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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없는 사람’에 감응하기

 

 

황규관 黃圭官

시인. 시집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등이 있음.

grleaf@hanmail.net

 

 

강우근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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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의 첫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에서 유독 눈에 띄는 점은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물들의 등장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들. 스케치북, 민무늬 탁자, 우산, 목욕탕, 주전자, 연, 도화지 등등. 그리고 시인의 주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조카, 아버지, 엄마, 친구들이 살고 있다. 시인이 이런 존재들과 얼마나 친밀한 감정을 느끼는지는 시에서 ‘우리’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먼저 시집에 등장하는 사물들과 주위 사람들, 그리고 시인이 그들을 부르는 호칭을 언급하는 것은, 그것(그)들이 강우근의 시를 읽기 위한 입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좀더 솔직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 시에서 자주 보이는 괴이쩍은 신조어들과 외래의 이름을 가진 사물들이 주는 피로감을 강우근의 시에서는 느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부정 방식의 평가일 뿐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읽기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낯선 신조어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외래어들이 시에서 빈번하게 호명되는 것일까? 단지 직관에 기대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양식이 그만큼 제국적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있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상품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은 땅과 하늘, 신적인 것들과 죽을 자들을 머물게 한다”1고 한 적이 있는데, 사물은 상품과 달리 강요된 제작물이 아니며 사물을 있게 하는 땅과 하늘, 신적인 것과 인간의 눈빛을 담고 있다. 만일 사물 자체에 능동성과 창조성이 있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에는 이런 생동하는 사물들이 빼곡하다. 하지만 사물들의 나열 혹은 출현 자체만을 언급하고 마는 것은 여전히 미진한 평가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강우근이 사물들과 맺는 관계 양식이며 사물들을 접하면서 형성된 마음의 모양 혹은 무늬를 살피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시집에는 ‘마음’이라는 시어가 자주 등장한다. 다만 ‘마음’에는 물성이 없어서 그것 자체를 검토하는 일은 자칫하면 심리 분석으로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시는 존재하는 사물을 통해 시인의 마음을 언어화하는 것 아니던가?

가령 「물고기 숲」 같은 시의 경우 “숲을 이루는 나무들의 수많은 잎”이 “물고기가 되어서 헤엄을 치고” 있는데, 이때 “잎”이 “물고기”가 됨으로써 “숲”은 역동적인 에콜로지(ecology)의 장(場)으로 화한다. 이 물고기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가 되어가고, 튀어오르면서 “자신이 어디까지 갈지 시험하고 싶어”한다. 이런 활발한 움직임들은 “숲의 범위”를 늘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범위는 애초에 정해지지 않았다. “꿈속의 공간이 제약 없이 이루어지듯이” 무제약적이며 “그저 가보지 않은 곳으로 유영하면서 영원”을 창출해낸다. 여기서 “영원”은 시간적 의미라기보다 잎들의 활동이 모여 이루는 제약 없는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한계나 경계를 갖지 않는 것은 실제로 무(無)에 가깝지 않은가? 우리는 한계나 경계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으니 말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영원”은 물고기가 된 나뭇잎들의 멈춤 없는 움직임을 표현한 것이며, 이때 “사람들은 숲에서 길을 자주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

「물고기 숲」은 근래에 만난 소위 ‘생태시’ 중 독특한 진경을 이룬 작품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숲에 도달”한 화자가 몸으로 꾸는 꿈 같다. 명시적으로 진술된 것은 아니지만 “꿈속의 공간이 제약 없이 이루어”진다는 대목이나 “가꾸어지지 않은 숲이 무슨 꿈을 꾸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같은 도입부에서 지금 화자가 꿈을 꾸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 꿈은 몽상이 아니라 어떤 바람〔願〕에 가까우며, 그렇지 않고서는 시가 환상성과 역동성을 동시에 갖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잎이 물고기가 되고 그 물고기들의 활발한 유영이 숲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은 단지 참신한 시적 비유의 문제가 아니라 ‘시의 마음’에 관한 것일 게다.

