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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의 과거와 현재

 

 

소종민 蘇鍾旻

문학평론가. 평론집 『어제의 책 내일의 책』 『문학의 극한』 등이 있음.

messai@empas.com

 

 

1

 

전태일의 분신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아 있다. 1970년 11월 13일, 자신을 불길에 내맡겨 ‘어린 생명’을 구하려 했던 전태일의 실천과 사상은 노동자들이 문제해결의 주체로 일어서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노동조합운동의 시작을 열었고 노동문학운동의 개시를 고하였다.

재단사로 일하느라 노동환경 조사를 하느라 지친 와중에도 전태일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수기를 비롯해 소설 세편의 초안, 일기, 진정서, 설문지, 업체 설립 계획서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썼다.1 일기에는 김소월의 시를 자주 옮겨 적었다. 어느날의 일기에는 가곡 「그 집 앞」의 가사 밑에 “내 영혼의 촛불 뒤로 샛별아 숨어라”라고 자기 문장을 적어놓기도 했다. 1970년 4월의 「소설 초안 3」과 같은 해 8월 9일 일기에는 유서로 여겨지는 대목이 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아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해서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에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소설 초안 32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1970. 8. 93

 

두 글에는 은유와 상징이 있고 절박한 마음의 진동이 있으며 상념들을 한데 모으는 고요한 멈춤이 있다. 응축과 휴지(休止)의 반복이 아마 그의 말투와 닮았을 리듬을 만든다. 한문장 두문장 나아가며 말에 담긴 정황과 의미를 감싸는 정신의 윤곽이 생성된다. 이러한 것이 시의 성격이라면, 두 글은 분명히 시적이다.

「소설 초안 3」의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는 노동이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에 관한 환유(換喩)일 것이다. 전태일은 “어린 동심”4 “나약한 생명체” “나의 나인 그대”를 살릴 노동, 억눌린 노동을 해방하는 노동, 그것을 “덩이”로 표현하였다. 그에게 노동은 완전함을 뜻하는 원(圓)과 구(球)의 형태이다. 그 안은 따뜻하며 우리가 궂음 없이 즐거이 한데 모일 수 있다. 서로 연민하고 우정을 나누며 손잡고 껴안는다. 한 울타리 안의 우리는 지상으로 내려온 하늘의 사람이 된다. 그의 노동은 성자적 실천에 가깝다. 8월 9일 일기에 드러난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를 죽이고 가”는 역설적인 결단은 죽음과 삶이 순환한다는 그의 강한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노동을 사랑의 운동이라고 믿었다. 그 사랑이 동심원으로 퍼져 세상을 보듬고 아우르게 되면 자신은 다시 돌아오게 될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의 분신 앞에서 지식인들은 크게 분노했고 몹시 부끄러워했다. 몸을 일으켜 노동자의 형제로서 싸움에 나섰다. 자본과 국가의 폭력은 연일 노동을 외진 곳에 매장하려 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노동·노동자라는 말은 공산주의를 연상시키는 적성(敵性) 언어로 취급되었다. 불가피하게 노동은 민족·민주·민중의 외피를 쓸 수밖에 없었고, 지식인들은 기꺼이 노동을 보호하는 책임을 맡았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폭압에 저항한 문인·언론인·학자·종교인들은 『사상계』 『세대』 『청맥』 『다리』 『씨알의 소리』 등의 정론지와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같은 문예지를 매개로 필봉을 휘둘렀다. 개발독재권력의 허위이념과 거짓 선전을 격파하고 몰아내고자 힘썼다. 쓰고 외치고 나아가며 노동을 지키려 애썼다. 신음을 흘리고 틈나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번개가 머리칼을 태우고 천둥이 귀를 찢어도/겁내지 말라 외쳐대는 친구들의/고함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가 들렸다”.5 노동의 시는 “울안의 타는 마음을 끌어내어”6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힘찬 노래가 되었다.

