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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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 李山河

1960년 경북 영일 출생. 1982년 『시운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한라산』 등이 있음. cheche2003@hanmail.net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오늘은 전체 단원들의 정기 건강검진일이다.

우리는 모두 병동 앞으로 나가 나체로 줄을 서서 대기했다.

텅 빈 마당에는 낡은 피아노 한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기시간이 길어지자 길게 하품하던 친위대 장교 하나가

누가 피아노를 한번 멋지게 연주해보라고 했다.

K가 천천히 걸어나가 나무의자에 앉더니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지난해 프라하의 테레진수용소에서 온 젊은 작곡가였다.

잠시 후 우리는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말았다.

그의 연주는 장교들이 좋아하는 스트라우스의 왈츠곡이 아니라

평소 내 영혼이 작곡했다고 자랑한 자기 피아노 독주곡이었다.

이튿날 새벽 노동현장으로 출근하는 ‘수감자 행진곡’ 연주가 끝나자

단장이 갑자기 오후에 특별공연이 있다고 했다.

얼마 전 부임한 악단장 겸 지휘자는 작곡가 말러의 조카인데

죽음에는 리허설이 없다며 단원들을 카포 이상으로 혹독하게 다뤘다.

우리 유대인 단원들의 공연 실수는 바로 지옥행이었다.

모두 악보와 악기를 목숨처럼 닦고 조이기에 정신이 없었다.

점심때 우리는 묽은 감자수프를 먹고 공연장으로 갔다.

어린아이들과 머리 깎은 어른들이 손을 잡은 채 웅성거렸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비트즙을 발라 건강하게 위장한 병자들도 보였다.

모두 목욕에 대한 기대 탓인지 아주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늘 그렇듯 악단은 밝은 표정으로 막사 무대를 정돈했고

난 악보와 트럼펫을 꺼내 다시 점검했다.

마침내 유대인 카포가 샤워실 회색 철문을 열자 우리는

바그너의 「발퀴레 기행」과 베르디의 「개선행진곡」을 연주했고

카포에게 ‘선발’된 수백명이 경쾌한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했다.

그런데 그 긴 행렬 중간에는 어제 사라진 K도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난 숨이 가빠져 트럼펫 선율이 흐트러졌다.

단장과 카포의 눈빛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꽂혔다.

얼마 후 행진이 끝나고 회색 철문이 닫히자 지휘봉이 치솟았다.

단원들은 얼른 뒤돌아 앉아 다른 막사에 비명이 들리지 않도록

주페의 「경기병 서곡」을 더욱 힘차게 연주했다.

이 곡은 트럼펫 독주여서 난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허리가 휘어지도록 혼신을 다해 불었다.

 

오늘도 우리의 ‘샤워심포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막사로 돌아와 낡은 수도꼭지를 트니 물방울이 떨어졌다.

모두 떨어지는 물방울 같은 하루분의 목숨이 연장되었다.

물론 난 예정대로 우리 악단의 행진곡에 발맞춰 행진할 것이다.

멀리 트럼펫 같은 굴뚝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제는 새들도 굴뚝의 연기를 피해 날아가고

태양도 막간을 이용해 잠깐씩 뜨고 질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80살의 베버는 노인요양원 옆방에 들어온 뮐러라는 사람을

이름은 달랐지만 얼굴은 금방 알아보았다.

그러나 백발의 치매노인 뮐러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의 인연은 먼 아우슈비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휠체어를 탄 베버는 틈날 때마다 뮐러를 만나 추억을 더듬었다.

특별한 뇌의 손상이 없는 그의 해리성 기억상실을 회생시키려고

베버는 나치 시절의 사진책과 상징물들까지 구해서 설명했다.

6개월쯤 지나자 단기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바뀌는 듯했다.

이때부터 베버는 요양원 주변 골목에 쌓인 쓰레기들을 가리키며

누가 먼저 저기에 몰래 버리니 너도나도 같이 버린 것처럼

사소한 혼란을 방치하면 곧 큰 범죄로 확산된다고 강조했다.

어디선가 본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렴풋이 기억났던 것이다.

얼마 후부터 두 노인은 방문을 잠그고 밀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직도 은신 중인 아우슈비츠 나치 부역자의 처형 모의였다.

그리고 성탄절 전야에 베버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지폐뭉치와 권총을 주며 약도를 자세히 설명했다.

 

다음 날 여전히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뮐러는 먼 여행을 떠났다.

그는 열차와 버스 속에서 품속의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난 깨진 유리창도 치워야 하고 쓰레기도 치워야 한다고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마침내 뮐러가 헤맨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얀 눈에 덮인 전원주택의 넓은 정원을 산책하던 백발의 노인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언젠가는 한번쯤 찾아올 줄 알았네.”

“그럴 테지, 골드만. 그동안 잘도 숨어 있었군.

이제야 내가 베버의 선물을 전하러 왔네.”

“베버? 아……”

뮐러가 품속에서 천천히 권총을 꺼내 골드만에게 쏘았다.

“아니, 베버도 아닌 자, 자네가 어떻게 나를……”

이때 뮐러가 뭔가 큰 충격을 받아 갑자기 기억이라도 돌아온 듯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권총을 자기 머리에 대고 쏘았다.

세 사람은 원래 친한 소꿉친구였다.

그러나 뮐러와 골드만이 친위대로 들어가더니 서로 모의해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 베버의 가족을 모두 가스실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