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젊은 시의 정치성
하재연 河在姸
시인.
조대한 趙大韓
문학평론가.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신용목 愼鏞穆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시인. 본지 편집위원
신용목(사회) 겨울호 대화에서는 촛불 이후 ‘젊은 시’에 나타난 변화에 대해 ‘정치성’을 열쇳말로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현실을 이전과 이후로 빠르게 분할하며 전개되는 듯합니다. 당연히 관점과 시각의 변화도 가파른데, 그 변화를 살펴보는 자리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제가 광범위해 겹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주제를 나눠서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되도록 최근 시단에 나와서 첫 시집 발간을 한 시인들을 위주로 말해볼까 합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어려워졌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부터 들려주시죠.
이성혁 여기서 제가 나이가 제일 많을 것 같군요.(웃음) 요즘 젊은 시인 모두가 어려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또 난해한 시는 1920년대부터 줄곧 있어왔고요. 문제는 김수영 시인이 말했듯이 ‘양심’이 있느냐 없느냐, ‘사기’냐 아니냐겠죠. 다행히도 요즘 젊은 세대의 시는 이런 문제에 민감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월호참사 이후 윤리의 문제를 피하지 않기 때문 같아요.
하재연 젊은 시가 어렵다는 말은 제가 등단할 때부터 들어왔어요. 문학사적으로도 김소월, 정지용 때부터 계속 있어온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가 어려워져서 소통이 안 된다는 건 올바른 인과관계가 아닌 것 같아요. 시 창작자와 독자 간의 소통이나 전달 방식의 변화가 유의미하게 감지되고 있다면, 결국 문화의 향유방식과 문학이라는 생산물이 사회적으로 유통되거나 공유되는 지식과 문화 체제의 변화 때문일 것입니다.
조대한 ‘젊은 시’는 무한히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나이, 등단년도, 혹은 시에서 느껴지는 세대감각 등 여러 기준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 기준과 선정이 자의적이긴 하겠지만, 오늘 이야기할 젊은 시들은 촛불이나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변화된 시대적 감각들을 직간접적으로 증거하는 작품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촛불 이후의 시와 정치성을 말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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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이성혁 평론가께서는 촛불을 보고 “시의 어떤 이념이 실현되는 것 같았다”(『position』 2019년 가을호 146면)고 하셨는데 인상 깊었습니다. 그 말씀부터 시작해, 시와 정치성이 최근 젊은 시에 구현되는 정황을 시대적 연속성 속에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이성혁 그렇게 말한 건 촛불봉기에서 ‘시가 현실화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촛불이 보여준 경이로움은 시보다 현실이 앞서 있고, 현실이 더 시적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죠. 하지만 촛불 이후 사회에 환멸의 정서가 더 만연해진 것 같기도 합니다. 혁명적인 사건이 일어났지만 실제로 변한 것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정서가 나타나지 않나 해요. 그런 현상을 보면서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가닥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시에서도 ‘주조’가 사라지는 경향이 나타난 것 같은데요, 많은 시인들이 일상의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에 집중하는 것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겠지요. 요즘 ‘조국 사태’를 보면서 깊고 음침하고 무서운 권력이 바로 우리 옆에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됐어요. 카프카(F. Kafka)가 『소송』에서 보여준 세계, 죄가 있어서 유죄 판결을 받는 것이 아니라 판결을 먼저 내리면 죄인이 되는 세계가 그야말로 우리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시가 싸워야 할 대상은 무엇인지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
조대한 촛불 이후 시가 즉각적으로 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광장의 정치적인 경험들이 시대의 지형도와 감각을 변화시켰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시로 형상화되려면 또 별개의 시간과 언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몇몇 살펴볼 만한 사례는 있습니다. 가령 김건영의 첫 시집 『파이』(파란 2019)의 경우, 자본이나 신 같은 거대한 권위의 적을 상정해두고 그 대상을 희화화하거나 비판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러한 직접적인 저항방식 자체는 시적으로 ‘올드한’ 정치적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 발화의 구체적 세목들과 2019년에 귀환한 패러디의 시차적 함의에 대해서는 좀더 섬세한 논의가 덧붙어야겠죠. 또한 촛불 이후 젠더 담론을 비롯해 문학 내 정치적 논의가 활발해졌음에도, 소설에 비해 시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담론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개별 시의 문제라기보다는, 시를 읽어내는 담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요. 예컨대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된 최근 논의들은 주로 소설 텍스트를 다루는 비평 사이에서 치열한 주장과 논박들이 오가며 축적되었습니다. 시 평론에서는 몇몇의 의미있는 발화가 제기돼도 이에 호응하는 시적 담론들이 이어지지 못하거나, 일회적인 특집 기획으로만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이는 ‘젊은 시’를 제대로 읽거나 담론을 생산해내지 못한 ‘젊은 평론가’의 개인적인 자책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용목 세월호 이후 사회 각 분야에서 어떤 ‘각성’이 일어났고, 촛불 때 그 각성이 공동 목표를 향해 모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집단지성’ ‘다중의 주체성’ 같은 말이 등장했고, 광장이나 정치를 사유하는 방식도 변했죠. 광장은 통일된 욕구가 분출되는 공간이 아니라 세부와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연결된 전체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였다고 봅니다. 그와 함께 빈번하게 통용된 말이 ‘정치적 올바름’이었죠. 담론적 구성보다는 세부적인 실천을 중시했던 것이 기존 담론적 시각에서 보면 정치성을 배제한 정치성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시가 ‘세계는 무엇일까’ ‘정치는 무엇일까’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면, 지금은 ‘세계와 나의 관계는 무엇일까’로 달라졌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는 시의 목소리가 다채로워진 가운데 개인의 삶 또는 개인의 구체성 속으로 더 많이 들어간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 양상을 정치성과 관련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재연 ‘정치성’이 ‘올바른 정치’로 번안되는 것은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읽고 쓰는 사람이 모두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는 않잖아요. 예민한 감각과 단단한 사유가 정치적인 올바름을 보장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시의 정치성’도 일반적인 견지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요. 시의 정치성을 ‘개별성에 대한 지극한 존중’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겠지만, ‘올바름’과 연결하려면 더 정교한 사유가 필요하겠습니다. 저는 ‘촛불 이후’를 ‘4·16 이후’로 바꿔서 읽어보았어요. 어떤 ‘이후’를 상정해볼 때 촛불보다는 세월호참사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변화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민주화되었다고 믿었던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얼마나 부당하고 비민주적으로 곪아 있었는지 극적으로 드러낸 것 같거든요. 시를 쓰는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변화와 공동의 경험이 분명히 작품에 영향을 미칩니다. 안희연의 시에 나타나는 ‘속죄’와 ‘죄의식’이 대표적일 텐데요, 그러한 의식이 ‘이후의’ 세대에 산포되어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러한 변화와 공동성의 경험이 젊은 세대의 시에 정치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진단할 때, ‘반영’이라는 말을 평면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안희연과 신철규의 시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생각이 결국 자신의 미학적 입장과 필연적으로 연결됩니다. 여전히 시에서의 정치성을 소재적으로 진단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만, “조종사의 두번째 자질은 아름다운 귀를 갖는 일 나는 귓속에 작은 귀를 감추어 들리지 않는 음악을 채집하죠 더 먼 캄캄함을 향해 방향을 틀어요 눈꺼풀 위로 칼날 같은 꽃잎이 쏟아지고”(「야간 비행」,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에서처럼 죄와 슬픔과 죽음이 아름다움으로 연결되는 안희연의 방식이나, “우리는 마음에 부목을 대고 굳은 무릎으로 여기에 왔다/목소리 위에 목소리가 쌓인다/우리는 각자의 목에 돌을 하나씩 매달고/목소리의 탑을 쌓는다”(「바벨」,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문학동네 2017)처럼 부패한 사회의 대항적 세력으로서 상상적 ‘우리’를 내세우는 신철규의 화법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조대한 시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성이 무엇일지 생각해봤습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스웰(H. Lasswell)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지느냐의 문제가 정치라고 했는데, 이를 빌려보자면 시의 정치성이란 기존의 감각을 어떻게 분배하고 재배치하는가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은영을 필두로 감성의 분할 및 분배를 언급했던 2010년 전후의 미학-정치 논의를 참조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새롭게 등장한 전위적인 감각의 작품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않고 곧바로 그 감각이 모든 이들에게 배분되지도 않겠죠. 소영현의 지적처럼 문학 자체가 정치적 실천이라는 식의 논의는 그 말만으로는 진실성을 규명할 수 없고(「공적 상상력과 감성적 사유」, 『올빼미의 숲』, 문학과지성사 2017) 현실적인 영향력을 지니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독자에게 새로운 인식과 감각으로 수용된다면, 그때 발생하는 공명 같은 것이 시가 지닐 수 있는 최대의 정치성 아닐까 싶어요.
