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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정아 金正雅
소설가. 소설집 『가시』 등이 있음.
padosoridul@gmail.com
선우은실 鮮于銀實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나를 망친 것, 내가 망쳐야만 했던 것, 그리고 나: 이주란론」 등이 있음.
eunsil_official@naver.com
신철규 愼哲圭
시인.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음.
12340158@hanmail.net
신철규 안녕하세요. 지난호에 이어 문학초점 사회를 맡은 신철규입니다. 초대손님으로 김정아 소설가와 선우은실 평론가를 모셨습니다. 마침 꽃의 계절에서 잎의 계절로 넘어가는 시기인데, 생명력 움트는 따뜻한 시기에 만나 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김정아 네, 날씨가 참 좋아요. 막 돋아난 잎의 여리여리한 연두색을 좋아하고, 그 연두색의 채도가 하루하루 덧입혀지는 것이 느껴지는 이 계절도 정말 좋아합니다. 한편으론 이 화려한 봄날에 황사와 미세먼지가 사람들을 암울하게 하고,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고, 4·16과 5·18이 있어 마냥 즐거워할 수만도 없지요. 복합적인 생각을 하며 왔습니다.
선우은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평론을 하는 선우은실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갈 일이 좀처럼 없는데, 오늘 초대해주신 덕분에 계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처럼 문학 얘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돼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혜경 『사소한 그늘』(민음사)
신철규 좌담을 열 소설은 이혜경 장편 『사소한 그늘』입니다. 몇년 전 연재되었다가 이번에 출간됐습니다. 오랫동안 에꽈도르에 살던 작가가 한국에 돌아왔음을 알리는 기념작이자 복귀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작품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세 자매를 그립니다. 각자의 성격과 선택에 따라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면서, ‘그늘’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삶이 또다른 그늘로 이행되는 것을 드러냅니다. 언뜻 도스또옙스끼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구성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정아 바흐의 음악이 수백년 동안 변주되듯이 페미니즘 문학도 이제는 그런 것 같습니다. 커다란 장르를 형성하면서 다양한 방식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 소설은 특히 저하고 멀지 않은 세대의 이야기라 친숙하게 읽혔습니다. 저희 세대와 바로 윗세대는 페미니즘을 처음으로 학습한 경우입니다. 열심히 공부했으나 그것이 자기 삶의 결정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지는 못했다고 고백할 수 있어요. 반면 우리 다음 세대는 페미니즘 유전자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세대갈등도 나타나죠. 엄마 세대에 대해 딸들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혹은 ‘알면서 왜 저래?’ 생각하거든요.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지는 못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작품이 그래서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선우은실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막내 지선은 대략 70년대 초반 생으로 짐작됩니다. 저로서는 60~70년대 생 어머니 세대 이야기로 생각되는데요, 세 자매를 통해 어머니 세대의 ‘K-장녀’가 그려지고 그걸 바라보는 ‘K-장녀’로서의 제가 있다보니 사실 읽으면서는 괴로웠습니다. 꼭 페미니즘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폭력이라는 걸 알 만한 일들이 그려지니까요.
신철규 틀이 잘 짜인 소설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만 해도 그런데, 경-영-지가 사실 예전에 시골에서 여자 이름 붙이는 방식이거든요. 큰 딸은 기쁘다는 뜻에서 경(慶), 둘째나 셋째 딸은 꽃다울 영(英), 막내는 다할 지(至)나 멈출 지(止)를 붙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물들이 어떤 틀 안에서 그려지는지도 흥미로웠습니다. 경선은 아버지에 맞서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과 물질을 중시하는 차가운 인물로서 ‘머리’에 가깝고, 냉정한 사리분별과 현실적인 선택이 돋보이죠. 경선의 머리를 “맹렬하게 쪼아”대는 새(296면)가 중요한 이미지로 나오기도 합니다. 반면 영선은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거나 차라리 그에 순응하면서 긍정성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배’에 가까운, 본능과 육체적인 충동에 충실한 인물로서 “집 안에 그늘이 드리워질 기미만 보이면 영선은 쏟아지는 비를 맞기가 무서워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298면)라는 묘사가 그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지요. 막내 지선은 그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며 현실적인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따뜻함과 차가움, 무름과 단단함, 무심함과 경계심이 공존하며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고 그러면서도 행동하기는 주저하는 ‘가슴’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렇듯 인물이 정형에 들어 있다보니 다소 평면적이라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그들이 각각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선택과 노력을 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김정아 무엇보다 주목된 것은 세 자매가 희한할 정도로 결혼 상대를 함부로 정한다는 점입니다. 영화 「미시시피 버닝」(1988)에 나오는 진 해크먼의 대사, “이런 동네에서 여자들이 누구랑 결혼하느냐 하면, 고등학교 졸업 댄스파티에서 자기를 제일 먼저 웃기는 머저리랑 한다”가 떠올랐어요. 억압적인 가족에게서 떠나는 유일한 방법이 결혼이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그런 선택을 한 세 자매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결혼에도 가정과 사랑에 대한 가부장적 낭만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매 맞는 엄마를 보며 자랐지만 내가 꾸리는 가정은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는 환상과 낭만이 작동하고 있지요.
선우은실 결혼이 이들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고 볼 때, 막내 지선은 언니들과 다르게 ‘이혼’을 두고 고민하며 조금은 길에서 비껴나 있는 인물입니다. 남자친구도 아니던 사람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자기 시대의 맥락을 받아들이되 ‘계속 그 자장 안에서 살기’를 거부하며 장년에 이르러 이혼을 선택하는 지선의 모습은 다른 세대의 삶을 이해하는 단서가 됩니다. 다만 조금 의문스러운 점도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경선, 영선, 지선 각각의 삶에 번갈아 초점을 맞추면서 내포작가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유독 아버지에게 초점이 할애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예컨대 아버지 자신도 많이 맞고 자랐다는 식의 서술입니다. 반면 어머니의 목소리는 완전히 삭제되어 있죠.
신철규 어머니에게 초점을 둔 장면이 없다는 점은 저도 아쉽습니다. 주로 단편적으로만 등장하는데다가 어머니가 방 안에 갇혔던 모습이 회고되는 결말부에서도 얼마나 원초적 폭력에 놓여 있었는지를 암시적으로만 드러낼 뿐이죠. 어머니는 정신적·육체적으로 방 안에 갇혀 있으며 내면의 목소리 또한 드러나지 않습니다.
