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이춘 『김명시』, 산지니 2023
‘무명의 헌신’ 김명시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
고영직 高永直
문학평론가 gocritic@naver.com
“크지 않은 키, 검은 얼굴, 야무지고 끝을 매섭게 맺는 말씨, 항시 무엇을 주시하는 눈매, 온몸이 혁명에 젖었고 혁명 그것인 듯 대담해 보였다.” 1946년 11월 21일자 독립신보 「여류혁명가를 찾아서」 기사의 일절이다. ‘조선의 잔 다르끄’라는 칭송을 받은 경남 마산 출신의 39세 여성 혁명가 김명시(1907~49)를 묘사한 대목이 퍽 흥미롭다. 그렇듯 김명시는 일제에 맞서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위해 싸운 전사(戰士)였다.
하지만 김명시라는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재성 장편소설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에서 박진홍과 이순금 같은 여성 혁명가가 알려지고, 조선희 장편소설 『세 여자』(전2권, 한겨레출판 2017)에서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이 조명되었지만 일제하 ‘여장군’ 호칭을 가진 유일한 독립운동가인 김명시는 그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왜 묻혔을까. 1949년 10월 10일 부평경찰서에서 사망한 김명시의 당시 직책이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기록된 점이 크게 작용했다. 저자 이춘은 한 사람의 ‘시민역사학자’로서 독립공훈 기록을 샅샅이 뒤져 평생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전사로 산 어느 국제주의자의 “무명의 헌신”(8면)을 『김명시: 묻힐 뻔한 여성 항일독립영웅』에 오롯이 복원했다. 3·1운동에 참여한 어머니 김인석의 영향을 받아 오빠 김형선, 남동생 김형윤(1910~?) 등 한집안 세 남매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며 ‘합계 25년’에 이르는 옥고를 치렀지만, 그 기록을 후세에 남겨줄 직계가족이 전무하다는 사실 앞에 아연해진다.
『김명시』는 7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에서 5장까지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김명시의 삶과 투쟁을 사실대로 기록했고, 6장과 7장에서는 창원의 시민단체 열린사회희망연대가 김명시를 알리고자 노력해온 활동을 담았다. 18세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한 김명시는 1925년 12월 모스끄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조선공산당 유학생으로 김조이, 고명자와 함께 파견된다. 이후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중국 상해, 만주 등지에서 홍남표, 조봉암과 더불어 상해공산당 재건활동을 한다. 1932년 국내에 잠입해 활동하다 조직원의 배신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신의주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옥중에서 임신한 아이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이 무렵 김명시는 신의주형무소에, 오빠는 경성 서대문형무소에, 동생은 부산형무소에 갇힌 신세였다. “친일이 항일을 청산하고, 매국이 애국을 고문하고 학살한 전형적 사례가 김명시 일가”(281면)라는 이춘의 문장을 예사롭게 읽을 수 없다.
출옥 이후에도 항일무장투쟁은 계속되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참여해 연안까지 종군하고, 베이징 등지에서 적구(赤區) 공작을 하며 의용군을 모집하고, 김무정 장군 휘하에서 조선의용군 장군으로 활동하다 태항산에서 해방을 맞는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명시는 조선부녀총동맹, 조선독립동맹, 민주주의민족전선 등에서 활동하는데, 동아일보 기사 「독립동맹은 임정과 협조」(1945.12.23)의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뭉치가 되어야 한다”라는 발언에서 보듯 통일전선 노선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명시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9년 10월 11일,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2년 3개월간 잠적했던 김명시가 지난 9월 체포되었고 전날인 10월 10일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3척 높이의 수도관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발표한다.
이 책은 일제하 여성 혁명가 김명시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정직하게 기록한 평전이다. 1945년 12월, 호가장전투를 다룬 김사량의 연극 「호접(胡蝶)」(1945) 관람 후 백마를 타고 종로 거리를 행진한 데서 ‘백마 탄 여장군’이라는 별칭이 붙었다는 김명시의 삶과 투쟁은 이채로운 매력을 발산한다. 역사학자 강만길이 “식민지 시대 고향 마산이 배출한 인물을 들라면 누구이겠냐?”고 물었을 때, “만주벌판 휘달리며 일본군과 총으로 싸운 김명시다. 마산독립운동사에서 그를 가장 앞에 세워야 한다”(130면)고 한 말이 이해된다. 창원 열린사회희망연대는 김명시가 ‘북로당 정치위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2022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영화 「암살」(2015), 「밀정」(2016)에 이어 방현석의 장편소설 『범도』(전2권, 문학동네 2023) 같은 작품이 나옴으로써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직도 철 지난 이념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옛 아서원 터(현재 롯데호텔)에 설치된 표석이 2023년 5월 누군가에 의해 철거되고,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제정해야 한다는 보수우익 일각의 목소리가 커지는 현실은 퇴행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소설가 김학철은 “역사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과제만을 준다”고 말했다. 김명시를 비롯한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마음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먼 미래를 믿고 ‘온몸이 혁명에 젖어’ 풍찬노숙의 삶과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들의 꺾이지 않는 싸움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이춘의 『김명시』를 읽으며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생각하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치지 않는다. “역사의 구경꾼이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가는 평범한 시민의 위대함을 부족한 글로나마 보여주고 싶다”(8~9면)는 저자의 말을 심상하게 읽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평전과 더불어 안재성의 장편소설 『한일혁명전사 김명시』(미디어창비 2022)를 같이 읽으면 당시 상황을 한결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은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