이성혁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슬로건이 제시된 배경은 이해하지만 이것이 문학을 확장시키기보다는 수그러들게 했다고 생각해요. 차이와 전복을 말하지 않게 된 것도 있고, 누가 올바름을 보증하느냐의 문제도 있고요. 시의 정치성을 말하기 위해선 다른 슬로건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감각의 재분배’는 주로 2008년 랑시에르(J. Rancière)를 경유해서 이야기됐죠. 거기서 정치성을 찾으려는 시도는 소극적으로 보여요. 재분배보다는 감각의 생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더 적극적인 논의를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사유가 아니라 감각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도 문제고요. 모든 시에 정치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원론적인 이야기라 그러고 나면 더 할 말이 없어집니다. 어떠한 정치성이 시에 요구되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비평가는 어떤 시가 요구되는지를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시의 텍스트에서 정치성을 읽어내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요. 일상의 ‘산문적인’ 현실에 시가 개입해 새로운 언어와 감각을 생산할 것을 독자로서 요구해야 합니다. 저는 권력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정치성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의 권력이나 우리 내부의 권력을 파헤치고 발견하고 시로 저항하는 게 정치성일 수 있겠죠. 이소호나 김건영은 기존 문학계의 점잖음이나 시가 요구받는 서정성을 비웃는 다다이스트적이고 파괴적인 저항을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저항이 좋게 보였습니다. 특히 김건영의 「사전」 연작은 지금 청년세대에게 닥친 ‘헬조선’의 현실을 온갖 패러디와 야유를 통해 비웃습니다. 이소호 역시 세상 질서에 대해 파괴적인 태도를 보여줘요.
조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과 직접적인 불화 없이 정치적인 시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불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한다고 할까요? 문보영의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는 동명의 게임을 시 세계에 차용했어요. 그곳은 이미 자본과 대중에 의해 만들어지고 향유되는 세계지요. 그 세계는 커다란 ‘원’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원 안쪽은 시스템이 허락한 안전지대이고 원 바깥은 위험지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플레이어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자꾸 좁아지고, 플레이어끼리 싸울 수밖에 없는 강제적인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 강제된 세계에 저항하려면 원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야 하지만, “난 아프고 싶지 않다” 또는 “난 죽고 싶지 않다”(「배틀그라운드 원」)고 외치는 시적 주체는 늘 원 안쪽을 향해 뛰면서 시스템이 주는 보급품들을 주워 먹으며 생을 연장해요. 하지만 세계의 명령대로 경쟁과 싸움을 수행하지는 않습니다. 시인은 원 안에서 혹은 그 경계에서 주변 인물들을 형상화하고, 미묘한 감정과 행복 같은 것들을 찾아내거든요. 권위나 시스템을 향한 적극적인 저항이나 투쟁이 없더라도 이를 ‘비정치적인 시’로 단정한다면 그 속에 있는 또다른 감각의 가능성들이 소거되지 않을까요.
하재연 김건영의 시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빈곤한 젊은 세대의 자의식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발화되는 방식이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져요. 시의 정치성이라는 것이 현실과는 다른 코드를 시 속에 삽입함으로써 현실의 질서에 균열을 낸다는 의미라면 김건영의 코드들은 앞세대, 가령 2000년대에 솟아난 세대와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의 코드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각 시들이 지닌 역동적 차이에 좀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앞서 주제나 내용만으로 시의 정치성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 건 시의 배치, 연작의 기획, 화법의 변화 같은 언어 형식의 변화들이 발휘하는 정치적 효과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이소호나 백은선의 시를 ‘젠더이슈’로 한데 묶어 정치적 효과를 따지는 일이 조금은 난감하게 여겨지는데, 여성화자가 전면에 드러난다는 공통점이 있어도 언어나 배치의 형식이 상당히 다르거든요.
시인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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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각각 다른 얘길 하셨지만 모두 현실과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구성해내는지와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나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전통적인 시쓰기가 대체로 주체를 결정한 다음 그 결정된 주체가 세계에 대해 언술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엔 오히려 언술 과정에서 시시각각 주체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정치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다르게 만드는데요, 정치적 담론에 따라 세부가 결정되는 게 아니라 세부의 연쇄 속에서 각기 다른 문제의식이 호출된다면 이 또한 정치성으로 소환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발화 방법만 따져보면 김건영과 이소호가 비슷한 맥락으로 읽히고, 결은 다르지만 참혹하게 자신을 경유한다는 점에서 안희연과 신철규가 공통점이 있고, 백은선과 문보영이 주체 설정 자체를 유예한다는 점에서 또 유사한 면이 있겠습니다.
하재연 백은선의 「비신비」(『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같은 시가 2010년대 정치성의 지표처럼 읽혔습니다. 이 정치성은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의 요리를 시켰는데 익숙한 맛이 날 때는 아니다.” “네 얼굴은 갈가리 찢겨 있어./눈과 코와 입이 전부 따로 놀아.” “다른 세계가 시작될 거라고 믿으면서 오래오래 걸었어. 물론 아무것도 없었지.” 같은 방식으로 발화됩니다. 결국 통합되지 않는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통합할 수 없는 걸 통합시키려 할 때 생겨난 문제를 진실하게 들여다봅니다. 말하는 형식이 더욱 급격하게 산문화된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겠어요. 시가 산문화된다는 진단은 꾸준히 있어왔지만,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그 경향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더 뚜렷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첫 시집이나 등단을 준비하는 원고를 읽을 기회가 꽤 있었는데, 시와 다른 장르의 교집합이 늘어났다고 느꼈습니다. 가령 벤야민(W. Benjamin)의 논문이나 페소아(F. Pessoa)나 바르뜨(R. Barthes)의 글 같은 인상을 받았어요. 시집에서도 사회학적 각주가 무수히 달리거나, 비문학 텍스트가 삽입되고, 서사가 이어지는 연작이 늘어났습니다. 백은선의 시도 그렇지만, 서사와 아포리즘이 섞여 있고 읽고 나면 흐릿한 모노드라마를 본 것같이 일종의 극적인 효과를 주는 작품도 많아졌고요. 시 한편을 수행적으로 즐기며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증가했어요.