 

 

2

 

노동자·농민·학생·지식인의 총력을 모은 1987년 대투쟁은 뜨거웠다. 1987년 8월 17~18일, 현대그룹노조 5만여명 노동자들이 중장비를 앞세워 민주노조 건설,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울산은 노동자의 해방구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중심에서 노동자 시인 백무산이 솟아올랐다. 그의 시는 팽팽한 긴장과 단호한 결의로 노동자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힘차게 돌아가는 엔진 소리 같았다.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정확한 비유와 예리한 직설로 노동을 표현했다.

 

살 속에 말이 있다

살은 스스로 말을 한다

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는다

 

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살과 살의 대화다

뼈와 살의 대화다

남의 살과 나의 살의 대화다

—백무산 「노동의 근육」 부분7

 

이 시는 노동자가 각성된 몸(“살” “뼈” “근육”)으로 시야와 언어를 획득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과정(“살과 살의 대화”)을 묘파한다. 이제 노동자는 스스로 일어선다. 노동의 주체적 생성과 기립을 고지(告知)한 그의 시는 노동시의 영역을 극적으로 확장하였다.

많은 지식인은 노동자의 굳건한 동지였다. 『노동문학』 『현장문학』 『노동해방문학』 『노동자문화통신』 등과 같이 노동을 다루는 매체를 만들어 노동과 지식이 함께하는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나갔다. 혁명 프로그램을 만들고 새 사회로의 이행을 준비했다. 창비·문지를 비롯하여 『세계의문학』 『작가세계』 같은 문예지도 노동문학으로 채워졌다. 노동자 시인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새 세상이, 노동의 세상이 곧 열리는 듯했다.

그런데 그 뜨겁던 노동이 차갑게 식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사태가 일어났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었다. 지구 북반구가 신자유주의체제로 바뀌고 있었다. 이 시기에 자본은 물밑에서 반격을 준비했다. 어느샌가 경제위기에 대한 노동자 책임론과 고통분담론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쟁의를 준비하던 노조는 공권력에 의해 속속 강제진압되었다. 고용 유연화 전략은 노동의 활력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국가와 자본의 발 빠른 변신에 속수무책으로 노동은 길을 잃었다.

1990년대가 저물 무렵, 우리 사회엔 국가적인 위기가 몰아닥쳤다. 자본은 막대한 부채와 재정파탄의 책임을 개인의 노동에 떠넘겼다. 능력주의, 우승열패, 적자생존 따위의 파렴치한 말들이 나돌았다.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다시 살아남기 위하여 무한경쟁의 회오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도록 쌓아왔던 신뢰와 연대, 헌신과 우애가 무너졌다. 노동의 신체와 영혼은 낱낱이 쪼개져 자본에 흡수되었다. 노동의 길을 함께하는 동지이자 형제였던 지식과 문학도 언제부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노동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노동은 쟁의에서 생계로 가라앉았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부분8

 

시는 1980년 5월 광주, 1987년의 투쟁들, 여러 투쟁의 죽음들, 한 시대의 장례를 치르는 듯하다. 하지만 이 장례는 이상하다. 관에 있어야 할 망자들이 거리를 떠돌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유(有)와 무(無)의 경계에서,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경계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공포스럽다.

『입 속의 검은 잎』에는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하는 노동이 여러 형상으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위험한 가계(家系)·1969」에서 병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곧 숨을 거둘 듯한 노동의 알레고리였다. 노동은 세상을 신비롭게 만들던 “떠돌이 사내”(「집시의 시집」),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병(病)」), “수백 개 율동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이제는 버려진 “작은 나무공”(「나무공」)이 된다. “우리도 한때는 아름다운 불씨였”다고, 시인은 찬란했던 노동을 회상한다. 그러나 지금 그 노동은 “어둠보다 더욱 짙은 공포”인 “적막”, “흰 뼈만 남은 역사(驛舍)”(「폐광촌(廢鑛村)」)로 남았다.

기형도의 언어는 축축이 젖어 바닥에 흥건했고 형체마저 불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걸어도 계속 안개에 발이 묶였다.

