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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안
1977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오빠생각』 『미제레레』가 있음. franza@nate.com
추애비폭(秋崖飛瀑)
있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변명을 고민하다보니 나뭇잎마다 구멍 뚫리고 여름이 끝났다. 나는 여전히 변명과 아포리즘을 구분하지 못하고, 늙고 있고, 늙어 망해가고, 생활로 인한 비겁과 생활로 인한 긍휼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머뭇머뭇, 점점 멍청해지고 있는데, 일주일 전, 딸아이가 꺾어온 꽃은 시들지 않는다. 그렇게 이상하게도 비참은 멀지만 불행은 여전하다. 가을모기를 죽이다가도 화장실 구석 거미줄을 치우다가도 너무 빨리 말해진 예언처럼 마음이 허깨비 같아, 몸이 미로 같아, 秋崖飛瀑, 秋崖飛瀑 눌러 써보다가도 눌러 지우다가도.
방생되는 저녁
마음에 생활이 넘쳐흐를 때면, 딸은
더 많은 말을 배운다.
말이 넘쳐 말이 넘쳐
나란히 베란다에 앉아 있으면 해가 지고
내 문장은 점점 눈 어두워져
헤매고 전위 따위야 혁명 따위야
말만큼 생활이 넘쳐도
생활이 내 아랫입술 밑에서 짜고 차갑게 찰랑거려도
이 물로는 내 죄가 씻기지 않는구나
마음의 올가미를 던져
억지로 끌어모은 이 상앗빛 면발로
저녁이 달그락달그락 흐르고
귀가 남아 있으니 듣고 마음이 남아 있으니 손잡은 채
딸의 말들로 짠 그림자로
이 조잘거리는 저녁 속으로 가정이 안온히 가라앉을 때
나는 여전히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먼 내 문장들은 제 집도 없이 천지사방
헤매고 속죄 따위야, 치욕 따위야
그저 내 말들을 방생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