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조명
세상을 향한 순한 먼지들의 노래
이설야 李雪夜
시인.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등이 있음.
snow7173@naver.com
1. ‘밥’의 상상력
정우영 시인의 시세계가 달라졌다. 올해 출간된 『순한 먼지들의 책방』(창비)은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이 시집이야말로 첫 시집 같다고,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문학동네 1998)부터 확장해온 시세계가 여기에 결집된 듯하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 속 표현에 기대자면 “왼갖 생명붙이들 숙어드는 첫 집”(「끝집」)이다. 살아서 “고물거리는 희한한 종족들이 줄줄이 몰려와 불을”(「유성으로 떠서」) 쬐는 집, ‘이순의 저녁’(「이순의 저녁」)을 고요히 지나가는 ‘첫 집’ 같은 ‘끝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쉬이 첫 시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시인과 줄곧 함께해온 한 단어 때문이다. 다름 아닌 ‘밥’이다. 정우영의 시 속에 모여 살던 사람들은 밥 때문에 살았다. 둥그런 밥상을 둘러싼 사람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자, 밥상과 제사상이 번갈아 차려지기도 했다.
시가 뭔지도 잘 몰랐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시가 백무산의 「노동의 밥」(『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이에요. 첫 구절이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인데, 읽는 순간 전율이 일었어요. 도대체 이 밥은 어떤 밥인가 싶었지요. 제가 살던 시골에서는 아무리 가난해도 밥을 굶지는 않았거든요. 밥에서 피를 떠올리지는 않았거든요. 농사짓다가 다쳐도 피가 철철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백무산 시인은 밥에서 피를 본 거지요. 피의 밥인 거예요. 제가 시골에서 자라면서 알게 된 밥과 백무산의 밥은 완전히 다른 밥이었어요. 이 충격이 제게서 ‘밥’을 계속 끄집어낸 것 같아요.
‘밥’에 대한 시인의 상상력은 최초에는 백무산 시인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밥’은 “숨어서 먹는 밥”이었다. “동지들이 피와 땀을 팔아/어렵게 어렵게 끓여준 밥”이자 수배자의 “목맺히는/숨은 밥”(「수배자의 밥」)이었고, “흘린 밥 한 톨도 안타까워 입에 넣”(「순남이 아재」)었다. 또한 임실역에 모여 “이마에는 ‘쌀 개방 절대 불가’ 빨간 글자 현수막”(「임실역: 전라선 1」)을 써 붙이고 ‘밥’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다 죽은 자에게 밥을 건네고 나눔으로써 백무산 시인의 ‘피가 도는 밥’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세번째 시집 『살구꽃 그림자』(실천문학사 2010)의 「밥집, 담아에서」에 등장하는 “하얀 밥”은 고인이 된 박찬 시인을 불러내어 건네는 밥이다. 네번째 시집 『활에 기대다』(반걸음 2018)는 마지막 시가 「상향(尙饗)」인 제의적 시집인데, 이 시집에서 시인은 “이 밥 먹고 너는 이제 하염없이 즐거워져라”(「마지막 밥은 노래로」)라고 쓰고 “나와 너의 밥은 누군가의 목숨으로 따뜻하다”고 적는다(「더운 밥」). 이렇듯 시인은 점차 피땀과 울분이 어린 절박한 밥을 넘어 누군가를 애도하고 위로하는 밥을 그린다. 그리하여 이전까지는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일요일이에요」, 『활에 기대다』)고 헛헛했던 마음이 이번 시집의 「햇살밥」에 이르러서는 “푸지게 담”긴 “햇살”로 충만해진다.
「햇살밥」은 ‘밥’에 대한 정우영 시인의 시적 사유가 절정을 이루는 시이다. “저이는 어찌 저리 환할까”? 그 비결은 “햇살”이다. 마음의 그늘과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햇살”을 “고봉”으로 담아서 일년 내내 맛있게 먹는다. “저 햇살들”은 “자연의 찬란한 햅쌀들”이다. 그래서 “저이”는 매일 환하다. “함께 사는 소양이”와 “마당 그득히 쏟아지는 햇살 듬뿍듬뿍 받”아먹는다. 계절별로 진수성찬이다. 이 자연의, 이 대지의 양식들로 배가 터질 듯이 부르다. “햇살” 양식들이 마음의 곳간마다 가득하다. 누구에게나 마음껏 나눠주어도 곳간은 언제나 다시 채워진다. 대지가 가르쳐준 비밀이다.
