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데이비드 하비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 창비 2019
보편적 소외의 시대에 필요한 보편적 투쟁의 전망
장석준 張碩峻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gramsci@empas.com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본래 지리학자이지만, 이제는 학문 분과를 떠나 현대 사회사상의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비판적 도시 연구로 처음 명성을 쌓은 그는 칼 맑스의 『자본』에서 자본주의 공간 연구의 기본 명제들을 끌어낸 『자본의 한계』(The Limits to Capital, 1982)를 발표해 일찌감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도 중요한 이론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자본』을 직접 연구한 저작을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하비의 저서 목록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미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는 『자본』을 다시 읽고 젊은이들에게 이를 강의하러 다니느라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강연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에도 번역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A Companion to Marx’s Capital, 1권은 2010년, 2권은 2013년, 한국어판 창비 2011, 2016) 연작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맑스의 작업에서 21세기 자본주의 분석의 실마리를 건져내려는 시도를 잇달아 책으로 냈다. 역시 우리말로도 소개된 『자본이라는 수수께끼: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위기들』(The Enigma of Capital: and the Crises of Capitalism, 한국어판 창비 2012)나 『자본의 17가지 모순』(Seventeen Contradictions and the End of Capitalism, 한국어판 동녘 2014)이 그런 저작들이다.
2017년 82세의 하비는 이 목록에 한권의 책을 더했다. 이번에 번역본이 나온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Marx, Capital and the Madness of Economic Reason, 김성호 옮김)가 바로 그것이다. 이쯤 되면 “또 냈어?”라는 물음이 나올 만도 하다. 더 무슨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겠느냐고 넘겨짚을 수도 있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때 평자의 생각도 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성급한 판단이었다. 이 책은 하비의 전작들보다 훨씬 더 전위적인 사고 실험장이다. 이 책에서 하비는 우리 시대,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미래 경향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을 생산하기 위해 맑스가 『자본』에 명시한 사유만이 아니라 그 행간과 여백에서 새로운 발상을 끌어내려 한다. 너무 독창적이어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내용들이지만, 하나같이 현대 자본주의의 이해와 분석에 참으로 긴요한 착상이다.
가령 ‘반가치’(anti-value) 개념이 그러하다. 『자본』에 비록 ‘반대가치’나 ‘비가치’ 같은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래도 맑스 자신이 개념 수준으로 발전시킨 구상은 아니다. 하지만 하비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근본 법칙을 설명하려고 제시하는 물질과 반물질의 관계에 빗대며 가치와 함께 반가치를 사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본은 가치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가치의 부정인 반가치 또한 생산한다는 것이다.
하비가 반가치 개념을 제안하며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것은 부채 경제다. 금융위기 이후 부채 경제가 현대 자본주의의 필수적 구성 요소임이 분명해졌다. 부채는 더이상 자본순환을 원활히 하기 위한 신용 개입의 부산물이 아니다. 1970년대 이후 화폐 자체가 신용화폐 성격을 강하게 띠면서 지구 자본주의는 ‘무한한’ 신용 공급이라는 전제 위에서 작동하게 됐다. 겉으로만 보면 이 덕분에 자본주의는 웬만한 위기나 한계에는 굴하지 않는, 전에 없던 역동성을 갖추게 된 듯했다. 아무튼 이로써 계속 천문학적 규모로 늘어나는 부채가 가치생산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토대가 됐다.
하비는 이러한 부채 경제에 내포된 의미심장한 가능성들을 탐색한다. 그중에서도 그가 주목하는 것은 ‘압류하다’(foreclose)라는 영단어의 함의다. 사전적으로만 보면, 이는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담보물에 대한 권리를 상실하고 채권자가 그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더 깊이 곱씹어보면, 이는 채권자의 지속적인 가치 증식을 위해 채무자의 다양한 대안적 가능성을 ‘미리 닫아놓음’을 의미한다. 부채 경제의 이런 속성이 자본주의와 일체화된다면, 이는 이제 사회의 미래 가능성 전체가 자본의 축적 기반이 됨을, 즉 수탈 대상이 됨을 뜻하게 된다.
하비는 이런 속성을 지닌 부채를 반가치의 대표 사례라 규정한다. 하비는 부채 경제가 전제하는 무한성이란 망상에 불과하다고 못 박는다. 이런 망상에 바탕을 두고 확대된 가공자본은 현실 가치 지반과 점점 더 크게 괴리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 가치생산의 여러 사슬 중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러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돌연 부채상환이 요구된다. 하비의 정식화에 따르면, 가치와 반가치의 모순이 폭발한다. 그러면 한 사회 전체가 자신의 미래를 압류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정확히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에 벌어진 일이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그렇다면 하비는 반가치 같은 개념을 통해 지구화-금융화 이후 자본주의에 어울리는 새로운 파국론을 제시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책에서 하비는 무한성이라는 망상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성이 실은 광기임을 강조한다. 경제적 이성의 광기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이에 대해 인류 역사는 (…)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328~29면)이라는 이 책 마지막 문장은 거의 예언자적 판결처럼 들린다.
그러나 하비가 희망을 거는 것은 단순한 파국의 전망이 아니다. 그는 자본순환의 요구로부터 생겨나는 반가치가 “상품화와 사유화에 대한 정치적 저항이라는 능동적 반가치로 변형”(129면)될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런 가능성은 『자본』이나 기존 맑스주의에서는 가치생산을 둘러싼 투쟁에 비해 소홀히 다뤘던 가치 실현의 장소와 시간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인구 집단의 상당 부분이 기후변화에 맞서는 사회관계를 구축하려는 욕망을 특정한 소비활동으로 표출한다면, 자본은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생산과정을 바꾸도록 압박을 받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경제적 이성의 광기 탓에 소외가 사회 전체의 일반적 현상이 될수록—하비는 이를 “보편적 소외”(308면)라 부른다—자본에 맞서는 투쟁의 저변 역시 유례없이 확장된다. 이렇게 새롭게 확장된 투쟁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지구 생태계 위기로까지 확대된 역사적 국면에 어울리는 희망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에서 하비가 제안하는 개념들이 아직은 덜 여문 미완의 수준이라 하더라도 21세기 인류문명의 출구를 찾으려는 이들이 한번쯤은 이 책을 읽고 노학자가 우리에게 남기는 제언을 진지하게 물려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