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다시 개혁의 고비에 서서
지구온난화 탓인지 여름 무더위도 갈수록 길다. 경기침체까지 계속되다보니 국민들의 불쾌지수가 어느 때보다 높다. 거기에 지루하게 이어지는 정치권의 ‘국가 정체성 공방’마저 겹쳐 짜증을 피할 도리가 없다. 총선 후 정치권이 앞장서 ‘상생정치’를 한다며 ‘새정치 협약’까지 맺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구태의 반복이다. 총선 결과로 나타난 개혁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을 생각하면 전체적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느낌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분단체제가 흔들리면서도 분단시대가 지속되는, 이 각별한 시기에 걸맞은 개혁의 큰 밑그림을 마련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설득력있는 모델을 가졌다면 개혁이 다소 지체하더라도 결코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며, 현 싯점에서 가능한 개혁을 훨씬 치밀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분단고착을 전제로 삼았던 박정희식 발전모델을 넘어서는 상이 없기 때문에 구시대의 기득권세력이 그들의 낡은 주장을 ‘국가 정체성’으로까지 포장해가며 기승을 부린다. 실은 ‘국가’가 마치 인격체인 양 ‘정체성’을 지닌다는 발상 자체가 오늘의 사회과학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더구나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하면 곧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가 된다는 생각은 일제의 ‘국체(國體)’ 개념을 은연중 활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혁을 추진하는 쪽에도 문제는 있다. 원래 정치판에서는 어떤 문제가 야기되건 정략적 접근이 아예 없을 수 없는데, 정략적 이용에 과잉반응하다보면 오히려 논의 수준을 정쟁 차원으로 떨어뜨리는 데 일조하기 쉽다. 개혁을 갈망하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되는 일 없이 소모적인 방식으로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사이 늘어나는 것은 불신과 분열이다.게다가 이라크 추가파병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이런 굴욕적인 처지에서 벗어날 장기적인 처방이라도 내놓고 국민을 설득해야 할 텐데, 정부는 마침내 자이툰 부대 일진의 출발을 비밀에 부치면서 구시대적 언론통제를 부활시키기까지 했다.
‘국가 정체성 공방’의 한 빌미가 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정에 대해서도 아쉬움은 있다. 이 위원회가 공권력의 부당한 인권침해를 확실히 밝히되 민주화운동 여부는 예컨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에 조회하는 등의 좀더 신중한 접근을 했더라면 불필요한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 수구세력의 구태의연한 인권불감증, 반공중독증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을 놓고 특정인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몰고 가면서 끝내는 ‘국가 정체성’ 공방으로 둔갑시키는 작태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거청산’이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남발함으로써 말꼬리를 잡히고 정서적 반발을 일으키는 문제도 생각해볼 일이다. 엄밀히 말해 과거의 역사는 ‘청산’하려 한다고 ‘청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제출된 법안은 누구를 처벌하거나 ‘청산’하자는 내용도 아니다. 뒤늦게나마 진실을 규명해서 우리의 인식과 자세를 가다듬자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조차 반대하는 낡은 세력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명분없는 정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런 식의 갈등과 혼란은 분단체제가 와해되어갈수록 더욱 많아질 터, 우리는 이를 어느정도 불가피한 사태로 차분히 받아들이면서 개혁을 온전히 성취하고 분단체제보다 나은 사회를 한반도에 만들어낼 수 있도록 우리 나름의 큰 그림을 갖고 결연하면서도 유연한 실행에 나서야 한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각계각층의 정성과 지혜가 모여야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창비는 남이 대신하지 못할 하나의 몫을 맡았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우리 할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려고 한다.
