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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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위기의 한국, 무엇을 해야 하나

 

2023년에 할 일들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백낙청 白樂晴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로 『민족문학의 새 단계』(개정판) 『민족문학의 현단계』(개정판)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등과 『백낙청 회화록』 1~7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여러해째 나는 세밑에 ‘신년칼럼’을 발표해왔다. 이번 칼럼은 종전대로 ‘창비주간논평’으로 내보냄과 동시에 ‘백낙청TV’를 통해서도 송출했다(2022.12.30). 지난해에 내가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러 일간지에 동시게재하던 것은 이번에 포기했는데 신문사 내부의 반응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던 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층 넉넉한 지면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신문 지면보다 덜 엄격하다 해도 ‘주간논평’이나 유튜브 동영상 역시 너무 긴 분량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제약 때문에, 또 나의 역량 부족 때문에, 미처 못한 이야기의 일부를 『창작과비평』의 지면이 허락된 김에 다소나마 보완하고자 한다. 1부는 신년칼럼을 원문대로 실었고 2부는 일종의 덧글에 해당하는데, 칼럼의 주제와 연관되지만 스쳐 지나가거나 아예 언급 없이 넘어갔던 대목을 소략하게나마 다루려 한다.

 

 

1. 신년칼럼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

 

나라의 주인이신 시민 여러분, 백낙청TV 시청자와 창비주간논평 독자 여러분. 연말이면 ‘신년칼럼’이라는 것을 써왔습니다. 이번 칼럼은 제가 얼마 전에 유튜브 방송을 시작했기에 동영상1으로도 올립니다. 아무쪼록 새해에 모두 건강하시고 보람찬 날들이 많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여러분, 지금 나라꼴이 말이 아닙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더구나 촛불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자랑하던 나라가 말이지요.

 

촛불이 일으킨 변칙적 사건

바로 촛불혁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사태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라고 저는 주장해왔습니다. 윤석열정권의 등장이 촛불혁명이 아니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변칙적 사건’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의 촛불혁명은 세계사적으로도 독특한 혁명이기에 그것이 지금 진행되는 역사라는 사실을 얼핏 몰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빼고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윤정권에 대한 판단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촛불이라는 역사의 격변이 아니고서 어떻게 이런 정권이 태어났겠습니까. 문재인정부가 해낸 것이 적지 않은데도 촛불정부를 자임했었기에 제대로 못한 부분으로 인한 시민들의 분노는 통상적인 수준을 훨씬 넘었습니다. 반면에 촛불정부가 한번 더 들어서면 자기네는 끝장이라는 기득권집단의 절박감도 남달랐습니다. 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지리멸렬하게 갈라진 여러 인사들이 선거 때는 필사적으로 대동단결하지 않았습니까. 후보가 무능하고 무개념이면 어떠냐, 당장에 유권자를 속이는 데 가장 유리한 인물이라면 ‘악마면 어떠냐’는 것이 그들의 공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민주당의 절박감이 태부족이었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이것도 촛불을 빼고는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촛불 대 반촛불의 전선은 지난날 여야의 대립 또는 ‘진보 대 보수’의 대치선과도 달랐습니다. 민주당 내부에도 전선이 그어진 것입니다. 그나마 촛불시민들의 열정으로 2기 촛불정부를 꿈꾸는 대선후보가 선출되었지만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만 생각했고, 심지어 2기 촛불정부보다는 차라리 정권교체를 감수하겠다는 정서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은 뜻밖의 난관에 직면했고 새 정부 집권 1년차에 이미 ‘이게 나라냐’ ‘이대로는 못 살겠다’라는 함성과 신음이 들려오게 되었습니다.

