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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박태순, 꼭 제3세계의 부정기간행물 같던 작가
김남일 金南一
소설가. 장편소설 『청년일기』 『국경』 『천재토끼 차상문』, 소설집 『일과 밥과 자유』 『천하무적』 『세상의 어떤 아침』 『산을 내려가는 법』 등이 있음.
tobeclimber@hanmail.net
선생의 나무젓가락
박태순(朴泰洵, 1942~2019) 선생의 부음을 전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느 뜨겁던 여름날의 한 풍경이었다. 그때 내가 근무하던 실천문학사 사무실은 서대문구 현저동의 허름한 4층짜리 건물에 세 들어 있었는데, 옆방이 바로 선생의 집필실이었다. 혼자만 계셨던 건 아니다. 이따금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던 당신의 부친이 운영하시던, 아마 그 시절엔 거의 명목만 유지하던 박우사라는 출판사도 겸한 사무실이었다. 길 하나 건너편이 서대문형무소였다. 때로 우리 방문객들 중에는 좁은 복도 창가에 서서 굳이 자신이 재소자로 ‘복무’하던 사동을 어림짐작하며 감개에 젖는 이들도 있었다.
문제는 거기가 건물 맨 꼭대기층이라 여름에는 몹시 덥고 겨울에는 몹시 춥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말이 사무실이지 손님이 와도 내줄 자리가 없을 만큼 좁아터진 방이었다. 특히 여름을 나는 게 끔찍했다. 한뼘 머리 위가 곧바로 옥상이어서 어디 내뺄 그늘도 없었다. 그날도 경복궁을 떠난 해가 현저동 산꼭대기를 다 건너오기도 전인데 사무실은 한증막처럼 푹푹 쪘다. 나는 아침부터 헉헉거리며 염천을 저주했다. 선생이 우리 사무실 문을 빼꼼 열고 보시더니 혀를 끌끌 찼다. 잠시 후 선생은 낡은 선풍기 하나를 가져왔다. 당신의 부친이 삼팔선을 넘어올 때 메고 온 거라 해도 믿었을 만큼 구닥다리였다.
“김형, 급한 대로 이거라도 써보세요. 그럭저럭 더위를 식혀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싶었지만 선생은 자신있게 전원을 꽂았다. 웬걸, 선풍기는 날개를 단 1밀리도 움직이지 못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선생이 당신 방에서 나무젓가락을 가져왔다. 방금 부친과 함께 시켜 잡수셨을 중국계 음식의 흔적이 여실했다. 선생이 그놈을 선풍기 철망 안으로 쑥 집어넣고 마치 세발자동차 시동 걸듯 날개를 몇번 돌렸다. 털, 털, 털. 놀랍게도 선풍기는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뜨뜻미지근할망정 바람이라는 걸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는 박수를 쳤고, 선생의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선생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낯선 거리」라는 단편이었는데, 문제의 그 건물에 처음 입주하던 때의 전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거기 기대면, 당신은 신촌로터리께로부터 시작해서 아현동, 북아현동, 충정로, 교남동 일대를 헤집은 끝에 그곳에 이르렀고, 복덕방 영감을 따라서 그 건물 앞에 서자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찼다.
‘이 건물은 여러편의 소설을 갖고 있겠는걸?’
아닌 게 아니라, 당신은 그 건물 외벽에 덕지덕지 붙은 간판들을 기어이 소설에 되옮겼다. 까페, 레스토랑, 이발소, 금은시계, 약국, 미용원, 찻집, 화실 등등은 물론, “여종업원 구함, 침식 제공” 같은 전단지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나로서는 단 한개의 간판도 기억나지 않으니, 그 시절 선생이 내게 베푼 나무젓가락의 애정과 더불어 소설가로서 선생의 철두철미한 산문정신 앞에 새삼 옷깃을 여밀 뿐이다.
역사가로서의 소설가
박태순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이른바 4·19세대에 속한다.