 

안개의 군단(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기형도 「안개」 부분

 

기형도는 죽음도 삶도 아닌 상태에 놓일, 애매하기 짝이 없을 노동의 현실을 벌써 예감했던 건 아닐까. 불분명한 경계에서 머뭇거리다가 점묘화처럼 주변 배경으로 스러져가는 길 잃은 노동을 어떤 시보다 더 선명하게, 깊이, 정확히 포착한다. 기형도의 시를 노동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9 노동의 바탕과 무게가 달라지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그의 시는 분명히 보여준다.

 

 

3

 

2000년대 초반,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전지구적 확산을 뜻하는 ‘세계화’ 담론이 맹위를 떨쳤다. 그로부터 20여년 동안 자본과 노동의 구조는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건 산업재해 규모였다. 2000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약 2,150명, 도합 5만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직도 노동과 노동자는 제대로 된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현실이 오늘날 젊은 시에서는 어떻게 드러날까?

이용훈의 시집 『근무일지』에는 여러 유형의 노동이 소개된다. “아파트와 물류창고 등의 건설 공사, 터널 파기 공사, 재개발 현장의 철거, 수화물 터미널의 짐 나르기, 지하 하수구의 오물 청소, 모텔 청소, 자가격리자들의 생활쓰레기 수거, 식품 공장의 오이 세척, 가구 공장의 본드 접착, 천 재단, 조경 공사, 화장터의 유골함 작업 등”10이다. 시에는 불통, 체념, 욕설, 혼잣말, 고함,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말들이 난무한다. 온갖 종류의 말들이 뒤섞인 이 시집을 숨 가쁘게 읽다보면 마치 작업현장에 섞여 들어간 듯해 현기증마저 인다.

 

폭발할 것 같은 고통을 극복하려 해 근육이 갈기갈기 찢어져 감각마저 사라지고 있네 바닥을 내치는 장딴지 검정 물결 푸른 힘을 느껴봐 피 냄새를 맡은 승냥이들 소리의 근원지로 모여든다 내달리는 경주마의 피 한방울 살점 한조각 얻기 위해 하얗게 질리도록 두 팔 허공으로 휘젓고 있네 팡파르가 울리면 함성과 종이 꽃가루 가득한 응원이 지상 가득히 퍼지네 질주의끝에는 환호의 세리머니가 형형색색 풍선으로 날아오른다 심장은 아직 뜨거운데 후줄근한 잿빛 바닥에 내쳐지네

—이용훈 「내 앞에는 복수니 쌍수니 제법 익숙한 선택지가 놓여 있다」 부분

 

이 시에서 “경주마”는 노동자다. “피 한방울” “살점 한조각”이 ‘노동’을 은유한다면, 이를 먹기 위해 달려드는 승냥이들은 ‘자본’일 것이다. “질주의끝”엔 노동의 성과물을 진열해놓은 자본의 축제가 벌어지지만, 이제 쓸모없는 껍데기가 된 노동은 세계의 저층에 쌓일 뿐이다.

이용훈은 이미 끝난 세계에서 노동이 얼마나 참혹하게 버려지는지 생생하게 전시한다. 그는 지구라는 회전판 위에 올라간 노동이 자본의 원심력에 의해 낱낱이 파편화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복기한다. 노동의 참상에 밀착된 그는 분열자(分裂者)가 되기도 한다. 그는 자본의 가속운동에 휘말려 이성조차 잃을 정도로 위태로워진다. 끝나지 않는 노동으로 몸은 기계처럼 움직이고, 마음은 쉬고 싶은 욕망으로 들끓는다. 그의 시에서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편에선 제지하고, 다른 편에선 이탈한다. 이용훈의 시에서 노동은 작업의 중단과 주체의 기립을 허용하지 않는 작동 불능의 세계다. 노동은 광란(狂亂)이다.

시인이 세상의 바닥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쓴 시가 있다. 무질서한 시간의 어긋난 틈으로 잠깐 빠져나온 것 같은, 그런 시다.