 

있어야 할 데는 없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민활한 국가

최근에 159명의 젊은 생명이 희생된 10·29 이태원참사만 해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와 차원이 다른 양상입니다. 세월호참사의 전례가 쉽게 떠오릅니다만 그때는 서울 시내 한복판의 길거리에서 일어난 참사는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대처가 무능했고 책임을 감추려고 유가족에 대한 온갖 탄압을 하기는 했지만, 주무장관인 해양수산부장관이 일찌감치 사의를 표했고 대통령은 진심이든 아니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으며 해경 해체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발표했습니다. 촛불대항쟁이 벌어지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렸던 것은 진상규명에 대한 방해공작뿐만 아니라 그런 ‘성의표시’나마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10·29참사의 경우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돌볼 국가가 없는 정도는 훨씬 심했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이 죽고 다친 뒤 국가는 실로 놀랄 만큼 신속하고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가족들이 희생자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지옥의 시간을 보내도록 만들었고, 유족들끼리라도 소통하며 서로를 위로할 기회를 철저히 봉쇄했습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그런 꼴까지 겪어야 했던 억울함과 분노를 누가 감히 필설로 형언하겠습니까.

정부의 이런 패륜적인 대응은 세월호참사의 교훈을 그들 나름으로 숙지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가 정권에 어떤 치명타가 되었는가를 기억하면서 그들은 어쩌면 겁에 질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름의 민활한 대응을 했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지만 수많은 공권력의 손으로 유가족의 입을 막고 눈을 덮는 데 한동안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얄팍한 짓거리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더 큰 분노와 비난을 사는 단계가 오고 말았습니다.

 

여당과 언론은 왜 저 모양인가

정부는 그렇다 치고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하는 정당인 국힘(국민의힘)당은 왜 저 모양일까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촛불혁명으로 가장 많이 변한 집단 중 하나가 지금의 여당이라고 생각합니다. 촛불대항쟁으로 크게 깨진 뒤 그들은 물불 안 가리고 자기 잇속이나 챙기는 집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수십년을 특권과 반칙으로 먹고살아온 세력으로서 여전히 ‘살던 대로 살자’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어진 겁니다. 오랜만에 정권을 되찾은 김에 최대한으로 챙겨야 하는데, 국고에 들어온 돈을 풀어주고 ‘좋은 자리’를 나눠주는 것은 대통령이 장악한 행정부입니다. 국힘당 인사들이 희생자와 유가족을 상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태연하고 빈번하게 해대는 것도 국민이 아닌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소리지요.

언론은 왜 또 그 모양인가요? 검찰왕국의 칼춤이 군사독재 시절의 탄압에 비할 바는 못 되는데도 ‘알아서 기는’ 언론이 그토록 많은 현실 또한 음미해볼 일입니다. 소위 레거시언론의 이런 행태 역시 촛불시대의 특징입니다. 이 경우에도 전선은 ‘조·중·동 대 진보적 신문’에서 조·중·동보다 좀 낫다는 언론사들의 내부로까지 이동했고, 더 뚜렷하게는 촛불시민들이 몸소 언론활동에 나선 유튜브, SNS 등 풀뿌리언론과 기성언론 사이에 그어졌습니다. 물론 레거시언론에도 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사 자체로 보면 독자를 확보하기 위한 사실보도 경쟁보다 광고계의 큰손을 잡는 사업이 주안점이 되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신문사마다 남이 못하는 ‘특종’을 하고자 열중했고 기사를 놓친 타사 기자들은 ‘낙종’했다고 데스크한테 깨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튜브에 어떤 단독보도가 나오든 일치단결해서 무시하면 아무도 낙종을 안 한 셈이 됩니다.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이지요.

지금은 정계와 언론계뿐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낮도깨비들이 총출동한 형국입니다. 그게 원래 없던 존재가 아니라 음습한 데 숨어서 활동하다가 양지로 나왔으니 이것도 촛불의 위력이라면 위력입니다. 다만 그런 성과를 내세우기만 하고, 낮도깨비들을 퇴치하고 제도하지 못한다면 루쉰(魯迅)이 말한 ‘정신승리’의 극치가 되겠지요.

 

‘퇴진’의 종류와 경우의 수들

세월호참사는 박근혜정권 2년차에 일어났는데 이태원참사는 윤석열정권 첫해에 발생했습니다. 참사 후 2년 넘게 지나서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가 본격화된 반면, 이번에는 퇴진운동이 이미 벌어지고 있던 상황에서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윤석열 퇴진이 박근혜 퇴진보다 더 확실하다고 단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2016~17년 대항쟁의 ‘리바이벌’을 기대하는 것은 시대마다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소홀히 하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이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의 퇴진 문제도 상상력을 한껏 펼쳐가며 연마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퇴진이라는 것도 여러 종류지요. 박근혜 대통령처럼 탄핵에 의해 강제퇴진당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승만 대통령처럼 자진해서 하야한 경우가 있습니다. 애초에 박근혜씨도 시위군중이 하야를 요구했는데 끝내 안 들으니까 헌법절차에 따라 파면했던 것입니다. 이승만은 자진해서 물러났지만,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벌어진 뒤에 이루어진 하야이므로 그런 경로를 우리가 답습해서는 안 되겠지요.