신용목 “우선 써보자. 귀머거리 여가수에 대해. (…) 눈물이라고 사랑이라고 써보자. 책임 없이. 감정 없이.”(「독순」, 『가능세계』)라는 표현은 사회성 속에서 탈취당했던 나를 언술 행위를 통해 재확인하는 과정인 듯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속죄는 세계와 대응하면서도 결국 주체로 귀결되는 행위인데, 안희연은 그러한 정념으로 세계를 장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계의 논리에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주지도 않습니다. 「물속 수도원」에서 “나는 물가에 앉아/짐승이라는 말을 오래 생각했는데”로 시작된 이야기가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땅에 그린 작은 집’이 가진 함의보다 그것을 그리는 행위, 어떤 결정성에 예속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떤 결정성도 갖지 못할 일이라는 게 더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그럼에도 이러한 전개가 세계와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목적의 정치성이라기보다는 방법의 정치성이랄까요.
조대한 신철규의 「소행성」(『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에는 산책을 하면 금방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다고 말하는 ‘나’가 등장합니다. 이 축소된 세계 혹은 상대적으로 거대해진 주체 사이에서, 세계와 나는 좀더 직접적으로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가령 우리가 함께 식탁에 앉아 기도를 올릴 때 세계의 울음과 아픔은 일순간 사라진다고 말하는 「식탁의 기도」나, 우리가 한꺼번에 울면 그 눈물로 세계의 해수면이 조금은 올라갈 것이라 말하는 「바벨」이 그러합니다. 나 혹은 우리의 슬픔이 곧 전지구의 슬픔으로 치환되는 이러한 세계를 ‘세까이계(世界系)’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박상수가 일부 젊은 시인들의 세계 감각으로 언급한 적 있는 세까이계적 상상력(「상실 이후, ‘나’와 ‘세계’가 직접 만날 때」, 『너의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줄게』, 문학동네 2018)은 주인공의 사랑과 감정들이 곧바로 세계의 위기나 운명과 연결되는 장르적 상상력입니다. 「너의 이름은,」(신까이 마꼬또 감독, 2016)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대표적으로 엿보이는 방식이지요. 감정과 재난을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나’와 이 ‘축소된 세계’는 “빌딩 유리로 돌진하는 여객기”(「구급차가 구급차를」,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와 모로 선 채 서서히 가라앉는 선박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경험, 그리고 그 아픔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발화하며 서로의 영향을 나누었던 매체 기술적인 감각과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하재연 문보영의 「입장모독」(『책기둥』, 민음사 2017)에는 코스트코 빵을 나눠주는 신이 등장합니다. 신의 속물화가 표상하는 세계는 거대 자본주의에 편입된 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보이죠. 하지만 신 자체를 속물화함으로써 그 세계가 사실 얼마나 한정적이고 우스운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요. 세계에 대한 이런 양면적이고 아이러니한 감각을 문보영은 독특하고 새로운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성혁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붙들려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됩니다. 김건영의 시가 ‘올드한’ 면이 있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런 게 지금 현실 같기도 해요. 젊은 사람들이 세상을 증오하게 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대의 문제를 관통하는 현실이거든요. 「사전」 연작은 세상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로 세상을 들이받는 모습은 요즘 젊은 시에서 찾아보기 힘들죠. 문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존하는데 새로움만 찾는 담론은 지양해야겠습니다. 화자가 변한 것도 맞겠지요. 사실 2000년대 이른바 ‘미래파’가 등장했을 때도 화자와 발화방식의 변화에 가장 많이 주목했죠. 따져보자면 1930년대 이상만큼 새로움을 보여준 시인이 있을까요. 저는 그만큼 파격을 줄 수 있는 시인이 등장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백은선의 시는 읽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시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기 세계에 치열하게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2010년대 젊은 시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병(病)에 대한 탐구예요. 이성복은 「그날」에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0)라고 했죠. 병은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 특히 백은선은 시를 위해 이 병을 정면으로 앓고 있어요. “창백한 공기의 떨림/빛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무한히 부딪치고 있다 구름처럼/말이 없는 모래밭에서/서로의 이름을 부르고는/뒤돌아 멀어진다”(「모자이크」, 『가능세계』)가 백은선 시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젊은 세대의 감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구절 같기도 하고요. 요즘 젊은 시의 또다른 특징은 윤리적인 자기성찰입니다. 안희연이나 신철규가 대표적이죠. 신철규의 「생각의 위로」(『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는 폭력이 자행되는 세계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부끄러움의 감성으로 성찰합니다. 그렇게 보면 윤동주의 계보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조대한 안희연이나 신철규는 비참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나와 우리를 어떻게 위치시켜나갈지에 시적 관심이 있는 듯해요. 그 안에서 희미하지만 섬세한 연대감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물론 이는 촛불 이전, 세월호라는 우리 공통의 경험과 밀접히 연관돼 있을 겁니다.
하재연 죄에 대한 감각이나 나라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 의지, 연대에 대한 믿음이 신철규나 안희연에게서 잘 보입니다. 신철규는 기형도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는데 시대적 알레고리를 담아내려는 시도 때문 같아요. “잠수함 속의 토끼에 대해 생각한다/토끼가 숨을 거둘 때/해쓱해진 그 얼굴에 박힌 붉은 눈동자에 비친 것은/사람들의 안도였을까 불안이었을까/아주 긴 굴뚝이 있어서 이 도시의 매연을 빨대처럼 뽑아낸다면 이 답답함이 사라질까”(「어둠의 진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같은 구절은 기형도가 도시의 안개를 통해 1990년대 전후의 시대 상황을 풍자해냈듯이 2000년대 한국의 현실을 되비춥니다. 김건영 역시 “너와 내가 같이 있었다 아이들이 살아 있었다 너와 내가 같이 잊었다”(「없는 나라」, 『파이』)에서처럼 정작 국가를 필요로 할 때 국가가 부재하는 현실을 체감한 4·16 이후 세대의 상상력을 보여줘요. 백은선, 문보영, 이소호와 함께 안희연, 신철규, 김건영의 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는 세분화된 취향에 따른 선택지가 늘어난 셈이기도 합니다. 다만 최근의 젊은 시들의 공간이 현실과 너무 비슷한 설정으로 반복 등장하는 것은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비슷한 동네, 비슷한 까페를 시에서도 만나게 되는데, 한 세대가 겪는 현실이 유사하더라도 공간에 대한 상상의 범주까지 겹치고 반복된다면 상상력의 지평이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돼요.