 

나이지리아 사람 몽고 사람 때로는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으로 무리 지어

어두컴컴한 모텔 복도를 이리저리 걷습니다 당신들은 타월을 충분히 달라는 요구도 시원한 물이 냉장고에 준비되어 있는지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합니다

세워지는 모든 존재들은 당신들의 두 손에서 체결되는데

당신들이 머무는 객실은 축축하고 마르지 않는 속옷과 수건들로 가득합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쓸어내고 훔쳐도 솟아나는 돌가루와 체취만이 방 가득 흐트러져 있습니다

—이용훈 「미안한 노동」 부분

 

객실 청소를 하러 온 ‘나’의 눈에 이주노동자들이 남긴 흔적이 보인다. 그들이 수건 한장, 물 한병 더 달라 말하지 못하고 떠난 걸 알게 된다. ‘나’는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돌가루나 묻혀 오는 그들 때문에 사장에게 욕이나 듣는다고 여겼던 게 미안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나’처럼 자본에 포획된 노동자라고 미처 생각지 못해서 미안했을 것이다. “당신들의 두 손”을 잡아주지 못한 게 미안했을 것이다.

또다른 시 「오함마 백씨 행장」에서도 화자는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업 동료 백씨의 수첩 앞에 멈춰 선다. “그의 가족에게 연락할 방법은 어디에도 적혀 있질 않았”다. 백씨의 배낭에는 작업복, 안전화, 스킨로션, 손톱깎이와 일회용 면도기만 들어 있었다. 그가 죽은 뒤에야 그의 흔적이 보인다.

이주노동자의 흔적, 무연고 시신으로 남은 노동자의 흔적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이 응시가 귀하다. 흔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은 고독을 불러낸다. 고독은 시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사이로 연민이 솟아난다. 쓸쓸한 흔적을 더듬으며, 흔적 이전의 궤적을 거슬러 걷다가 저들이 태어나 자란 곳, 그들이 빛나게 살아 있던 날들을 내 안에서 만나는 것. 응시는 노동의 흔적을 살려내는 시적 장치다.

이용훈의 응시를 통해 우리는 세계의 어떤 끝을 보게 된다. 낯설고 끔찍한 것 안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인은 폐허를 응시하며 지옥이 되어버린 노동의 한복판에서 무언가 건져올린다. “폐허를 인양”한다.11 폐허의 흔적 그대로, 그 상태 그 윤곽 그대로를 온몸으로 받아안는 이 시간은 전에 없던 새로운 시간이다. 더이상 자본의 시간이 아닌 ‘산 노동’의 시간이다.

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또한 노동을 포획한 자본이 세상을 폐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그는 오늘의 세상 풍경에 어두운 가족사와 옛 친구들의 상실을 겹쳐놓음으로써, 노동의 산물을 ‘더미’로 형상화함으로써 폐허의 이미지를 강화한다.

 

너는 무섭다고 내게 전화했다 같은 층에 살던 중년 남성이 사망했고 며칠 전부터 복도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었는데 그게 쓰레기 냄새인 줄 알았다고, 그 냄새가 잊히지 않는다고

(…)

지하실에 몇십년 된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대 사람들이 떠나면서 버렸대 쓸모없는 것들이 숲을 이룬 거지 농담이야 정신 차리자

(…)

몇편의 시와 미완성 원고 한뭉치

(…)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을 애써 찾는 것은 옳은 일인가

—최지인 「더미」 부분12

 

중년 남자의 시신, 지하실의 쓰레기, 시 원고 한뭉치, 연락 끊긴 사람들 모두 ‘더미’의 형상이다. 중년 남자는 “공사판에서 일하다/다리를 다쳤고/몇달째 공치고 있었다/그러다 바닥과/하나가 되었다”(「도시 한가운데」).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다들 무언가 시도하다가 좌절하고 만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많아서”(「파수」) 생긴 더미들이다. 바닥에 쌓여가는 더미들은 처치 곤란이다. 오늘도 마지못해 나서는 노동 역시 더미로 귀결된다. 더미는 전태일의 ‘덩이’처럼 해방하는 노동이 되지 못하는, 그저 죽은 노동의 퇴적물일 뿐이다. 시인은 더미를 무덤과 동일시하여 “그가 묻힌 곳은 몇년 뒤 콘크리트로 뒤덮였다”(「언젠가 우리는 이 원룸을 떠날 테고」)고도 말한다.

