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강수빈 姜秀斌
동국대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4학년. 1999년생.
rkdtnqls0806@naver.com
봄에 나는 것들
커터칼을 손목 가까이 가져다 댔을 때 문득 부엌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달래가 떠올랐다. 칼날의 녹슨 부분이 시든 달래의 색과 닮아서였을까. 어쨌든 달래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약 부작용으로 살이 조금 쪘다며 통통해진 손가락 사진을 보낸 언니가 떠오르자 어쩐지…… 내가 이걸로 뭘 하려고 했더라……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나는 칼을 내려놓고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씩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이딴 녹슨 커터칼로 어쭙잖게 손목을 그었다가는 제대로 죽지도 못하고 파상풍으로 병원과 약국을 다니게 될 것이다. 그랬다면 의사와 약사 모두 엄청나게 심오한 사연을 가졌을 것만 같은 나의 상처 부위를 보고 괜히 말을 아끼거나 어색한 표정을 짓겠지. 그런 식의 배려는 정말로…… 최악일 것이다. 나는 단숨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이 있었으나 제대로 죽지도 못한 불쌍한 사람이 되겠지. 한 사람이 스스로 손목을 그을 만큼 괴로운 일이 무엇일지 그 사람들은 궁금하겠지만 궁금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할 거고, 그 노력 때문에 난 그 사람들이 내가 죽고 싶어하는 이유를 궁금해한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럴 바엔 지지부진하게라도 사는 게 낫다. 아마, 사는 게 나을 것이다.
커터칼을 다시 연필꽂이에 꽂아두니 책상이 텅 비었다. 몇달째 책상 위를 전부 치우고 칼 하나만 올려둔 채로 지냈었는데 커터칼이 사라지니 이제 책상을 치워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상은 현수가 남긴 물건을 모두 처분한 후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다. 처음엔 이 책상도 같이 처분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 책상은 분명 현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현수가 내게 선물해준 것이므로 현수의 것이 아닌 나의 것, 그런 이유로 중고 가구 판매 기사는 허탕을 치고 돌아가고 재희는 내 옆에서 한숨만 푹푹 내쉰 적이 있었지…… 내일 재희를 불러 책상을 가져가라고 할까. 그럼 재희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책상을 치울 마음이 들었냐고 물을 것이다. 재희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이제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그러면 재희는 아직도 새것 같은 책상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쓸어보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깨끗한데?’ 그렇다면 이제 책상에 앉을 일이 없다고 말해보는 건 어떨까. ……그럼 재희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망설임 없이 내가 꽁꽁 닫아둔 장롱 문을 열고 그 안에 든 세계문학전집이며 철학서, 소설, 인문과학책, 철 지난 문예지와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노트북을 가리키겠지. 재희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아니, 정말 잘 아나? 재희가 나를 정말 잘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재희는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나는 현아랑을 잘 알아’ 하고. 역시 재희한테 연락하는 건 안 되겠다. 그럼 어떡하지. 책상은 잠시 그대로 둘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책상 정도야 잠시 그대로 둬도 상관없겠지만, 책상이 계속 눈앞에 있으면 또 커터칼을 올려놓고 싶어질 것 같았다. 또다시 몇주 동안 책상 위에 그걸 올려두고 골똘히 바라볼 것 같았다. 한번 실패해봤으니 두번째는 아마 실수도 하지 않을 거다. 두번째의 나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 집 뒤에 있는 야트막한 산까지 가벼운 산책을 하고 벤치에 앉아 땀을 좀 식히다가 산에서 내려와 근처에 있는 까페에 가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이제 모든 게 다 됐다, 싶을 즈음 문구점에 들러 가장 깨끗하고 단단해 보이는 커터칼을 골라 집으로 돌아오겠지. 손목에는 빨간 줄이 그어지고 줄은 점점 커져서 어느새 줄이라기보다는 면적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가 되고 방 안은 점차 피로 물들고…… 눈이 자꾸만 감기는데 그 사이로 자꾸만 빛이 들어오고 그러게 현수야, 진작 커튼 좀 달라니까, 중얼거리는데 들어줄 사람은 없고 내가 중얼거리든 말든 눈은 부실 거고 의식도 점점 저물어가고 그 와중에 언니도 보고 싶을 거고…… 안 되겠다. 어떻게 해도 언니 생각이 났다. 핸드폰을 켜 재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우리 집 좀 와.
재희에게선 곧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갑자기? 왜?
—책상을 정말 처분할까 해.
말풍선 옆에 표시된 숫자 1은 진작 사라졌는데 재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 엄청 고민 중일 거다. 그 집에 책상이 있는 게 현아랑에게 좋을까, 없는 게 좋을까. 내가 잘 아는 현아랑은 어떤 쪽에 더 어울리는 사람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재희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분 정도 지났을 때 재희는 힘겹게 쳤을 게 분명한 답을 보내왔다.