‘쓰는 사람’과 ‘쓰는 행위’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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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최근 시가 ‘새로움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씀에 얼마간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그들의 리얼리티로 읽히기도 합니다. 선우은실이 정한아와 최지인의 시를 분석하며 노동이 어떻게 시 속에 드러나는지 지적한 바 있죠.(「노동을 해보았느냐고?」, 『문학 3』 2019년 2호) 예전에는 노동이라는 키워드로 모순된 세계의 전모를 관측할 수 있었지만, 지금 똑같은 방법론을 들이대면서 전체상을 그리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노동의 형식과 내용이 다르게 작동하는 거죠. 물론 이전의 모순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항존한다는 점에서 노동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설야 같은 시인이 귀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노동자가 더이상 노동을 제공하는 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재화가치를 어필하며 스스로를 시장에 내놓아야 하는 시대라면, 이제 노동과 노동시는 자본의 대타적 의미로 한정된 채 사유되기보다는 새로운 차원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정치성이 적대와 모순을 지시하면서 드러날 수 있겠지만, 수없이 갈라지는 자기모순을 확인하고 거기서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통해서도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며칠 전 녹색당 공동정책위원장인 백희원이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구원할 것”(한겨레 2019.10.13)이라고 말했는데, 개인주의를 복원함으로써 개인과 개인의 그 네트워크로 공동체가 새로워질 수 있다는 논지였어요. 이제 모순도 각자의 모순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조대한 개인의 복원이 새로운 네트워크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촛불은 ‘우리’가 함께 생산한 연대의 결과였지만, 어쩌면 각자가 서로 다른 ‘우리’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불합리나 부정에 저항하는 공통감각으로 함께 촛불을 들었으나 그 안에서 다양한 사건과 감각적 분할을 겪으며 또 별개의 깃발을 든 ‘각자의 우리’가 생겨나기도 했죠. 당연시되던 ‘우리’라는 집합적 주체가 재배치되거나 혹은 부재하게 되면서, 결국 다시 ‘나’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최근 퀴어 담론에서 등장하는 ‘1인칭’의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고요. 황인찬의 「떡을 치고도 남은 것들」(『릿터』 2019년 4·5월호)이 좋은 예가 되겠습니다. 그곳엔 크게 두가지 장면이 겹쳐 있어요. 하나는 길거리에서 떡을 치는 아저씨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아저씨들의 행위를 보고 과거 삼촌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나의 모습이에요. 제목은 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이중의 은유겠지만, 핵심적인 것은 아저씨들을 목격한 뒤 느껴지는 나의 감각입니다. 그들에게서 나눠 받은 떡의 미감이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것만 같은 그런 맛”을 품고 있다고 시인은 말해요. 그러니까 용기 내어 드러난 누군가의 행위와 새로운 시적 감각의 분배 덕분에 잊고 있던 나의 과거는 마치 좋아했던 것만 같은 시간으로 다시 배치되는 셈이죠. 이전의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어릴 적 좋아했던 삼촌과의 동성애는 숨겨야 할 것 혹은 죄스러운 것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변화된 새로운 지반 위에서 나를 이루는 감각은 새롭게 다시 구성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나’와 개인들이 또다른 감각의 네트워크를 새로이 만들어나가는 것 아닐까요.
이성혁 ‘차이’ ‘주체의 분열’은 이미 2000년대에 나온 키워드입니다. 2010년대 들어서는 윤리의 문제가 부각되는데, 바로 자기 삶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변화시키고 어떻게 자기 세계를 지킬까가 초점이에요. 개인적 문제가 정치적 문제임을 자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시도 이제는 어떤 조류를 형성하지 않는 것 같아요. 2000년대 시인들도 어떤 흐름을 만들기 위해 뭉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는 이런저런 호명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호명 자체가 없어졌어요. 유희이기도 하고 치유이기도 한 시쓰기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자기를 변형시키며 삶을 규정하고 틀에 가두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를 ‘미학적 윤리’라고 부릅니다.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 삶을 주조하고, 그것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는 거죠. 시의 탈맥락화 역시 최근 더 과감해졌어요. 한편의 시에 여러 맥락으로 쓰인 말들이 조합되고요. 그래서 읽는 입장에서도 ‘내 멋대로’ 읽게 되죠. 의미를 생각하면 도저히 독서에 진도가 안 나가니까요. 그것 또한 시인들이 의도한 것이라고 봐요. 최근 한 낭독회에 갔더니 큰 종이에 인쇄한 시를 조각조각 자르더라고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그걸 골라서 연결해요. 맥락은 하나도 없는데 근사한 시가 나오는 걸 보면서 한편의 시를 쓰는 주체도 나눠질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여러 주체들이 각자의 말을 한편의 시에 쏟아내는 거죠. 앞으로 인공지능이 써내는 시도 나올 텐데 어떻게 봐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에요.
신용목 김현의 「지혜의 혀」(『현대시』 2017년 3월호)가 인상적인 것이 아이의 돌잔치와 “하야하십시오” 같은 정치 구호를 아무런 장치 없이 덧대놓는데, 그런 어긋남이 시 전체 맥락을 흩트리지도 않고 이상하게 수긍됩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촛불에서처럼 일상을 정치적으로 사유해본 독자의 경험이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겁니다. 앞서 이성혁 평론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항의 의미를 전면화하는 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어요.
조대한 현실과 지면의 교차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방식도 이야기해볼 만합니다. 시 텍스트에 시인의 목소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들여온 사례로 이소호가 있습니다. 언뜻 시인은 언표 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다시 말해 시인의 목소리와 작품 속 나의 목소리를 합치시키는 방식을 사용해요. 우리에겐 이렇게 현실을 직접적으로 들여오는 ‘납작한’ 시는 세련되지 못하다는 문학적 규범이랄까 감각이 있었는데, 이소호의 시는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형철은 2000년대 들어오며 한국시가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65면)고 말한 적 있어요. 그 진단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1인칭의 자아에서 벗어나 널리 확장되어간 주체의 전위적 영역이 현실의 ‘나’가 개입할 수 없는 안전거리가 되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세련된 미학성을 내걸고 지면의 안온한 알레고리 안에서 어떤 편안함을 누렸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현실의 소리가 영화의 입체적 이미지를 파괴해 예술작품을 납작하게 만들 것이라 우려하는 반대 목소리가 컸다고 해요. 현실의 소리에 영화가 동기화되고 종속될 것을 우려한 그들의 걱정을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이제 그 사운드가 침묵의 이미지에서 얻을 수 없었던 또다른 가능성을 덧입힌다는 것을 알고 있죠. 마찬가지로 현실의 목소리는 묵독의 지면에서 얻을 수 없었던 또다른 불온함과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재연 2000년대 시에는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가 되는 미학적 규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를 만들어나가는 행위 속에서 시의 의미가 생성되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도 ‘만듦새’에 대한 고려, 일종의 건축적인 구조성을 상정한 시가 많았던 것 같아요. 이소호의 시들을 보면 그런 미학적 규준 자체를 깨뜨립니다. 더 구조적으로 완결된 시의 형태가 있다거나 더 견고한 만듦새가 있다는 생각을 비틀고, 거기서 다른 미학이 생겨나는 방식을 보여주는 모습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서 말씀하신 ‘쓰는 행위’에 대해 의견을 보태자면,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자기를 확보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확실히 최근의 시인들이 쓰는 행위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즐거움이 아니면 시를 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까요. 또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시인과 독자 사이의 구분이 창작단계에서 암시적으로 작용했다면, 지금은 시인들이 이전보다 더욱 시 쓰는 자기 자신을 독자로 삼고 창작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기원으로서의 저자의 자세가 아니라, 직조되어가는 텍스트를 짜는 과정 자체가 훨씬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수행성과 젠더, 혹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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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김미정이 개인과 주체에 집중하는 최근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내가 누구와 접속하고 나의 경험이 어떤 종류인지 아카이빙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거라고 쓴 글을 읽었어요.(「회로 속의 인간, 회로를 만드는 인간」, 『작가들』 2019년 봄호 188면) 삶과 죽음이 개인의 것이 아닌 것처럼 글쓰기도 추상적이지만 집단의 행위이고 또 그 집단을 만드는 행위겠죠. 글쓰기 자체가 대안적 삶을 구축하는 방편이 되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글을 쓰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 ‘대안적 삶’이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도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듭니다. 시쓰기를 통해 확인되는 수행성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시 자체의 수행성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젠더 의식이 수행성을 통해 드러난다고 말한 양경언의 관점(「최근 시에 나타난 젠더 하기(doing)와 젠더 허물기(undoing)」, 『문학동네』 2017년 여름호)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해요. 예컨대 황인찬의 어떤 시는 마치 무균실에 놓인 것처럼 표백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표백을 넘나드는 연대와 연루의 감각이 표면 뒤에 숨어 있어요. 말하자면 표백성의 안전함이 시인이 가진 젠더 의식이나 페미니즘을 통해 극복되고 있거나 애초에 그로부터 선택된 전략이 아닐까 했습니다. 시는 그런 특징들이 사건화되기보다는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겠죠. 어떻게 보면 시 혹은 시쓰기의 수행적 과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담론화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조대한 평론가는 앞서 시가 소설에 비해 젠더 담론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하셨죠.