과연 1960년 4월 6일, 박태순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과에 입학한다. 축하는 이르다. 그는 단 며칠 만에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의 진로까지 뒤바꿀 획기적 사건과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4월혁명이었다. 연보에는 대개 ‘4월혁명에 가담, 충격을 받음’ 이렇게만 나와 있다. 그러나 그때 청년 박태순이 입은 내상은 꽤 깊었다. 새로 맞춘 교복에 먼지도 내려앉지 않았을 무렵인데, 그의 학우는 총상을 입고 절명했다. 그리고 그는 해 아래 버젓이 살아남은 것이니, 말하자면 시대에 대한 부채의식은 필연적이었다. 그것이 그를 훗날 작가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해 11월, 최인훈은 “아세아적 전제(專制)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광장」 서문) 불가능했을 소설로서 「광장」을 발표했다. 박태순은 그보다 몇해 늦게, 그러니까 1964년 대학 졸업 직후 『사상계』 신인상으로 등단했고, 이후 당대의 어떤 작가보다도 ‘시대의 증언자’로서 작가의 역할에 충실했다.
고된 길이었으되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예컨대 소설가가 된 그는 잠시 주춤했던 4월혁명의 열기가 교수단 데모를 통해 다시 한번 큰 불길로 번지던 날을 애써 소환한다. 거기서 박태순의 분신인 소설 속 ‘그’는 어떤 거물 깡패가 소유한 극장으로 몰려가는 데모대에 합류한다. 깡패는 늙은 독재자의 하수인이었다. 분노한 민중의 원시적 분노가 어떤 간섭이나 자제도 없이 폭발한다. 어쩌면 그건 인간을 동여매던 일체의 주박을 풀어버리려는 하나의 당돌한 무질서 상태일지 몰랐다. 극장은 파괴된다. 의자는 뜯겨나가고, 스크린은 갈가리 찢긴다. 그 장면은 박태순의 손끝에서 장엄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생생히 복원되었다.
사람들은 동물이나 내는 기괴한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은 눈앞에 닥친 무질서에 환장해 버려서, 마치 사회의 인습과 생활 규범을 몽땅 망각한 것 같았다. 그들은 기괴한 소리를 뱉으며 물건들을 부수고 있는 것이었다. 극장 안에 이루어져 있었던 여러 형상물들은 점점 망가져서 쓰레기더미로 화하였다. 말하자면 추상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 나 또한 부서진 의자에서 철근을 추출해 내어 그것으로 타일을 깐 바닥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꽈당, 꽈당. 내가 내고 있는 소리가 나의 육체 속으로 달려들었다. 마치 내 몸뚱어리를 꽈당꽈당 들깨부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생각될 지경이었다.(「무너진 극장」, 『낯선 거리』, 나남 1989, 97~98면)
지독한 혼란의 와중에서 그는 어느새 무대에 있었다. 그러자 평소 늘 객석에서 바라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무대와 객석의 놀라운 역전 현상이라니! 그건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이었다. 그가 장차 역사라는 무대의 이면에 주목한다면 바로 그때의 경험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터였다.
「무너진 극장」은 4월혁명의 적자로서 박태순의 작가적 면목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후에도 그는 늘 합류하고 기록하고 증언했다. 그에게 소설과 역사는 굳이 구별되는 별개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러자니 일본소설에 흔하다는 이른바 사소설 따위는 처음부터 그의 문학적 지향일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마지막 걸작으로 평가받는 중편 「밤길의 사람들」은 그가 최루탄 자욱한 1987년의 거리를 부지런히 순례한 결과물이다.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분신하자 그는 청계천으로 달려갔다. 1971년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경기도 광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는 닷새를 머물며 근 백명의 주민들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그가 쓴 두편의 르뽀르따주, 즉 「소신(燒身)의 경고: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얼」과 「광주단지 4박 5일」은 그 자체로 우리 문학사의 기록문학 편에 반드시 수록되어야 할 명편으로 남게 된다.