외국의 사례로 임기 도중에 사임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이 확실시되자 미리 물러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는 자기 살길을 마련해놓고 나간 점이 특이합니다.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면서 닉슨을 사면해준 것입니다. 그 후폭풍으로 포드는 재선에 실패하지만 어쨌든 대통령 하야의 또 한가지 사례로 남았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제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도 하나의 참고자료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윤석열 퇴진’을 정말 이뤄내고 말겠다는 사람이라면 퇴로를 열어주면서 퇴진시키는 방식이 과연 바람직한지, 다시 말해 촛불시민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그렇더라도 누가 주도하여 조율하고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여러 가능성을 차분하게 연마해볼 일입니다.

‘언제’냐에 따라 ‘어떻게’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2027년이면 임기만료로 윤석열 퇴진은 저절로 이뤄집니다. 어떤 분들은 그것이 정상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때까지 참고 견디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고 체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체념하는 분들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아우성의 절박함을 나라의 주인으로서 판단한 것인지, 살던 대로 4년을 더 살면 세상과 나라가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를 성찰해본 건지는 물어봄직합니다.

 

조기퇴진 논의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박근혜시대로 치면 탄핵이 이루어진 4차 연도에 해당하는 것이 2026년입니다. 그런데 한번도 안 가본 길을 어렵사리 열어서 뒤늦게나마 정권퇴진을 이룩했을 때와 이미 탄핵을 해본 역사 속의 시간표는 다릅니다. 1년차부터 퇴진을 부르짖다가 3년차까지도 성공 못했는데 4년째 들어가서 곧 물러갈 사람을 두고 퇴진행동이 불붙기는 어렵겠지요.

그래서 더 앞당겨 2025년에 희망을 거는 이들도 있습니다. 2017년이 20대 총선 이듬해였듯이 2025년은 22대 총선의 다음 해가 됩니다. 총선에서 야권이 크게 이겨 탄핵 정족수를 확보하거나 여당의 분열로 퇴진이 성사되리라고 기대하는 거지요. 하지만 촛불시민들의 요구를 그때까지 실현하지 못한 야권이 총선에서 크게 이길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재선에 성공하여 2028년까지 꿀단지 하나씩을 확보한 국회의원들이 촛불혁명의 전진에 얼마나 열성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지요.

2024년 총선의 해에 기대를 품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는 2025년 대망론과도 통하는 발상이지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선거라는 이벤트는 혁명에 독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물론 독재가 아주 심한 상황에서 ‘선거혁명’이라는 게 일어나기도 합니다만, 압도적 다수 의석을 가진 야당이 2024년까지도 성과를 못 내다가 한 이삼십석만 더 주시면 꼭 퇴진시키겠노라고 했을 때 국민들이 과연 얼마나 귀엽게 봐줄까요? 이 문제도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접근할 일입니다.

촛불시민들의 직접행동으로 말하면, 2016년에는 그해 12월에 정점에 달하여 국회의 탄핵결의를 끌어냈습니다. 이어서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할 때까지 시민들이 추운 겨울을 버텨냈지요. 2022년의 촛불행동은 그 수위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혹한을 만났습니다. 결의에 찬 시민들이 이 고비를 넘겨 시위의 열기를 지켜낸다면 새해 봄쯤 최고조에 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열기가 2023년을 넘어 총선국면으로까지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고 자칫 지루한 대치상태가 뒤따를지 모릅니다.

