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촛불 5년, 새로운 진전을 위하여
|대화| 2022 대선, 대전환의 과제 ②
촛불혁명의 현재와 촛불정부 2기의 과제
박정은 朴亭垠
참여연대 사무처장. 시민평화포럼 운영위원장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세교연구소장.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변혁적 중도론』(공저),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이정철 李貞澈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공저서 『세계질서의 변화를 읽는 7개의 시선』 『현대 북한학 강의』 『북미 대립』 등이 있음.
황규관 黃圭官
시인.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 시집과 산문집 『문학이 필요한 시절』 등이 있음.
이남주(사회) 『창작과비평』에서는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2022 대선, 대전환의 과제’라는 이름의 연속기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호에서는 다가오는 촛불항쟁 5주년을 맞아, 촛불혁명이 만든 변화를 평가하고 이후에 더 나아가기 위한 방향성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또 내년 대선이 촛불혁명이 발전적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좌우하는 주요한 정치적 계기가 될 텐데, 이러한 관점으로 대선을 바라보는 경우가 흔치 않은 상황이라는 점도 좌담을 준비한 취지 중 하나입니다. 촛불항쟁 5주년을 맞이한 지금, 그때의 기대와는 격차가 나는 부분이 있고 어떤 영역에서는 오히려 더 나빠지지 않았나 하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이는 상당부분 촛불정부를 자임했던 정부여당이 촛불정신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힘들이 작동하면서 그동안 표면화되지 않았던 문제들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여러 문제나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해서 5년 전에 나타난 변화의 흐름을 부정하거나 그것을 계속 이어갈 초심을 잃는다면 우리 사회에 더 심각한 문제가 올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가 변화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이 5년 전 기대되었던 대전환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이 아닌가 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지난 5년을 평가하고, 내년 대선까지 다시 한번 동력을 만들어가는 작업들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대화에는 황규관 시인, 박정은 참여연대 사무처장, 그리고 북한정치와 남북관계를 전공으로 하는 이정철 서울대 교수가 참석했습니다. 창비에서는 ‘촛불항쟁’을 기점으로 촛불혁명이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인식을 여러가지 방식으로 발신해왔습니다. 촛불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든 아니든, 5년 전 한국사회가 촛불항쟁을 거치며 대전환에 진입했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이런 변화 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셨는지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정은 촛불 당시 시민들이 나올 수 있는 광장을 지키고 운영하는 데 참여연대가 함께했습니다. 2008년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포함해 여러 현장에 있었는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때는 시민들이 나서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적 기운이 분명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민의 힘으로 탄핵까지 간 것이라고 봅니다. 집회에 백만명이 넘게 나오는데, 물론 예전 집회의 경험이 쌓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집회 과정 자체가 굉장히 평화적이었습니다. 사회자나 참여자가 성차별적·폭력적으로 비춰질 만한 언사를 하더라도 현장에서 다 시정되었어요. 그리고 정치인을 가능하면 등장시키지 않았죠. 그런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이 이 자리가 무척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기에서만큼은 대통령 탄핵을 포함해 마음껏 자기 생각을 표현해도 안전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촛불집회가 이어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는 촛불 이전에는 시민들이 정부에 축적된 분노가 있어도 이를 표현하기에 공론장이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여러 사안들이 쌓였고 이것이 촛불로 폭발하면서 당시의 혁명적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죠. 그런데 오히려 지금은 달라지겠구나 하는 기대가 별로 없어서, 계속 ‘혁명’이라는 말을 쓰기가 주저됩니다.
황규관 2016년 민중총궐기 때, 백남기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였죠. 그때부터 ‘결정적인 균열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촛불 당시에도 백만명이 모이기 전, 약 10~20만명 정도가 광화문에 모였을 때의 광경을 잊지 못해요. 그때 나왔던 시민의 여러 요구나 바람들에서 우리 사회가 크게 변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흐름이 대선 국면에 들어가면서 다 현실정치로 수렴돼버리고, 현 정부가 초대 내각을 인선하는 과정에서부터 몇가지 부정적인 징후들이 느껴졌어요. 이후에도 정부여당이 선거 전에 주장한 것과 달리 사드(THAAD) 배치가 강행되는 등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최종적으로 현 정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진 것은 2019년 제주 제2공항을 포함해 전국에 공항을 짓겠다고 하고 이를 위해 예비타당성조사도 면제하겠다는 얘기가 나왔을 때예요. 당시 무슨 사자성어처럼 ‘예타면제’ 운운하며 온갖 무리수를 두어 토건사업을 벌이려는 정부를 보고 맥이 풀려서, 비판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대선으로 들어설 새 정부에 대해서도 촛불혁명과 쉽게 결부할 수 있을지 확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고요.
이정철 촛불혁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복잡한 문제이긴 한데 일단은 광장정치의 성공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한때 대의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보면서도 좌절에 그치고, 간헐적인 선거를 통해서만 의사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1987년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2002년 이후 축적된 촛불의 경험으로 광장정치와 직접정치에 대한 자신감과 당위성 같은 것들이 많이 쌓여왔어요. 2016년에 그게 폭발했던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이런 주기적인 역동성, 분출하는 광장정치와 직접정치에 대한 요구가 변곡점마다 사회의 변화를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나 싶어요. 우리가 다시 과거로 돌아갈 거라며 맥이 풀려하는 것은 너무 자신감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역사적 용례 외에 촛불의 동력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사회 인프라의 변화도 있습니다. IT산업의 성장과 더불어 온라인 정치가 활성화되었어요. 댓글 공작 같은 부정적인 경우도 있지만 한국의 정치문화적 특징으로 거론되는 팬덤 현상 등 우리 사회의 온라인 정치는 굉장히 발달한 상황이에요. 촛불과 같은 직접정치와 광장정치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사이버 네트워킹을 통해서 획득한 정보와 소통 방법이 축적된 결과이기도 합니다. 촛불이든 태극기든 좌든 우든, 사이버 문화의 발전과 평행적 소통구조가 현재 한국사회의 직접정치와 광장정치적 특징을 강화하고 있는 것 역시 역사적 진전의 결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황규관 그런데 촛불혁명으로 대전환에 진입했다고 할 때, 사실 저는 이 ‘대전환’이라는 말이 상당히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당장의 구체적·실제적 현실은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인데요, ‘대전환을 이루어야 한다’라는 당위에 대한 논의와 대화는 충분히 나눌 수 있겠지만, 과연 우리 현실이 대전환에 진입했는가 하면 잘 모르겠거든요. 창비에서 ‘촛불혁명’이라는 명명과 그를 기점으로 한 대전환에 대해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을 저로서는 ‘그렇게 가야 한다’는 나름의 실천의식이나 절박함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남주 우리가 ‘촛불혁명’이라고 이야기할 때는 혁명으로 이미 전환이 완료되어서 새로운 사회가 시작되었다기보다는 한국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해결이 필요한 근본적 문제나 제약들을 실질적으로 건드리고 변화시키는 과정에 들어섰다는 의미입니다. 즉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혁명의 과정에 있고 이것을 더 진전시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또 이러한 관점이 있어야만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노력의 방향을 더 명확하게 잡아갈 수 있다는 뜻이고요.
