽음과 그의 회사를 물려받은 한이사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윤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상 어떻게 해도 바로잡을 수 없는 오해도 있었다. 민석의 경우가 그랬다. 영진과 윤주는 광고디자인 회사를 운영했다. 영진이 영업을 담당하고 윤주가 디자인을 맡았다. 여러 사람의 사정을 들어주다가 그들의 사업은 위기를 맞았다. 거래처 담당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입금을 미뤘다. 영진과 윤주가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며 입금을 부탁했지만, 그들은 매정하고 냉정했다. 줘야 할 돈을 주지 않으면서도 당당했다. 모델하우스 건마저 제날짜에 입금되지 않자 직원 몇명이 회사를 떠났다. 그중 회사 창립 멤버인 민석도 있었다. 민석은 회사를 상대로 월급과 퇴직금 미지급을 사유로 소송을 걸었고 끝내 취하하지 않았다. 올봄 영진과 윤주는 함께 꾸린 첫 회사를 정리해야 했다.
윤주는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지영에게 돌렸다. 지영의 눈동자와 입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색은 검은 베일에 싸인 듯 어두워졌다.
전 복직을 준비 중이에요. 그런데 남편이 하던 일이 아직도 정리가 안 되었어요.
지영은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방법을 알아보고 있어요. 신랑은 애들을 생각하자고 하지만 저는 마음이 안 놓여서…… 정말 괜찮을까요? 어떠셨어요? 두분께 얘기를 듣고 싶었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윤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
저희도 이혼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영은 입안의 이물질을 식탁 위에 뱉어낸 것처럼 입을 살짝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박실장님께 들었어요. 그러니까 두분은 서류상으로.
뒤늦게 윤주의 얼굴을 본 지영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을 엎지른 것처럼 급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박실장이 뭘 착각했나보네요. 그렇게 알고 계셨던 거예요?
차분한 목소리로 윤주가 물었다. 입술을 움찔거리며 서 있던 지영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망치듯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밥을 먹자. 그리고 다시 찾아보는 거야.
현우가 아이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불빛 하나 없이 깜깜했다. 풀이 죽은 아이들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현우는 서랍장 위 칸을 빼내 내용물을 거실 바닥에 쏟았다. 지영은 싱크대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렸다.
윤주가 앉은 자리에서는 주방이 들여다보였다. 그녀는 지영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그녀는 지영처럼 망설이지 않았다. 강제폐업이 결정 난 후 영진과 윤주는 빠르게 움직였다.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잡을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같은 자리에서 맴돌 수는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윤주는 박실장에게 법무사를 소개받아 아파트와 다른 부동산을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칠년 전에 결혼한 영진과 윤주는 여전히 함께 살고 있지만 삼개월 전부터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었다. 지난달에는 다른 사람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누군가는 축하를 건네고 누군가는 험담을 했다.
상처가 부풀고 있는 것 같아. 세균에 감염된 게 아닐까.
화장실에서 나온 영진이 말했다. 그는 반창고 하나를 떼고 상처 부위를 들여다봤다.
이상하단 말이야. 왜 이렇게 부어오르느냔 말이야.
당신은 개한테 물린 게 아니야. 자갈에 긁힌 거야.
윤주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영진은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지 않았다. 머리를 매만지지도 셔츠의 흙먼지를 털지도 않았다.
아저씨 아줌마 때문에 내일 놀이공원 못 가!
유석이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들은 풀이 죽은 게 아니라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저씨 차 괜히 타고 왔어.
유석이 씩씩거렸다.
차가 고장 나지 않았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영진이 대꾸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영진은 팔에 붙어 있던 거즈를 아예 떼어버렸다. 벗겨진 피부 아래 붉은 속살이 드러났다.
우리 차 고장 안 났어!
유석이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달려와 주먹으로 영진을 때렸다.
아빠, 우리 차는 고장 안 나지?
차를 고쳐 왔으니 이제는 고장 나지 않을 거라고 현우가 유석을 달랬다.
우리 차는 고장 안 난다고 했잖아!
아빠의 말에 아이는 더 화가 났다. 유석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장 난 거 맞아. 이 멍청아, 하며 유민이 유석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니야, 우리 차는 고장 안 나. 길에서 놀고 있으면 은색 차 탈 수 있다고 했잖아! 내일 놀이공원에 간다고 했잖아!
벌게진 얼굴로 유석이 악을 쓰며 울었다.
유석아, 지금 뭐라고 했어?
영진이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왜 그래, 여보. 무슨 일이야?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지영이 주방에서 나왔다. 손에는 냄비를 들고 있었다.
지금 유석이가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
영진이 현우에게 물었다.
유석아, 아빠가 그랬어? 아저씨가 차 태워줄 거라고 했어?
영진이 유석의 어깨를 잡자 현우가 그를 밀쳤다.
여보, 애들 데리고 가. 애들한테 말 걸거나 가까이 가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현우가 험상궂은 얼굴로 모두에게 명령했다.
차가 고장 난 게 아니었어. 여보, 이 사람들 우리를 속인 거야.
영진은 허리에 양손을 얹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지영이 또 물었다. 하지만 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란 얘기만 했다. 지영은 아이들을 이층 방으로 올려보내고 금방 돌아왔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영진은 공업소 영수증을 보여달라고 했고 현우는 없다고 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공업소에 갔다가 그냥 왔다구요.
