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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엄원태 嚴源泰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침엽수림에서』 『소읍에 대한 보고』 『물방울 무덤』 『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가 있음.
wteom@naver.com
이 동물원을 위하여 8
여우 길들이기
은여우는 꾀 많고 영악해
고슴도치보다 길들이기 어려운 동물이지
은여우 조련은
코끼리 조련보다 더 영악한 방법이 필요하지
여우 사(舍)에 낮엔 종편채널을
밤엔 유튜브 방송을 줄곧 틀어놓는 거야
벨랴예프 방식1보다 덜 과학적이긴 하지만
여우에겐 더 효율적이고 어울리는 방식이긴 해
자신이 길드는 걸 알지 못하게 한다는 건 비윤리적이긴 하지
은여우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공영방송을 보다가도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훅 치고 들이대는 CF들에 우리는 분노를 느끼지만
그런 폭력적 광고 방식을 도입하고 제도화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굳이 알려고 하진 않지
길든다는 건 그런 거지
동물원이 떠안아야 하는
운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네
이 동물원을 위하여 9
내부의 적
양을 잡아먹던 늑대들이 소탕되자
옐로우스톤에서 늑대가 멸종되었다고
늑대가 사라지자, 엘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그러자 풀과 나무들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덩달아 새와 곤충이 사라졌다고
사라진 풀 때문에 강둑이 마구 훼손되고
물고기와 비버까지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활어차에 메기 한마리 넣어 청어를 더 싱싱하게 운반한다는
메기효과는 진실이 아닐 수 있겠지만
가혹한 환경이 인류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토인비 선생의 말씀은
적어도 이 동물원에선 진실이 맞겠다 싶다
동물원에선 지금
경쟁자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해 형평과 균형에 도달한다는 건 너무 이상적인 역설일 뿐
내부의 적은 단호하게, 제거되어야 하고
가혹하게, 제거되는 중이다
그것이 지구라는 이 동물원 공동체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 할지라도
종말은,
내부의 적이 절멸되는 날에서 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적이란 적은
모두가
지구라는 이 거대 동물원 내부의
적일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대들이여,
진정 적은 우리의 안과 바깥 구분 없이 존재함을
외계인이라도 침공해 와야 인정하겠는가,
이미 온난화와 미세먼지의 거대한 침공을 받는 중인데도 불구하고
―
- 1952년 드미뜨리 벨랴예프(Dmitri Belyaev)라는 러시아 생물학자는 사나운 은여우를 길들여보기로 결심했다. 우리 앞에 갔을 때 그나마 호기심을 갖고 다가오는 여우들만 선별해 번식시킨 결과, 길들여진 여우가 단 8세대 만에 나타났다. 45세대 이후 태어난 여우는 80퍼센트 이상이 사람을 따랐다. 명백하게 길들여진 것이다. 궤도 『궤도의 과학 허세』, 동아시아 20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