최지인은 시에서 자신의 좌표를 자주 드러낸다. 30대 남성이자 노동자이며 예술가인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매순간 고민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불안을 한 묶음으로 감수하는 시인은 자신을 언제나 명확한 자각과 명쾌한 행동 안에 위치시키려고 노력한다. 그의 시에서 우리는 노동조건의 불안정성을 확인하는 한편, 불투명한 상황을 헤쳐나가는 노동의 생활력을 발견한다.

그의 시는 여러 단락으로 구성된 장시가 주를 이룬다. 이 단락들은 노랫소리, 두 사람의 대화, 명사형의 이미지들, 나직한 혼잣말, 전쟁속보, 라디오 뉴스, 재해장면 등의 몽따주이다. 시인은 직접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외부세계의 동향을 배치하면서 세계-내-존재를 형상화한다. 이질적인 사건들을 공통의 장으로 끌어들여 무관한 장면들이 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세계감(世界感)을 잃지 않도록 유도한다.

시인의 목적은 뚜렷하다. 그는 “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직 “미래는”(「문제와 문제의 문제」) 닫히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최지인 시에서 노동은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시인은 오늘의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내일의 노동은 그렇지 않길 소망한다.

 

세상을 바꾸겠다, 얘기하면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는 집에서 담배를 태웠고 문틈에 꽂힌 독촉장을 찢었다 일을 구하려고 애썼으나 실패했고 죽으려고 했으나 두려웠다 골방과 거리를 오가면서 확신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최지인 「마카벨리전(傳)」 부분

 

최지인 시의 주인공들은 쉬이 지치지 않는다. “천개의 몸/천개의 죽음”(「Love in a Mist」)을 만나서 울고 사랑하면서 “희망이 없어도 우리//만날 수 있다”(「기도」)고 믿는다. 이것이 최지인 시의 큰 미덕이다. 시인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북을 치는/사람들”(「세상이 끝날 때까지」)의 일원으로서 동시대 청년 노동자들의 마음을 살피는 데 충실하다. 폐허와 같은 현재를 딛고 서서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길 그는 간절히 원한다.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도 선배 시인들처럼 삶의 최일선에 처한 존재들을 자기 중심에 놓는다.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가장 작고 여린 존재들에게 가까이 다가선다.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를 향해 생을 열고 함께 살아간다. 이 젊은 시인들은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고, 없어야 할 것을 없게 하려고 움직인다.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사랑의 노동을 펼친다. 전태일의 유산을 오늘의 눈과 몸으로 이으려 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씨알의 소리

  1.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전태일의 글을 모아 엮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에서 볼 수 있다.
  2. 같은 책 151~52면.
  3. 같은 책 172~73면.
  4. 전태일이 그토록 연민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중 한명이었던 신순애는 열세살에 평화시장 ‘시다’가 되었다.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이 개설한 중등교육과정에서 글을 배웠다. 40여년 뒤, 그는 여성노동자의 자기 역사쓰기를 실천하여 『열세살 여공의 삶』(한겨레출판 2014)을 출간했다.
  5. 신경림 「산역(山驛)」, 『농무』, 창작과비평사 1975.
  6. 조태일 「불타는 마음들」, 『가거도』, 창작과비평사 1983.
  7. 백무산 『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
  8.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9. 송종원의 글 「기형도 시에 나타난 시대적 징후」(『인문학연구』 30집, 인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8)는 노동의 관점에서 기형도의 시를 해석한 유일한 사례로 파악된다.
  10. 김수이 해설 「‘해체되기 위한 쇼’에 초대당한 당신」, 이용훈 『근무일지』, 창비 2022, 126면.
  11. 백무산 「인양」, 『폐허를 인양하다』, 창비 2015.
  12. 최지인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창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