—ㅇㅇ
고작 두글자, 아니 자음 두개니까 이걸 글자라고 칠 수 있나? 어쨌든, 두번의 터치를 위해 20분을 사용한 재희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웃었고, 어, 내가 웃고 있네, 나 지금 정말 웃기네, 깨달으니 더 웃음이 나왔고, 웃음이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방 안이 웃음으로 가득 차고……
핸드폰 화면이 꺼져 재희와의 대화창이 사라질 때쯤 웃음이 멈췄고,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나는 한가지 가능성을 되짚어봤다.
나는 살고 싶은 걸까? 지지부진하게 말고 정말 제대로.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
몇시에 오라거나 몇시에 온다거나 하는 연락은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재희는 딱 적당한 때에 문을 두드렸다. 까페에서 매니저로 근무하는 재희는 출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한데도 내가 부를 때면 가장 적당한 시간에 찾아와주었다. 힘들다거나 어렵다는 말 한번 없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문을 여는데 재희는 대뜸 여러 채소 사진이 잔뜩 인쇄된 음료수 세개를 내 품에 안겼다. 내가 엉겁결에 그것들을 받아 들자 재희는 마치 오다 주웠다는 투로 턱짓을 하며 마셔, 말했다. 토마토와 당근이 그려진 것, 고구마와 연근이 그려진 것,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보라색 채소들이 그려진 것까지. 보라색 채소도 있구나. 이건 무슨 맛이 날까. 채소에는 문외한이지만 사진들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면 답이 거기 쓰여 있기라도 할 것처럼. 재희는 나를 지나쳐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너무 자연스러운 거 아니니.
우리 사이에 예의 차릴 게 있나.
재희는 건성으로 답하며 책상의 크기를 가늠했다. 가늠,이라고 해봤자 줄자, 아니 그 흔한 30cm 자도 없이 팔과 다리를 휘적대며 사진을 몇장 찍는 게 전부였지만. 나는 재희가 준 음료수 세개 중 보라색 채소가 그려진 것과 사과와 당근이 그려진 것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언뜻 봐도 흙 맛이 날 것 같은 건 재희에게 주었다.
너 고구마 좋아하잖아.
네가 고구마를 싫어해서 날 주는 건 아니고?
재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뚜껑을 열어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나는 옆에서 원샷이네, 원샷이야, 하며 박수를 쳤다. 재희는 빈 팩을 내게 넘기고 다시 책상의 크기와 문의 크기와 현관의 크기를 가늠하듯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고민이 있거나 긴히 생각할 게 있을 때 재희는 자주 저랬다. 핸드폰도 내려둔 채 책상의 가로 길이만큼 팔을 벌렸다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 세로 길이는 몇뼘인지 재보기를 반복하는 재희를 보면서 나는 재희가 정말 고민하는 건 책상의 크기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그냥 가만히 두었다. 어차피 재희라면 곧 물어볼 것이었다.
아랑아
그러니까,
이번엔 정말 치워도 괜찮겠어?
이렇게.
재희는 책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내게 물었는데 보지 않아도 재희의 표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재희의 등이 언뜻 떨리는 것도 같았는데 그 등에 손을 올리는 대신 재희가 넘겨주었던 음료 팩을 얇게 접어 던졌다.
아!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그럼 너도 맞아보든가.
재희는 몸을 돌려 음료 팩을 다시 내게 던졌다. 그러나 음료 팩은 내게 닿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졌고, 나는 그걸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을 가까이 숙였는데도 팩이 잘 보이지 않았고 앞이 점점 흐려졌는데, 난 그게 내가 울어서인지 몰랐고 김재희는 이런 순간에도 현아랑을 잘 아는 건지 어느새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어깨에 팔을 둘러주었다. 재희는 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등이 점점 축축해졌다. 재희도 우는 걸까. 재희도 슬픈 걸까. 아니면 내가 우니까 재희도 우는 걸까.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나는 한동안 재희의 품에 안겨 있었다.
*
아직 재희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효선 언니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것. 나는 아직 답장을 쓰지 못했는데 효선 언니는 한번 문자를 보낸 이후 주기적으로 내게 짤막한 문장과 함께 여러 사진을 보내온다는 것. 그래서 요즘은 불쑥불쑥 효선 언니 생각이 나고, 효선 언니를 생각하다 커터칼을 손목에 갖다 대는 것도 포기했고, 책상을 치워버리려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는 걸 재희는 아직 모른다. 아니, 재희라면 알지도 모른다. 내가 책상을 가져가라는 문자를 보냈을 때, 답장을 고민하던 그 20분 사이에 재희라면 모든 걸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재희는 나와 효선 언니와 현수를 모두 아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니까.