2023년만 돼도 총선 말고 다른 생각이 없는 이들이 부쩍 늘어날 겁니다. 이럴 때 선거가 촛불혁명에 독이 되는 대신 어떻게 촛불과 상승작용을 일으키게 할지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유리한 점 하나는 민주당에 2기 촛불정부 건설을 꿈꾸는 대표가 있다는 점이고, 국민의힘에서도 오히려 선거를 앞둔 상태기 때문에 윤석열 간판으로 자신이 당선될 수 있겠는가 고민하는 의원이 많아지리라는 것입니다. 불 보듯 뻔한 경제위기의 본격적 도래와 서민 살림의 극한적 추락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혁명은 경제가 최악의 상태를 벗어나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할 때 일어난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러나 이미 촛불혁명을 일으켜서 추진 중인 시민들이 경제마저 망가뜨리는 반촛불 정권을 응징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지요.

 

개벽세상의 문턱에서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점점 실감되는 지구생태계의 위기 앞에서 너무 국내정치에 열중한다는 비판을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더 넓은 세상의 큰일들도 당연히 생각해야지요. 당장에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인 어려움만 하더라도 미·중 갈등이라는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미국과 일본 따르기에 골몰하는 정권 아래서 막막하기만 합니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역시 2017년보다 오히려 더 위태로운데, 현 정부는 반전을 이뤄내려는 능력은 물론 의지조차 없어 보입니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을 젖혀두고 벌이는 거대담론이나 거시적 전망은 한담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이 땅에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는 일은 한국사회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현존 세계체제로서도 관건적 사안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적 일부이자 약한 고리거든요. 따라서 촛불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입니다. 윤석열정부의 등장이 변칙적인 사건이라지만, 체제화된 분단현실과 그것을 뒷받침해온 강대국 기득권층의 동조라는 나름의 토대가 있어서 발생한 사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던 대로 생각하고 살던 대로 살아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습니다. 분단체제는 힘이 셉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과 민족도 지혜롭고 끈질기며 힘이 셉니다. 조선왕조 몰락기에 동학이라는 새 사상이 나와서 이 땅의 후천개벽운동을 출범시켰고, 1894년의 동학혁명이 비록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패배했으나 민중의 각성과 헌신을 보여주었으며, 식민지 아래서의 3·1혁명 같은 변혁 노력이 분단시대에도 지속되어 드디어 남한에서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만 성취의 역사가 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촛불혁명의 와중에 변칙적으로 대두한 정권과의 대결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목표를 갖게 된 상황입니다. 한반도와 인류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할 복된 시기를 사는 영광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에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보람찬 나날 보내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2. 추가적 단상 몇개(2023.2)

 

살던 대로 살지 말자는 주장은 자칫 말꼬리를 잡힐 소지가 있다. 선량하고 성실히 살아온 사람더러 이제부터는 악하고 불성실한 삶으로 전환하라는 말인가! 맥락을 무시하고 이렇게 읽는 독자는 드물 테지만, 칼럼의 제목은 어떤 의미로 계간 ‘창비’가 1996년에 30주년을 맞아 채택한 표어 ‘한결같되 날로 새롭게’의 연장선에 있음을 상기하고 싶다. 실은 당시 표어의 전문은 ‘한결같되 날로 새롭고/날로 새롭되 한결같이’였다. 그것을 2023년의 급박한 상황을 맞아 ‘살던 대로 살지 맙시다’로 표현해본 것이다.

하지만 아래 글에서는 칼럼처럼 국내정치 논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어찌 보면 더 거대한 주제 서너가지를 살펴보려 한다. 물론 본격적인 논의는 아니고 내가 기왕에 제기했던 의견을 단상(斷想)의 형태로 부연할 것인바, 이런 주제들에 대한 논의와 연마가 부족했던 점도 촛불혁명의 원활한 진전을 이루지 못한 원인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문제의식도 갖고 있다.

 

살던 대로 살 수 없게 된 지구

적어도 최근 수년간의 기후변화 등 지구생태계의 위기는 ‘살던 대로’가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실감을 더해주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엄청난 규모의 위기요 과제이기 때문에 실제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 탄소배출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는 이제 과학자들뿐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대체로 동의하게 되었지만 각자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나는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되 중도 내지 중용을 놓지 말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특히 단기적 과제에 매몰되거나 장기적 차원의 원론 제시에 머물지 말고 실효적인 최선의 해법을 찾는 데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또, 무엇이 최선이며 얼마나 실효적인지가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단기적으로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면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 일단 하고 보되 그것이 참된 ‘중도’에 해당하는지, 가장 바람직한 궁극적 해법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물음을 멈추지 말자는 것이다.