김정아 와이셔츠 얼룩 때문에 아버지가 크게 호통을 치는 장면을 보면, 어머니는 말없이 손으로 방바닥만 쓸어요. “엄마가 문대는 건 방바닥이 아니라 엄마 자신인 것 같았다. 옷장 구석에서 흔적도 없이 조금씩 줄어드는 나프탈렌처럼, 엄마가 졸아붙고 있었다”(269면)라는 묘사가 인상적입니다. 즉 어머니는 학대 속에서 계속 쪼그라들다가 사라져버리는 인물이고, 그래서 목소리도 지워질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봐요. 한편 여기서 폭군 같은 아버지를 잇는 것이 첫째 딸 경선이에요. 못산다고 동생 영선을 무시하고, 지선의 이혼을 반대하고, 자기 딸을 억압하는 모습입니다. 껍데기일 뿐일지라도 가장 중요한 준거는 가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이 집안에 아들도 둘 있지만, 작가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희미하게 처리하고 아버지에게서 장녀 경선에게로 이어지는 가부장성을 그립니다.
선우은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소설을 읽을 때 드는 고민은, 그 폭력이 실재할지언정 작품에서 그걸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과연 어떤 성취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에요. 경선이나 어머니를 묘사할 때 이들을 헤아리고자 하는 작가로서의 개입이 좀더 있었어도 좋았지 않을까요?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설 속 사건들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 젠더폭력, 스토킹 등 가부장적 폭력에 다름 아니거든요.
신철규 재현의 비중과 윤리의 문제를 제기해주셨습니다. 작가는 지선의 이혼을 둘러싼 자매들 간의 담론 대결을 통해 이 문제를 드러내려 했던 듯합니다. “다들 그런다고 나도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305면)라고 물으면서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입장과, “다들 그러고 사는 거야”(301면)라며 무마하고 억누르려는 보수적·유화적 입장의 충돌이죠. 지선은 “사람마다 아킬레스건”(305면), 즉 고통의 역치와 부위가 다르다며 이를 보기 위해선 고통의 공통감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사실적인 부딪침인데 다만 충분히 발화되지는 못한 느낌입니다. 성장과정에 대한 비중이 크다보니 삼십대에 이른 이들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간소하게 처리되어 있어요.
김정아 이 작품의 작은 구멍은 여성 연대가 없다는 점이에요. 딸들, 특히 첫째 경선과 어머니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거의 없어요. 모녀지간만 아니라 자매들끼리도 소통이 일방적이고 각자도생을 하고 있죠. 바흐의 음악이 우리에게 선물 같은 의미를 띠는 것은 연주자마다 새로이 재해석되기 때문일 텐데요, 다시 말해 창작에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사이를 벌리고 틈을 만들어내려는 노력과 시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여성주의적 글쓰기에 있어서도 적나라한 현실 폭로의 한편에 여성 연대의 가능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견지할 필요가 있어요.
신철규 결말에서 “서로에게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 곳으로”(319면) 향해야 한다며 희망의 여지를 드러냅니다. 제목 ‘사소한 그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가정과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존재는 사실 누구나 겪었을 법한 삶의 굴곡이라는 의미에서 ‘사소하다’고 명명된 게 아닐까 싶었어요. 그러나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외부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지워지지 않는 그늘이며, 이러한 부조리에 더 가까이 관여될 수밖에 없는 여성들 대다수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그늘’이기도 하지요.
선우은실 작가는 어쩌면 이들의 그늘을 ‘사소한’ 것으로 바꿔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개인적 차원에서는 너무 압도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점점 명시화하고 사회적 문제로 만듦으로써 작아질 수 있게 하자는, 어떤 지향성으로 읽어볼 수 있을 듯해요. 좀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요.
김정아 가공된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 많이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야 했기에 작가로서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살릴지 고민되었을 텐데, 실감 있게 와닿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정지아 『자본주의의 적』(창비)
신철규 다음은 정지아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지아의 작품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이 작가가 아주 진지하고 진중할 것이라는 저의 선입견이 깨지는 부분이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정지아는 그간 현대사의 질곡을 조명하며 자본주의적 실존의 문제 및 현실에 천착하는 소설을 써왔습니다. 두분 어떻게 읽으셨는지 말씀 나눠주세요.
선우은실 이 소설집은 자본주의와 계급 문제에 주로 초점화되어 있습니다. 가령 「존재의 증명」에서는 취향만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남성을 통해 자본주의적 허위의식을 겨냥합니다. 가장 흥미로웠던 소설은 경비원 주인공을 통해 중장년층의 노동현실을 그린 「계급의 완성」이었습니다. 지금은 120세 시대여서, 보험을 들 때도 불입 기간을 100세까지 하라고 한다죠. 이러한 수명 연장이 과연 모두에게 희소식일지, 기술과 사회적 인식이 빠르게 바뀌어갈 때 나타나는 속도의 계급적 격차 문제를 작가가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경비원은 자신의 존재감을 되찾으려는 듯 풋케어를 받으러 나서지만 결국 돈 백만원도 못 쓰고 포기합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허황된 일탈을 추궁하고 화내다가도 식당 일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가야 하고요. 똑같은 하층 노동자인데도 아내의 이야기는 덜 주목되고 남편-아내 관계에 대한 전형적인 구도가 활용된 점이 다소 아쉽지만, 이러한 전형성을 통해 오히려 더 생생하게 와닿는 매력도 있었습니다. 유머러스한 서술이 이어지는데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웃어도 되는 문제인가?’ 생각하게 합니다.
김정아 만약에 저라면 경비원이 돈을 전부 탕진하는 쪽으로 썼을 것 같습니다.(웃음)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그게 더 재미있고 극적이니까요. 그런데 현실에 더 있음직한 아버지는 「계급의 완성」에서처럼 비용을 환불받고 마는 쪽이죠. 그래서 ‘아, 정지아 작가는 여전히 꾸밈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소설은 꾸미는 거거든요. 아무리 현실의 질료에 바탕을 두었다 해도 꾸미고 가공해내는 작업을 거치는데, 작가는 이를 최소화하는 선택을 합니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도 하다못해 ‘불문학’박사로라도 돌려 쓸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죠. 어쩌면 ‘빨치산의 딸’이라는 타이틀이 너무 각인되어 있어서 여러 캐릭터를 넘나들지 않게 되는 것일지 몰라도, 자기 삶에서 이미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면서 이제는 너무 정색하지 않는 면이 좋게 다가왔습니다. 오래 입은 바지가 유들유들 몸에 감기고 편하듯이, 작가도 나이가 들면서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달까요.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에서도 처음엔 기자들의 취재 방문을 부담스러워하다가 나중에는 마을 축제처럼 흥겹게 즐기며 끝나잖아요.
신철규 작가의 변신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신선하지만, 새로운 시도의 일환으로 개의 시점에서 쓰인 「아하 달」이나 시골마을의 젊은 외국어 교사들이 등장하는 「애틀랜타 힙스터」 등은 조금 낯설고 혼돈스럽기도 했습니다. 반면 우리가 익히 아는 정지아표 소설들도 꽤 실려 있지요.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데, 이 두가지 경향의 경계에 있는 작품을 꼽자면 「자본주의의 적」입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드러내면서도 그 지향성을 너무 무겁지 않게, 재치있게 풀어냈어요.