현수가 죽은 뒤로 나와 효선 언니는 만난 적이 없다. 현수보다 효선 언니와 더 오래 알고 지냈는데도 효선 언니와는 현수의 장례식에서만 잠깐 얼굴을 보았을 뿐 그후로 연락조차 주고받지 않았다. 효선 언니는 장례가 끝나고 현수네 부모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시청과 광화문광장, 청와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거나 집회에 참여해 촛불을 들었다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재희가 알려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는데 차마 재희에게 사실 알고 있었어,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였다. 그도 그럴 게 현수가 죽고도 현수의 이름은 포털 사이트 상단이나 저녁 뉴스에 자주 오르내렸으니까. 추운 날씨 때문에 코와 귀가 벌겋게 물들었는데도 꿋꿋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너무 쉽게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 뉴스가 반복되던 때에 나는 고작 TV를 갖다 버리고 노트북은 전원을 꺼 장롱에 처박아두기만 했다. 핸드폰은 자주 전원을 꺼두었고, 그럴 때마다 재희는 내가 사는 집에 찾아왔다. 재희는 매번 치킨이나 피자 같은 걸 사 들고 와서는 너희 집에 온 목적은 오로지 야식을 먹기 위해서야,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그것들을 차근차근 해치웠는데 나는 매번 재희의 두 눈이 벌겋게 부풀어 있다는 걸 알았다. 재희야 미안, 너도 힘들 텐데 나 때문에 힘들다고 말도 못하고 정말 미안. 그러나 그런 말들을 정말 재희에게는 할 수 없었고, 그 대신 나도 재희 옆에 앉아 차근차근 음식들을 해치웠다. 밤에 파는 음식들이 대개 그렇듯 그것들은 너무 달거나 짜거나 맵거나 기름졌지만, 어차피 잠에 잘 들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아주 천천히 그것들을 먹었다. 재희가 너무 맵네, 하면 내가 물을 갖다 주고 내가 너무 달다, 하면 재희가 우유를 갖다 주면서.
재희와 있을 때는 착실히 몸에 에너지를 채우고 재희가 돌아가 혼자 남으면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워 현수가 자주 앉았던 책상을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책장이 붙어 있는 원목 책상은 현수가 이사 선물로 사준 것이었는데 정작 나는 까페에 나가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현수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현수가 우리 집에 놀러 올 때마다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현수는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는데 기껏 그리고 쓴 걸 내게 보여준 적은 한번도 없었고 매번 다음에, 더 좋은 게 나오면,이라는 말로 나의 관심을 거두려 애쓰기만 했다. 그때 너무 순순히 현수의 말을 들어주지 말걸. 더 고집부려서 어떻게든 봤어야 했는데. 나는 언제나 다음이라는 게 있을 줄 알았어, 현수야. 현수에게 더 좋은 말을 많이 해줄걸, 같이 맛있는 음식을 자주 해 먹을걸, 꽃이 피면 꽃구경을 가고 단풍이 들면 단풍구경을 가고 여름이면 수영장에 가고 겨울이면 썰매장에 가고 그럴걸, 하는 후회는 생각보다 안 하는데 이상하게 현수가 그리고 쓴 것들에는 미련이 남았다. 후회는 매번 이상한 방향으로 남았다. 현수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하면 책상에서 등을 돌려 핸드폰을 켰다. 비행기 모드를 유지하고 와이파이만 켠 채로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현수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리고 이미지 탭을 누르면 종종 효선 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언니는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았고 피부도 거칠어 보였는데, 그게 그냥 카메라의 성능이 과하게 좋아서인지 아니면 정말 언니가 어딘가 안 좋아서인지 헷갈렸다. 어느 쪽이 됐든, 언니에게 연락할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언니의 얼굴을 보면 좋았다. 피곤해 보이고 힘들어 보이는데도 언니가 저기 있다는 게 좋았다. 현수가 죽었는데 그래서 효선 언니는 찬바람에 얼굴이 부르트면서도 밖에 나가 서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좋아해도 되나. 현수가 죽었는데 여전히 좋은 게 있어도 되나. 하지만 효선 언니의 얼굴을 보는 것도, 가끔 찾아오는 재희와 늦은 저녁을 먹는 것도 좋은데. 후회가 남는 모양만큼 마음의 모양도 이상한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마음들이 동시에 존재해도 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렇게 모르는 채로 현수를 생각하다가, 재희와 밥을 먹다가, 효선 언니의 사진을 보다가 잠에 들었다. 대부분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고, 간혹 운이 좋으면 꿈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게 재희인지 효선 언니인지 현수인지는 잠에서 깨고 나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효선 언니와는 스무살 때 처음 만났다. 그해 대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 고용 문제로 투쟁이 한창이었고, 나는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과 선배를 따라 청소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학생 서포터즈에 들어갔다. 큰 뜻이 있던 건 아니고 그저 선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선배는 뒷전이고 효선 언니와 더 친해졌다. 언니는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는데, 처음엔 요즘에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신기하게만 생각했었다. 어쩌다 언니와 친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효선 언니와 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비슷했던 것 같다. 웃어넘길 수 있는 문제와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가 비슷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언니와 나는 사람이 너무 싫다, 무섭다 하면서도 그래도 사람이 너무 좋다고 울면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다. 서포터즈 활동이 끝나고도 효선 언니와 종종 만나면서 언니의 생각을 듣고 활동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저런 사람이 있어서 그래도 세상이 굴러가는구나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언니를 만나면 안심이 되었다. 마음을 놓고 마음을 자유롭게 내비칠 수 있었다.