조대한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패널과 청중이 같이 참여하는 한 포럼을 기획하면서였어요. 페미니즘, 퀴어 등의 젠더 담론이 주제였는데, 그때 언급되는 텍스트들이 모두 소설이더라고요. 최근 페미니즘을 다룬 앤솔로지 평론집 『문학은 위험하다』(민음사 2019)를 놓고 간략히 추려보니 총 19편 가운데 시를 텍스트로 다룬 평론이 단 3편(장은정 2편, 양경언 1편)뿐이었습니다. 변화의 지형이 어떤 장르에 한정된 것은 아닐 텐데, 관련 담론이 상대적으로 적게 산출되는 것이 과연 시 비평에 종사하는 평론가 숫자의 문제일까, 아니면 시 장르 자체의 문제일까 고민해봤습니다. 시라는 장르 안에서 최승자나 김혜순 같은 전복적인 여성의 발화가 앞서 등장했기 때문이거나, 또는 아무래도 소설이라는 장르가 변화된 현실과 좀더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재연 시가 소설과 경향이 다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는 결국 상징계의 언어와 싸워야 하는데, 그 싸움이 최근의 시들에서 한층 명확해졌다는 느낌이에요. 1990년대나 2000년대에는 퀴어나 젠더 이슈를 전략적으로 사용한 시들이 있었어요. 지금 시들은 개별자의 삶에 밀착된 느낌이 더 강하고요. 그런데 이소호 시집 『캣콜링』(민음사 2018) 같은 경우는 이러한 시적 전략과 개별자들의 삶 사이의 구분을 오히려 무너뜨립니다. 시집을 출판하는 일도 기획을 필요로 하는데, 최근의 첫 시집들은 이러한 기획력이 확실히 강하게 느껴져요. 퀴어, 젠더, 페미니즘 이슈가 새롭지는 않지만 지금 뚜렷하게 가시화된 것은, 결국 문단 시스템에 대한 자의식과 그에 대한 거리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잡지의 창간과 운영을 비롯해 문학 재생산이 남성 문인 또는 가부장제 중심의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상황에서, 기존의 많은 시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거나 반(反)페미니즘적 언어를 구사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거죠. 과거에는 시인들조차 그런 언어들에 둔감했다면, 지금은 확실히 민감도가 높아졌고 시스템의 질서를 재생산하는 수사나 언어와의 싸움을 분명히 하려는 기획력 자체가 증가한 게 아닐까요.
이성혁 최근 페미니즘 시 비평이 적은 이유로 김혜순, 고정희, 김승희 같은 쟁쟁한 시인에 관한 담론이 이미 많았다는 조대한 평론가의 말씀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소설과 비교하는 건 다른 문제인데, 하재연 시인 말씀대로 시에서는 남성의 언어, 즉 상징계 언어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작업이 꽤 있었어요. 소설은 현실 속에 녹아든 가부장제 또는 남성중심적인 장치들을 섬세하게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시의 경우 이미 선취해낸 바가 있는데다 앞세대를 뛰어넘는 페미니즘 시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 조명이 적은 것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캣콜링』은 예전과는 다른 식으로 페미니즘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젊은 여성들이 겪는 성적 대상화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그러한 실감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 같고요. 「누워 있는 경진」이라는 시에는 욕설이나 외설적인 표현이 거리낌 없이 쓰이는데,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저는 이런 표현이 시에서 계속 발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혐오를 위한 욕설이 아니라 전복을 위한 욕설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시에서 ‘남성의 시선에서 본 여성’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남성 누드를 그리는 실비아 슬레이가 언급되는데, 그걸 보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그간 저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누드를 보아왔다는 깨달음이 온 거죠. 이 시집에서는 자매애와 동시에 자매 사이의 갈등도 보여줍니다. 갈등이 있다는 걸 드러내야 해결이 가능하잖아요.
신용목 여성이라는 기표가 직접 등장하지 않더라도 시쓰기 전반에서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가령 안희연의 시 「백색 공간」(『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은 “일초에 하나씩/새로운 옆을 만든다”로 끝납니다. 시 제목이 ‘백색 공간’이라서 텅 빈 장소에 대한 이미지처럼 느껴지지만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에서처럼 그 공간을 침범한 수직적 과정의 폭력(절벽) 또는 그로 인한 파멸(물에 잠긴 계단)을 짐작게 합니다. 그런데 결부에 이르러서 화자는 아래위보다는 옆에 대해 사유합니다. 그리고 그 옆은,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새로운 ‘백색 공간’이 되는 거죠. 이렇게 새로운 지대를 향한 수평적 사유가 빈번하게 작동되는 것도 페미니즘적 과정이 아닐까요.
하재연 최승자, 김혜순 같은 강력한 페미니즘적 전통이 있음에도, 저희 세대는 여성 시인이 여성 화자를 선택할 때 오히려 시적 가능성이 제한된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여성 화자에게 기대되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요구가 불쾌할 때도 있고, 여성 화자를 선택함으로써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시적 주체가 발화할 가능성을 좁힌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읽은 시들이 여성성을 신화화한 측면 또한 있어서 그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에 나타나는 인물이나 화자의 성 정체성을 탈색시키는 방식이, 여성성에 대한 요구나 기대에 부응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기존의 젠더 관습을 거부하는 전략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첫 시집을 낸 세대에서는 확실히 다른 지점이 느껴집니다. 여성으로서만 겪을 수 있는 고유한 경험자질들을 언어로 어떻게 현실화할지에 집중하고, 또 그것이 매우 효과적인 시의 방법론으로 드러나기도 하죠. 임승유, 백은선, 이소호의 시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문보영의 “F도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나/브래지어가 없었다 헐렁한/하얀 면티를 입고 있었으므로/허리를 펴면 젖꼭지가 비쳤다/허리를 굽혀야 했다 고개를/숙이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노력이란 건 브래지어 없이 불가능했다//(…)//브래지어가 어디 있다는 걸까 아무리/생각해도 그것은/F에게만 없고 모두에게 허락된 무엇이었다”(「얼굴 큰 사람」, 『책기둥』) 같은 구절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지겹게 소비되어온 여성의 ‘유방’ ‘젖가슴’의 신체 이미지가 아니라 “젖꼭지”라는 신체와 “브래지어”라는 여성만이 착용하는 사물과의 관계 속에 주체의 자리가 발화되고 있어요. 이것이 지금 세대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여성의 신체를 신화화하거나 물화하는 방식에 대항해 폭력적으로 신체 이미지를 전시하는 방식이나, 아예 여성적 신체 이미지를 표백하는 방식 두가지 모두에 거리를 두고, 현실 세계에서 겪는 여성적 경험들의 세목을 언어로 구체화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들은 여성적 경험을 경유해 지금의 세계에 처한 주체의 자리를 현실화함으로써, 그동안 신화화되거나 대상화되어왔던 여성 신체를 현실과 마주하고 부딪치는 구체적 신체로 표현해냅니다.