선우은실 작가 자신을 화자로 내세우는 것이 소설적 장치이자 하나의 기호라는 생각이 드는데 「자본주의의 적」은 이를 전면적으로 활용한 작품입니다. 화자 ‘정지아’는 삶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친구 ‘현남’의 삶을 들려주면서 자본주의사회에서 과연 욕망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현남과 잘 가까워지지가 않았어요. 이유를 생각해보니 현남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나 욕망에 접근하는 태도에 동의되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저는 현남이 욕망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거든요. 자신이 승인하든 안 하든 생활양식 및 생존방식에서 분명히 자본주의체제 내부에 속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한 사람을 과연 무욕망의 존재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게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적’일 수 있을까 의문이었습니다. 모든 욕망을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결부시켜서 봐야만 하는지도 의문이고요.
신철규 작가가 현남을 자본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우진 않지만 “미니멀리즘”(「존재의 증명」, 222면 외), 즉 ‘최소한의 삶’을 중요한 화두로 제시한 게 아닌가 합니다. 진정한 미니멀리즘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삶, 즉 최소한의 것만을 보고 누리고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는 삶일 테니 자본주의가 두려워할 만한 것 아닐까요. 자본주의체제에선 어쨌든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부의 정도를 측정하고 자기 계급의 위치를 확인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높이 올라가도록 추동하는 것이 바로 욕망인데, 그것이 없는 삶은 어떨지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에요. 그리고 저한테는 현남이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떻게 살려고 저러나, 보고 있으면 아주 답답한 사람인데 정작 현남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요. 그리고 자동차 운전 같은 별것 아닌 일에는 화자를 찬탄하면서 정작 소설 쓰기에 대해서는 “왜 꼭 어딘가 발표해서 누구에게 읽히려고 하는 거지?”(33면) 식으로 반응합니다. 아, 이런 사람 어디서 만난 적 있다 싶을 만큼 현실감 있지 않나요.(웃음)
김정아 현남과 비슷한 인물이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의 알코올중독 사촌동생 ‘기택’입니다. 기택과 현남은 자본주의라는 것 자체가 체질상 안 맞는 사람들이에요. 1998년에 인권운동사랑방 서준식 대표와 박래군 활동가 등이 양지마을이라는 일종의 부랑아 시설을 급습해 수용인들을 구출한 적이 있어요. 한국 인권운동사에 전무후무한 일이고, 이를 통해 수용시설의 반인권적 행태가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오면서 가게에 잠시 들렀는데 그중 몇명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소주를 한병 사서 맥주컵에 따라 단숨에 마셔버렸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박래군씨를 찾아온 이들의 용건은 물론 소송이 어떻게 되어가냐 묻는 것도 있지만, ‘이만원만 줘’였습니다. ‘이만원 주면 뭐 할 거야? 밥 사 먹어야지 술 사 마시면 안 돼’ 하면서 번번이 주게 되었지요. 대부분은 술로 돌아가셨어요. 이 자본주의 경쟁사회와는 맞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기택을 보면서 우리가 타인의 삶이나 고통에 대해서 술 끊어, 담배 끊어, 염려하고 요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신철규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타인에 대한 그런 인식론적 장벽을 빼어나게 담아낸 단편이지요. 한편 「검은 방」은 아흔아홉살 노모의 이야기이자 여성서사인데요, 이처럼 깊숙하게 파고드는 방식이 정지아 소설의 본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단편에서는 자기를 얼마간 희화화하면서 나를 ‘빨치산의 딸’로만 규정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면, 「검은 방」은 지워버릴 수 없는 자신의 어떤 기원을 보여주고 있어요.
선우은실 작가의 아이덴티티가 반영된 작품이라 짐작하며 읽었습니다. 자전적으로 읽힐 뿐 아니라, 단편들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특정 인물의 맥락이 여기서 주요하게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빨치산’이라는 낙인을 지고 살아가는 아흔아홉살 여성의 회고이면서, 자신의 사상적 낙인이 어떻게 여동생이나 딸 등 다른 가족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화자의 삶과 자의식의 구성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역할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복잡한 마음이 되기도 했습니다.
김정아 정지아 소설은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면면이 파고들면서도 그 방식은 장황하지 않습니다. 가령 지금 사회에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잖아요. 공무를 처리하려면 신분증이 있어도 지문을 추가로 대조해야 하는 식이죠. 인권활동을 하면서 이러한 정보인권 문제를 많이 제기했는데, 「존재의 증명」에서는 주인공이 자기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CCTV를 통해 집을 찾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냅니다. 즉 현존 그 자체가 아니라 재현과 등록된 것을 통해 ‘존재의 증명’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죠. 이처럼 사회적인 문제의식이 간명한 서사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이 이번 소설집의 뛰어난 미덕이고 중요한 성취라고 생각됩니다.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자음과모음)
신철규 다음은 이현석의 첫 소설집입니다. 등단 이후 부지런하게 작품활동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고, 첫 소설집임에도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졌습니다. 각 단편의 주제들이 동시대의 사회적 문제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이현석 작가는 의사이기도 한데, 의사로서의 전문지식을 단순히 전시하거나 소재주의로 끌어다 쓰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와 연결시키는 서술방식이 돋보입니다.
김정아 임신중지, 재소자 인권과 이중처벌 문제, 산업노동자의 재해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쉽지 않은 주제인데도 측면으로 돌아서 가거나 부연을 덧붙이는 방식 대신에 정면을 응시하는 태도를 보여요. 마치 칼을 잘 쓰는 외과의사 같다는 느낌, 정공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한테도 좋은 레퍼런스가 되었습니다.
선우은실 이 소설집의 키워드로 ‘당사자성’을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의사의 시선일 때 더욱 잘 보이는 문제들을 소설의 형식으로 재구조화할 때 작가로선 여러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지요. 당사자성 자체를 강조하거나 혹은 완전히 감추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작가는 의사로서의 당사자성을 버리지 않고, 그렇다고 내세우지도 않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낙태죄 위헌 소원을 배경으로 한 표제작을 보면, 세미나 모임에서 의사들이 임신중지와 관련된 칼럼의 초고를 함께 검토하는 장면이 나와요. “반대 세력에게 역이용될 소지가 있어 지웠다”(50면)라는 식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예상하고 논의하는 대목인데, 이런 장면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소설 쓰기 태도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신철규 기존의 당사자성 글쓰기가 현실과 허구의 경계 및 그 권위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의미 부여되어왔다면, 최근에는 당사자성 글쓰기의 한계나 재현의 윤리에 대한 질문들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현석 작가도 이를 집중적으로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표제작은 임신한 여동생 ‘해수’와 임신중지권리를 위해 싸우는 ‘희진언니’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 ‘지수’의 서술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임신과 임신중지 문제는 많은 여성들의 존재론적 난관이라고 생각합니다. 2019년 4월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지만, 실제론 “그거 진짜 순간이고, 암것도 아니었다”(42면)라는 경험적 사고와 배아도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해야 할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들이 착종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임부인 여성에 대한 배려나 주체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려를 찾기 힘들기도 하고, 어떤 심리적·물질적 단절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작가는 “배아마저 아기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습적인 재현이 아닌지, 그렇게 관습적으로 재현되는 음울함만이 임신중지에 연결되는 유일한 감정이어야 하는지”(52면)라는 말처럼 틀에 맞춰진 재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목소리를 냅니다. 그 고민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를 ‘당신’이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경어체로 서술하는 태도로도 드러나는데요, 당신을 ‘없는 것’으로 생각하려 했던 자신의 마음이 뒷목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47면)으로 재현되기도 하지요. 동생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행복을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음을 전하는 점도 인상적이었어요.
