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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신예시인특선
이설야 李雪夜
1968년 인천 출생.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lsy196800@hanmail.net
책을 버려요
보지 못하는 책들이 어깨 위에 있어요
망루 위에 있어요
아무것도 보지 못해요
고여 있는 우리는
갇혀 있는 우리는
옥상에는 일손을 놓친 장갑들이 날아다녀요
침묵하는 책들이 불타는 방
검은 아이를 낳다가 죽은 잉크들
우리는 만난 적은 없지만
찬물에 폭풍을 가라앉히며
사랑한 적은 없지만
입술에 묻은 빗물자국을 지우며
거울을 버려요
책을 버려요
망루 위에는 아직 깃발이 있어요
콜타르가 흐르는 사거리에 죽은 아이들이 있어요
너무 많은 귀신들
귀착지들
1
내가 한때 귀신이었을 때
더듬더듬 벽을 짚고 도착한 곳은
생선가게 이층 다락방
삐거덕거리는 젖은 나무상자 속이었지
축축한 벌레들이 우글우글 내 입속으로 뛰어들었지
내가 등 푸른 고등어의 몸속으로 숨어들어가자
유령벌레들이 따라 들어왔지
몸은 벌레들의 서식지
지구라는 말이 지워진
절멸이라는 말이 사라진
내가 한때 귀신이었을 때
젖은 벽을 짚고 천장 위를 달려갔지
거꾸로 매달려 흔들리는데
노란 알전구도 흔들리다가 머리가 깨지는데
아아, 그림자를 죽였네 나는
이제 발바닥도 없이 거미줄을 타고
이 꽃과 저 꽃의 고통 사이에 줄을 놓네
이 방과 저 방의 지문 속을 달리네
내가 한때 귀신이었을 때
별들은 더이상 빛나거나 뾰족하지 않았지
천국에서 버린 못으로 만든 기억들
아프지 않아도 망각하지는 않아
그게 바로 지옥, 귀신들의 세계라고 속닥거리며
그늘을 옮겨다니는 우정 많은 귀신들
그늘에다 나무인형을 심고 웃는 귀신들
서로를 통과해도 다치지 않는 귀신들
이성과 감정의 사다리를 버리고
두꺼운 자연의 질서를 비웃기도 하지
우습기도 하지, 이 몸
너의 무덤이 떠내려가도
나의 무덤 위에 삽이 꽂혀도
아무렇지도 않네 정말
2
어서, 검은 사과씨 품은 나무를 밟고, 아홉번째 하늘 끝으로 올라가야 해 그런 하늘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면서 의심을 지우면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지우면서 어둠의 숲에서 기침하는 나무새와 함께, 눈이 먼 무저갱의 아침, 검은 물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손들을 잡고서, 발을 놓친 신발들도 함께 가야지
이 우매한 공기들, 관과 무덤을 다 썩게 할 수도 있는 것들, 어린 심장을 파먹는 뱀들의 천국에 불을 놓아야지 이가 쑥쑥 빠진 붉은 달을 늪 속에다 빠뜨려야지 빛들이 떠난 납작한 지붕들이 점점 더 더러워지기 시작하는, 저 수상한 오늘들
3
문지방 위로 나비가 불을 나르고 있네
다시 지문의 샛길들이 모두 녹아내리기 전에
다시 딱딱하게 몸이 굳어져 달력에서 사라지기 전에
꽃의 이마에 굵은 낙인을!
감금당한 미래의 전차
오늘이 된 어제의 망집
귀신들로 빽빽한 세계
운구들로 가득한 세계
유령벌레들이 물에 젖은 그림자들을 모두 수거해가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