이 글을 쓰기 전, 나는 소설가 박태순을 주로 ‘외촌동’ 시리즈의 작가로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장면들에 혀를 내둘렀다. 단언컨대 저 지독했던 궁핍의 시절, 우리 주변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었던 공중변소의 끔찍한 추억을 그보다 잘 그려낸 작가는 없으리라.
하나의 거드럭거리는 이방인으로서 당신이 이 동네에 들어선다면, 우선 대변 보는 곳으로 들어가서 십여 분쯤 쪼그리고 앉아 있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변소간의 너덜거리는 썩은 나무 판대기에서, 전혀 당신이 예상할 수 없었던 감동과 환희의 고함을 듣고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이 자지는 말방울 자지다.(「정든 땅 언덕 위」, 『낯선 거리』 22면)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똥 누는 시간은 길다. 변소 안에 들어앉아 있는데 바깥으로부터 재촉하는 듯한 기침소리가 나면 그것처럼 화가 나는 일은 없다. 사람은, 적어도 편안하게 똥을 눌 수 있는 자유만은 누려야 한다. 그 많은 자유를 다 차지할 수 없을지라도 이 자유만은 양보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가 되어갈 무렵 드디어 변소 앞에는 사람들이 열(列)을 지을 정도가 된다. 나이가 듬직한 어른들은 차마 내색을 할 만큼 천박하지는 않기 때문에 성기어져 가는 별빛을 보며 쉰사[修人事]를 나누고 떠덜하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점잖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샘골 공터에는 항상 똥더미가 여기저기 늘어붙게 된다. 똥개들이 미처 다 먹어치우지 못할 정도로 천지 사방에 싸지른 똥구덩이를 보게 된다.(「가슴속에 남아 있는 미처 하지 못한 말」, 『정든 땅 언덕 위』, 동아출판사 1995, 233~34면)
물론 후자는 아직 외촌동 이전 시기의 풍경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월남한 이른바 ‘38따라지’로서 박태순의 가족이 한때 정착한 원효로 산동네를 모델로 한다. 거기서도 버텨내지 못한 사람들이 훗날 외촌동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서울에 외촌동이라는 동명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것이 (역시 실재하지 않지만) ‘중심’을 뜻하는 내촌동의 알레고리임을 짐작한다. 안과 밖. 내남없이 고단했을 전후의 생존 과정에서도 서서히 계급은 분화되게 마련이어서, 이제 안에서 밖으로 내쫓긴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그들은 변소 하나를 놓고도 아직 깜깜한 새벽부터 이웃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절박한 처지로 전락한다.
이때 그의 소설은 오로지 관 주도의 경제개발만을 지상과제로 내세운 우리 현대사의 부박한 이면을 증언하는 훌륭한 기록/기억의 서사가 된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
평론가 최원식은 박태순의 작품들을 새삼 통독한 후 무척 놀랐다는 심사를 숨기지 않았다. 그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의 소설들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읽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마치 천 일 동안 셰에라자드의 이야기에서 헤어나지 못한 어느 아라비아 왕처럼 귀가 먹먹할 지경”1으로.
발터 벤야민에 기대면,2 이야기는 정보나 보고처럼 사물의 순수한 실체를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듯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꾼으로서 박태순이 남긴 흔적은 무엇일까.
1980년대 초 그는 독특한 형식의 기행서 『국토와 민중』(한길사 1983)을 펴냈다. 그는 그런 작업을 통해 골방의 예술가가 아니라 저자와 거리의 이야기꾼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전고(典故)고 뭐고 없던 시절 스스로 민중 속으로 하방을 결단했던 드문 작가, 드문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리지 않았다. 완행열차 안에서, 다방에서, 대합실에서, 이발소에서, 경찰서 보호실에서, 향군 훈련장에서, 백운대 등산로에서, 하다못해 공중변소에서도 그는 이야기가 있다면 기꺼이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예를 들어 강원도 영월군 석항의 종합버스정류소에서는 상동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단 한시간 만에 소품 「정선아리랑」을 건질 수 있었다.