「햇살밥」은 김용만 시인의 집을 배경으로 쓴 시예요.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때 보았던 고양이와 산속 풍경, 푸진 햇살이 한 장면으로 밀려와서 굉장히 쉽게 쓴 시죠. 이 시집의 초고는 이제까지의 시집과 같이 제의적 성격이 강하고 어두웠어요. 하지만 출간을 앞두고 보니 이번 시집에서만큼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살아가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산 자가 죽은 자를 경배하는 모습 말고요.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햇살밥」이 눈에 들어왔고, 그 시를 서시로 옮기니까 시집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생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어 모두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인 ‘햇살밥’이 시집을 환하게 만들었죠. 제 시에 동원되었던 많은 ‘밥’이 지금의 ‘햇살밥’이 되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햇살밥’을 말하는 시인의 표정은 환하고 맑았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산다는 것,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 그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시 속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을 ‘밥’ 시편들이 보여준다. 밥은 산 자와 죽은 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일상을 견딜 힘을 준다.
2. 시공간의 재구성
한 사람이 생을 지워 또다른 시간 속에 접어들었음을. 그리하여 이제는 갈라진 우리의 시공간을 한꺼번에 껴안고 돌아가는 것 아닐까요.
—「뻐꾸기시계」 부분
정우영 시에서 ‘시간’ 개념은 여러 의미로 확장되어왔다. 첫 시집에서의 시간은 정지된 시간이다. 오래된 임실역 벽에 붙박여 있는 “괘종시계”(「임실역: 전라선 1」)는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었다. 두번째 시집 『집이 떠나갔다』(창비 2005)에서는 “시간의 그늘” 속에서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거나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생강나무」) 그것은 인간의 시간만이 중심이 아니라는 발견이었다. 그다음 시집을 살펴보면 시간은 주름과 그늘을 경유한다. 시인은 기억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 고향집 살구나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이때 시인이 도달한 시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구분이 별 의미 없다. 주름처럼 접힌 그늘의 시간을 다시 펼치기도 하면서 살구나무의 그림자를 벗어난 새로운 시간을 발견한다. 이것이 이어진 시집 『활에 기대다』에서 “뒤엉킨 시간”(「뒤엉킨 시간의 역사」)으로 표현되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여기까지 오면서 중첩된 모든 “시공간을 한꺼번에 껴안고 돌아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즉 시인이 “또다른 시간 속에 접어”(「뻐꾸기시계」)든 셈이다. 이 시간은 우리에게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저것이 무언가. 용인 송담대역 주변, 손 닿기 어려운 도로가. 걸레 같은 게 뭉쳐져 있다. 가까이 스치며 바라보니 이런 이런. 처참하게 으스러진 한마리 새끼 고양이.
(…)
슬픔이 솟구치기 전 태초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일까. 저 어린것이 무서운 기세로 사라지고 있다. 지나가는 차들 끌어들여 제 흔적 말끔하게 지우며.
후텁지근한 거릴 바람이 이파리 물고 건너간다. 새끼 냥이라도 되는 것처럼 싸목싸목 궁뎅일 쳐들고.
—「바람이 궁뎅일 쳐들고」 부분
로드킬당한 “새끼 고양이”가 자기 흔적을 지우며 넘어간 세계, “바람”이 “새끼 고양이”와 한 몸이 된 너머의 세계를 두고 시인은 “시공간을 뭉뚱그려버리는 시적인 한순간”이라고 말했다. 「전서구」(『살구꽃 그림자』)의 비둘기는 바람과 같은 존재의 등장 없이 그냥 소멸했지만, 이 시에서는 다르다. 바람과 고양이가 한 몸이 된다. 시인은 이를 “동지적 일체”나 “영성의 일체”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번 시집에서는 시공간을 압축하거나 시간을 재구성하고 중첩하여 또다른 시간 속으로 들거나 “시공간을 닫아걸”(「흉내쟁이 인간들」)고 초월하는 일이 전작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활기차게 펼쳐진다.
‘문턱’과 ‘문지방’은 시간의 의미를 고민해온 시인에게 내내 중요한 시적 상징이다. 「문턱」(『집이 떠나갔다』)을 살펴보면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기준은 “목숨이 아니라 문턱”으로, 아직 저쪽으로 온전히 넘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밤마다 문턱에서 솟구쳐나와”서 “서럽게 흐느끼다 돌아간다.” 시인은 그저 “숨죽인 채 듣고 있을 뿐”이다. 「시간의 주름」(『살구꽃 그림자』)을 들여다보면, 여기서 “문지방”은 “시간의 주름” 속에 접혀 있어서 넘어가지 못하는 경계, 금기, 정확히 알 수 없는 슬픔의 진원지였다. 그래서 “문지방”은 축축한 통증의 장소이거나 “낯선 얼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그러나 동시에 이쪽이기도 하고 저쪽이기도 한 영역”으로 아직 고통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 젖은 곳이었는데, 이번 시집에 이르면 시인은 그 젖은 ‘문턱’을 마침내 넘어간다.