언니와 만남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까지 함께 다니고 있던 재희를 언니에게 소개하는 일도 생겼다. 언니가 나와 현수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나와 언니와 재희, 셋이 종종 모여 밥을 같이 먹게 됐을 때쯤이었다. 나와 재희처럼 언니와 현수도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선후배 사이였는데, 언니는 현수가 우리와는 다른 학교에 다니지만 너랑 참 잘 맞을 것 같다며 어느날의 술자리에 현수를 불러냈다. 언니도 재희만큼이나 현아랑을 잘 아는 사람이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그냥 파악하기 쉬운 사람이었던 건지 언니의 짐작대로 나와 현수는 참 잘 맞았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미묘하게 달랐는데 정말 좋아하는 것과 정말 싫어하는 게 비슷했다. 나는 아이돌 음악을 좋아했고 현수는 힙합 음악을 좋아했는데 신기하게도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같았다. 지금은 활동하지 않는 인디밴드였는데, 주변에서 그 밴드를 아는 사람을 처음 만난 덕에 나와 현수는 어색해할 틈도 없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였던 그 ‘정말’의 감각이 그땐 엄청 결정적으로 느껴져서 나와 현수는 오래 지나지 않아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 사귀면서도 여전히 미묘하게 다른 점들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것들에서 자주 통하고는 했는데…… 언니는 나에게 현수를 소개해준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현수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효선 언니를 따라 언니의 동아리 활동을 따라간 적이 있다. 언니는 시사사진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안산으로 출사를 가는 길 내내 나와 현수의 연애를 축하하며 자기가 아는 현수 이야기를 선물 꾸러미를 풀듯이 말해주었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던 언니가 출사 장소에 도착하자 굳은 얼굴로 조심히 사진을 찍던 모습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때 효선 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농담할 줄 아는 사람이 슬퍼할 줄도 아는 것이라고. 열심히 동아리 활동을 계속하던 언니는 내가 4학년이 되던 해부터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언니는 멍한 얼굴로 그냥,이라고 답할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부터 언니는 내게 농담을 잘 건네지 않았다.
*
서로의 품에 안겨 울던 재희와 나는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어 소파의 양 끝에 걸터앉은 채 각자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확인해야 할 연락이나 자주 들락거리는 SNS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바쁜 용무가 있는 척 핸드폰 화면을 의미 없이 스크롤했다. 재희는 내 쪽을 한번 힐끗 보았다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다리를 뻗어 나를 툭툭 쳤다.
아랑아.
왜.
밥 먹을까.
TV 위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8시였다. 재희가 온 지도 벌써 네시간이 지났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좋아, 뭘 먹어볼까 하며 핸드폰으로 배달 앱을 열었다. 재희는 식욕을 돋우는 사진들을 슥슥 스크롤하며 나에게 메뉴 이름을 하나씩 댔다. 엽기떡볶이, 백억곱창, 그린샐러드, 달래해장……
잠깐만.
왜?
먹을 거 있어.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는 재희를 부엌에 데리고 갔다. 당당하게 냉장고 문을 열어 김치와 달래장을 꺼내니 재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가스레인지 불을 켜 쑥과 달래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를 데웠다. 재희는 놀란 눈을 하면서도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기고 부엌 찬장을 열어 햇반과 김을 꺼냈다. 오래된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괴상한 소음과 쇠숟가락이 테이블 위에 닿으면서 나는 소리, 바삭한 김이 접히는 소리,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 조금 전까지 둘이 부둥켜서 안고 울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소리로 집 안이 꽉 찼다. 재희는 내가 꺼내둔 달래장과 김치를 테이블로 옮기면서 물었다.
된장찌개도 그렇고, 네가 요리도 해?
된장찌개가 다 끓어 보글보글 넘치려 했다. 나는 불을 끄고 가스 밸브를 잠그고 마른행주를 넓게 펼쳐 냄비 손잡이를 잡았다.
효선 언니한테 연락이 왔어.
재희는 테이블에 냄비 받침을 올려두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재희의 반응을 보아하니 언니가 재희에게는 연락을 보내지 않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재희와 효선 언니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
언니는 잘 지낸대?