친환경적 생활을 하려는 각자의 일상적 노력은 단기적 효과뿐 아니라 장기적이고 궁극적인 과제와도 직결된다. 나 하나의 일상적 노력이 별것 아닌 것 같아도, 할 수 있는 일을 정성껏 하고 보겠다는 마음가짐은 더 큰 사업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설혹 큰 효과가 없더라도 옳은 일이니까 한다는 결기가 없이는 어떤 사업도 긴 성공을 기약하기 힘들기도 하다. 혼자만으로 이룰 수 없는 위기극복에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서도 내가 안 하면서 남더러 함께하자고 해봤자 호응하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생태계위기의 극복처럼 개인들의 노력이 합쳐 국가 정책과 제도의 변화를 끌어내고 국제적 협약의 체결과 이행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과업의 경우 특히나 그렇다.

그러나 과제의 거대함에 비해 자신의 일상적 노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인식하고 기억하는 공부 또한 필수적이다. 그것이 없을 때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상(相)’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며, 동조하지 않는—또는 동조할 처지가 못 되는—사람들에 대한 우월감과 심지어 적대감을 품게 되기 쉽고, 자칫 환멸과 분노에 차서 운동으로부터 이탈할 우려마저 있다.

친환경적 기술의 개발과 실행에 따른 이득을 계산하는 개인이나 집단을 지나치게 배격하는 태도 역시 ‘중도’는 아니다. 이른바 케인즈주의적 생태주의라도 당장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면 일단 수용하면서 그에 따른 중·장기적 문제점은 그것대로 연마하고 비판해야지, 무엇이 실현 가능한 최선의 길인지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칙적인 입장에 너무 집착할 일은 아닌 것이다.

덧붙여, 케인즈주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내가 제기해온 ‘적당한 성장’ 개념도 한층 폭넓고 진지한 토론의 대상이 되었으면 한다. 이는 탈성장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공유하되 그것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각 지역과 시기 나름의 적당한 성장, 곧 자본주의체제의 성장주의를 극복하는 전략이자 방편으로서의 성장이라는 개념으로서, 졸저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창비 2021) 13장 「기후위기와 근대의 이중과제」에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되었고, 유튜브 방송 백낙청TV의 “인간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 이루어가는 실용주의 사상 백낙청 교수의 ‘적당한 성장론’”(2022.8.27) 꼭지에서도 다룬 바 있다. 탈성장이 아무리 정당한 목표이고 지구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체제와 국가 및 기업들과의 싸움이 아무리 급박하더라도 싸움의 성패는 결국 단·중·장기 목표를 얼마나 슬기롭게 배합해서 대중의 지지를 얼마만큼 얻어내느냐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생태계위기를 말하면서 주로 기후변화를 거론했지만, 그밖에 생물종 다양성의 급감, 플라스틱 쓰레기의 범람, 원자력발전의 위험성과 원전 폐기물 처리의 지난함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들이 많다. 디지털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낳은 인공지능과 자동기기, 가상현실 등의 도전도 인간의 대응능력을 시험하고 있다. 이들을 뭉뚱그려서 ‘물질개벽’의 일환으로 파악하면서 그에 걸맞은 ‘살던 대로 살지 않는’ 인간정신의 발본적 쇄신이 필요하리라는 것이 나의 소신인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고자 한다.

 

성평등과 평등사회

우리 사회의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심각한 상태라는 인식은 기후위기만큼 광범위한 합의를 끌어내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여성들의 절박감은 그만큼 더 크게 마련이며, 일부 남성과 기득권층 여성이 일으키는 ‘역풍’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태의 심각성을 방증할 따름이다. ‘살던 대로’가 안 통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여기서도 사태 해결을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되 ‘중도’를 잃지 말자는 제안은 타당하다고 믿는다. 다만 당장에 무엇이 필요하며 각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논란이 매우 격렬하고 ‘중도 잡기’가 훨씬 힘든 면이 있다. 80대 남성이라는 신원의 논자가 끼어들기는 심히 위태롭기조차 한 형국이기도 하다.