이정철 촛불에 방향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 저는 있다고 생각해요. 방향성이 없다고 보는 쪽은 촛불을 독재나 대의기관의 부정에 대한 일시적 저항으로 평가하는데요. ‘촛불혁명’이라는 개념을 강조할 때는 진보적인 방향성을 가져가겠다는 것이고, 그런 차원에서 저는 촛불혁명이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박정은 하지만 지난 5년간 여러 의제를 돌아보며 정부와 집권세력, 정치집단, 시민사회들이 촛불을 잇는다는 정확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나를 생각하면 그렇다고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적어도 시민사회 활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용두사미가 된 것도 많고 애초에 변화의 의도조차 없던 것도 꽤 있어요. 이게 방향성은 있었으나 미흡하거나 무능했던 것인지, 도중에 방향성을 잃은 결과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지만요.
이남주 촛불혁명에서의 ‘혁명’은 수행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아요. 이는 방향성이 있다 해도 그 구체적 경로가 미리 정해져 있어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박정은 처장도 언급했듯이 다양한 요구들이 어느 순간에 결집되어 큰 변화들을 만들어낸 힘으로 작동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지속시키는 것이 간단한 과제는 아닙니다. 특정한 개별과제를 실현하는 것이 아니니 과정도 복잡해질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이 화두를 계속 들고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촛불정부 1기’의 5년은 어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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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지난 5년, ‘촛불정부’를 자임했던 이번 정부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박정은 문재인정부가 다른 정부와 다르게 그나마 성과를 남겼다고 할 만한 영역은 권력기관 개혁입니다. ‘명을 거역한다’ ‘총장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각자 자기편을 동원한 채 대립하는 모양새가 장기화되기도 했지만, 이것은 검찰총장, 민정수석, 법무부장관이 모두 검사 출신이었을 때는 생기지 않았던 갈등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민주주의의 또다른 단면을 마주해봤다고도 평가할 수 있어요. 또 하나는 남북이 같이 살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던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핵무기와 전쟁이 없는 한반도, 적대행위 금지, 점진적 군축 얘기를 수면 위로 꺼낸 경험은 귀했습니다. 하지만 분단구조의 높은 벽을 넘어서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도 지난 몇년간 확인됐고요. 두 영역 외에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준비가 잘 안 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법원개혁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법농단으로 대법원장이 구속된 사상 초유의 상황에도 감감무소식입니다. 재벌대기업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보다 더 커졌고요. 이런 상황을 목격하면서, 저는 문재인정부의 개혁 움직임이 어떤 방향성에 근거한 것이라거나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준비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만약 촛불이 없었으면 이 정도의 개혁을 꿈도 못 꿨을까요? 그건 아니라고 봐요.
이남주 그런데 사실 촛불 자체가 예상 못했던 사건 아닌가요? 촛불 이전의 상황을 보면 창비에서는 박근혜정부가 ‘점진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역주행이 심각했거든요. 그러니 당시에 미리 방향성이 정해져 있기는 어려웠죠. 저는 촛불 없이는 검찰개혁·법원개혁이 이 정도까지 오기도 어려웠을 거라고 봅니다. 촛불의 힘을 갖고서도 여전히 해결이 잘 안 되는 문제일뿐더러 수면 밑의 구조적 문제도 아직 남아 있어요. ‘이게 문제구나’라는 인식까지 오는 데에도 상당히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는 거죠. 실제로 개혁 단계에 이르면 저항이 더 교묘하고 강해지잖아요. 개혁 대상의 입장에서 양보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에 그 저항의 힘에 밀리기도 하고요. 말씀하시는 부족했던 점은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박정은 정치세력과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고 정보 접근도 수월해지다보니 평가가 더 박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지요. 물론 개중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과한 얘기들도 있습니다. 지금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탄압한다든가, 법원개혁이나 일부 재판 결과를 두고서 ‘법원까지 장악하려고 하느냐’ 하는 식의 얘기도 나오니까요. 개혁 대상들의 저항이나 마타도어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기관 개혁에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있는 것은 그 과정에서 시민의 인권 보장이라는 본질이 흐릿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방향성에 의문을 품는 것이고요.
황규관 시장화되고 복잡해진 미디어 환경이 우리의 의식을 오염시켜온 것이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시장 원리가 정치에도 언론에도 뿌리내렸다고 볼 수 있죠.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자본주의와 현행 대의제가 어떤 공모관계인지 따져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런 인식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와 정당정치의 공모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착각해왔다면 결국 개혁의 걸림돌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것 같습니다. 개혁을 외치던 세력들이 정치권력을 잡으면 모두들 비슷한 존재가 돼버리는 현실도 자본주의의 심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단지 이번 정권에 대한 평가를 넘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문제의 심층이 오랜 기간 동안 반복되면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싶고요.