장편 『어제 불던 바람』(전예원 1979)에는 남녀 주인공이 묘하게 의기투합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는 “우선 이 도심지대를 벗어나야 해. 아무 버스나 타고 종점까지 가서, 다음 문제는 거기에서 생각하기로 하자구”(283면) 하고 말한다. 여자도 찬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둘은 주택이 들어서다 만 황지(荒地)의 가녘에 있는 어느 버스 종점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가장 허름한 여관’을 목표로 다음 행로를 잡는다. 지극히 박태순다운 해결책이었다. 그는 실제로 아무 때나 아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라면 모름지기 재미가 있어야 할 텐데, 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박한 편이다. 앞서 박태순을 새삼 괄목했다고 말한 최원식 또한 “그러나 박태순은 재미있는 이야기꾼은 아니다”라고 금세 덧붙인다. “판소리 광대들의 절묘한 표현을 빌리면, 소리를 맛있게 찍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정 ‘시끄럽고 껄끄러운 소리’를 내어 독자들을 곤혹에 빠뜨리곤 한다”(103면)면서.
나 역시 주변에서 소설가 박태순을 두고 내리는 그런 식의 ‘평가’를 심심찮게 듣곤 했다. 가령 이런 대화.
“태순이 형의 소설은 말야, 남녀가 여관에 들어가거든. 가서 뭐 하는 줄 알아?”
“그거야 뭐…….”
“하하, 천만에. 두 남녀는 서로 토론을 하신단 말씀야. 것두 아주 진지하게. 목하 이 나라 민주주의라든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문제점 따위에 대해서 말야.”
술자리에서 가끔 주고받던 이런 따위 악의 없는 농담이 사실에 크게 어긋나는 건 아닐지 모른다. 가령 ‘발괄’이니 ‘실금’이니 ‘경장의 시대’ 따위 뜻도 잘 모를 이런 말들이 죄 박태순의 소설 제목이라면? 본문에서도 그는 마치 1930년대 소설에나 쓰일 ‘물역가게’ ‘나변’ ‘세음’ ‘개짐’ ‘경야’ ‘말감고’같이 생소한 낱말들을 수두룩 동원한다.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서야 우리말에 ‘~서껀’이라는 독특한 조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얀 하늘」에서는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다 오자마자 다퉜고, 아내는 집을 나간다. 그리고 삼개월 만에 둘은 다시 어느 허름한 변두리 극장에서 만나 사랑을 확인한다. 물론 아내는 더이상 호락호락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한다.
이 사내는 오직 성욕을 통해서만 여자를 본다. 성욕을 통해서 여자를 알아차리고 여자를 이해하고 여자와 만난다. 그러면서도 이 사내는 그 점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 이 사내는 대중이라고 하는 무의식 집단 속에 함몰되어 버린 평범한 소시민에게 허여(許與)되는 약간의 근대적인 자유를 누리고는 있지만 그 소시민이라는 위치에 대한 아픈 자각을 갖고 있지 않다. 이 사내에게는 역사가 없다. 이 사내에게는 그래서 근대가 없다.(『낯선 거리』 62면)
이것이 삼개월 만에 다시 남편을 만난 아내의 심중이라면 대체 누가 이런 소설을 재미있다고 하겠는가. 짐작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많은 작가들이 소설의 흥미를 자아내는 손쉽고 익숙한 장면 묘사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박태순의 소설은 그런 단순한 감정이입을 단호히 거부한다. 마치 브레히트의 서사극처럼!