이렇듯 강우근의 시에는 시인이 직접 느낀 사물들의 촉감이 급류 없는 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다람쥐가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가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양팔을 벌린 채” 뛰는 괜한 행동이나(「다람쥐가 있던 숲」) “할머니가 죽은 후에도 주전자엔 생명이 깃들어 있다”(「주전자가 할 수 있는 일」)는 읊조림 등은 시인이 언젠가 또는 어디에서인가 느낀 감각이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직접적인 주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읽는 이의 마음을 사물의 세계에 ‘가만히’ 놓이게 하는 것도 시인이 자신의 몸에 살고 있는 감각을 ‘시의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몸의 감각이 부재한 마음이란 일종의 자기 환영일 텐데, 그는 이미 “흰 도화지 같은 공허”(「점선으로 만들어지는 원」)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침을 “가장 어린 새”가 “가장 늙은 새”로부터 “영혼”(「비행하는 구름들」)을 이어받는 시간으로 파악하는 플라톤적 시선은 ‘새’에 대한 예민한 감각 없이는 얻기 힘든 것이다. 강우근의 시가 신뢰를 주는 이유는 “흰 도화지 같은 공허” 속에서도 영혼이 유전된다는 비상(飛上)의 기운이 그의 시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명윤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걷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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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재현에 충실한 서정시에 대한 정당한 비평이 무척이나 인색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아직도 그런 서정시는 그치지 않고 창작되는 중이다. 전통적인 서정시가 시적 대상을 서정적 자아에 폭력적으로 동일시한다는 비판도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시는 (짓기의 주체인) 시인에 의해 창작되기 때문에 어떤 시가 됐든 시인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시가 시인의 소유물이라는 뜻이 아니다. 시인의 자아 또한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시인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시를 대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시인이 자신의 자아를 사유화하는 것이다. 사유화된 자아만이 현실 또는 시적 대상을 폭력적으로 굴복시키거나 그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의 심리상태를 대신하게 한다. 어쩌면 자아의 사유화는 자본주의 상품경제가 왜곡되어 내면화된 현상일 수 있다. 극단화된 자본주의는 자아의 울타리를 더욱 강화하는데, 이는 자본주의가 원자화된 개인을 만들고 또 선호하는 역사적 현상과 정확히 겹치는 문제다. 그렇다면 자신의 자아를 부단히 개방하면서 이 같은 문화에 저항하는 서정시는 어떨까.

이명윤의 세번째 시집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속 시적 자아는 “모든 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만 깃들어” 있는 현실에서도 “세상을 엿듣고”(「귀」) 있다. ‘보다’와 ‘듣다’가 각각 어떤 인식구조와 정서상태를 형성하는지는 사실 과학에 맡길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시의 입장에서 숙고해볼 문제다.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뇌과학에서는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음파를 정보로 환원해서 접근하겠지만, 시의 입장에서는, 특히나 시를 읽는 입장에서는 그것들이 단순히 정보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인이 보고 들은 것은 시인의 정신과 감성구조를 통해 정보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의미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정신과 감성은, 비유하자면 물렁물렁한 흙반죽 같은 것이기에 ‘구조’처럼 딱딱한 언어로 표현될 수 없으며, ‘보다’와 ‘듣다’가 시인의 정신과 감성의 변화에 참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엄밀히 말하면 작품으로서의 시는 그 변화 자체가 언어화된 경우이다.

시의 발생 과정을 도식화해보면, 감각이 정서의 변화를 촉발하고 그 변화의 방향에 시인의 정신과 실존상태와 역사(시대)적 현실이 참여하는 것이다. 시는 이와 같은 것들이 번개처럼 동시에 작용하면서 터져나오는 일에 가깝지만, 한편으로는 시인 자신의 경험이나 유전된 문화와 정신 등을 바탕으로 하는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몸으로 얼마만큼 깊이 받아안느냐일 것이다. 시에 생동감을 주는 것은 이런 사태들을 향해 열려 있는 시인의 몸이다. 그랬을 때 흙반죽은 그대로 굳어버리지 않고 변형을 통해 더 많은 숨골을 갖게 되지만, 이런 운동을 멈춘 내면이 쏟아낸 시에 대해서 우리는 상투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윤의 이번 시집은 도그마화된 서정시와는 결을 달리한다. 「고라니가 우는 저녁」에서 “사람의 울음을 고라니가 우는 저녁/몸속 울음들이 온통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고 한다거나 사랑의 감정을 “산산조각”으로 공중에 걸어두고 살겠다는 비극적(하지만 차라리 기쁨의 감정에 가까운) 파토스(「사랑」), 또는 「그 동네 가로수 길」에서 보여주는 사이와 거리에 대한 깊은 발견 등은 이번 시집을 한층 밝게 해주는 모닥불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사랑」에서 “산산조각의 감정이 공중에 있”으며 그 “공중의 감정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한다”는 발화가 단지 새로운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의 문제성이다. ‘사랑’은 감정을 단단하게 뭉치게 하는 것인데, 시인은 반대로 ‘사랑’을 “산산조각”이라고 규정지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사랑의 감정이 “공중에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제는 어제의 산산조각을 오늘을 오늘의 산산조각을 살아야 한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사실 단단해지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의 결과가 아닐까? 타자를 자신의 감정 안에 가두면 가둘수록 사랑은 행동이 아니라 감정으로 축소되며 그만큼 관계를 왜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산조각”은 어떤 사랑을 가리키는 것일까.

