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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지창 『문학의 위안』, 한티재 2020

문학의 ‘위안’과 문학의 ‘소임’

 

 

황규관 黃圭官

시인 grleaf@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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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통해 역사를 읽는 일은, 학문적 연구물을 통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결을 갖는다. 그리고 다른 감을 준다. 아무래도 문학작품에 객관적 관점의 결여를 지적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에 맞서 학문적 결과물은 절대적인 객관성을 갖느냐고 반론하는 것은 이야기를 일탈하게 할 개연성이 있다. 서로 간에 절대성을 갖는 초월적 척도를 향한 의미 없는 관념을 나열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문학의 특성에 입각해, 문학작품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역사의 의미를 겸손하게 소출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문학작품도 어디까지나 역사적·문화적 조건들이 만들어낸 시대의 구조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그것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시대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는 생각 정도면 어떨까.

물론 한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정신과 영혼이 단순히 시대의 흔적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작가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시간에 대한 기억과 경험들, 그리고 생리적인 특질들마저 작용한다. 여기에서 생리적인 특질이 ‘작용’한다는 것은 그것마저 작가가 자신의 시대적 삶을 받아들이거나 밀치거나 또는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데 관여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정지창의 『문학의 위안』을 읽고 나서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상념들이었다. 왜냐면 이 책의 1부에 실린 글들의 배치 순서가 지난 역사, 그러니까 식민지를 통해 일그러진 채 시작된 우리 근대사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가 가장 앞서 배치한 「권정생의 문학과 『한티재 하늘』」에서 다룬 권정생 장편소설 『한티재 하늘』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여진이 남은 “구한말 1895년부터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36년까지 한티재 인근 농촌 마을들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 민초들의 살아온 이야기”(22면)가 담겨져 있고, 그뒤로 실린 글들은 각각 4·19혁명과 1960년대의 풍경, 1970년대에 꿈틀거린 문화적 저항, 그리고 이어서 1980년대 이후의 시대적 초상을 짚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가 읽은 텍스트는 이호철의 단편 소설 「어느 이발소에서」, 그리고 최인훈의 몇몇 소설과 희곡 작품들, 김승옥과 김원일의 소설, 고은의 에세이, 백무산의 시 등이다. 본격적인 평론이 아닌 자유롭게 쓴 에세이인 경우도 있고,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언급하면서 작가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역사를 살피기도 하는데, 이런 점이 저자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개괄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문학작품을 렌즈 삼아 바라본 역사이다보니 역사적 사건을 직접 다루는 관점을 취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살아가야 했던 존재들, 즉 민중의 숨결과 생명력, 의지, 또는 새로운 삶의 모색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백무산이 만난 최제선」은 백무산의 시 전체에 대한 소감이 아니라, “왕년의 저항 시인과 노동해방의 전사”가 앞에 놓인 “좌절과 실패”(123면)를 어떻게 뚫고 나가는가에 집중하며, 「『녹색평론』과 생태시」에서는 저자의 외우였던 김종철의 사후에 『녹색평론』을 재독하면서 “생태문제를 소재로 삼았다는 의미 이상의 감동을 주지는 않”(147면)는 기왕의 ‘생태시’에 대해서 숙고한다. 글의 논지와 결론의 의미에 대해서 여기서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만, 정지창의 평소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었는지 『문학의 위안』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 짚어두는 게 알맞을 것 같다. 왜냐면 우리의 근대가 야기한 문제를 시종일관 환기시키는 게 이 책의 의도인 듯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얼마만큼 집요하게 매진했는지에 대한 아쉬움도 어쩔 수 없이 든다.

저자는 ‘책머리에’의 첫 문장을 이렇게 썼다. “문학의 소임 가운데 하나는 현실에서 무시되거나 왜곡된 진실을 찾아 드러내는 일이다.”(5면)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압축적으로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1부에 실린 한국문학 작품 읽기를 통해서도 그 일을 수행하고, 2부에서는 시야를 확장시켰다가 다시 구체적인 세목에 집중한다. 헨리 제임스, 베르톨트 브레히트, 한나 아렌트를 짧게 소개한 뒤에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무시된 진실’에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고갱이가 2부에 실린 「기억과의 전쟁,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찾아서」 「왜곡된 역사와 뒤틀린 삶」 「4·3항쟁 70주년과 『화산도』」 「10월 항쟁의 시적 형상화」가 아닌가 싶다. 이들 글이 다른 글에 비해 대체로 조금 더 문학평론 형식을 갖춘 것은 단지 외형적인 특징일 뿐이다. 이 글들에서 눈에 띄는 점은, 저자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인 대구와 그 근방에서 벌어졌던 학살 사건을 다룬 문학작품을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이 추상적인 ‘공간’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에서 벌어졌다는 건강한 관점을 가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접근 방식이며, 지역의 입장에서 한국 근대사의 사건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사실 지역문학이라는 것은, 지역의 토속성만 별나게 드러낸다고 해서 그 독특성이 확보되는 것이 아니다. 토속성이라는 것 자체도 역사적 맥락을 거느린다고 본다면, 문학은 가능한 한 많은 맥락을 사고의 용광로에서 제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만 문학작품은 생기를 얻으며, 문학작품이 생기를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작품이 이룬 탁월성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열어젖히는 작은 물줄기가 될 가능성을 갖는다는 뜻도 된다. 어쩌면 이것이 저자가 말한 “진실을 찾아 드러내는” “문학의 소임”의 본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을 구체적인 작품의 성과를 통해 강조하고 주창하는 일이 문학비평의 또다른 임무일 것이다. 「10월 항쟁의 시적 형상화」에서 “10월 항쟁 같은 복합적이고 규모가 큰 사건을 담아내는 데는 아무래도 시보다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더 적절할 터인데, 문제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작가가 없다는 점이다”(245면)라고 말할 때, 저자도 이미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심리적인 ‘문학의 위안’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저자가 애당초 그것을 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위안’의 역할을 하는 게 있다면,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을 빌린, “망망대해 같은 무(無, Nichts)의 바다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고 해도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실험을 멈출 수는 없지”(309면) 않느냐는 격려(?) 정도에서일 것이다. 3부에는 그런 격려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글들이 주로 실린 것도 사실이나, ‘문학의 위안’은 ‘문학의 소임’을 다한 다음에나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만일 여기에 어떤 진실이 있다면, 정지창의 『문학의 위안』은 독자들에게 의외의 위안을 줄 것이다. 문학은 현실의 도피처가 아니라, “험난한 구도의 천로역정에서 작가가 사랑과 고통의 언어로 지어놓은 간이 대피소”(5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한걸음 더 나아가는 ‘소임’을 뿌리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