선우은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는 환자의 이야기를 SNS에 올린 의사를 등장시켜 글쓰기의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그 반영이 어느 정도로 타인의 삶을 침범하거나 훼손하지 않아야 하는지가 문제로 남습니다. 이 단편에서 환자 이시진은 이혼 후 게이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환자의 동생으로서 보호자를 자처했던 이가 사실은 그의 애인이었음이 밝혀지며 소란이 발생합니다. 동료의사인 ‘수연’은 이 사연을 SNS에 올리며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 개선을 촉구하고, 주인공 ‘나’는 당사자의 동의 없는 게재에 분노합니다. 자신 역시 이시진과 그 애인을 보며 소설을 구상했고, 그 자신도 수연의 동의 없이 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도 피하지도 못하면서요. 이처럼 문학에서 수행코자 하는 ‘우리의 이야기’에서 ‘우리’란 과연 누구이며 어디까지일 수 있는지를 당사자성의 문제를 경유해 고민하게 만드는 태도가 소설집 전반에 드러납니다.
김정아 권리운동에서도 당사자주의를 오류 없이 수행하기란 참 어려운 거거든요. 당사자주의라 해서 당사자만 옳고 그만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죠. 그것을 이슈화하고 정치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윤리적 선(善)을 위한 어떤 도그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은 굉장히 다양한 면을 가진 존재인데 당사자를 단순하고 단일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게 되죠. 그래서 당사자주의를 제대로 성취하려면 우리가 더듬더듬 조심히 가야 하는데, 그 ‘더듬더듬’을 잘 보여주는 작가 같아요. 구금시설 재소자 문제를 다룬 「참(站)」의 경우에도 남다른 윤리의식을 보여줍니다. 아동 강간범으로 수감된 이가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했다는 의혹을 파헤치는 이야기인데 ‘징벌방’ ‘계구’ ‘검방 의무과장’ 같은 교도소 용어들을 조합해 사회적 논의가 뜨거운 가해자 인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흔히 말하는 ‘피해자다움’과 ‘가해자의 전형성’은 어쩌면 동전의 양면 아닐까요. 누구도 완전히 절멸당할 수 없는 인권이 있다면 그 ‘누구’에는 범죄자도 포함됩니다. 형사절차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미란다 원칙도 미란다라는 강간범의 인권 문제에서 비롯되었죠. 이 작품은 가해자의 인권이라는 해묵은 아포리아를 가감 없이 다룬 수작으로 리얼리즘 소설의 진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철규 한편 소설집 맨 마지막에 ‘참고한 내용과 약간의 덧붙임’이라 해서 자신이 소설을 쓰는 데 어떤 과정을 거쳤고 어떤 공부를 했는지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창작경위서’라 할 만한데, 인물 설정부터 목소리를 어떻게 재현해낼 것인가 아주 고민하는 작가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화자들이 모두 경계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윤리와 정체성 문제를 탐구하는 소설이 어떤 판단과 응징의 서사로 흘러갈 수 있는 것과는 달리, 화자는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어떤 믿음에는 맹목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고, 모든 결함에는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불가항력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인물이 가진 힘이 엿보여요.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독단적인 선택과 진실의 왜곡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한쪽 문이 닫혀야 반대쪽 문이 열”(257면)리는 ‘참(站)’의 공간은 윤리적 정당성과 진실 사이에 서 있는 존재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지요. 참(站)이라는 한자가 ‘우두커니 서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담고 있어요.
김정아 그런데 경계에 서 있다 해서 작가가 열린 결말을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소설을 통해 작가가 전하려는 말이 있고, 그것을 마지막에 분명히 적더라는 것이지요. 「다른 세계에서도」를 보면 태어나지 않은 동생의 아기에게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한다고,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당신이 이해”(70면)해달라고 적고 있어요. 임신중지를 둘러싼 여러 문제를 둘러서 묘사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작가 자신의 견해가 드러납니다.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도 상당히 세련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광주항쟁을 다룬 「너를 따라가면」의 마지막은 헌혈 장면인데, 자칫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상투성과 연결될 수도 있는 지점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선우은실 한가지 더 주목되는 것은 청년세대를 그리는 방식입니다. 화자들이 비교적 젊은 세대인데, 따지고 보면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들이에요. 열심히 노력하고 주변에서 보탬도 받으며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지만 ‘1군’을 지향하지는 않습니다. 세대 담론에서나 청년을 형상화한 소설에서 청년들은 대상화되기 쉽고 여러 구체적 지점들이 소거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현석 소설은 ‘2군’에 머무르기로 한 청년들의 선택을 대상화하거나 일반화하지 않고 그려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그중 「컨프론테이션」은 ‘2군’으로 대변되는 청년세대 감각 안에서도 각자의 사회적 입지나 정체성에 따라 비대칭적으로 가로놓여 있는 조건들을 꼼꼼하게 포착하고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단편에는 미래가 유망한 변호사 커플이 등장하는데요, 그들 중 한명만 기업체에 스카우트될 상황에 놓이자 남자친구인 한서가 정민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고자 합니다. 한서는 굳이 무리해 경쟁하지 않는 ‘차선’을 택하는 듯 보이지만 그러한 태도로 인해 정민의 삶은 양보받아야만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이 되어버립니다. 청년세대 안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른 영향력을 형성하는지까지 숙고하게 하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김정아 화력발전소의 산업재해 이야기가 등장하는 「눈빛이 없어」는 과거의 노동소설에서 못해낸 것들에 대한 형식적인 모색을 한 것 같아요. 노동자의 몸이 기계에 빨려들어가 부서지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던 작가가 어떤 형식의 소설을 쓸지 고민을 많이 한 끝에 내놓은 소설이구나, 깜짝 놀랐어요. 깜냥이 넓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도 기대가 됩니다.
장수양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문학동네)
신철규 이제 시집 이야기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장수양 시인이 젊은 시인으로서의 자기감각을 잘 드러낸 첫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읽기에 따라 어렵기도 하고 많이 공감될 수도 있었을 듯한데, 두분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김정아 4차원인 사람을 친구로 사귀었을 때 그가 하는 수다를 듣는 것 같았어요. 때로는 중얼거리는 수다, 때로는 속사포 같은 수다, 또 어떨 때는 뭔가를 끄집어내서 한마디씩 던지는 말 같은. 친구가 된다는 건 가까워지는 거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건데, 상대의 우울한 면을 툭툭 건드려서 별것 아닌 일로 만들어주는 듯 다가오더라고요.