재희는 밥 위에 된장국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두부와 애호박을 건져 으깨다가 쑥을 발견하고는 내 그릇 위에 얹어주었다. 얼른 인간 되어라, 하면서.
고향에 내려갔대. 요즘 살이 조금 쪄서 고민이래.
그게 약 부작용 때문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재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잘 지내나보네, 조그맣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나는 재희가 그릇에 올려준 쑥을 질겅질겅 씹었다. 입안에 쑥 향이 돌았다. 쑥은 역시 맛이 없었다. 재희는 쑥을 씹을수록 구겨지는 내 미간을 보더니 남은 쑥은 전부 자기 그릇에 담았다. 나이 먹고 편식하지 말라는 잔소리는 내 그릇 위에 담아주면서.
먹지도 않을 걸 왜 넣었어.
언니가 사진을 보내줬거든.
나는 핸드폰을 켜 언니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언니가 보낸 많은 사진 중 하나를 눌러 크게 확대해 재희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쑥이래. 달래 사진 보내준 것도 있어. 보여줄까?
재희는 상에 올라온 달래장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언니 고향이 어디였지? 재희가 물었고, 김해,라고 내가 대답했다.
거긴 벌써 봄이구나.
언니가 보내준 사진 보니까 사고 싶어지더라.
재희와 나는 잠시 언니가 보내준 푸르고 작고 얕고 낮은 것들을 함께 보았다. 쑥은 생각보다 잎이 동글동글했고 달래는 마늘 위에 쪽파를 붙여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땅에 나 있었다면 잡초로 생각하고 지나칠 것 같은 생김새였다. 재희와 나는 길에서 쑥과 달래를 보면 잡초와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희는 길을 걸으면서 주변을 유심히 보는 성미가 못 되었고, 난 눈썰미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었다. 너랑 나는 봄을 비효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재희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재희를 바라보자 재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봄 되면 가끔 뒷산에 쑥 캐러 다니는 아주머니들을 볼 때가 있거든. 나는 뭐가 쑥이고 달래인지, 길거리에 핀 저게 내 입에 들어가도 되는 건지 아닌 건지 관심도 없는데 세상 누군가는 봄에만 나는 나물을 캐러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다는 게…… 말도 안 되게 봄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어서.
재희는 김을 한장 집더니 밥을 올리고 한입에 넣기 좋게 접었다.
너는 그래…… 이번엔 웬일로 제철음식을 챙긴다지만 네가 모르는 봄도 얼마나 많겠어.
재희는 김에 싼 밥을 달래장에 콕 찍었다. 김가루 떨어지게 무슨 짓이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달래장 위에 둥둥 뜬 김가루를 건져올리는데 재희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왜 그래?
너 이거 안 먹어봤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힘겹게 밥을 삼키고 말했다.
흙 맛이 나.
사실, 처음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을 땐 당황스러웠다.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지 너무 오래되었으니까. 언니와 나는 오래 알고 지내면서 서로 많은 것을 나누었지만, 우리가 나눈 것 중 하나였던 현수가 사라지자 마치 우리가 나누었던 게 현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관계가 되고 말았으니까. 어떤 사라짐은 절대 단독으로 일어나지 않고 그 주변까지 몽땅 데려가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도 했으므로 나는 언니도 그 과정의 하나라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가끔 포털 사이트에서 언니 사진을 찾아보거나 언니 이름을 검색해보는 짓을 하긴 했지만. 어쩌다 한번씩은 메신저 앱에 들어가 혹시 언니의 프로필 사진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언니와는 이제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언니와 있으면 현수 생각이 날 테고, 그럼 언니와 나는 또 슬퍼질 테니까. 언니는 현수를 위해 밖으로 나가 맞서 싸웠는데, 난 여전히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될 테니까. 그건 너무 괴로울 것 같았다. 지금 괴로운 것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나를 괴롭힐 게 분명했다.