이정철 저는 촛불 이후에도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분단체제가 유지되는 한 한국사회는 보수기득권이 우위를 점하는 체제가 유지될 거예요. 제가 촛불혁명이라는 단어를 지지한다고 할 때 그 운동장이 역으로 진보 진영에 유리하게 기울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촛불혁명은 전환점으로서 그 기울기를 시정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제 다 바꾼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하는 반응은 그런 인식의 간극에서 나온 것 아닐까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첫번째 싸움이 노무현정부의 ‘언론과의 싸움’이었죠. 그때 힘겹게 어느정도 성과를 내서, 촛불 때는 대항 언론을 통한 소통구조를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지금 보수언론을 보면 15년 전과는 많이 다르잖아요. 이전에는 중립적 언론이라는 허울을 버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벗고 직접행위자로 뛰어들었어요.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상황까지 온 거예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언론개혁은 어느정도 대전환의 물꼬는 텄다고 보고요. 그다음이 법조계이지요. 문재인정부의 중요 화두가 권력기관 개혁인데, 저는 이게 법조계 전체의 기득권을 겨냥한 촛불운동의 진행과정이라고 봅니다. 지금 법조권력 스스로 대단한 위기감을 갖고 있을 거예요. 사법고시가 없어지고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과거와 같은 엘리트 카르텔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어요. 게다가 이제는 정부가 대놓고 개혁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법조카르텔의 한 축에 일정하게 흠집이 나고 있습니다. 위기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서울법대 출신이며 각각 검찰 권력과 재판부를 대변한다는 윤석열과 최재형이 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려는 것이죠. 반(反)개혁의지의 결정판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로 보이거든요. 물론 여전히 판은 기울어져 있어요. 그들이 훨씬 기득권이고 권력도 있고 강력한 보수 네트워크도 있죠. 직접정치와 광장정치를 통한 촛불의 정신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꿔가고 있지만 대의체제를 일상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아직 못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의기구의 한계나 무능함을 감내만 하고 있을 것도 아니지요.
이남주 실제 법조계에는 검찰이든 법원이든 상관없이 전체적으로 이익을 공유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에 혹 권력기관에서 나오더라도 계속 이익을 취할 수 있어요. 기획재정부 공무원들도 정부의 말을 안 듣는데, 장기적으로 봤을 때 자기 이해와 관련해 참조해야 할 그룹들이 이미 사회적으로 강한 힘을 쥐고 있으니 당장 집권세력이 요구한다고 해도 쉽게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구조적으로 대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힘이 아직 상당히 부족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같은 구조적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일 적게 가졌던 게 정부여당 사람들인 것 같아요. 자기가 권력 잡았다고 세상이 다 바뀌었다고 생각하는 자세죠. 그러니까 권력을 독점하려는 식의 모습도 보였고요. 촛불정부라고 자임한 것치고는 현실 인식이 부족했던 것이 주요한 문제입니다. 무능도 무능이지만 자신의 구조적 위치를 냉정하게 파악해서 문제해결을 도모했어야 하는데, 의지만 앞세운 꼴이었어요.
박정은 청와대 의사와는 달리 여당이나 관료가 안 움직이는 경우도 있어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코로나19 관련 재난지원금 지급 규모나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기획재정부의 태도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청와대가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의 적극적 행사를 국정과제로 밝혔는데, 이 역시 관료들이 잘 안 움직인 측면이 있죠. 국민의 노후자금을 운용하는 국민연금공단이 재벌대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해 대주주로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한진칼 정관 변경을 제안한 단 한번에 그쳤습니다. 여당이 영향력을 발휘했어야 할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5인 미만 사업장은 제외되는 등 미흡한 첫발을 내디뎠고, 시행령은 거기서마저 후퇴했습니다. 관료를 통제하지 못하고 부처 운용에 한계를 드러낸 것은 정권에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청와대 스스로 크게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경우도 있고요.
이남주 의지의 문제인 측면이 있다는 거죠?
박정은 네. 예를 들면 검경수사권 조정 과정에서 정보경찰을 폐지하지 않은 것, 국정원 수사권 이관을 유예한 것 등이 그렇습니다. 산업자본이 은행 등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금산분리원칙이 허물어지는 데에도 청와대의 의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하고요. 몇몇 국회의원이 이에 반대하다 결국 표결에서 기권하기도 했지요. 관료나 여당이 말을 안 듣는다, 어차피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해서 정부의 책임이 면해지는 건 아닙니다.
더욱 선명해진 민주주의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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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정부가 수립 당시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한 데는, 현 정부가 형식적으로는 촛불정부를 주장해도 실제로 촛불혁명에 진심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탓이 있지 않나 생각하게도 됩니다.
이정철 촛불의 성과를 특정 개인과 집단이 사유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단 문재인정부나 민주당 우파만이 아니라, 그보다 왼쪽에 있는 박용진 의원이나 좌파정당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들이 다 했다고 생각하나 싶을 때도 있어요. 싸운 건 시민들인데 그 성취물을 자기의 것으로 취하려는, ‘촛불혁명의 사유화’죠. 역사적 민중운동은 항상 집단의식의 사적 독점과 투쟁해왔는데, 그 결과는 대체로 새로운 엘리트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역사적인 큰 흐름 속에서 의식의 공유와 확장은 이루어지죠. 이런 역사의식을 갖고, 촛불 이후 상황에 대한 허무감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권력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수행하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사실 시민사회에도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행정부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최고 권력자는 관료들에게 재량을 또 위임하고요. 이러한 권력의 이중 위임 과정에서 관료들의 전횡을 막을 통제력이 없는데, 어떤 식으로든 대안을 만들어야 돼요.
이남주 이 문제의 최종 책임은 분명히 정부여당에 있지만 사유화하게 넘겨준 데에 대해 시민사회에서도 책임을 느껴야 됩니다. 큰 변화의 방향에 대해 새롭게 정의해주면서 압박을 형성하고 감시했어야 하는데 개별 이슈만 가지고 싸우는 와중에 사유화할 수 있는 틈을 줬다는 생각도 들어요.
황규관 사유화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관점을 조금 바꾸어서 우리한테 통제할 수 있는 동력과 주체가 있느냐고 되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시민사회의 역량이 거의 파편화되면서 현실 권력과 대등한 역량과 동력이 없으니 엘리트 구조와 네트워크가 계속 유지되는 것으로 봅니다. 누가 됐든 그 구조에 들어가면 결국 다 똑같아져버리는 것은, 본래 그들이 엘리트 의식을 갖고 있었거나 또는 평소에 엘리트에 대한 욕망을 품고 살아왔다는 방증은 아닐까요. 한편으로는 언젠가부터 우리가 선거를 통해 뽑은 세력들에게 개혁을 위임하는 데 익숙해진 게 원인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촛불정부를 자임한 정부여당이 선거철이 아니면 아무런 문제의식도 절박함도 없어요. 이렇게 된 것은 다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 것일까요? 먹고살기 힘들게 만들어놓고 우리를 길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아직도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구호에 갇혀 투표 이외의 정치 참여를 생각지 않는 데서 오는 문제일 수도 있고요.