신철규 다른 식으로 설명하면 저는 그 친구와 마주 앉은 것이 아니라 옆에 나란히 앉아 얘기를 듣는 듯했습니다. 어디 방죽 같은 데 걸터앉아 먼바다를 보고 있는 거죠. 얼굴을 보고 눈을 마주하면 오히려 꺼내어지지 않는 내밀한 고백이랄까요. 아주 엉뚱한 친구인데, 함부로 판단받고 싶지는 않아하는 단호함이 담긴 언술도 눈에 띄었습니다.
선우은실 장수양을 비롯한 젊은 시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위치감각 같습니다. 초반에 실린 「사람들이 떠나기를 좋아하는 세계」는 “위치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라고 시작돼요.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은 위치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자세를 의식”하고 “위치를 가늠”하고 “걸음을 새로” 재지요. 이 시집의 화자들이 모든 일에 대해 별것 아닌 듯 짐짓 가볍게 말하는데, 그 까닭을 지금의 현실과 연결 지어보면 사실 너무나 힘들어서, 자신이 이 세계에 위치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일 거예요.
신철규 형식적으로는 여러가지 문법적인 결함들을 활용한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목적어와 서술어를 일부러 어긋나게 한다든지 대화를 엇갈리게 하는데, 이것이 일종의 혼자 놀기나 연극처럼 다가왔어요. 「같아요」는 “미네”와 “오리”의 대화로 이루어지고, 둘 사이의 대화는 중간중간 명사들의 교환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음절수가 비슷하고 유사한 음가를 가진 낱말들이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인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문화적 체험과 세대적 고민을 같이하는 존재들끼리 가능한 대화일 테지만, 제목 ‘같아요’는 단순한 일치만이 아니라 ‘다르면서도 비슷함’을 뜻하기도 하고 어떤 일에 대한 추정이나 짐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 속의 두 인물도 그런 복잡하면서 단순한 관계에 놓여 있고, 시집 전반에 이처럼 독백도 대화도 아닌 어떤 경계의 발화들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선우은실 「같아요」는 다이얼로그를 풀어놓은 것 같은 긴 시죠. 화자들이 서로 ‘티키타카’가 되는 것 같지는 않고, 관객을 향해 독백을 들려주는 것처럼 느껴져요. 화자는 지금 감정을 줄여서 말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하나의 무대를 설정하고 그 위에 올라 감정을 정제한 채 독백을 한다고 보였습니다. 또 이 시에서는 “람들이 우리를 찾아내”라거나 “람들이 보았다고 믿는 것” 등 ‘람’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시인은 이 ‘람’이 의문형 종결어미라고 주석까지 달아두었는데, 실은 ‘사람’을 계속 떠올리게 하는 언어유희입니다. ‘이게 뭐람?’ 하고 핀잔을 주는 듯한 가벼운 언술이 ‘사람’과 연결되어 사람을 너무 무겁고 버거운 존재가 아닌, 한결 가뿐하게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게 합니다. 나아가 사람은 다시 ‘사랑’으로 전유되는데요, 시인에게 언어유희가 정말 중요한 것이 글자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도 많은 의미가 파생되지요. 람들이 “내 발치에, 머리맡에” “가만히” 있었고 그것이 “제각기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때, 사랑이란 가만히 있어주는 일이며 거기에 상당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헤아려보게 됐어요. 시집에 흐르는 시인의 태도란 이처럼 가만히 있기 위해서도 애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것과 관련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아 저는 「트루먼쇼 증후군」이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뭐 하러 길게 소설을 쓰는가’ 하는 생각이 들죠.(웃음) “김상은 트루먼쇼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길지 않은 시 속에서 한 사람의 생애를 압축해 들려줍니다. 세대의 감수성과 취향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라 더 와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어진 삶’과 ‘갈망하는 삶’의 대비를 정교하게 이루어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어긋나는 지점에서 불안과 소외를 느끼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한데요, “김상”의 삶은 전세계에 생중계되는 운명이라 타인의 욕망이 내 생에 투영된 채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진실로 갈망하는 것은 “퀼트 담요”가 깔린 “나무 지지대로 만든 텐트”에 숨겨둡니다. 소망했으나 낳지 못한 “복숭아색 뺨을 가진 딸”도 텐트에 떨어지는데, “텐트 속으로 처음 보는 몽롱한 얼굴의 갓난아기가 포대기째로 툭 떨어졌다.”로 시가 끝나면서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8)처럼 시간을 거스르는 기법인가 싶은 흥미를 느끼게 했어요. 마침내 그는 갈망하는 삶을 이제 다시 살게 된 것일까요? 「트루먼쇼 증후군 2」를 기대하게 합니다.
신철규 사랑이라는 중요한 화두가 제시됐는데, 시인이 사랑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좀더 이야기 나눠볼까요. 「여는 시」에는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사랑을 기다”리는 화자가 등장합니다. 제목만 보면 맨 앞에 실려야 할 시인데 1부 중간에 실린 까닭은, 연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고 그 기다림이 또 어떤 것을 열게 하기 때문 같습니다. 「사람행」에도 그러한 경로 위의 존재가 보입니다. 사람이 되어가는 일은 여행과 비슷하고, 사람이 되어가기까지 우리는 어떤 과정 중에 있는 존재로서 여러 일들을 겪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경험들을 스스로 체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언니의 밤」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사랑하는 일에 대하여”라는 구절이 나와요. 무엇도 완결되지 않았다는 점, 이미 완성된 무엇을 고수하며 버티는 것과는 다른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선우은실 「여는 시」에서 “生을 부르면 죽음이 온다” “사람을 부르면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대목도 삶이라는 것이 굉장히 역설적이고, 하나의 막을 기준으로 서로 반전되는 것들이 연결되어 흘러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 「미치」의 주인공 미치는 “실수로 유혹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미치가 사람들을 유혹하는 건 “작자 미상의 사랑을 갖고 있”어서, 즉 사랑을 계속 주고 싶고 갈구하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런 미치도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이기 위해 감내하는 어떤 것들이 있을 텐데, 그것은 누군가 물어야 비로소 확인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치는 누군가 “미치, 아프니?”라고 물었을 때 비로소 “응”이라고 대답하고 “양 손바닥에 얼굴을 깊이 파묻고 돌아서 울”게 됩니다. 즉 시인의 중요한 지향점은 설령 어떤 존재가 “그대로” 거기 방치되어 있어도 상관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해도 옆에서 힘드니, 슬프니, 아프니 하고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는 점 같아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말이 계속 소환되더라고요.