언니는 그런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아닌지 천연덕스럽게 사진 한장과 함께 짧은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은 김해 집에서 이걸 캤어, 하면서 쑥을 한아름 든 손을 찍어 보내거나 이건 달래, 하면서 플라스틱 통에 담긴 달래 사진을 보내는 식으로. 내가 답장을 하든 말든 언니는 개의치 않았다. 말풍선 옆 숫자 1이 사라지면 언니는 곧장 새로운 사진을 보냈다. 하늘 사진일 때도 있었고 집 앞에서 만난 강아지 사진일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봄에 자라는 식물들의 사진이었다. 가끔은 사진을 여러장 보내면서 일주일 동안 이만큼이나 자랐다며 놀란 얼굴의 이모티콘을 보내기도 했다. 종일 멍하니 누워 책상만 바라보다가도 언니가 보내준 사진을 보고 나면 한번씩 창밖을 바라보게 됐다. 아직 찬바람이 불어 초록이라고 부를 게 마땅치 않은 집 밖 골목의 풍경과 핸드폰 속 푸르고 작은 풍경이 번갈아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그러면 이상하게 푸스스 웃음이 흘렀다. 휑한 바깥 풍경과 비교될 정도로 언니의 사진이 너무 밝고 푸르렀다. 가장 볕이 좋은 시간에 나가 최적의 자연광을 위해 이런저런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했을 언니가 눈에 선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언니는 종종 나와 현수의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그때마다 나와 현수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보라거나 각도를 오른쪽으로 좀 틀어보라거나 혹은 그쪽은 볕이 잘 들지 않으니 앞으로 나오라거나 하는 수많은 요구를 하곤 했었다. 평소엔 목소리도 작고 자기주장도 세지 않은 사람인데 이럴 때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된다니까, 나와 현수는 카메라에 집중하는 언니를 앞에 두고 키득거렸다. 그래서 언니가 보내오는 사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알림창에 언니 이름이 뜨면 매번 들어가 언니가 보는 풍경을 상상했고, 날이 풀리기 시작하자 좋아하지도 않는 달래와 쑥을 사러 집 밖으로 나갔다. 달래와 쑥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는 언니가 보내준 마늘대 사진과 함께였다.
……정말 흙 맛이 나네.
달래장에 담갔다 뺀 숟가락을 조심히 상에 내려놓으니 재희가 당장 저걸 치우라는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너는 요리할 때 맛을 안 봐?
할 말이 없어 된장찌개에 든 달래를 건져서 먹어보았다. 다행히 여기서는 달래 맛이 제대로 났다. 된장찌개를 재희 가까이 밀었다.
이거 많이 먹어.
재희는 역시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탈이 나는 법이라고 약을 올리며 된장찌개를 싹싹 비웠다. 네가 달래를 손질 안 해봐서 그래……라고 항변했지만, 재희는 피식 웃으며 무시할 뿐이었다.
호기롭게 달래와 쑥을 사서 집에 돌아왔지만, 막상 거실에 놓인 푸른 것들을 보고 있자니 난감함이 엄습했다. 저것들을 어떡하지…… 그래서 이틀 정도는 가만히 놔두었다. 도저히 저것들을 어쩔 힘이 생기지 않았다. 사실, 저것들이 집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임무를 완수한 것도 같아서 무언갈 더 할 의지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달래가 너무 빨리 무르고 썩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 바깥에서 자랄 때는 며칠이고 싱싱하게 피어 있을 거면서 왜 집에 오니까 이렇게 빨리 썩어버리는 거야? 빠른 속도로 시들해지는 달래는 이상하게 부채감을 자극했다. 저게 우리 집에 오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언니가 보내준 사진 속 풀들처럼 일주일 동안 더 길게 자라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결국, 어제 커터칼을 치우고 유튜브를 켜 쑥과 달래 손질법을 검색했다. 달래는 뿌리의 흙을 씻어내고 껍질 안쪽 검은 부분을 떼어내고 잎을 물에 헹구고…… 쑥은 거칠거나 누런 부분을 잘라주고 식초 물에 담가서 씻어주고…… 설명으로 볼 땐 단순해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너무 많이 시든 것들은 버리고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것들만 모아 손질했는데도 점점 힘이 부쳐 마지막엔 대충대충 물에 담갔다 빼는 시늉만 했다. 그 마지막 달래들이 달래장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너는 달래가 주는 부채감을 몰라……
지금 달래한테 가장 못된 짓을 한 건 너야. 달래의 가능성을 앗아갔어, 넌.
재희는 다 먹은 그릇과 냄비를 치우고 상을 닦았다.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데 재희가 달래장을 들고 옆에 섰다. 버린다, 하는 재희를 급하게 막았다.
그냥 냉장고에 놔.
이거 못 먹어.
재희는 한사코 버리라고 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탐탁지 않은 얼굴로 달래장을 다시 냉장고에 밀어둔 재희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거실 소파에 기대 누웠다. 젖은 손을 털며 재희에게 다가가자 재희가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자고 갈 거야?
자고 가도 돼?
고개를 끄덕거리자 재희가 야호, 하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꺼내왔다.
오랜만에 거실에서 자자.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재희가 이불을 깔기 편하게 엉덩이를 슬쩍 들었다. 재희는 자기 집인 것처럼 이불을 펼쳤다. 그 위에 눕자 몸이 노곤해졌고 눈이 조금씩 감겼다. 재희도 내 옆에 누워 몸을 가까이 붙였다. 재희의 손바닥이 내 등을 가볍게 쓸어주었다. 재희의 손짓에 웃음이 나왔다. 재희야, 너 이러는 거 안 어울려. 재희는 얼른 자기나 하라고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근데 재희야.