사람마다 선명한 기억들이 다르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 본 장례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윗목에 병풍 치고 모셔둔 관을 들고 나오면서 문지방에 놓인 박을 짓밟아 깨뜨리는데, 그 순간이 저는 너무 슬펐어요. 박이 깨지는 소리가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지금도 가끔 들립니다. 나중에 커서 되짚어보니까 그날이 어머니 장례였어요. 모성을 완전히 빼앗기는 순간이었죠. 그래서 문지방이 제 시의 강렬한 상징으로 남은 것 같아요. 결국 문지방은 삶과 죽음의 경계인 거예요. 문지방을 넘어가면 사라질 것들, 그것들을 붙잡기 위해 계속 문지방이라는 경계를 지우려고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귀나무 꽃그늘」이라는 시에서 시인의 기억 속 장례를 언뜻 살펴볼 수 있다. 시에서 상출이네 “아버지 염”을 할 때, 먼저 돌아가신 상출이네 어머니가 와서 “문턱 넘는 아버지”를 맞이한다. 어렸을 때 본 장례 장면을 여전히 변주하는 시인은 아직도 어머니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그에게 모성 상실의 상징적 장소인 ‘문턱’은 고통과 원초적 슬픔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 슬픔이 끊임없이 이월되는 장소이다.
전북 임실은 시인의 고향이자 시적 원형의 공간이다. 임실이라는 장소는 시인이 직접 겪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여러 의미망으로 펼쳐지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첫 시집에서 임실은 “시간은 회칠벽 괘종시계에 붙박여서 멈춘 채 움직이질 않고, 기차가 오지 않는 철길 저켠에서 눅눅한 먼지로만 절어 있는 곳”(「임실역: 전라선 1」)으로 소환된다. 이때의 임실은 시인에게 정지된 시간이자 멈춰버린 절망의 장소이다. 두번째 시집에서 임실은 아버지의 죽음을 맞는 곳이다. “문득 서까래가 흔들리더니/멀쩡하던 집이 스르르 주저앉았”고 모든 빛을 잃게 된다. 그리하여 고향을 떠나온 시인은 “집이 떠나갔다”(「집이 떠나갔다」)고 말한다. 이후 시집 『살구꽃 그림자』에서는 ‘살구나무’가 고향의 표상이 되면서 임실은 “시간의 주름”이 만들어낸 “허공에 지은 집의 잔상들”(「시간의 주름」)만 가득한 곳이거나 ‘시간의 그늘’이 만들어낸 “아주 오래된 폐허”(「시간의 그늘」)로 남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 이르면 임실만의 독자적인 장소성이 드러난다.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서사와 장소애가 「하굣길」 「하얀 저고리」 「귀성객」 「작은고모」 「하나씨」 「노랑나비 한마리」 등에 서늘하지만 따뜻하게 담겨 있다.
저는 ‘사투리’라고 하지 않고 ‘고장말’이라고 합니다. 사투리라는 말에는 표준말은 옳고 사투리는 촌스럽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이렇게 부를 만큼 제 시에서 고장말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잊어서도 잃어버려서도 안 되는데 어느새 뒤처져버린 시공간을 고장말로 불러내는 것이지요. 사실 제 시가 자꾸만 임실로 향하는 것이 한동안 콤플렉스였어요. 그래서 언젠가 김종철 선생님께 제 시에 자꾸만 임실이 어른거리는 이유를 여쭤보았지요. 선생님은 “근본이니까”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셨어요. 근본! 그러니까 임실이라는 시공간이 제 시의 근본이었던 거예요. 임실은 단순한 고향이 아니라 대지이고, 대지와 함께하는 농본이고 농민이며 농사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그로부터 시작되니까 제 시의 눈이 임실로 향하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다고 선생님은 저에게 일러주신 거지요.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은 근본을 중심에 담은 결실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임실이라는 제 문학의 근원적 토양과 고장말을 시와 몸에 새긴.