김정아 시인에게 사랑은 움직임, 즉 동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읽혀요. “끈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는데 누군가의 대답이 “사랑이에요.”였어요.(「미소」) 끈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물건의 움직임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훔쳐보는 눈, 그 두근거리는 마음이 아닐까 상상하게 되네요. 「사랑들」에서는 “한 번쯤 폭발했으면!” 하는 “불온한 마음”을 실토하면서 “마주보고 싶다 …… 왜 멀리 있어? 하필 사람이어서 날아갈 수 없어”라며 그리움을 토로합니다. 그리움은 드디어 폭발하는데 그게 물이라면 분수처럼 솟아올라 누군가에게 물방울 하나 튀어 갈 수 있기를 바라는, 그래서 “나의 조금은 언니가 가질 수 있겠지 그럼 난 조금도 다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마음(방)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이고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방)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요, 전부는 바라지도 않으니 “조금”이라도 가져가줬으면 하는 소심한 사랑의 바람이 움직임과 사물들에 투영되어 있었습니다.
신철규 그런데 저로선 시집 전반에 더 깊이 파고들어 동감할 만한 부분이 적은 듯했습니다. 시적 상황과 화자의 감정적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급작스러운 발화의 전환이나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충돌이 곳곳에 있다고 생각됐어요. 여러 시에 걸쳐 등장하는 소설, 만화, 영화, 게임 등 다채로운 문화적 기표들이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편집된 아름다움’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자기 세대의 취향과 감수성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달까요.
선우은실 대표적인 시가 「플라스크 속의 작은 인간」인데, 이 시 제목은 일본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의 캐릭터인 ‘호문쿨루스’의 별명이기도 합니다. 시에서도 주석으로 이 만화를 언급하고 있으니 연관관계를 좀더 적극적으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만화는 저희 세대에선 유명하고 저 역시 무척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세계 안에서 자아의 위치를 어떻게 가늠해볼 수 있는가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작품이에요. 결국에는 거시적인 의미로서의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존재해야 함을, 즉 그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증하는 것으로 관계돼 있다는 것이 큰 메시지입니다. 이 만화의 주된 내용은 두 형제가 서로의 몸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인적 목적은 종래에는 신의 세계와 대립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즉 개인이 자기 자신이기 위한 일이란 곧 세계와의 대립이자 교섭이 되는 셈이지요. 장수양의 시가 그러한 큰 주제의식을 낱낱이 드러내진 않지만, 세계에서의 자기 위치성과 사람, 사랑을 주요한 키워드로 삼아 비슷한 감각을 가져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기조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b)
신철규 다음은 기술 또는 기술자의 의미를 중심으로 다룬 조기조의 시집입니다. 시인의 세번째 시집으로, 시적 장치라고 할 만한 것들을 많이 쓰지 않으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시들이 엮였습니다. 소박한 작법을 일궈나가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자기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지를 고민하고 있음이 전해집니다.
김정아 ‘노동자 문학’을 하셨던 분인데 이번 시집에는 노동자보다는 기술자가 주요하게 등장합니다. 이때 기술자란 전문가와는 좀 다른 개념인데요, 살다보면 누구나 기술 한두개는 가지게 되잖아요. 하다못해 버티는 것도 기술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삶의 노하우를 시인은 기술이라 칭하는 것 같아요. 다만 모든 기술이 좋은 것은 아니고 안내견과 동반한 시각장애인에게 지하철 자리를 양보하는 「반려의 기술」이 있는가 하면 “염치없이 챙기기만 하는” 「세습의 기술」 같은 것도 있죠. 이처럼 삶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여러 기술과 기술자를 통해 시인은 노동과 자본의 대립, 노동자의 해방성 등 자신의 문제의식을 계속 견지해간다는 생각입니다.
신철규 전문가가 원리를 학습해서 익힌다면 기술자는 오랜 시간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가며 직접 숙련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술자가 등장하는 시간」에서도 “컴퓨터가 고장일 때/보일러가 자동차가 멈췄을 때/당신은 기술자를 부른다”라고 해요. 기계와 가장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던 사람,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기술자라는 점을 드러내주죠. 1부가 이처럼 공장과 노동에서의 기술을 말한다면 2부와 3부에서는 삶 전체를 무대로 해서 인생의 기술로 은유됩니다. 은유가 이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 이것이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 이것과 저것을 겹쳐놓는 것,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유사성을 떠올리고 밝혀내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각 체계 사이의 교환과 소통에 대한 열린 시선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동과 삶, 그리고 현실이 하나로 얽혀 들어가려는 것을 통찰하려는 자세가 시집의 곳곳에서 보입니다.
선우은실 1부의 마지막 시 「기술」에서 “노동을 견디는 기술”까지 말하는 것을 보고 탁월한 감각을 느꼈고 2021년에 이런 시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이 동시대성을 얼마나 담지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어요. “때론 먹을 시간조차 없었던/컵라면”을 이야기하는 「기술자의 가방」은 구체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하면서 의미있게 다가온 반면, 「바이러스와 친구 신청」 같은 시들은 좀 아쉽게 여겨졌습니다. “나보다 약한 사람은 건들지 말라고 우리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엔 가지 말라고” 하는 구절에서 일종의 시혜성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코로나19는 최근 작가들에게 중요한 화두 중 하나고, 팬데믹 시대의 불행이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은 현실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우위에서 바라보는 듯한 태도는 경계해야 할 것 같아요.