이남주 말씀하셨듯 대의제 현실에서 기득권 구조에 정치를 위임해야 하는데, 촛불혁명 과정에서는 이를 거부하듯 반(反)정치적인 경향이 다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다시 과두집단에게 모든 정치권력을 위임하게 되었죠.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정치를 통제해야 하는가, 시민사회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겠습니다.
박정은 이번 정부도 나름의 문제의식이 있었던지 위원회를 통한 협치, 혹은 외부로부터의 정책 자문 공급을 굉장히 많이 시도했어요. 예를 들면 수많은 개혁론자들이 참여했던 정책기획위원회를 비롯해서 공정거래·조세재정·노동·법무검찰·경찰·국방·외교 등 여러 분야에 민간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청산과제와 개혁과제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왜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느냐 하면, 민간 참여를 통한 협치나 정책 자문은 결국 관료 통제를 염두에 둔 것이잖아요. 관료들을 자극하고 오랜 관성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외부 전문가를 통해서 공급받겠다는 취지인데 그게 잘 안 되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이 방식도 안 통한다는 사례만 더한 꼴이 되었어요.
이남주 정부위원회의 논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참여자 대부분이 자신의 전문적인 정책 의제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의제 간의 관계, 또 그게 한국사회의 변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잘 안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번 정부 구성에 ‘시민사회 출신’으로 소개되는 인사들이 많이 참여했는데도 그러합니다. 오히려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에서 그 인사들이 비판의 대상이 될 때 시민사회단체도 같이 욕을 먹는 상황이 왕왕 있었습니다. 시민사회단체 활동이란 사회에 실제적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거고, 그에 대한 의식을 지닌 채 정부에 합류한다면 입각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당연히 없죠. 문제는 실제 시민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아주 약한 사람인데도 반대편에선 시민사회단체 이름을 앞세워 비난한다든지, 혹은 시민사회단체의 이름으로 들어가놓고 정신과 방향성은 공유하지 않은 채 정책 하나만 가지고 일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이정철 이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에 대한 아쉬움도 있는데요, 위원회와 같은 제도적 보완 장치에 대한 아이디어와 그 영역을 관리할 인적 자산을 시민사회 쪽에서 잘 공급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되거든요. 이게 잘 안 된 데는 지난 10년의 보수정권하에서 시민사회가 경험을 쌓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라고 봅니다. 그러다보니 노무현정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10년을 건너뛰어서 다시 정부에 들어가는 모양새가 되곤 했는데, 그들이 지난 보수정권 시절에 시민사회와 연대하면서 공유 자산과 정책 연대체를 만들어왔느냐 하면 꼭 그것도 아니란 말이죠. 회전문 인사를 비판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정책적 연대체 제도화를 위해서도 힘을 쏟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박정은 당사자로서 말씀드리면, 시민단체 출신들이 정부에 많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활동을 하다가 바로 정부에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그들과 정책의 방향성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논의하고 조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의 운동이 구체적인 운용의 문제를 간과하고 주로 정책 중심으로만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부분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책 집행이 제대로 되는지 감시한다면서 정작 운영의 메커니즘을 잘 모르는 상황인 거죠. 정책 못지않게 정책을 실현할 구조와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한데 그런 토양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요.
황규관 저도 문재인정부가 노무현정부보다 더 진전되지 못한 이유가 인사에 있다고 봐요. 구성원은 비슷한 반면 10년 동안 사회가 엄청나게 변했어요. 민도(民度)가 많이 변했죠. 시민항쟁도 계속 있었고요. 사실 협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정도로 많다면 역량을 모아서 별도의 대안 세력으로 나타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문제는 촛불 이후에 그 역량이 다 분화되어버렸다는 거죠. 미투, 조국, 정의기억연대, 위성정당 등 여러 논쟁을 거치면서 각각의 목소리로 흩어진 것 같아요. 사실 그 사건들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고, 이러한 분화에는 앞선 원인이 있을 겁니다. 그 원인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벌어진 일의 뒤만 허겁지겁 좇게 될 게 빤합니다. 개별적인 역량은 있는데 이를 모아내는 시도는 않고 각자의 이해관계, 욕망, 관념 속에서만 살아온 것 같아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남아 있는 역량을 결집하고 새로운 역량을 길러내는 일일 텐데, 이 과정에서 공통적인 인식이랄지 감성을 회복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남주 시민사회나 지식인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촛불혁명이다 대전환이다 하면서 에너지는 올라왔는데, 그걸 담아낼 수 있는 틀이나 사유가 오히려 이전의 시민사회보다도 부족했던 듯합니다. 과거 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새로운 사회적 감각을 수용할 수 있는 통로로부터 단절되고, 시민사회는 실제로 뭔가 할 수 있는 상황이 와도 경험을 공급하지 못한 탓에 정확하게 개입할 수 없게 되었고요.
박정은 그렇죠. 실제 정부 정책에 개입한다고 할 때는 정책 제안과 감시를 넘어서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는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이냐, 실제로 어떤 권력이 국정운영에 적절하냐가 다시 고민거리가 되죠. 지금 상황이 답답한 건 선택지가 안 보여서예요. 그러면 양당구조를 깰 수 있는 새로운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하자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러는 동안 양당구조의 현실정치가 계속 공고화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촛불이 진짜 대전환의 계기가 되려면 이번 대선에서는 쟁점에 대한 대안 경쟁이 있어야 합니다. 이번 대선의 어젠다는 이미 선명해요. 자산 불평등과 부동산 문제, 기후위기, 신(新)산업과 일자리 문제, 그에 수반하는 노동권 문제, 기본소득 논의까지 해봄직한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는 가능성 있는 후보를 도와 제대로 된 정책과 의제를 내놓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남주 시민사회단체 차원에서도 지금처럼 대선을 앞두고 캠프가 구성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형성해두어야, 사람들이 캠프에 들어가더라도 그 정신을 계속 거기에 이식하지 않겠어요? 창비에서 촛불혁명에 대한 인식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인식이 없으면 공동의 감각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대전환의 시각에서 현재 정치 상황과 정책 의제를 점검해가야겠지요.
