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임승유 林承諭
1973년 충북 괴산 출생. 201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그 밖의 어떤 것』 『나는 겨울로 왔고 너는 여름에 있었다』 등이 있음.
sooboon@hanmail.net
종묘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나오는 오래된 집 앞에 서 있었다. 양손에는 모종삽과 화초를 들고서.
빛이 쏟아져 내리는 마당으로 걸어가
땅을 판 후에 들고 있던 화초를 심고 돌아오면 되는 그런 장면 속에 있었을 뿐인데, 나는 어느새 주인이 되어 집 안으로 들어가 모자와 장갑을 챙겨 들고 현관문을 나오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내가 몇년 동안 거실에 모아두었던 화초를 다 옮겨 심고 나서야 돌아갈 때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돌아와서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화초를 심기만 하고 물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허사였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하면 다시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던 것은 혼자서 그 먼 곳으로 갔다가 돌아왔다는 점인데
내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몇 발자국 걸어 나가면
꽃나무가 드문드문 있어서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던 어느 날 아침, 연분홍 프릴 칼라 원피스 차림으로 출근한 동료와 이야기를 나눴다.
프릴과 원피스와 레이스에 대해
그리고 오늘 아침 누가 봐도 그날의 대화와 무관하지 않은 아 그 레이스,라고 할 만한 원피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히죽 웃었는데
미리 한 연습이다. 동료 앞에서는 화사하게만 웃고 싶은데 나도 모르는 웃음이 번져 나오면 프릴과 레이스와 원피스 그리고 꽃나무와 관련해 어떤 국면이 펼쳐질지 모르고
산적한 업무를 처리하기도 바쁜 나날 가운데서, 어지럽게 흩날리는 꽃잎을 따라가다 중간에 멈추는 일만은 피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