둘의 언성이 높아졌다.
우리 아빠한테 뭐라고 하지 마!
유민이 외쳤다. 어느새 아이들은 방에서 나와 계단에 서 있었다.
윤주가 영진에게 재빨리 다가갔다.
여보, 가자. 여기서 지금 나가자.
윤주는 영진 옆에 바짝 서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관 밖으로 그를 끌어내려고 했다. 손을 잡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은 뜨거웠다.
저 사람들 차 키도 숨겨놓은 거 아니야? 애들 울리면서 연극한 거 아니야?
눈을 번뜩이며 영진이 말했다. 그 소리에 아이들을 다시 올려보내려고 계단을 오르던 지영이 획 돌아섰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당신들 도대체 누구예요?
지영이 뛰듯이 계단에서 내려와 영진과 윤주 앞에 섰다.
그게 바로 내가 묻고 싶은 거예요.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 무슨 짓을 꾸미는 거예요?
영진은 윤주의 손을 뿌리치고 지영과 현우를 향해 섰다. 그때 유민이 비명을 질렀다. 거의 동시에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영이 뒤를 돌아봤다. 유석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유석을 안은 지영은 현우가 대기시켜놓은 차를 타고 출발했다. 아이는 두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지영은 유석의 몸을 문지르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두 발은 엄마 옆에 앉은 유민의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현우는 사고 없이, 안전하고 빠르게 병원에 도착하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기도했다. 유석이 무사하기만 하다면 모두를 용서하겠다고 맹세했다. 반대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몇분 후에 현우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지영이 차를 세우라고 했다. 아이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유석을 품에 안으며 지영은 아이의 이름을 외쳤다. 현우는 안전띠를 풀고 뒷좌석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유석은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처럼 팔다리를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아빠, 숨을 못 쉬겠어. 유민이 말하기 전까지 현우는 양팔로 세 사람을 끌어안았다. 갓길에서 빠져나온 차는 다시 병원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차 안에서 지영은 한쪽 팔로 유석을 안고 다른 팔로 유민을 감쌌다. 아이들의 체온이 요동치는 그녀의 가슴을 서서히 진정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벌어진 모든 일이 믿기지 않았다. 까페 앞에서 윤주 부부와 헤어진 후에 현우는 갑자기 오후 일정을 바꾸었다. 오늘 경찰박물관에 가지 말고 집에서 놀까? 대신 내일 놀이공원에 갈까? 놀이공원이라는 말에 아이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경고등에 문제가 생겼다. 룸미러로 현우의 두 눈이 보였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현우는 곧 병원에 도착할 거라고 말했다. 지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그녀의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유민이 그걸 집어 들었다. 차에 타기 전에 유석의 몸을 덮어주려고 급히 집어 든, 자몽청을 흘린 유석의 셔츠 앞주머니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고 식탁 위에는 아직 열기가 남은 냄비가 놓여 있었다. 제시는 시끄럽게 짖어댔다. 영진은 뒤뜰을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자 정말 조용해졌다. 영진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거실 안을 서성였고 윤주는 거실 한가운데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계단을 등지고 섰다. 계단 난간 사이로 작은 몸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모습, 놀란 아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다시 제시가 짖기 시작했다.
오던 길에 큰 병원을 봤어. 그 병원으로 갔을 거야.
식탁과 현관 사이를 오가며 영진이 말했다. 그는 그 병원으로 가보자고 금방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굴었다.
가만히 좀 있어봐.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윤주는 두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녀는 알고 싶었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지난 일년, 아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 다른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동시에 그녀는 쓰러질 듯 피로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늑하고 쾌적한 아파트의 포근한 침실에 눕고 싶었다.
영진이 그녀를 불렀다. 그는 태엽 풀린 장난감처럼 우뚝 선 채 그녀를 쳐다봤다. 윤주는 그의 표정을 알아보았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그녀는 두려웠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또 무슨 이상한 얘길 하려는 거야?
윤주가 소리 지르듯 물었다. 형광등에 비친 그의 머리카락은 회색빛이고 볼은 푹 꺼졌다. 그는 겁에 질린 나이 든 남자처럼 보였다. 민석을 봤다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 때도 그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그녀는 민석을 보지 못했다. 영진이 가리키는 하객석을 살펴봤지만 민석은 없었다. 영진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윤주는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제시도 짖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고요함에 그녀는 서늘함을 느꼈다. 살며시 고개를 돌리며 영진은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쉿!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는 서랍장 위를 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눈을 쫓았다. 서랍장에 놓인 검은 전화기를 보는 순간 악몽을 꾸었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그녀의 동공이 활짝 열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마주 보았다. 그녀는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양철통에 든 쇠구슬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전화기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윤주는 영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 집에서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현관문이 닫히고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녀는 집 안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몸을 떨었다. 짧은 순간 그녀의 눈앞에 이상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이 집에서 그녀는 잠이 들고 아침을 맞았다. 다음 날도 그와 함께 여기서 깨어났다. 개 한마리를 키우는 노부부가 된 자신과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끊겼던 전화벨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를 잡아보려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수화기를 집어 드는 그를 지켜보며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