이정철 한편으로는 소위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오래된 어젠다, 지금은 정의당으로 남아 있는 이 노선이 얼마나 지속 가능하며 얼마나 유효한가에 대한 논의도 시민사회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야 합니다. 시민사회가 30년간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계속 도모했는데 아직도 국회의원 5~6석에 머무르고, 그 때문에 촛불 허무론에 빠지는 착시 현상을 성찰해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진보 진영의 ‘순결함’을 지킨다고 현실정치에든 협치에든 직접 뛰어들지 않고 우물쭈물했던 좌파정당의 노선은 또 적절했느냐는 거죠. 그러면서 촛불혁명의 결과도 민주당에 다 빼앗긴 거 아니겠어요? 차라리 새롭게 헤쳐 모여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등 아예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이남주 시민사회가 선거를 통해 제도권에 진입하면 제도가 뒷받침하는 안정성을 확보하고 물질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도 유리하지요. 그렇지만 새로운 가치를 제기하고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무서운 면이 있습니다. 득표율이 수치화되기 때문에 그게 가치 평가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져요. 가치와 꿈은 큰데 투표 결과로 보면 5% 언저리거든요. 그러니까 ‘그 정도인가’ 하고 위축되는 거예요. 하지만 시민사회가 물질적 기반이 취약하고 당장은 큰 힘을 갖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시민사회가 제기하는 가치들은 유효한 것이고, 시민의 동의를 받으면 엄청난 힘이 발생하잖아요.
황규관 사실 저는 현행 대의정치 자체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선거를 보고 있자면 ‘이게 정말 민주주의인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선거 자체가 정치 이벤트, 정치산업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누가 뽑힌다 한들 현행 대의기구가 제대로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가 의문이 있습니다. 촛불 중간에 시민의회를 만들자는 논의가 잠깐 있었는데 당시 그 주장이 또다른 욕망으로 치부되면서 사그라졌죠. 그래서 추첨제를 통한 의회 구성을 자치단체 수준에서라도 운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원자나 추천받은 사람들로 꾸린 풀에서 추첨을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 직접민주주의를 시도하는 동시에, 현재 남아 있는 역량을 ‘시민의회’ 형식으로 담아내는 발상의 전환도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정치권에 입법 청원만 할 게 아니라 시민의회를 통해 사회적 의제를 상징 입법하는 것이죠. 권력구조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시점에서 시민의회 운동이 일어난다면 꽤 활발한 호응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사실 그런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이기도 하죠. 아무튼 좀더 활발한 상상력과 구체적인 실험이 필요한 때입니다.
박정은 지자체 차원에서 직접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사례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서울민주주의위원회같은 시도도 있었고, 참여예산제와 같은 제도가 자리 잡기도 했죠. 다만 대의기구의 대체재로서 직접민주주의가 작동하고 관료를 통제할 수 있으려면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능력,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담보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만만치 않은 과제이겠습니다.
황규관 혁명은 단발적 봉기나 사건이 아닙니다. 프랑스혁명은 근 백년을 반동과 퇴행과 쿠데타를 거치며 이루어냈잖아요. 어떻게 보면 ‘그것도 혁명인가?’ 싶기도 하지요. 하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기나긴 변화의 과정이라면,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살고, 변화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존재-되기’가 필요한 것이죠. 그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역량, 또 각 골목과 마을 단위의 자치 역량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어떤 당이냐’ 하는 혐오스러운 선택지를 강요당하지 않으려면 직접 삶과 사회를 꾸려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시민들의 공부와 모임과 참여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작은 풀뿌리들은 때가 되면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할 개연성이 충분해요. 시민의회 운동과 연결될 수도 있고요. 아무튼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내려놓음의 자세와 윤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새롭게 드러난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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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멀리 보면 3·1운동부터 촛불까지 ‘백년의 변혁’ 과정에서 성취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한 흐름에서 촛불항쟁이 새로운 국면을 연 것이고요. 동시에 촛불항쟁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거나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던 문제들이 최근 5년 동안 드러났습니다. 기후변화 문제가 대표적이고, 글로벌 경제의 변화 등이 그렇죠.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도 촛불혁명의 진행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촛불혁명이 수행적 과정이라면 문제의식이 5년 전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박정은 질적으로 아예 다른 문제들이 지난 5년 동안 마구 등장했어요. 저는 애초에 촛불에 담긴 문제의식이 단일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이미 축적된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참사를 통해 국민의 안전과 생명에 대한 국가의 책무 문제가 제기되었고, 대외적으로는 한일관계나 한미동맹 문제가 있었죠. 권력기관의 정치 개입과 선거 개입 문제도 있었고요. 지난 5년 동안 이 문제들이 중요한 화두였어요. 아직 다 해결되지도 않았죠. 그러는 사이에 새로운 문제들이 부상했습니다. 2017년 대선 당시 미세먼지 대책이 주요하게 다뤄졌는데, 기후위기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젠더 이슈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예전에도 있었지만 2018년부터 여당 광역단체장들의 성범죄가 연이어 터지면서 문제제기가 더 거세게 몰아쳤죠. 플랫폼 노동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형태의 노동이 없었던 건 아닌데 코로나시대에 사람들이 온라인 기반의 생활을 하면서 사업장과 생산 현장이, 노동과 고용관계가 송두리째 달라졌어요. 그런데 이를 규율할 법률이 미비하죠. 최근 가장 문제인 자산불평등 문제는 어떤가요. 놀랍게도 문재인정부의 주거·부동산 관련 국정과제에는 청년, 신혼부부, 서민의 주거안정이라는 내용만 있었지 주택임대차보호, 부동산 과세, 투기 근절, 이익 환수에 관한 정책은 애초에 없었어요. 지금은 한국사회의 핵심 문제가 되었잖아요. 만약 다음 대선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대안이 논의되고 차기 정부의 기조도 이에 맞춰 수립된다면 지난 5년이 헛걸음은 아니었겠다, ‘대전환’의 의미를 찾는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남주 저는 지금 하신 말씀 자체가 창비에서 얘기하는 대전환이나 촛불혁명의 효과라고도 봅니다. 우리가 지금 시기를 ‘대전환’이라고 명명한 것은, 단순한 저항이 아니라 그 안에서 뭔가 새로운 길로 이끄는 방향성이 있고, 그것이 어떤 방향인가에 대해 우리가 논의하고 공감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거든요. 