「하얀 저고리」는 시인의 가슴 한켠에 묵직하게 자리한 공간인 “독바우”를 매개로 쓰인 시다. 어린 화자가 “독바우” 앞을 지날 때면, 목을 맨 “그 각시”의 “하얀 저고리”가 자꾸만 나풀거려서, “대낮에도 발목까지” 휘감겨와서 “하나도 안 무섭다아” 소리치며 내빼곤 했었다. 피하고 싶지만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했던 독바우. 어느날 “동네에 버스가 들어오면서” “통째로” 지워져버린 독바우. “어머니 묘를 이장한 다음 날 밤”에 “오십년도” 더 넘어 화자에게 찾아온 그 하얀 저고리가 “집에 가자. 우리 집에 가자. 하도 간절해서” 들쳐 업었다. 그 순간 무겁던 하얀 저고리는 “점점 가벼워”져 “그는 이제 여기서 나를 살고/나는 가서 그를 살게 되는” 경지를 열어준다. 하얀 저고리는 시간의 공기를 타고 시인에게로 와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준 중요한 상징이다. “집에 가자”라고 할 때의 “집”은 단순한 집 이상의 의미일 것이다. 온갖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모여 밥을 먹고 흩어지는 곳이다. 시인의 문학적 본류인 임실이라는 장소는 정적인 시간에서 입체적인 시간으로 변모하면서, 그 시간 속에 시인이 머물던 장소들도 더욱 특별한 곳이 된다.
3.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이번 시집에서 정우영 시인은 “밤새 큰 눈이 내렸다. 집과 길, 여기와 저기의 분별을 지웠다. 풍경들은 다만 새하얗고 펑퍼짐한 경계선을 그릴 뿐”이라며(「고요야 까마귀야」), “아니, 혼령들이 넘지 못할 데가 어디 있어요”라고 묻는다(「훨훨」). “개천의 해오라기도 훌쩍 돌아가고 경계를 집어삼킨 뭇별들 퀭합니다”(「흐르는 별들이 내리는 곳」)라는 표현에서도 분별이나 경계를 지운 세계가 그려진다. 그것은 이쪽이면서 저쪽인 세계, 저쪽이면서 이쪽인 세계, 그 ‘너머의 세계’(「너머의 세계」)를 말한다. 너이면서 나인 세계, 인간이면서 비인간인 세계, 비인간이면서 인간인 세계. 그러나 현실은 그런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경계나 분별이 만들어낸 참혹한 세계이다.
소와 돼지 수백만마리가 산 채로 땅속에 묻혔다.
닭과 오리 수천만마리도 땅 밑으로 끌려 들어갔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람들은 지상에 남은 동물들,
싱싱한 살과 뼈를 열심히 발라 먹고 끓여 먹었다.
(…)
사람 같은 형체들이 찢긴 공간으로
우 쏟아져 내리기 전까지는.
지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떨어진 인체들 몰골이 끔찍했다. 희끗희끗 풍화된 주검들은 철사에 꿰인 것처럼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데 그 속에서 피리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혼란에 빠졌던 매몰자들은 이윽고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너머의 세계」 부분
인간의 무분별과 욕망이 소와 돼지와 닭과 오리를 “산 채로 땅속에 묻”었다. 우리와 함께 생명을 나누며 살았는데, 싱싱하지 않다며 생매장했다. 나는 너였는데, 너는 나였는데, “서로가 빛이었고 공기였”는데 모두 죽이거나 잡아먹었다. 이제 지상에는 무슨 일이 더 벌어질까. 매일 두렵다. 어리석은 우리가 지구 멸망의 날을 매순간 앞당기고 있다. 우리가 만든 구덩이, “매몰자들”, 셀 수도 없는 사건과 사고, 곧 다가올 무시무시한 세계. 그 “찢긴 공간으로” 우리가 사라져버린 뒤 우리를 대신할 괴물들이 성큼 다가올지도 모른다. 혹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인간만 남는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충분히 넘치는 우리가, 끝없는 허기로 무엇이든 집어삼킬 것이다. 지금 지구는 온통 빨간불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일종의 계시록으로 읽힌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이 초래한 끔찍한 멸망, 참혹한 죽음을 기록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는다. 시인의 생태적 전환의 사고는 죽음으로써 삶을 다시 일으킨다.
요즘 ‘영성’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종교적인 ‘영성’과는 다른 의미로서요. 인간은 우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금 독특한 생명체가 아닐까 싶어요. 대부분 일백년도 살지 못하는 이 유한한 생명체가 거꾸로 무한한 우주의 본성을 탐구하잖아요. 우주가 어떻게 생겼지? 우주는 뭐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이렇게 우주와 교감하면서 인간으로서, 영성을 가진 존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우주가 나한테 무언가 요구한다면 그것을 우주에게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영성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는 게 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게 제가 시를 열심히 쓰는 이유이기도 해요. 세상이 나를 키운 의미가 여기에 있구나 싶으니까 소멸의 공포로부터도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일 거예요, 죽음을 생명의 새로운 씨앗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죽음을 언제까지나 죽음으로 둬서는 안 된다고 봐요. 죽음을 기어이 생명으로 바꿔낼 때, 죽은 존재에게서 삶을 발견할 때 비로소 시는 의미를 갖는다 생각해요.