조대한 『캣콜링』에 보이는 어떤 전위성과 그로테스크함,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뒤바뀐 폭력적인 발화 등은 매혹적이지만, 이 시집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경진’이라는 이름의 수행적 연속체가 흥미로워요. 이 시집에서는 경진이라는 이름의 ‘나’가 어떤 서사적 연속성을 지닌 인물처럼 일관되게 유지돼요. ‘경진’은 이소호 시인의 개명 전 이름인데, 그것이 실제로 시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기보다는 실제처럼 보이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경진의 발화가 삽입되어 들어오는 각주의 방식도 재미있어요. 「우리는 낯선 사람의 눈빛이 무서워 서로가 서로를」 「경진이네 거미집」 등의 작품에는 경진이 겪은 일화가 실제 발화처럼 각주로 삽입되어 있어요. 이같은 외적 각주들이 내적인 미감을 깨트리고, 작품을 납작하고 평평한 현실의 재현에 머무르게 한다는 비판적 시선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민음사 2018)을 두고 벌어진 논의에서도 꾸준히 있어왔죠. 하지만 이 평평한 각주들이 이전에는 잘 표현되지 않았던 날것의 감각을 시에 삽입함으로써, 거꾸로 그 작품 안에 울퉁불퉁한 겹층의 입체감을 만들어주기도 해요. 마지막으로 『캣콜링』은 시가 발화되는 무대가 달라졌다는 점도 특별합니다. 정한아는 이 시집을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 “유일한 망설임은 오직 이 시집이 너무나 시의적절하다는 데 있었다”(『릿터』 2018년 12월·2019년 1월호 218면)고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 시집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 또한 그 현실적인 시의성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재연 이소호의 시가 취하는 태도는 가족관계에서 나타난 폭력을 재현하거나 남성 중심 사회에 폭력의 언어로 그것을 다시 되돌려주는 방식이라는 면에서 최승자, 김민정 등 앞세대와 연속성이 있습니다. 다만 앞선 시들에 나타난 개인 또는 여성 화자에게 가해진 폭력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한 폭력으로 읽히는 상징성을 강하게 띤다면, 이소호의 시에서는 때로 상징화되기를 거부하는 언어들도 보입니다. 앞서 시적 전략과 개별자들의 삶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어찌 보면 이것도 새로운 전략입니다. 시적 허구를 무너뜨리는 또다른 허구라는 점에서요. 이러한 허구성의 측면에서, 요즘 드라마틱한 시집이 많아졌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시가 길어졌다거나 산문화되었다는 특징적 경향성이 단지 리듬이나 서정성이 옅어져서라고 보기만은 어렵고, 일종의 드라마화된 무대 위에서 ‘나’라는 주체를 만들어나가는 느낌과 관련있어 보입니다. 2000년대부터 전면적으로 등장한 시 안에 여러명의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방식이 더 다양해졌다고 할까요. 예전에는 구심점 아래 캐릭터가 모이고 흩어졌다면 이젠 무대에서 즉흥극을 하는 느낌이 더 강해요.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봐야 그 시적 드라마가 이어지는 게 아니라, 중간에 들어와도 즐길 수 있고 마지막 부분만 봐도 괜찮은 드라마처럼 읽힙니다.
이성혁 기획하거나 구성을 짠 시집이 나오기도 하죠. 『배틀그라운드』도 한편의 장시라 할 수 있고, 『파이』에도 의도된 짜임이 보여요. 수행하는 행위, 즉 연극적인 행위와 언어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이게 젊은 시의 특징일 수도 있는데, 현실과 시를 나누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시가 지금 현실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또 현실에 시가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젊은 시인들이 그런 경계를 의식적으로 없애려 하는 것 아닐까요. 『배틀그라운드』는 게임과 현실을 뒤섞었고 『책기둥』도 현실과 책의 세계에 경계선을 없앴죠. 외부의 세계가 책에 침입해서 책을 생산해내고, 그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그 책이 우리의 의식이나 행동을 구성해내면서 말이죠. 문보영의 시쓰기는 현실과 책의 경계선을 지워나가려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백은선의 환몽적이고 탈맥락화된 상상적 언어 또한, ‘가능세계’라는 제목처럼 시에서 펼쳐낸 가능성의 세계로 현실을 구성해내려는 것 같고요. 시가 가능세계를 구성하고, 그 세계가 또한 지금 읽고 있는 독자를 구성해내기도 하니까요.
시적 기획과 매체, 시 향유 문화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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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연 매체나 유통을 고려한 기획 맞은편에 조작이라는 측면이 있어요. 우리가 접하는 기기나 사회환경이 조작적이잖아요. 조작에 익숙하고, 조작으로 많은 걸 배운 것이 지금 세대죠. 시 또한 조작이 가능한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면 낭만주의적인 기획과는 절연하게 돼요. 물론 최근의 시에서도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요즘 주목할 만한 시집의 기획을 살펴보면 구조적이기보다는 조작적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시에 현실과의 접점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실을 시 속에서 조작하는 주체로서 ‘나’가 시를 공연하는 형식이 많아졌어요. 이러한 현상은 요즘의 낭독문화와도 연결됩니다. 낭독은 고전적인 전통이고 근대 이후 묵독이라는 독서환경이 당연해진 세대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작적 세계관 또는 환경 속에서 공연되는 시라는 텍스트는 현장성에 의해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고 소통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근대적 낭독문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독자와 만나는 지형공간으로 최근 낭독문화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신용목 낭독문화뿐만 아니라 텀블벅 같은 플랫폼을 통해 습작생이나 등단제도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도 문예지를 기획하는 사례 역시 함께 짚어보면 좋겠습니다. 등단 시인이 낀 『MOTIF』도 있지만 『TOYBOX』 『공통점』 등 비등단자들이 모여서 내는 잡지도 여럿 눈에 띕니다. 단행본도 나오는데, 동덕여대생들이 텀블벅을 통해 여성주의 관점의 소설을 엮은 『사바트』 같은 책이 그렇죠.