그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젠더, 환경 등의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자기표현과 요구를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고, 이를 시대적 과제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이정철 한편 촛불운동과 관련해서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근저에 깔린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고 봅니다. 하나는 2015~16년의 남북관계 위기입니다. 8·4 목함지뢰 사건 이후 북한의 4, 5차 핵실험, 사드 설치나 개성공단 폐쇄 등에 말미암아 위기감이 고조됐었죠. 권력이 한국의 분단 상황을 시민을 통제하는 메커니즘으로 쓰는 데 대한 저항감, 그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한반도 위기에 대한 분노. 이게 우리 사회만이 갖고 있는 분단체제적 특성인데, 박근혜정부 말기에 ‘이러다가 정말 전쟁이 날 수도 있겠다’ 하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촛불로 분출된 측면이 있고요. 또 하나는 글로벌 밸류체인의 변화입니다. 한일관계를 예로 들면 전통적으로 우리는 일본 의존적인 경제체제로 인식되어 왔어요. 그런데 이제 소재·부품·장비 독립을 추진하는 등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잖아요. 경제 부문의 일본 종속성을 탈피해왔고, 그게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에 있어 한국이 기존과는 다른 접근을 하게 만들었던 겁니다. 글로벌 밸류체인의 변화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함께 부지불식간에 진행되었고, 경제적 측면에서 우리는 일본과 미국 중심 밸류체인에만 머물지 않고 동시에 중국과의 네트워크를 심화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변화도 촛불정신의 한 축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직접적 원인이라고까진 말하기 어렵겠지만 글로벌 시스템의 변화 속에서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촛불에 영향을 주지 않았나 하는 것이죠. 분단체제와 밸류체인 변동, 이 두 사안이 한국사회의 변화에 매우 중요한데, 촛불도 이에 대해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남주 우리 사회의 진보를 항상 방해하는 잠재적 요소 중 특히 박근혜정부 시기에 극단화된 것이 분단구조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적대적 갈등인데요, 촛불을 거치면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과거 분단체제에서 강요되었던 관습이나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나아가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문재인정부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황규관 촛불의 동력이 남북관계 개선에 상당히 획기적인 돌파구 또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에 동의합니다. 일단 정권의 성격을 바꾼 것도 그렇지만, 우리가 의식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힘’을 창출한 것도 사실이죠. 지금은 교착 상태이긴 하지만, 두 정상이 만나고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는 퍼포먼스 자체도 역사의 한 경험이거든요. 다만 그것이 과연 촛불이 만든 동력에만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고요. 트럼프의 등장이라는 비극적 상황이 역설적으로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 아닙니까? 물론 하노이회담이 아주 우습게 결렬되면서 관계 진전이 멈췄지만, 그것마저 역사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꽤 괜찮은 시간이기도 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남한의 자본주의가 극점에 달한 상황에서 과연 남북관계가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해질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비무장지대 개발 논의들이 꿈틀거리기도 했잖아요. 창비에서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얘기하는 ‘변혁적 중도주의’에 비춰 봐도 단순한 남북관계 개선에서 더 나아간 상상력을 계속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게 없다면 언젠가 역사는 우리를 크게 곤란하게 만들지도 몰라요. 역사적 현실은 반듯한 논리가 아니라 비선형의 역설에 가깝기 때문이죠. 어쨌든 그 정도로 진전되었던 남북관계에는 촛불혁명으로 축적된 자신감의 영향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다가오는 대선, 대전환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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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주 내년 대선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건 권력이 유지되느냐 교체되느냐의 문제도 있지만 한국사회의 대전환을 위한 변곡점으로서의 의미가 크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의제가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다음 대선과 새롭게 수립될 정부에 어떤 의미와 과제를 부여해야 할지 각자 생각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정은 우선 기후위기 대응이 매우 심각한 당면과제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얘기가 대선주자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있어 우려스럽습니다. 현 정부에서도 여전히 구체화되지 않고요. 이 문제는 시장에 맡겨놓을 수 없어요. 녹색의 이름을 단 시장이 성장할지는 몰라도 탄소 중립이든 탄소 배출 감소 등의 움직임과는 무관하리라고 봅니다.
이남주 생태 문제의 경우는 사실 촛불항쟁 과정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촛불 이후 사람들의 수용성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기후위기와 생태 문제는 이제 사회에서 화급한 과제로 인지되고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대전환의 방향성을 수립하는 데 중요하겠지요.
황규관 지금 정부가 탄소 배출량 감소, 재생에너지 전환과 같은 문제를 계속 시장에 맡기고 있어요. 서울만 벗어나보면 밭 한가운데에 태양광 패널이 있어요. 삼림을 깎아서 하는 데도 많이 봤고요. 며칠 전에는 신안 갯벌에 풍력발전기 1000기를 세운다는 보도도 나왔죠. 친환경 에너지 전환 논의의 취지에는 기존의 중앙집중적이고 반생태적인 에너지 발전 사업을 자치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전환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건데, 이걸 정부가 ‘에너지 산업’으로 다 뭉뚱그리면서 설치 사업만 진행하고 있다는 게 큰 문제입니다. 기후위기는 종국에 성장주의를 포기해야 해결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여당이든 야당이든 여기에 대해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고 있어요. 경제가 성장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만이 행복한 거고 달성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장을 멈출 수도 없고 다른 방식에 대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여요.
이남주 성장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굉장히 강력한 이데올로기죠. 한국도 이제 공식적으로 ‘선진국’ 됐잖아요. 그런데도 아직 ‘5퍼센트 성장’에 집착하면서 그걸 목표로 정책을 집행하는 건 물론 대단히 문제입니다. 불가능한 수치죠. 다만 여러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성장은 해주어야 사회적인 대응 능력도 갖출 수 있고, 더욱이 현실정치의 측면에서는 성장주의를 아예 포기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이 실제 가능한가의 문제도 있겠습니다.