우리는 매일 다른 생명체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것이 비극을 만든다. 어떤 비극은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 같은 일은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최악의 폭력이자 영성의 무자비한 훼손”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자연의 마음, 대지의 마음을 회복한다면 비극을 줄일 수도 있다. “생존의 벼랑에서 솟아오르던 풀”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인간 이전의 그 오랜 양식”이자 “생체 에너지”(「쑥」,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를 다시 갖춘다면. ‘너’가 되겠다는, ‘너’의 아픔에 동참하겠다는 마음이 서로를 살릴 것이다. 몰락의 바다에서 우리를 건져낼 것이다.
너를 따라갈 수 없는 꽃잎들,
화르르 번져가는 어제에게
내가 대신 가 있겠다.
너는 재잘재잘 돌아와 오늘을 익혀라.
새침하고 다감하게.
내일을 묶은 통증들 기척으로도
실어 가지 않으리. 슬픔이 밀어 올린
새잎들로 부산스러운 아침.
순둥순둥 눈빛들 팔랑거린다.
잘 깨어났다, 아이들아.
환희를 뿜으렴.
—「연두」 전문
참혹한 비극 속에서 스러져버린 아이들에게 우리는 어떤 해원(解冤)의 노력으로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이 지상의 환한 봄날에 핀 꽃잎들이었던 아이들에게 오늘을 잘 “익혀”서 깨어나라고, “새잎들로 부산스러운 아침”에 “환희를 뿜”고 살아나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영계(靈界)”와 “철없는 시공간”을 넘어 “울고 웃고 떠들며 악몽을 씻으라”고, “여기”(「여기가 온통 네 집이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 다시 살라고, 우리 속에서 우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 살자고 해원의 노래를 부른다.
4. ‘낮은 목소리’ 곁에서
그간 정우영 시인이 쌓아올린 시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낮고 작고 희미한 존재들과의 끊임없는 연대와 공감이다. 시인은 언제나 귀를 쫑긋 세우고 온갖 만물의 기척에 다정다감하게 반응했다. 그러한 태도는 “사람만이 이 땅의 희망인가/사람의 마음만이 세상의 중심인가/그렇다면 세상의 변두리에서 오히려 중심이 되는/저 모진 생명들은 다 무엇인가”(「사람만이 희망인가」, 『집이 떠나갔다』)와 같은 구절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며 낮게 흐르는 목소리를 따라나서는 그의 시적 여정에서 ‘귀’는 중요하다.
보는 건 일방적이잖아요. 상대가 보지 않아도 내가 보면 보는 거예요. 하지만 듣는 건 달라요. 상대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듣고 있다고 할 수 없죠. ‘너’가 없으면 성립 불가능한 게 ‘귀’인 거예요. 귀를 통해서 상대를 감각하면 나의 상상력을 온통 열어젖힐 수 있어요. 듣는 행위를 통해 제 시적 공간이 확 열리는데 이때 저는 어떤 환영을 봅니다. 이때의 ‘환영’에는 맞이함과 환각(illusion)이 함께 엉켜 있습니다. 실재와 비실재, 존재와 비존재의 결합이 환영에는 들어 있지요. 이런 것들을 발견하면서 저도 모르게 시 속에서 귀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는 게 아닐까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시인이란 잘 봐야 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가 오롯하게 살아 있으려면 분별하고 경계 짓는 우리 안의 ‘눈’과 싸워야 한다. 어지럽고 낭비되는 눈빛들을 하나씩 소등하고, 온전하게 살아 있는 존재들의 여린 음성까지 들을 수 있도록 귀를 한껏 열어야 한다. 정우영 시인은 온갖 기척을 알아듣고 진심을 다해 당신의 심장에 다가가는 귀이자 한없이 열려 있고 가장 나중에 닫히는 귀다. “희미하게 환한 저 끝집”(「끝집」)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소리를 잘 들으려고 오늘도 몸을 한껏 낮추는 시인의 모습은 바닥으로 가라앉는 작은 먼지 같기도 하다. 그 먼지가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세상 가장 멀리까지 가는 시이지 않을까. 멈춘 시공간인 괘종시계에서 벗어나 시공간을 휘돌아 나온 뻐꾸기시계의 시간 속에 있는 시인이 그 먼지의 노래를 계속 불러주기를 희망해본다.(2024.4.4. 창비서교빌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