「눈사람」에서 시인은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고 하거니와 그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마술에 걸린 사람”이다. 그 사람은 “우리의 세계를” 바라보며 날씨를 만들고 홀로 노래도 부른다. 스스로 ‘없음’으로써 “눈부시게 완성”된다. 시의 마지막이 “눈부시게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능동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되는’ 존재가 바로 “없는 사람”이다. 기실 우리는 너무도 오래 그리고 깊이 능동적인 존재로 살아왔지만 ‘능동’은 주체의 지배 의지가 만들어낸 환영에 가까운 심리일지도 모른다. 눈은 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빛의 수동적 응축일 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생명은 능동성에 앞서 수동적 종합을 전제로 한다. 이렇게 이명윤이 발견한 “없는 사람”은 스스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완성‘되는’ 존재이며 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우리(“사람”)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명윤의 시에서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모든 불이 꺼지고 칠흑 같은 어둠만 깃들어 차갑게 숨이 식어 가는 빈집에서 귀는 끝내 고집을 부리며 저 홀로 남아 도둑고양이처럼 세상을 엿듣고 있다고 한다.”(「귀」) 이 진술은 아무리 읽어도 시인의 경험이 짙게 배어 있는 것만 같으며, 지금 시인은 “없는 사람”을 몸으로 느끼는 중이라고 단언해도 좋다. 그 물증을 더 들 수도 있다. 「곡소리」에서 “물기 마른 곡소리”에 현기증이 일면서도 그 “곡소리”가 “하늘길을 간다”고 하거나 「묵념」에서 “귀신도 모르게” 귀신을 보는 것은 시인이 얼마나 “없는 사람”에 감응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처럼 “없는 사람”은 ‘있는 사람’을 무의미로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그 존재자성을 더 타오르게 한다. 또다른 가작(佳作) 「검게 타 버린 생각들」은 슬픔의 감정을 주면서도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삶의 지속성을 확인시켜준다. “순식간에 사라진 세계 앞에” “치매라도 걸린 듯” 나무는 “주저앉아 있”지만 동시에 “하염없이 마을의 집들을/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국적 질서의 강요를 넘어

 

자본주의 문명이 불러온 미증유의 생태계 파괴는 결국 기후의 카오스적 변화를 야기했고 그로 인한 피해와 신음 소리가 점점 깊어지고 있다. 물질적 팽창의 극단화는 이제 인간의 정신과 언어마저 상품화하고 있으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상품화된 언어의 덫에 걸려 있는 형국을 맞았다. 만일 우리가 상품이 된 언어를 필요에 의해 구입해 사용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정신의 비소(卑小) 현상은 쉽사리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국가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적 장벽을 무시하는 균일한 삶의 양식과 환경이 구축되고 있는 게 그 원인이라고 지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본에 의해 그 ‘진보’가 추동되는 과학기술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의 언어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은, 전지구적으로 비슷한 구조와 상품 진열대와 교통체계와 무선 통신망으로 뒤덮인 대도시들에 갇혀 살기 때문일 것이다. 생활의 변화는 언어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대도시들이 주로 하는 일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지 사물을 생성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만일 이 진단이 사실과 크게 동떨어지지 않다면, 과연 시는 어떨까? 인공지능(AI)에 항복하는 게 ‘진보’라고 생각하는 아포칼립스적 상황 속에서 말이다.

강우근과 이명윤의 시집이 반가운 것은, 오늘날 우리의 문화가 버캐 같은 존재들과 현상들에 휩싸인 채 그것을 충실히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현대성’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퇴폐적인 현대성은 제국적 생활양식 자체를 문제 삼지 않거나 문제 삼더라도 제국적 문화가 양산한 언어로 그렇게 하면서 그 병증을 깊게 한다. 적의 언어를 전유해 적을 사유하고 적과 투쟁한다? 하지만 사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게 문제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가 적의 언어라는 사실이 언제나 자기 살을 베는 상태가 아니라면 애당초 적의 언어는 싸움의 대상이어야 한다.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이 자신의 평생을 지배한 제국의 언어인 일본어에 복수하려고 일본어로 시를 쓰는 것은 아주 희귀한 예이며 김시종의 경우처럼 목숨을 건 투쟁이나 도약이 없으면 자칫 허울 좋은 문화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강우근과 이명윤에게도 어떤 부정적인 그림자가 설핏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일종의 쇄말성(瑣末性)과 소시민성이다. 요즘에 이런 말을 잘 쓰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이 제국적 생활양식에 절어 있어서이지 그것들이 극복돼서가 아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시대의 그리스적 명랑성에 대해 “어려운 것을 책임지지 않고 원대한 꿈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나간 것이나 미래에 올 것을 현재 있는 것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는 노예의 명랑성”2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런 진지한 지적을 듣지 않으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같다. 명랑과 즐거움마저 상품화된 세상인데도 말이다.

 

 

  1. 마르틴 하이데거 『강연과 논문』, 신상희 외 옮김, 이학사 2008, 229면.
  2.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9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