황규관 이렇듯 강력하게 말씀드리는 건, 생태가 대전환의 핵심 키워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글로벌 경쟁 시스템에서는 자유무역이 계속 강화되는데, 결국은 자본의 이동이 극대화되고 생태적인 고려와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인다는 뜻이죠. 그렇게 됐을 때 실제 농촌이나 민중들,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토대가 파괴될 것이 자명합니다. 실례로 논에 묘목을 심거나 아예 놀리는 경우도 많고, 농업부지에 아파트나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건 오래된 일이에요. 서울만 벗어나면 너무도 흔히 목격되는 현상입니다. 또,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정보통신기술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전환은 기왕의 노동집약적인 산업을 폐기하면서 동시에 노동 조건을 황폐화시키죠. 지금 상황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자칫 양의 의미가 아닌, 음의 의미의 대전환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요. 이를 현실정치와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엄중하게 생각하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박정은 현재 시민사회 내에서는 기후위기에 관한 대응 수위나 연대 범위의 확장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가 비단 환경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산업 분야의 체질 변화와 일자리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인데요, 대응 지형은 미묘하고 복잡해 보입니다. 정부에 들어간 환경단체 출신 인사들이 관련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크게 변화를 끌어내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일각에서는 모두가 감내하고 결단해야 할 문제이니 시민참여 방식으로 전국적으로 토론하고 결정하는 기초 단위를 꾸리자는 의견도 있습니다만, 한편에서는 가덕도 공항 건설에만 해도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단일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소한의 성장까지 부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절충적 입장도 있고, 그렇게 해서는 전혀 시정할 수 없으니 지금 결단해야 한다,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고요. 탄소중립위원회에 대한 평가도 당연히 엇갈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탄소중립으로 가는 것이 아주 절박한 과제인 반면 정부 대응은 매우 미흡한 상황이라 시민사회의 강도 높은 압박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남주 기후위기는 문제가 너무 심화됐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과제입니다.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실천이 좁은 의미에서의 환경운동이 아니라 대전환의 핵심 의제이자 시민사회가 촛불혁명 과정에서 자기 역할을 찾아가는 데 관건이라는 인식의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이외에도 더 명확해지거나 절박해진 문제로 무엇이 있을까요?
이정철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개혁의 사다리를 하나하나 타고 오르는 게 최우선 과제겠습니다. 식민지, 한국전쟁, 분단체제의 형성을 거치면서 기울어진 운동장이 구조화되었는데, 1987년 6월항쟁 이후 우여곡절은 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도 조금씩 교정이 되어왔지요. 현 단계에서는 언론권력에 대한 개혁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한 이후 법조권력과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넘어서느냐가 중요하겠고요. 동시에 아까 말씀드린 두가지 과제,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우리의 구조적 선택의 변화와 분단체제 극복 문제가 중요할 것으로 봅니다. 미중관계 속 한국이 기술 협력의 미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미 논의가 되고 있지만 계속해서 국민적 공론화가 필요하겠습니다. 남북관계는 다음 정부에서 장기적 과제가 아니라 현안으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요. 문재인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많이 했지만, 전시작전권 전환과 남북관계 진전 사이의 딜레마는 결국 해결하지 못했잖아요.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국방비의 과도한 증액과 같은 문제도 발생했는데요, 저는 사법개혁이 일단락되면 다음 장기 개혁과제는 군비·군사·국방개혁 문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봅니다.
이남주 문재인정부에서 국방비를 증액하면서 전작권 전환을 시도하고 군부의 불만을 무마했던 것에서 이제는 본격적인 군사비 통제와 평화체제 구축으로 의제를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정철 네, 다음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남북관계가 계속 표류할 거예요. 이번 정부는 딜레마 상황에서 전략적 오류를 범한 셈인데요, 2019년 8월 한미연합훈련을 하면서, 이게 끝나면 북한이 회담장에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후로 북한이 2년째 안 나오고 있거든요. 그런데 정부가 당시의 선택을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답보 상태에 머문 겁니다. 최근 남북 통신선이 복원되어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들었지만 북은 바로 한미연합훈련 문제를 제기하고 나왔고 통신선도 불통이 되고 말았지요. 대선을 앞둔 내년 2월, 그리고 새로운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내년 8월에 코로나도 좀 잠잠해지면 미국은 군사훈련을 정상화하자고 할 거고, 북한은 으름장을 놓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결정을 주시할 겁니다. 이때 어떤 후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다음 대선에서 또 하나의 선택 기준이 될 거예요. 미중관계의 전개 상황도 주시하면서 자신감을 갖고 장기적 전략에 대한 초석을 놓는 작업을 다음 정부가 해내야 하겠습니다.
이남주 일반 시민들에게는 군사 문제의 구조가 가시화되지 않은 측면이 있거든요. 가시화가 가능할 방식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이정철 전작권 전환 상황이 실제로 도래해야만 하지 않을까 싶고요. 올해 FOC(완전운용능력)까지 못 갔잖아요. 마지막 FMC(완전임무수행능력)까지 검증한 이후에 근본적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는 시점이 있을 겁니다. 그 시기가 일찍 올수록 개혁에 대한 저항과 제약이 많을 테고요. 저는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이 지금은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판단하지만, 피할 수는 없으니만큼 시간을 두고 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박정은 한미동맹에 가장 도전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노무현정부 때 ‘전략적 유연성’ 합의부터 해서 중요한 토대를 다 결정했잖아요. 차기 대통령이 이 사안에 대해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보다 진취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네요.
황규관 저도 들으면서 그게 전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남주 그 결정이 강요되는 상황이 올 거예요. 군비를 증강하면서 북한에 평화와 비핵화를 요구하는 건 그야말로 성립 불가능한 얘기지요.
박정은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피로도가 높은데, 일각에서는 중국에 대해서 굉장히 강한 저항과 불쾌감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이제 단순히 미국과 중국 중 택일의 문제로 얘기되는 게 아니라, 중국의 공격적 대외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국내에서도 많이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는 선택이 더 빨랐으면 좋겠어요. 오랜 시간 끌어왔던 문제고 계속해서 논의는 되는데 매 정권 말기가 되면 결국 답보 상태로 머물다보니까 ‘이게 결국 최선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해요.
이남주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에는 권력을 바꾸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누가 정권을 잡든 해결이 어려운 문제들이 많아요.
박정은 그렇죠. 이번 정부도 전작권을 임기 내 환수하겠다 했는데 중도에 ‘조속한 전환’이라고 말을 바꾸더니 결국 실현하지 못했죠. 역설적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약속만으로는 믿을 수 없고, 대통령 한명 바뀐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졌어요. 그래도 시민사회로서는 실제로 약속을 지키는지 계속 감시하고 독려하고 촉구하는 일이 언제나 과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단 전작권 환수뿐만이 아니고 모든 정책에 대해 적용되는 얘기겠습니다.