부담을 무릅쓰고 내가 던진 제언은, 중·단기적으로는 성차별철폐에 매진하되 장기적으로는 성평등보다 ‘음양의 조화’ 같은 좀 다른 차원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을 처음 펼친 것은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 백낙청 외 지음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창비 2015에 수록 후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9장으로 재수록)였는데,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인 조은 교수와의 대담에서 꽤나 비판적인 반응을 접했다(『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조은 편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여성운동」; 이에 관한 나의 뒷이야기로 백낙청 외 지음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창비 2018, 255~58면 참조). 비판적 반응의 주된 원인은 물론 내 논지에 치밀함과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만, 근대주의적 교육을 주로 받은 현대 한국인이 ‘음양조화’ 같은 개념을 깊이 이해하거나 그 표현에 쉽게 공감하기 힘든 실정도 작용했을 것 같다.

아무튼 공부의 화두를 던지는 게 아니고 운동의 목표와 구호를 제시하는 경우는 대중의 동조가 필수적인 만큼 ‘음양조화’ 같은 용어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다만 성차별철폐는 가령 맑스주의의 계급철폐론이 지배계급의 소멸을 지향하는 것과 달리, 우리가 성별 자체가 사라진 세상을 추구할 수는 없고 남녀(및 성 정체성이 다양한 사람들도) 모두 고르게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이므로 그런 원대한 지향에 걸맞은 목표설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아니, 평등사회 자체가 그때그때 지우(智愚)를 구별하는 일마저 제외한 무조건적 평등주의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할 때 ‘성차별이 사라진 평등사회’ 구상에 나름의 새로운 개념과 호명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맑스 자신도 궁극적인 목표로는 평등보다 계급철폐로 자유로워진 개인들의 연합과 각자의 개성 내지 인격의 발달을 설정하지 않았던가. 남녀가 모두 자력(自力)이 부족한 상태에서 권리만 동등하다 해서 무엇이 얼마나 될 것이며, 지혜도 없고 마음에 어른도 없는 애물들이 판치는 세상이라면 모두가 함께 애먹는 세상일 따름일 게다. 물론 권리가 동일하지 못한 사회에서 자력양성이 순조로울 수 없으므로 이것이 성평등과 온갖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는 운동의 대의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아무튼 성차별을 포함한 불평등의 심화는 국가적 문제일 뿐 아니라 국가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 자체를 망가뜨리는 사태이기 때문에, ‘살던 대로 살지 말자’는 결심이 특히나 절실한 영역이다.

 

남북관계도 이대로는 안 될 시점에

촛불대항쟁으로 정권교체를 이룩함으로써 남북관계에도 전에 없던 발전을 이룬 것이 2018년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됨으로써 남북관계도 교착상태로 접어들었고 2022년 남한의 정권교체로 지금은 이명박·박근혜 시대보다 오히려 더 위태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남북대립이 격화될 때마다 흔히 나오는 것이 분단체제가 흔들린다더니 어찌 된 일이냐는 질문이다. 나의 일관된 답변인즉, 관계가 악화되었다 해서 분단체제 고착기의 상대적 안정이 복원된 건 전혀 아니고 오히려 분단현실의 불안정성과 위험성이 증대했을 따름이라는 것이었다. 윤석열정부의 등장으로 한반도는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전시작전권도 없는 정부가 무슨 ‘선제타격’으로 촉발한다기보다 우발적 사고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을 겪고 있다. 우리가 살던 대로 살다가는 모두가 다 죽을지 모르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 촛불시민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북미관계나 남북관계에 직접 끼어들 틈새는 그 어느 때보다 협소하다. 그러나 내가 거듭 주장했듯이(예컨대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11장 「시민참여형 통일운동과 한반도 평화」) 통일과정에의 시민참여라는 게 북미관계·남북관계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전부가 아니며, 오히려 “시민참여 중에서 최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남북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정권을 시민들이 들고일어나 쫓아낸”(같은 책 284~85면) 2016~17년의 촛불대항쟁이었던 것이다.

