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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형준 朴瑩浚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불탄 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등이 있음.
agbai@naver.com
언덕 위 재개발지역
잘못 접어든 산책길에
서쪽에서 들어오는 초저녁 빛을 따라
평안으로 난 길이려니
한참 언덕을 올라가다 만난 재개발지역
철망이 없어도 철망으로 경계를 두른 듯한
급류로 쓸려나간 도심의 시간이
무덤처럼 모여 멈춘 곳
골목골목마다 집이 있는,
위로 올라갈수록 복비가 저렴한
복덕방 주인과 손님이 노상의 평상에서 흥정하는,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홑이불 한장에 고단한 몸을 누일 것 같은
첩첩지붕들,
골목 사이사이로
언덕 꼭대기 교회의 십자가와
이슬람사원 첨탑의 흰 초승달이 보이는,
갈림길의 언덕에 또다른 계단이 나타나는
계단이 만든 쓸쓸한 탐험길 한 끝에
또다른 동네, 또다른 골목이 펼쳐지고
오래된 비디오 대여점과
전봇대 밑에 봉지로 싸인 채 가지런히 놓여 있는 연탄재들
초저녁 빛은
골목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고
골목 어느 길로 가든
서쪽 하늘을 향해 가는 길은 트여 있다
계단을 다 올라가서 바라보니
언덕 맨 꼭대기 집 옥상에 빨래가 널려 있다
발아래로 서울 시내 마천루와
한강물을 내려다보며 아침 햇살에 빨래를 널던 사람은
창공까지 쥐어짜며 자기 삶도 바싹 마르길 기원했을까
더는 올라갈 데 없는 산동네의 저무는 언덕에서
거둬들일 손 없이 흔들리는 빨래를 깃발 삼아
우연하게 시작된 오늘의 산동네 등정은 끝이 난다
공가 팻말이 붙은 집들이 늘어나는 철거 중인 산동네
계단마다 서로 다른 삶을 한층 한층 쌓아올리며 어울리던
집주인보다 세 들어 사는 사람이 많은 곳,
울타리에 생선과 모자가 함께 널려 있듯
이름을 몰라도 서로 어울리기 좋아한 사람들 떠나고 나면
이곳에 들어설 단지명이 영문인 아파트
산동네의 계단을 다 내려와
대로로 통하는 언덕길을 걸어가는데
길 한복판에 풀어져 속이 휑한 커다란 검은 비닐봉지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륵스륵 따라온다
뒤돌아보면 딱 멈췄다가 발걸음을 떼면 따라오는
집뱀 같은 비닐봉지
어둠을 채 가리지 못한 가로등 불에 반짝인다
봄이 오는 무덤가에서
내 목소리는 언덕 하나를 넘지 못해서
언덕 너머로 양들이 한마리 두마리 도망치기 시작하고
여자의 노래는 양들이 사라진
언덕 너머 두번째 세번째 언덕을
가없이 넘어
설산 아래까지 가닿아
내 목소리가 놓친 양들이
설산에 부딪혀 메아리치는
여자의 노래를 따라 돌아오고
해진 신발 밑창에
뭉툭한 발가락이 드러나는
유목민의 발걸음을 닮은
그 여자의 노래
야생에서 죽어가는
짐승들의 숨소리를 닮은
그 여자의 노래
내 목소리는 언덕 하나를 넘지 못하고
언덕 너머로 도망친
양들은 설산 아래서
길을 잃고
그 여자의 노래
언덕을 넘고 넘어
도망친 양들의 귀에 가닿아
설산을 기어오르려던 양들이
뒤를 돌아보는
풀과 눈이 뒤엉켜 있는
초원의 언덕에
그 여자의 노래가 배어 있다
양들의 발걸음에 차일 때마다
땅에서 눈을 뚫고 솟아나는 풀을 닮은
그 여자의 노래
그 여자의 무덤을 덮고 있는
눈을 헤치며 솟아나는 풀을
손으로 쓸어본다
설산에서 길 잃은 양이여
돌아온 양이여
언덕 위 그 여자의 무덤에서
뒤돌아서 고향집을 바라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면서
마을 바깥으로
길과 들판을 넘어가던
나를 뒤돌아서게 하던 그 여자의 노래
울타리 가에 서서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던,
동구 너머까지 들리던
몇개의 언덕을 굽이치는 그녀의 옥타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