황규관 같은 맥락에서 저는 진짜 ‘우리의 정치’를 하려면 대선이라는 이벤트와는 별도로 우리 사회가 어떤 역량을 구축해야 할지에도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선이 그런 이슈들을 수면 위로 띄울 기회가 되기도 하겠지요. 일례로 저는 농민기본소득이 본격화됐으면 좋겠어요. 올해 6월에 국회의원 66명이 농민기본소득법을 발의했어요. 월 30만원씩인데요. 처가에서 농사짓는 걸 봤더니, 원래 키우던 작물들을 십수년 새 환금성 작물로 다 바꿨어요. 농사로 벌어먹고 살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거예요.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한 기반을 국가가 제공한다면 농촌에서의 삶을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겁니다. 떨어지는 식량자급률 해결의 실마리도 보일 테고요. 물론 이러한 농민기본소득이 단순한 농업수당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기획이 함께 있어야 하죠. 우리가 자본주의 산업문명에 너무 익숙해져서 산업노동 아니면 일자리에 대해서 전혀 상상할 줄 모르는 인식의 한계를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일자리와 도시과밀화 문제에도 영향을 줄 겁니다. 기후위기를 마주하면서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상당히 낭만적인 언어거든요. 어떻게 결단을 내려요. 다 셧다운해버릴 수는 없잖아요. 결국 지속 가능하려면 흩어져야 합니다. 도시의 집약적 구조에서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에너지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려 결국 에너지를 낭비하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농업으로 회귀하고, 흩어져야 해요. 이때 농업으로의 회귀를 강제할 수 없으니 농민부터 기본소득을 시작하자는 겁니다. 이러한 시도와 실험이 계속 누적되어야 하는데, 씁쓸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농민기본소득이 의제화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농민 수가 적어서 표가 안 되니까요. 그러니 자꾸 이게 민주주의냐는 의문이 드는 겁니다.
이남주 당장 선거 국면에서 표가 안 된다며 외면되는 의제들이 분명 있지요. 지난호 대화에서 다룬 균형발전 문제도 점차 주요 의제에서 밀려났기 때문에 첫번째 주제로 다루었던 것이고요. 다음 대선을 통해 촛불정부 2기가 출범한다고 하면, 대전환이라는 시야에서 정책들을 배치해가야 하고 그 의미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현재 후보자 캠프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수준에서 다음 대선의 의미를 규정하고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황규관 네. 그래서 기본소득이 정말 이번 대선에서 본격적으로 의제화되면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방법론 차원의 논의도 진전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 논의가 필요한 의제로 노동 문제에 대한 얘기도 덧붙이고 싶은데요, 지금 시스템에서 비정규직이나 산재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황이거든요. 과연 이런 문제들이 말끔하게 해결될 수는 있는 것일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 근대 산업문명의 중핵에서 나오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영국의 경우처럼 중대재해기업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법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기업은 또 법적으로나 하청·재하청 구조에 변화를 줘서 빠져나갈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금노동을 통해 생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 문제를 좀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도 필요해요. 즉 사회에 필요한 노동에 덧붙여진 터무니없는 잉여노동을 줄이는 노력과 투쟁들이 필요합니다. 노동시간을 줄이고도 삶이 가능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기본소득이 다시 화두가 될 겁니다. 기본소득은 그냥 주는 ‘꽁돈’이 아니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우리 사회의 문화와 정신에 기여한다는 존중의 정신과 닿아 있습니다. 맑스가 말한 대로 자본주의사회는 ‘산업 예비군’, 즉 실업자가 있어야 존속되는 사회예요. 이들의 삶을 사회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가 실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도 변수가 되죠. 불안정 노동자, 예비 노동자가 자본이 취사선택하는 상품 내지는 재료가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구성원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일반화된다면 지금처럼 만연한 차별의식에도 큰 변화가 올 겁니다. 저는 차별의식을 변형된 절망감이라고 보는데요,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은 한 사람의 마음과 영혼을 충분히 바꿀 수 있습니다. 현실이 논리나 관념을 엎어버릴 수 있음에도 계속 이러한 상상을 해야 하는 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의의 발전을 통해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좋아진다면 우리 사회의 자신감도 더해질 것이고, 그만큼 더 겸손해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아가 세계사적으로도 큰 의미와 파장을 예상할 수 있죠. 좀 낭만적인 발상 같지만, 어차피 혁명을 말한 이상 이런 낭만과 낙관을 빠뜨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박정은 한미동맹 같은 이슈를 보면서 늘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낮추어 본다고 느껴요. 한국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나라인데 특히 왜 외교·안보 영역에서는 자꾸 작아질까 항상 의문이에요. 5년 전 촛불은 저에게는 자부심으로 남아 있어요. 놀랍도록 평화적인 진보를 이루어낸 게 다름 아닌 시민의 힘이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 계속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지금 대선후보라고 자임하는 이들이 국민을 가벼이 본다, 우습게 본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어요. 대선에서 인물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제시하는 정책도 중요하고 국정운영을 함께 책임질 세력을 선택하는 의미도 큽니다. 특히 ‘촛불정부 2기’라 하면 지속 가능한 한국사회를 만드는 어젠다 중심으로 논쟁 구도를 바꾸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우리 시민사회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 합니다.
이정철 저도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오늘 논의 중에 ‘공정’ 얘기가 없었는데요, 최근에는 여권보다 야권에서 공정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든 결정은 재분배를 가져오고, 어떤 재분배든지 불만은 존재하기 마련이거든요. 다시 말해 공정은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완벽한 공정이란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예요. 소위 MZ세대가 갖는 좌절감을 극복하는 담론으로서 공정을 제시하는 건 이해하지만, 분배의 파이가 커지지 않는 상태에서 공정 자체를 국정운영의 방법론으로 구체화시키면 분명히 벽에 부딪히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좌절감은 더 큰 분노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복지 담론에 친화적인 공정을 자유주의 담론으로 가져갈 때 어색함이 발생할 텐데, 이를 극복할 정치공학이 정교하게 만들어지길 기대해봅니다.
이남주 오늘 논의된 내용이 대선 국면에서 모두 의제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에 대전환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주지시키는 차원에서 꼭 필요한 논의였다고 생각합니다. 대선에 나선 이들이 촛불 이후로 대전환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촛불정부 2기’의 이름을 감당하려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논의된 과제들에도 반응할 겁니다. 이번 대화 이후로도 시야를 넓혀 우리 사회의 본질을 보고 과제도 도출하며 적극적으로 논의를 이어나가야 하겠습니다. 더운 여름날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7.27.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