김정아 「국가기능사 불량 사건」은 내공 있는 노동자 시인이라서 쓸 수 있었던 시가 아닐까 합니다. 기능사 자격증을 따고 공장에 취업한 청년이 자기 일당보다 세배는 비싼 나사를 잘못 깎는 실수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흐름이 간결한 문장 속에서 리듬감 있게 드러나는데다가 현장실습 고교생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죠. 인권단체에서 현장실습 노동환경을 많이 조사한바 실제로 노동착취가 너무나 심각해요. 김용균씨의 죽음도 그 연장선에 있고요. 그처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 노동자들이 있는데, 사회적·국가적 관심은 고3 수험생과 대학입시에만 쏠리곤 합니다. “친구들의 대입수능고사가 일주일 연기되었다는 뉴스를 듣다 스르르 잠이” 드는 청년 노동자의 삶을 그리면서 그 처지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준 시예요. 노동자 문학의 유산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철규 노동 문제를 청년노동으로까지 확장해 살필뿐더러 시인이 직접 판단을 내리지 않고 거리를 둠으로써 더 생생한 효과를 낳았다는 생각입니다. “기계의 매력은 그런 것이다/피로를 모르는 근면한 기계/반성을 모르는 성실한 기계/모순을 모르는 순수한 기계”.(「기계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기계의 반대편에 노동자(인간)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힘겨움을 몸소 겪고 자기의식을 가지고 사리를 분별하며 복잡한 모순덩어리로서의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적 발견일 것입니다. 한편 이 시집에서 기술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정치라 할 수 있습니다. 기술이 인간과 세계의 소통이라면, 정치는 일종의 구획 짓기로 상징돼요. 「벌목의 정치」를 보면 어떤 나무를 베고 어떤 나무를 살릴지를 결정하고, 공간을 지배하고 배치하는 정치의 작동방식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선우은실 김정아 소설가의 단편 「마지막 손님」(『가시』, 클 2017)도 그러한 기술과 정치의 대비를 잘 그리고 있지요. 국숫집 주인이 철거 용역에게 국수를 팔게 되는데, 결국엔 그 용역이 국숫집도 철거할 거라는 아이러니한 현실이 같이 놓여 있습니다. 식당 주인으로서 국수를 만들어 파는 것이 기술이라면 그것의 온당성이나 역사성과는 별개로 그 ‘국수 판매’가 어떻게 정치적인 것에 연루되는지를 드러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정아 아, 제 소설을 읽었어요?(웃음) 그런데 이 시집의 아쉬움을 꼽자면 기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기계와 식탁」 「기계는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등에서 기계의 노동에 대한 사유의 단면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좀 오래된 사유예요. 우리 종(호모사피엔스)의 다음 종은 과연 무엇일까요? 과학기술과 관련해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질문 중 하나인데, 노동자의 미래도 그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 있습니다. 한가지 더 아쉬운 점은 「우리가 언제 그랬을까」에서 표출된 여성주의에 대한 인식이에요. 80년대 노동자대회에서 만난 여성(“아가씨”)에게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워 “뭐라도 좀 바르시지 그랬냐고 한 마디 건넸다”가 “부르주아 같은 놈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은 화자가 20년 후 “조그만 호프집 주인이 된 그녀를” 다시 만났는데 그때 이야기에 “배꼽을 잡”으며 웃는 그녀의 모습이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주의적 관심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서사는 오늘도 뜨거운 현장의 목소리일 것인데 이것이 추억담으로 끝나버린 것이 실망스러웠습니다.
선우은실 이주노동자가 등장하는 시에서는 경계와 혐오, 배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엿보이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그러한 인지가 작동하지 않는 느낌이에요. 「타자의 기술」에서 보면 “외국인”과 “내국인”에 대한 교차되는 서술이 “난민”에 대한 문제의식으로까지 확장됩니다. 물론 여기서도 다소 손쉬운 연민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은 ‘문제적 현실’을 바라보며 발견되는 주체들이라 할 텐데 여성의 경우는 다소 예외적입니다.
신철규 네, 그러한 아쉬움이 있고, 노동과 기술의 문제를 보편적인 삶의 진리로 확장하면서 때로 비약이 드러나거나 흥미가 떨어지기도 하지요. 이러한 시적 긴장의 약화는 어쩌면 시인이 지금은 노동현장에서 떠나 있기 때문일 거라는 짐작도 되고요. 다만 우리가 어떤 부조리나 모순에 대해 개별적으로만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시인은 이 세계가 어떤 체제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지 거시적인 관점을 탐구하는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럴듯하고 화려한 기교가 아닌 정직한 ‘기술’로 쓴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노동시가 귀한 환경에서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거리를 던져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김승희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신철규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김승희 시집입니다. 시력(詩歷)이 길고 연배도 있는 시인이지만, 기발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여전히 활달한 언어유희에서 파생된 위트와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엿보입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인간 혹은 인간됨에 대한 질문, 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 및 성찰이 깃들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선우은실 여성시의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인데, 이번 시집에서도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계급성과 젠더에 대한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삶과 죽음을 경유해 사랑으로 확장되는 지점이 새롭게 느껴졌어요. 어떤 면에서 좀 따뜻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달까요. 또 한가지 특징적으로 다가온 것은, 토마토나 백합이나 마늘처럼 생활에서 볼 수 있는 채소나 식물의 이미지를 많이 활용한다는 점입니다. 인간 존재와 식물의 관계성을 탐구한다는 인상이었습니다. 여러번 등장하는 ‘백합’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 수 있겠는데요, 「백합 자살」에서 “백합”이라는 식물 자체의 특성인 독성은 “인간의 원죄”이자 “조건”이라 할 만한 “나의 들숨은 세상 누군가의 공기를 빼앗고/나의 날숨은 캄캄한 탄소를 배출한다”라는 점과 맞물립니다. 식물을 활용하되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되지요.
김정아 동시대의 아픔을 박아놓은 듯한 시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작은 영생의 노래」에서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은 세번에 걸쳐 죽는대요”라면서 세번째 죽음은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날 때”라고 하죠. 「꽃이 친척이다」에서는 “배가 새고 있어요”라는 구절이 문득 등장하고요. 4·16을 비롯한 사회적 사건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기억을 환기합니다. 일상에서 문득문득 어떤 기억이 손을 잡아끄는 느낌이 들거나 우리를 멈춰 서게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 순간이 그냥 스쳐가지 않게끔 시인이 탁 박아놓는 느낌이었어요. 「피로 물든 방의 론도 카프리치오소」에서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보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할 것 같은데 세상에는 이상하게도 피해자를 더 조롱하고 더 공격하고 더 짓밟는 가해자들이 있다”라면서 가해자에 대해서 거의 이를 갈듯 이야기해요. 가해자의 끈질김, 2차 가해의 문제는 우리가 최근 들어서 많이 경험한 문제인데 시인도 동일하게 겪고 느꼈구나 하는 데서 동질감이 생겼습니다.
신철규 첫 시 「꿈틀거리다」에는 “생살로” 이 세계와 만나고 꿈틀대려는 노력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행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마음”과 비슷하게 「사랑의 전당」에서도 “절벽인데도/한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죽음에 아주 가깝게 있을지언정 영혼의 살아 있음을 온전히 느끼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드러낸 대목입니다. 생살의 꿈틀거림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면서 삶을 향해 전진하는 자세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세계의 모순 속에서 쇠약해가는 신체, 그리고 그 시간들을 그야말로 온몸으로 견뎌내는 노력이 담겨 있어서 1부와 2부의 시들이 좋게 다가왔어요. 반면 관념의 노출이 전면화된 3부와 4부는 좀 아쉽기도 했습니다.
선우은실 명료한 주장이 담긴 시가 많아서 얼핏 단순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3부와 4부를 읽으면서 앞의 시들이 환기되는 느낌이 있었고, 시인의 인식이 메타적으로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반부에서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면, 후반부에서는 그러한 의문들이 대답으로 소급되는 듯해 입체적으로 읽혔습니다. 후반부의 시는 비교적 뚜렷한 주제들로 모아지는 인상인데 그간 김승희 시인의 시적 세계의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을 ‘여성’과 관련한 부분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뉴욕주 어느 시골 우체국에서” 마주한, “기지촌 영어로 불만을 터트리”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젠더와 국적의 교차성을 보여준달지(「그 여자의 랩」) “버려진 여자, 망가진 여자, 살해된 여자들”을 주제로 삼아 예술활동을 하는 “신디 셔먼”의 작품 세계에 대한 시적 해석을 표현한 시(「신디 셔먼의 여자들」) 등이 그렇습니다. 여성과 관련한 주제를 시적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김승희 시인은 비교적 뚜렷한 입장을 취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여성’에 대한 명징성이란 그 자체로 의심되고 검토되어야 할 사고이기도 하지요. “진심은 복잡하고 입체적인데/진심을 감당하기엔 내내 모가지가 꺾이는 아픔이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표제작의 구절이 진실에 접근하는 일의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이 시편이 앞부분에 위치해 있어 시집을 끝까지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어보면 오히려 뒤에서 앞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흐름이 발견되기도 하고요.