이러매 그의 소설에서는 고왕만, 나종애, 서춘환, 민경대, 문세빈, 허명두, 윤명선, 김치삼 하는 식으로 꼬박꼬박 굳이 성까지 달고 나타나는 ‘투박한’ 이름의 등장인물들이 직업과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시로 고담준론을 벌이고 각종 쟁론에 참예한다. 심지어 장편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심설당 1980)에서는 ‘어느 사학도’가 제헌헌법 초안에 대해 아예 몇 페이지에 걸쳐 장황한 분석을 시도한다.
솔직히 그는 작가가 시대의 증언자라는 스스로 세운 윤리의식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설명보다는 묘사”라는 소설 창작 교과서의 오랜 전통을 쉽게 무시한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새삼 읽으면서 나로선 오히려 우리 문학사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세계를 발견한 감동이 훨씬 컸다. 주제나 줄거리만이 아니다. 그의 소설 문체 역시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단편소설 「뜨거운 물」에 이런 대목이 있다.
겨울밤은 어느 계절보다도 조용하였고 길었고 아늑하였다. 나는 겨울이라는 저 완강한 세력이 개입해 들어와서 지저분한 나의 방을 모든 세상과 차단시켜놓고 있는 듯한 그런 고립을 사랑하고 있었다. 밤 한 시에는 밤 한 시의 귀신이 있었고 밤 두 시에는 밤 두 시의, 밤 세 시에는 세 시의, 밤 네 시에는 네 시의, 그리고 여명 다섯 시에는 여명 다섯 시의 귀신이 있었다. 나는 그 밤의 귀신들과 친하게 지냈다. 형광등이 소리를 내지르고 그리고 밤은 그 소리를 재치있게 빨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밤새도록 점잖았고, 내 방의 가물(家物)들도 점잖았다.(『낯선 거리』 76면)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껏 밤의 귀신에 대해 쓴 소설 여러편을 읽었겠지만, 밤의 매 시각마다 나타나는 귀신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이 장면은 까마득히 모르던 신화적 세계의 어떤 국면을 맞닥뜨린 것 같은 황홀감마저 안겨주었다.
그를 기억하는 또다른 방식
유신 말기, 자신들의 안위에 자신감을 잃은 정권은 이제 한낱 소설가의 조그만 아파트까지 찾아와 창작을 훼방하는 건 물론 자유로운 출입마저 봉쇄한다. 박태순이 그 해괴한 연금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 「3·1절」인데, 첫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는 소설을 씀으로써 문학을 행위하는 자이지만 때로는 소설을 쓰지 아니하고 침묵을 견딤으로써 문학을 행위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신생』, 민음사 1986, 271면)
박태순은 이처럼 소설가의 존재 의의와 존재 양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가 매일같이 소설만 쓰는 것을 지선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를 다만 ‘소설가’로 기억하는 것은 부당하다. 어쩌면 그의 국토기행이라든지 르뽀 작업, 그리고 이따금 그가 서울대 영문과 출신임을 새삼 일깨우곤 하던 번역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도 홀대해서는 안 된다.
가령 이런 것이다.
현저동 시절, 선생과 나는 『문학과 예술의 실천논리』(실천문학사 1983)라는 책 하나를 기획했다. 당대 문학/예술 운동의 실태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지향을 따져보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 각 분야의 숨은 실력자들에게 두루 원고를 청탁했고, 제법 원하던 결과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선생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고 잠시 출판을 보류하자고 했다. 얼마 후 선생은 한 뭉치의 원고를 건네주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말로만 듣던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와 관련한 번역 원고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선생이 건넨 원고를 책 뒤에 부록으로 묶어 편집했다.
[부록 ①] 아시아·아프리카 작가운동 연혁 20년
[부록 ②] 로터스상 수상자 소개 및 발언
[부록 ③] 제3세계 민중연극의 현황
그렇게 하여 이 나라에 둘도 없을 기획이 완성되었다. 나는 내가 출판계에 머문 전 기간을 통틀어 그때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다.