하재연 저도 소셜펀딩을 통해 이른바 ‘미등단 작가’들과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를 만나본 경험이 있습니다. 권력은 어떻게든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중심권력을 없애야 한다, 특정 문학상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그 안에 어떻게 유기적인 채널을 마련할지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권위는 자본에 의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문학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동경과 인정에도 기반하거든요. 지금의 공고한 비민주적인 방식을 내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바깥에서 다양한 채널을 마련해서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것이 생산적이에요. 최근 독자와 만나는 기회가 다양해진 것은 문자문화로 진입하며 지면을 기준으로 작가와 작품이 분리됐던 문학이 다시 수행적인 과정으로 변화한 결과라고 봅니다. ‘이런 텍스트를 쓰겠어요’라고 내걸고 소셜펀딩을 시작하면, 독자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접점들이 생겨나죠. 브이로그를 만들거나 자신의 일기를 배달하며 독자와 만나는 문보영의 활동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대자본이나 출판사들이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몇몇의 작가 외에 다른 작가들이 어떻게 노동과 예술이라는 문제를 결합시킬지와 상당히 관련있어요. 지금의 젊은 세대는 전 세대보다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거든요.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문학이라는 예술을 하고 있는 건데, 이를 어떻게 지속할지 고민하는 거죠. 대형출판사의 청탁을 받지 못해도 삶과 예술을 어떻게 이어나갈지 가능성을 발견해나가고, 다른 동료를 만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결국은 쓰기와도 밀접하게 연동될 것 같아요.
이성혁 하지만 시가 인기있는 소비재에 그칠 위험도 보입니다. 독자이자 평론가로서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시인들이 더 불온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젊은이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이런 권력 시스템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미술 쪽 예술가들은 굉장히 행동주의적이에요. 예전에는 시가 미술보다 훨씬 앞서서 전위적인 역할을 했는데 말이죠. 지금은 젊은 시인들이 정치적인 문제를 등한시하는 건 아닌지 우려됩니다. 이 문제를 돌파해야 새로운 문학을 생산해내고 시의 다른 출구를 뚫을 수 있어요, 그러지 않으면 문학이 사회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는 문화 분야로만 고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시의 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반갑고 박수쳐줄 일이에요. 하지만 독자에게 행동을 요구하면서 독자를 불편하게 하고, 권력을 비판하면서 그런 권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의 정치적 기능이 희미해진 것 같아요. 다양화된 출판이나 독자와의 만남 등에 그냥 안주해버리면 새롭거나 다른, 전복적인 문화 생산이 막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대한 이성혁 평론가의 우려 혹은 문제의식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고 해서 해당 시의 불온성이 옅어지리라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는 한국시의 미학적 성과가 수직적으로 충분히 깊고 두텁게 쌓였다고 봅니다. 그 감각들을 좀더 수평적으로 확산하고 분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여요. 꼭 폐쇄적인 문학성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대중성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은 아닙니다. 양쪽의 방향이 이분법적으로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 같지도 않고요. 가령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시작된 아침달 시집의 성공은 상당 부분 큐레이터라 불리는 기성 시인들의 안목과 상징 자본에 기대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큐레이터 3인의 심사와 선택이 등단제도에 비해서 유달리 개방적이거나 민주적인 것도 아닌 듯하고요. 그럼에도 이전과는 다른 물성을 지닌 디자인, 비등단 시인의 발굴, 수요자 참여 형태의 시집 출판방식 등은 이 시리즈의 시집이 한국시의 미감을 좀더 수평적으로 확산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새로운 감각의 시가 더욱 많이 탄생하려면 이처럼 시를 창작하고 발표할 수 있는 매체적 조건이 다양해져야 해요.
하재연 젊은 세대에게 불온성을 요구하는 세대감각이나 방식에 의문이 듭니다. 불온성을 요구하는 주체들이 자신들이 진단하는, 혹은 대상화하는 시들의 불온성을 감지할 만큼 현실감각과 독해력이 있을지, 새로운 불온성의 가능성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요. 시스템에 편입돼 기존의 향유방식이나 반영방식에 익숙한 기성세대가 불온성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일지 들여다봐야 해요. 지금 현장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이 지닌 에너지를 간취하는 의지와 감각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기존 시스템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죠. 거기에 대해 반성적인 의식도 없고 거리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시를 불온하게 쓰라는 것이 무슨 문화적인 의미를 지닐지 회의가 듭니다.
이성혁 하지만 독자이자 비평가로서는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젊은 시가 불온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문화지형이 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까 언급된 제도 바깥의 움직임을 활용할 수도 있겠고요. 그런데 그런 움직임도 더 정치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한다는 거죠. 세대감각이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저는 50대지만 아직 이력서를 씁니다.(웃음) 그래서인지 젊은 세대와 세대감각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같은 세대 안에서도 차이가 나고, 다른 세대끼리도 공감대가 형성되니까요.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문제예요. 젊은 시인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건 불만이에요. 위치는 다를지 몰라도 같은 세계를 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시인들과 같은 세계를 대면하면서 살고 있는 독자로서, 또 비평가로서 지금 현상을 마냥 긍정만 할 게 아니라 시인에게 요구하는 바도 있어야 해요. 오늘 이야기한 여러 시인들의 시세계가 굉장히 다르지만 이들의 네트워킹도 시도해볼 수 있겠습니다. 차이를 지우고 동일성으로 묶자는 건 아니고요. 비평가는 다양한 시인들의 시로부터 여러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현상을 긍정하며 지켜보는 것을 넘어서 요즘의 시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지, 무엇이 요구되는지 고민하고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용목 현실 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적응 과정으로 볼 때와 신자유주의적 전망과 그 흐름에 예속된 것으로 볼 때의 온도차가 있는 듯합니다. 매체는 그 자체로 경험의 형식이면서 권력의 수단이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는 당연한 것 같습니다. 저는 촛불 당시의 다양한 깃발들과 ‘다중’, ‘해체와 재배치’ 같은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는데요. 이런 현상들을 개별 사례로 접근할 때와 전체적 흐름으로 접근할 때 느껴지는 감도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거기서 발언되고 발표되는 것들에 어떤 전략이 있다고 보기 어렵지만 각자 위치에서 나름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려지는 전체상을 보면 또 문학 자체를 어디론가 옮겨 가는 듯도 합니다. 다만 제 우려는 그런 장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시가 오히려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건데요, 말하자면 문학장에 관심을 가지는 것과 시 독서가 분리된 분들, 수행성을 통해 드러나는 시와 시쓰기의 장에 참여하지 않는 분들에게 온전하게 다가갈 수 있는 완결된 텍스트로서 시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거죠. 물론 제가 방금 말한 그 문학장과 분리된 ‘그분’들이야말로 상상된 독자거나 ‘거짓 독자’일 가능성이 높지만요.(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독자들을 떠올려본다면 조대한 평론가께서 말한 것처럼 문학적 방법은 넓어졌지만 오히려 문학독자층과 비독자층을 구분하고 그 벽을 더 높이 쌓으면서 문학이 더 협소해진 측면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그보다는 시집을 ‘텍스트’로 보는 관점이 이제 고루해져버렸다는 게 더 중요한 현실일 수도 있어요. 디자인이나 물성이 중시되는 것만 보더라도 기의적 측면보다는, 언어 자체의 기표적 측면을 시집 외연에 이르기까지 확장시켜놓은 느낌이랄까요.