왜.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책상은 어떻게 치우려고 했어?
…… 뭐.
몸만 달랑 온 주제에. 너 차도 없잖아.
애초에, 면허가 있기는 해? 내가 키득거리자 재희는 빨리도 묻는다, 하며 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래, 그냥 너 보러 왔다.
그러니까 이제 자, 재희는 내게서 손을 거두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잘 자, 재희야. ……너도. 재희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잠든 밤, 꿈에는 웬일로 현수와 효선 언니, 재희가 모두 나왔다. 우리는 돗자리를 들고 어느 풀밭을 거닐다가 울창한 나무가 우뚝 선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먹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아무도 없다는 게 참 이상하다, 재잘거리면서도 그것에 관해 깊게 생각은 하지 않고 달래와 쑥이 들어간 전과 주먹밥을 먹었다. 이번엔 어느 음식에서도 흙 맛이 나지 않았다. 봄에 나는 것들은 참 끈질기다 그렇지, 현수가 쑥을 질겅거리며 말했고, 그래야 겨울을 뚫고 자라는 법이다, 효선 언니가 대답했다.
*
눈을 떴을 때 거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눈을 찡그리고 있는 재희가 보였다. 저녁 먹고 바로 잠들었는데도 어쩐지 허기가 졌다. 재희를 깨울까 하다가 더 자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핸드폰을 켰다. 알림창에 효선 언니의 이름이 떠 있었다. 언니와의 대화창에 들어가보니 단단하고 불그스름한 잎이 여러갈래로 나뉘어 오므려 있는 식물 사진 한장이 보였다. 어쩐지 열대과일로 자라야 할 것만 같은 생김새의 그것은 지금까지 언니가 보내온 사진과 다르게 무엇인지 전혀 예상되지 않았다. 이게 뭘까……? 뭐 보는데? 언제 깬 건지 재희가 슬쩍 다가와 물었다. 재희에게 핸드폰 화면을 내밀자 재희는 눈을 몇번 끔벅거리더니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냐.
나도 몰라.
용과 그런 거 아냐?
용과가 우리나라에서도 자라나?
나야 모르지.
재희와 나는 아예 엎드려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길가에 뭐가 피어 있든 관심도 없는 사람과 눈썰미가 나쁜 사람이 알아맞히기엔 난도가 너무 높았다. 내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하자 재희가 핸드폰을 뺏어 타자를 두드렸다.
—언니 이게 뭐예요?
야!
아, 귀청 떨어지겠어.
재희에게서 다시 핸드폰을 뺏어왔지만, 이미 말풍선 옆에 숫자 1이 사라진 후였다. 내가 답장을 안 했을 뿐, 언니에게서는 지금까지 연락이 매일 왔었는데도 어쩐지 긴장이 됐다. 그러나 몇분이 흘러도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 대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재희는 누구 올 사람이 있느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금 콩닥거렸다.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열자 효선 언니가 달래가 든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언니는 멋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백합이야.
아, 백합이구나. 저돌적인 열대과일로 자랄 것만 같은 그 싹은 백합이 될 싹이었구나.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내가 돌아오지 않자 현관으로 따라 나온 재희가 언니를 보고는 바로 ‘언니! 같이 책상 치울래요?’라고 묻는 바람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언니는 재희의 말에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재희에게 봉투를 내민 언니는 말했다. 밥부터 먹자.
*
언니가 서울에 온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현수의 1주기를 지나 곧 현수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건 그냥 알 수 있는 거였다. 우리는 둥글게 모여 앉아서 달래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언니가 달래를 고무줄로 묶어서 주면 재희가 뿌리에 묻은 흙을 정리하고 내가 이파리를 물에 헹궜다. 깨끗하고 싱싱한 달래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응모자는 총 463명으로, 지난해 355명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한 추세를 보였다. 양적으로 풍부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어느정도 기본기를 갖춘 탄탄한 응모작들이 대다수를 차지해, 심사자들은 기쁘면서도 곤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본심 후보작 9편 중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을 보여준 작품 4편이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그중에서도 「홈」이 보여준 개성적인 목소리와 문체의 아름다움은 단연 눈에 띄었다. 특히 처음부터 끝까지 찰나의 장면과 순간에 온 감각을 열어놓고 집중해 얻은 환상의 이미지와 문장들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만 그쳐 타자와 세계에 대한 관심과 해석이 희박해 보인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됐다.