도대체 그 원고들의 출처인 잡지 『로터스』(Lotus Magazine)의 출처가 몹시 궁금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도 진작 폐간된 엄혹한 상황에서, 말이 제3세계문학운동이지 소련과 중국이 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비동맹운동의 문학적 아바타로서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의 기관지를, 그것도 1969년 창간호 이래 모든 호를 구비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런데 바로 선생이 당신의 그 허름한 사무실에 그것들을 몰래 감추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선생은 이 땅에서 제3세계문학운동을 실천한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또한 『팔레스티나 민족시집』(실천문학사 1981)을 펴낸 것은 물론, 미국의 흑인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밀턴 멜즈의 『랭스턴 휴즈』(실천문학사 1994)와 하워드 패스트의 『자유의 길』(형성사 1979)을 번역했다. 아울러 인도의 쿠스완트 싱과 나이지리아의 치누아 아체베를 소개함으로써 당시 막 논쟁이 일기 시작했던 우리의 제3세계문학운동론에 구체적으로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 내게 선생은 1980년 봄 그 시뻘건 표지만으로도 우리의 나태와 비겁을 초라하게 만든 부정기간행물 『실천문학』의 실질적 발기인이었다.
나는 기억한다. 그해 봄, 그러니까 너무 황홀해서 오히려 모호했던 그 ‘서울의 봄’ 어느날에, 아직 대학생이던 내 눈앞에 홀연히 나타난 『실천문학』 창간호가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표지 색깔도 색깔이려니와, 어떻게 이런 명명이 가능하단 말인가. ‘실천문학’이라는 제호,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민중의 최전선에서 새 시대의 민중운동을 실천하는 부정기간행물(MOOK)’이라며 이마에 떡하니 달고 나온 부제라니!
『실천문학』 제3호를 만들 때였다. 나는 어쩐지 제호 글자체가 너무 딱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명조체로도 한번 뽑아보았다. 선생이 그걸 보고 경악했다. 얼마 후 선생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그 제호의 의미에 대해서 찬찬히 설명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말하자면 내 행위는 초호 고딕으로 써야 마땅할 『실천문학』의 정신을 송두리째 훼손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던 것. 훗날 그 일화를 어떤 동료에게 말했더니 선생이 원래 앞뒤 꽉 막히신 거 몰랐느냐며 슬쩍 흉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선생의 그 고지식함이 더없이 고마웠다.
불행히도 지금, 그 시절 선생의 열정과 가르침으로 일구었던 그 모든 역사는 초토화되었으니, 나는 오직 참괴할 따름이다. 이유 여하, 누구보다 크나큰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선생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한국작가회의)의 창립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꼼꼼히 기록했다. 2014년 한국작가회의는 창립 4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작가회의 40년사』를 펴냈다. 나는 부위원장으로 그 일에 참여했는데, 그때 모든 작업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는 무엇보다 선생이 해놓은 선행 작업은 물론, 선생이 애써 모으고 보관해온 귀한 자료들이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일로 선생을 뵈러 수안보에 가서 식사를 잘 대접받았다. 그 뒤 선생은 당신의 집 앞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한봉지’ 샀다. 나는 그제야 선생의 건강이 크게 염려되었다. 물론 나도 그 몇해 전 큰 수술을 받았고 그때 아직 완치 판정을 받지 못한 상태였기에 그걸 핑계 삼아 얼른 달아났다.
부음을 받고 허겁지겁 장례식장에 가자 선생은 그때 내 태도가 괘씸했다는 말씀도 없이 그저 사람 좋은 비주류(非主流)의 미소로 내 절을 받으시는 것이었다.
꼭 제3세계의 부정기간행물 같던 선생이시여, 부디 명목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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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식 「이야기꾼과 역사가」, 『소수자의 옹호』, 자음과모음 2014, 102면. ↩
- 발터 벤야민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 최성만 옮김, 길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