조대한 시집의 외연과 디자인과 관련해 ‘현대문학 핀 시리즈’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정규 앨범보다 적은 곡을 담는 미니앨범처럼, 보통의 시집에 비해 부피가 줄어들고 판형도 작아졌죠. 여섯권의 시집이 디자인적 연속성을 띠는 컬렉션의 일종으로 출간되는 방식도 새롭고요. ‘아침달 시집’도 그렇지만, 저희가 시집의 전형이라 여겨온 오십편 내외의 시와 거기에 뒤따르는 해설은 이 기획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시인의 에세이가 들어가 있어요. 이렇게 달라진 물성과 배치는 시집에 대한 다른 감각을 생성해냅니다. 이러한 변화 전체를 하나로 묶어 해석하기는 어렵겠지만, 범박하게 일단 독자친화적인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많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매체 감각을 떠올려볼 때, 저는 ‘사진 찍을 만한’ 대상으로서 시집이 꽤나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이제 단순히 맛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고 사진으로 찍혀 전시되는 플레이팅 등이 미감의 중요 요소라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시의 미적 감각에서도 내용 못지않게 보이는 아름다움이 중요합니다. 신용목 시인 말씀처럼 언어의 기표적 측면이 시집 외연까지 점차 확장된 것일 수도 있겠고요. 읽히는 시집이 첫번째인 것은 당연하지만, 향유하고 있다는 것을 전시할 수 있는 시집 또한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성혁 평론가 말씀대로 자본 친화적이고 대중 영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는 항시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유지해야겠죠. 다만 견고하게 쌓은 어떤 권위와 감각의 첨탑을 기꺼이 허물어트릴 때, 다수의 메아리가 울리는 공동의 장에서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또다른 가능성을 길어 올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촛불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재연 잘 팔리는 시가 모두 좋은 건 아니지만 시가 잘 팔리는 환경을 만드는 시도는 좋다고 봐요. 예전에는 독자들더러 오라고 했다면 이제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갈지 궁리하는 거죠. 한국의 근대시는 기술복제 시대 이후 시작되었으니 미디어와 출판시장에서 자유로웠던 적이 한번도 없어요. 지금은 어떻게 독자와 접점을 만들고 독자의 요구를 들을지의 문제가 출판 매체의 고민이자 창작자의 고민인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시라는 ‘공동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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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시와 독자의 연결망이 중요하게 고려되는 시대인 건 틀림없습니다. 개인적인 인상이지만, 이 숱한 연결망과 소통 현장을 보다보면 이삼십년 전의 현상과도 묘하게 겹치는 게 있어요. 쉬운 말로 시를 쓰자는 ‘민중적 언어’ 담론도 그렇고, 대학이나 노동 현장에서 ‘공동창작’이 유행했던 것도 그렇습니다. 감성데이터를 통해 손쉽게 문화적 요소를 흡수하려는 태도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지만, 지금 SNS에서처럼 그때도 시의 구절들이 분절된 구호가 되어 유통되었죠. 아무튼 당시의 소통 방식과 창작자와 향유자의 일치 현상이 최근 매체 다변화, 낭독회 또는 소규모 모임 등을 통해 다르지만 비슷하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수없이 작은 연결고리를 만드는 게 큰 틀에서 보자면 대안을 찾는 일종의 역사 복원의 과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재연 텍스트 자체의 권위가 많이 약해진 탓도 있겠지요. 최근에는 창작 과정에서부터 유통과 소비를 먼저 고려하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1980년대적인 ‘공동창작’과 비슷하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텍스트의 개별성이 강해지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시집 한권 분량의 시를 모으기 위해 꾸준히 발표하면서 인정받아야 했다면, 지금은 개별적이고 조작적인 글쓰기를 동시다발적으로 하면서 이미 시집 한권의 분량을 써둔 사람들도 많아요. 이런 현실에서는 지향점 자체를 없애야 문학이 자생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 대한 요구는 없애고, 네트워킹은 강화하자는 거죠. 창작이 먹고사는 문제인데, 작업을 노동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니까요. 그런 면에서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시가 많이 읽히는 현실은 고무적이에요. 시를 공유하는 기반이 넓어지니까요.
조대한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예술활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전혀 없다고 대답한 비율이 28.8%나 되더라고요. 문학 분야에서 겸업이 아닌 순수하게 글쓰기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은 연 평균 550만원으로, 월 45만원 정도에 불과하고요. 이마저도 소설, 평론 등 상대적으로 수입 단가가 높은 산문 분야를 제외하면, 시를 쓰는 사람의 실질적인 월 평균 소득은 비참한 수준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 창작을 계속하는 원동력으로서, 앞서 언급된 여러 네트워킹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듯해요. 최근 ‘분리수거’ ‘켬’ ‘뿔’ ‘ 0’ 등 젊은 시인들이 꾸린 여러 동인 활동과 낭독회가 특히 눈에 띕니다. 동인과 낭독회는 매우 오래된 전통을 지닌 창작 공동체의 발화방식이긴 합니다만, 그 방식이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해졌어요. 수적으로 불어난 독립서점과 여러 지원사업과의 연계 등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시인들 나름대로 창작을 지속하기 위한 돌파 방식을 찾으려 하기 때문 같기도 합니다.
이성혁 옛날 이념을 떠든다고 그걸 따르는 사람도 이제는 없겠지요. 지금 시대에 맞는 이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이념은 이데올로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말하는 ‘이데아’라는 의미로서의 이념입니다. 저는 ‘정동’과 ‘공통적인 것’이 화두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차이를 형성하면서 그 차이가 우리의 것이 되는 공통적인 것의 생산 말입니다. 아까 말씀하신 ‘네트워킹’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물론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이 있지요. 그걸 한번에 없앨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은밀하게 작동하는 그 권력을 의식하면서 살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권력에 순응하지 않고 살면서, 사람들과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게 하나의 이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함께해보자고 권하는 게 ‘꼰대짓’으로 몰리기도 하는데, 그런 분위기도 문제예요.
하재연 시를 쓰는 사람이나 시에 대한 담론을 만드는 사람 모두 플랫폼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권위나 권력을 지닌 문학 시스템을 없애기보다는 민주적인 채널로 변모시키고, 또 그밖의 여러 채널을 새로 만드는 것도 중요해요. 각자가 가진 권위에 대한 동경도 성찰해봐야 하고요. 문단이나 문학의 비민주적인 지형, 성폭력적인 제도, 감정적인 위기에 대한 의식이 지금 다방면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 바탕에서 공동의 의식을 사유해보면 좋겠습니다.
조대한 기존 플랫폼인 문예지 가운데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월평이나 계간평을 쓰려고 여러 문예지를 살피다보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지면에서 각자의 발화를 열심히 이어가는 시인들이 많아요. 이들을 조명하는 루트가 다양해지면 좋겠습니다. 가령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상’은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소설을 바깥으로 알리고, 작가들의 주목도를 높여 단행본으로 이어질 교두보를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해요. 대중적으로도 꽤나 커다란 호응과 인지도를 쌓은 것 같고요. 비교적 최근 시작된 문학과지성사의 『소설, 보다』 같은 기획도 응원하고 있습니다. 한데 시는,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이런 조명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첫 시집을 계약하고 발간하기 전까지 창작을 지속하기 힘든 시인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요. 단행본과는 또다른 매체와 기획이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신용목 조금씩 다른 결로 말씀하셨지만, 다양한 시각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미처 인지하거나 적확한 이름으로 호명하지 못했지만 이런 자리가 또한 그 일을 위한 모색이겠지요. 더 고민해볼 여지를 남기며 오늘 좌담을 마치겠습니다. 긴 시간 함께해주신 세분 감사합니다. (2019.10.25.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