김정아 표제시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은 저한테는 조금 어렵게 다가왔는데요, 나쁜 의미로서가 아니라 질문을 던져준다는 점에서요. “내가 들킬 것만 같아/진실한 사람 앞에선 늘 불안하다”라는 구절에서 시인이 진심과 허심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어떤 상황과 판단에 대해 그것이 과연 진실일까 탐구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관계를 형성하거나 사물과 상황을 인식할 때 내가 얼마나 진실에 다가가고 있는가, 내가 찾는 게 정말로 진실인가, 저 사람의 진심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잖아요.
신철규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 시인의 특징적인 발화인데, 때로는 낯설고 조금 어렵게 읽히기도 할 것 같습니다. 표제시에는 인간됨 또는 인간에 대한 질문도 담겨 있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은 일을 겪었다 해도 알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본심에 대한 무서움이랄까요. 자기 눈앞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입체적인 진심과 그 무게가 그려져요. 어쩌면 이 시집에서 중요한 감정 표현을 담은 형용사로 ‘무서움’과 ‘무거움’을 들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2월에 동백꽃은」은 삶의 일회성과 순환을 보여주면서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무서움’, 자신의 삶을 끝내 지켜내려는 존재의 고투에서 비롯되는 ‘무거움’이 잘 드러나 있어요. 출발은 했지만 도착하지 않는 삶, 기적이 없는 삶, 그리고 죽음에 도착해야만 “무궁의 미로”(「공항에 가서 보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은 무서움과 무거움의 느낌을 동반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포스트잇’이 등장하는 시들도 많은데 어떻게 보셨나요. 저는 세월호참사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 사건 때 벽에 붙는 포스트잇이 상기되기도 했습니다.
김정아 최근 우리가 많이 공유한 경험이 포스트잇을 통해 죽은 자에게 인사를 전하는 일입니다. 시집에서도 포스트잇이 죽음과 많이 연결돼요. 여기서 세대적인 특성도 나타난다고 생각하는데, 종이에 적는 일은 아날로그적이잖아요. 더욱이 그게 포스트잇이기 때문에 나부끼는 편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이미지를 죽음과 연관 지어 의미있게 차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철규 「절벽의 포스트잇」을 보면 “잠깐 손을 맞잡은 두개의 물방울 같은 포스트잇”이라고 합니다. 서로 만나긴 했지만 그 시간이 “잠깐”이라는 것은 언제든 다시 떼어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에 존재론적인 사유가 담겨 있는 듯했어요. 한편 노회찬 의원의 죽음을 담은 「작별의 포스트잇」에서는 포스트잇 문구마다 “(나 여기 있어요)” “(내가 여기 있어요)”라는 말이 답글처럼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내가 다른 곳도 아닌 ‘여기’ 있다는 삶의 두 측면을 언어의 변주를 통해 드러냅니다. “아픈 사람은 아픈 곳만 생각한다”(「‘콩나물을 길러라’ 포스트잇」)라고 할 때, 시인은 이 아픔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현실과 밀착되어 있고, 여성을 비롯해 아픈 이들에게서 튀어나오는 말들에 더 가까이 파고들어요. 관념적·관조적 태도로 흐르지 않기에 시적 긴장이 여전하다고 생각됩니다.
김정아 현미경처럼 세상을 들여다보려는 태도가 느껴졌어요. 「나이아가라폭포」에서 “그래, 우리는 모두 타이타닉호에 예약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체념으로 흐르지는 않거든요. 오히려 현실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것들을 놓치지 않고 낱낱이 기억하려 합니다. 예컨대 「진혼의 다리를 건너는 봄에 빨간 사과의 이름을 부르다」에서도 “홍로, 홍옥, 국광”부터 온갖 사과의 이름을 다 등장시켜요.
선우은실 그 시의 마지막 문장은 “이름 모르는 빨간 사과에 이름 모르는 사랑을 걸고 싶다”라는 것이에요. 시집 전반에 “이름 모르는” 존재들에 대한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이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이방인으로 여기며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고, 다만 시선을 주고 마음을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더불어 예술가들의 작업이나 전시를 토대로 여성성을 이야기하는 시들도 눈에 띄었는데요, 최근 여성시에서 많이 시도하는 기법이지만 김승희 시인은 그 예술을 빌려올 때에 어떤 낭만성이나 숭고함을 꺼내들지 않습니다. 「분만에 대하여」는 “2018년 4월 뉴욕 MoMA에서/‘On My Birth’라는 제목의 카르멘 위넌트의 사진전을 보았다”라고 시작하는데, 1차 원본에 대한 시인의 후기이자 2차 창작이라고 해야 할 이 시에서 시인은 분만에 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딱 생활의 감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들이 재미있게 읽히는데, 화자는 지금 ‘사진’을 보고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분만의 현장성’을 보는 거지요. 호흡을 하고 아이를 밀어내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숭고하다기보다는 그야말로 ‘급박함’을 느끼게 합니다.
신철규 시인은 “자전을 하면서 공전도 하는 그런 삶”(「감자꽃이 싹 트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나 혼자 자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것들과 함께 공전해야 한다는 접근을 통해, 자연의 거대한 중력과 시간의 끌어당김을 느끼게 해요. 그리고 삶의 완성은 결국 시간의 거대한 질서에 몸을 담그는 것임을 우리의 소소한 일상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아주 짧지만 빛나는 순간, 그런 찰나의 아름다움까지 포착한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긴 시간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선 생각지 못했던 방식의 읽기를 경험해 더욱 즐거웠습니다. 두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우은실 해가 무척 좋은 날에 좀 걷기도 하고 작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좌담에 참여한 각각의 개인이 자신을 정체화하는 방식에 따라(가령 저의 경우 평론가이면서 여성이 되겠네요) 동일한 장면을 각기 다른 질문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정아 저에게는 실로 오랜만에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자리여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준비하면서, 이런 말은 꼭 해야지 담아두었던 대목들을 풀어낼 수 있어 행복했던 것은 물론이고요, 혼자서는 그 진의에 다가서기 힘들었던 글들도 함께 읽어서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궁금증을 자아내 언젠가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혼자서는 선뜻 들어가지 못했던 길모퉁이 술집에서 반가운 사람들과 즐겁게 한잔한 기분입니다. 정겹게 이야기해주신 두분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2021.4.20.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