「외출」은 ‘지박령’이라는 비인간 화자의 시점에서 퀴어 커플의 일상을 바라보는 설정을 취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은 소재적인 면보다는 약소하게나마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귀신의 마음’이 지닌 따뜻함에 있다고 느껴졌다. 다만 중간 중간에 흔들렸던 시점 적용과 다소 도식적이고 뻔한 결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홍수 따라잡기」는 주인공이 옥탑방에 들인 정수기 때문에 온 동네가 물에 잠기는 홍수 사태가 촉발됐다는 선언에서 출발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환상이라는 마술을 통해 실재와 비실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상상력, 거대한 재난과 이별을 등치시키는 능청스러움이 돋보였으나, 중간에 인물이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퇴장하는 등 거칠고 투박한 전개가 소설적 완성도를 떨어뜨렸다는 한계 또한 분명해 보였다.
당선작으로 정해진 「봄에 나는 것들」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난 뒤 남은 이들의 일상을 차분하게 그린 소설이다. (사회적 타살이 분명해 보이는) 연인의 죽음을 견디고 회복해나가는 과정을 과장하지 않고 무심하고 덤덤하게 그려내는 태도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준다. 화자가 혼자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물을 만들어 먹고 죽은 친구를 위해 촛불을 드는 다른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 또한 중요한 주제의식으로 다가왔다. 「봄에 나는 것들」은 앞에서 논의된 다른 후보작들에 비해 소재의 참신성이나 기발한 상상력은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어붙은 땅이 녹은 뒤 솟아오르기 시작한 봄나물의 생명력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길어올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고, 동시대 청년 세대의 화두를 진정성있게 풀어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투고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한다.
김숨 김유담 천운영
당선소감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선 소식을 듣고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 당선되었어’ 말하려는데 불쑥 눈물이 쏟아졌을 때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내가 소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소설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어렵고 힘들기만 한데 쓰는 동안엔, 문장이 나아가는 동안엔 그 안에 빠져들어 지내는 삶이 마냥 즐겁다. 어떻게 괴로운데 동시에 행복할 수 있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소설 바깥에서 자주 슬펐다. 슬플 때면 무엇이든 쓰고 싶어졌고.
그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쓰는 게 좋다. 소설이 정말 좋다. 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이 꼭 사는 걸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려서 지금까지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때로 삶이 미워서 소설이 미웠고, 삶이 어려워서 소설이 어려웠고, 삶이 싫어서 소설이 싫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좋은 풍경이 있었고, 좋은 순간이 있었으며, 좋은 사람이 있었다. 자꾸만 돌아보게 하는, 자꾸 더 자세히 보게 하는, 그래서 기어코 사랑하게 만드는 존재들이. 그러면 또 삶이 좋아졌고 그러면 또 속절없이 소설이 좋았다.
계속 좋은 걸 보고 듣고 발견하면서 괴로운데 즐겁고 슬픈데 행복한 이 이상한 일을 계속하고 싶다.
노트북 앞에 앉은 나는 혼자이지만, 소설을 둘러싼 생활은 혼자서는 할 수 없기에 나의 생활을 이루는 모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어떤 나여도 언제나 묵묵히 바라봐주는 엄마 아빠에게. 언제나 나의 첫 독자가 되어주는, 나보다 더 나를 믿어주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예빈에게. 나의 여름의 시작과 끝 같은 현지와 채영. 너희랑 한가로이 웃고 떠드는 시간이 너무 좋다. 내 생일은 언제까지나 너희와 보내고 싶어. 나의 가장 큰 행운, 혜원, 수진, 예림, 재영, 유빈, 보경, 주희. 너희가 없었다면 내 대학생활은 많이 외로웠을 거야. 너희가 보내주는 사랑과 다정에 나는 매번 감탄하고 말아. 잊지 마, 너희가 나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그건 이미 너희가 가진 것이기에 그렇다는 걸. 주혜, 정열, 승학. 제게 없던 용기를 건네주어 고맙습니다. 우리는 계속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부르고 싶은 이름들. 유나, 지우, 범수, 세희, 재이, 진주, 성원, 연경, 미혜, 유빈, 진경, 유진, 동희, 준겸, 휘주. 나의 생활에 자리해준 당신들이 있어서 나는 자꾸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름을 말하진 못했지만, 나를 자랑으로 여겨준 모두에게. 당신들은 언제나 나의 자랑이었음을 꼭 알아주길.
글을 쓰는 동안에 많은 가르침을 주신 학교 안팎의 모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염승숙 교수님, 한유주 교수님, 문지혁 교수님. 선생님들께 배운 소설 쓰는 자세와 마음을 계속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믿지 못한 저를 발견하고 불러주신 세분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보고 듣고 발견하겠습니다.
다은 언니. 언니가 보내준 봄에 나는 것들이 없었다면, 이 소설을 시작하지 못했을 거예요. 언니가 전해주는 마음들에 많이 의지해요. 언니가 나의 의지이듯 나도 언니의 의지이고 싶어요. 우리는 봄에, 봄에 나는 것들 속에서 또 만나요. 언제나 건강하기를, 안과 밖 모두.
강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