정권이나 미국정부의 무지와 무책임을 연구자와 논객들이 지속적으로 밝혀주는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연구와 토론 역시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서는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 남북연합 건설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추진 없이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정착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며, 촛불시민의 정치참여를 남의 일로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전문가적 타성이요 현실안주일 수 있음을 자각할 때라는 것이다.

 

개벽사상과 2023년

하던 대로 할 수 없이 된 세상을 근본부터 바꾸고 새로 출발하는 역사를 19세기 중엽 이래 이 땅의 선각자들은 ‘개벽’이라 일컬어왔다.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는 ‘다시개벽’을 말했고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해월신사법설(海月神師法說)」 37. ‘기타’, 『천도교경전』 11판, 2020, 417면)이라는 말을 남겼다. 물리적 천지가 열린 태초의 개벽이 있었다면 이제는 인심 곧 사람들의 마음이 개벽되는 ‘다시개벽’이 이루어질 때라는 것이다.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원불교의 개교표어로 삼았는데, 이때의 ‘정신개벽’은 해월의 ‘인심개벽’과 통하는 말이지만 ‘물질개벽’은 해월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해월 자신도 “장차 물질발명이 그 극에 달하”(같은 면)리라고 예측하면서 이에 따라 도심(道心)이 더욱 쇠약해지는 사태를 경고했다. 그러나 물질발명이 극에 달하는 현상 자체를 ‘개벽’이라 부르지는 않았는데, 소태산의 물질개벽론은 일찍부터 있던 ‘물질’(협의의 물질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 제반 환경 등을 포함)이 오늘날 개벽에 준할 정도로 새롭고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니 그에 걸맞은 정신의 개벽이 절실하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 후천시대는 물질도 개벽하는 시대이며 물질개벽 자체를 반대하기보다 그로 인해 ‘물질’의 세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인간의 정신이 쇠약해져 문명의 노예로 변하고 있는 상황을 정신개벽을 통해 넘어서자는 것이었다(원불교 「정전」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 및 「대종경」 교의품 30장 참조). 여기서 자본주의 근대에 적응하면서 극복하자는 이중과제론과 한반도 특유의 후천개벽운동이 원만히 만날 길이 열린 셈이다.

그렇다고 개벽이 이중과제보다 추상 수준이 높은 상위개념이라고 보는 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개벽’이 자본주의시대 이전까지 포괄하고 어떤 우주적 시운(時運)을 향해 열린 면이 있는 한에서는 개념의 외연 곧 적용범위가 더 넓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적용의 범위가 넓어진 동시에 구체성에서도 한걸음 더 나간 면이 있다. 이중과제의 실제 완수에 필요한 심법(心法)과 실천 요령에 관해 ‘근대’ 논의에서 곧잘 간과되는 세세한 사항까지 챙기고 있는 것이 개벽사상이요 후천개벽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잠깐씩 논한 생태계위기라든가 성차별과 불평등 문제, 세계체제 속의 남북분단 같은 사안도 각자가 개벽세상의 진행이라는 차원에서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들 문제를 우리가 과연 정신개벽·인심개벽이라는 세계사적 요구에 걸맞은 지공무사하고 알뜰한 마음가짐으로 대응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2023년에 할 일들도 그런 차원에서 성찰하고 설정해야 한다. 예컨대 ‘퇴진’ 문제만 해도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지 아닌지, 바람직하다면 언제가 최적기인지를 자의적으로 정하거나 말로만 외치면서 자기 일처럼 실행하지 않는 것은 개벽일꾼과 촛불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정상적 퇴임과 중도퇴진 중 어느 것이 어째서 더 바람직하며 후자라면 언제 어떤 방식이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은지를 온갖 경우의 수를 상상하면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선택해야 한다. 또, 2023년을 목표로 정했다면 그것을 지금부터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과 다른 선결과제에 일단 골몰하는 사람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다툴 필요는 없다. 마음속으로 정리한 바가 일치하더라도 그 실행방법마저 처음부터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든 우리의 표준은 개벽세상이어야 하고 한국인의 경우라면 촛불혁명이기도 함을 되새기는 일이다.

 

 

  1. 유튜브 ‘백낙청TV’(youtube.com/paiknctv)를 통해 시청할 수 있다.

백낙청白樂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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