이번 특집 ‘변화하는 시민사회와 새로운 민중운동’도 그런 다짐의 일환으로 계획했다. 한기욱(본지 편집위원)과 하승창(‘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의 대담 「시민운동과 민중운동, 이대로 좋은가」는 지난호 좌담 「4·15총선, 민주노동당, 그리고 시민운동」을 이어받아 다소 미진하게 논의되었던 시민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탐사한 것이다.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으로 갈라서 보았던 그동안의 구분법을 문제삼으면서 구체적으로 빈곤문제와 반전평화운동 등 접점을 이루는 영역들을 통해 상호연대 및 변화가능성을 모색하고, 아울러 새로운 시각에서 상호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생각해볼 수 있게끔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등 부문별 민중운동을 다룬 세 편의 특집글은 각 운동영역의 상황을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변화된 오늘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모색해야 할 지점들을 적절히 예시해주고 있다. 김종엽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형성된 노동체제로부터 97년 노동법 재개정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는 노동체제의 구조적 과정을 분석하며, ‘너무나 더딘 산별노조 건설’로 인해 노동운동은 ‘87년 노동체제’라는 긴 터널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아울러 그동안 이념적 하향평준화를 겪으며 경제주의에 갇혀온 노동운동에서 사회문화적 영향력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영향력-정치화’ 노선의 함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한다. 이일영은 농민운동 자체를 분석하는 대신, 오래된 의제로서 ‘WTO 쌀협상’과 새로운 의제로서 ‘동북아 농업씨스템’을 분석 검토하여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업을 매우 현실주의적인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현재의 농정-농민체제가 아직도 ‘87년 보호체제’에 머물러 있다며 외부의 환경을 정확히 인식하여 농기업과 협동조합 등에서 혁신이 필요하고, 농민운동 역시 그에 걸맞게 변화해야 함을 강조한다. 윤정숙은 여성운동이 지난 십여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운동영역이고, 동시에 자신의 치열한 실천으로 변화를 일구어낸 한편으로 제도화 등의 문제점을 현재 안고 있다고 보고 그 극복방안을 전환의 시각에서 살펴나간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투성이 지구」는 인구 폭발과 도시화 추세 속에서 새로운 지구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도시의 슬럼화’와 ‘비공식부문 프롤레타리아’ 문제를 매우 상세하고 깊이있게 다룬 흥미로운 논문이다. 전지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우리 사회의 변화양상을 살피는 데도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울러 풀뿌리 생태운동으로서 새로운 모범사례를 창출해낸 ‘성미산지키기운동’에 대한 이경란의 현장통신도 특집의 문제의식과 상통하는 글이다. 또한 미국의 전략변화에 촛점을 맞추어 한미동맹의 변화를 고찰한 서재정의 논문과, 소위 ‘주권 이양’ 이후 이라크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가운데 과거 미국의 일본 점령통치와 비교하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후 재건과정을 분석한 마크 쎌던의 글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우리의 인식틀을 전지구적으로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깨우쳐준다.
문학관련 편집위원과 자문위원이 대거 참여하여 힘을 모았던 지난호 문학특집은 기대만큼 반응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문학지면을 앞으로 더 내실있게 다져야겠다는 새로운 다짐도 하게 되었다. 또 창비 내부를 향한 자기점검의 성격도 있고, 우리 문학의 현재적 가능성을 찾자는 의도도 있는지라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가고자 관련 평론 두 편을 싣는다. 특집에 실린 개별적인 평론들에 대해 성실하게 논평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창비가 펼쳐온 비평적 노력 전반에 대해 ‘할 말을 아끼지’ 않고 쓴소리를 해준 김명인·김영찬 두 평론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90년대 말 이후 등단한 신예시인들의 시세계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따듯하게 품고서 그들의 시적 특징들을 요령있게 갈래지은 이장욱과, 재일작가 김달수의 소설을 ‘재일문학의 기원’이란 시각에서 분석한 박광현의 평론, 그리고 장석남·정홍수의 촌평 등도 이번호의 비평이 녹록치 않음을 보여줄 것이다.
창작란은 역량있는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워졌다. 작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우리 현대사에 밀착하여 독특한 민중서사를 만들어낸 성석제, 외국인노동자들의 신산스런 삶의 풍경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담아낸 김재영,그리고 독특한 화법이 돋보이는 정이현·박민규의 소설 등 모두가 개성이 강한 작품들이라 읽는 맛도 그만큼 다채롭다. 또한 민영·정현종·고형렬·김혜순·박영근·김사인·엄원태·김수영·성기완·성미정·이병률 등 역량있는 시인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시풍도 주목해주길 바란다. 아울러 최근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최 ‘제1회 아시아 청년작가 워크숍’ 초청작가로 방한했던 팔레스타인 시인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귀한 시편은 작금의 중동사태를 생각할 때 남다른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외에 마이클 무어의 화제작 「화씨 9/11」에 일갈을 던지는 김종광의 영화평, 그리고 만화분야에서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는 지식교양만화의 현황과 문제점을 잘 정리해준 박인하의 글도 유익한 읽을거리이다. 아울러 최근 들어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대중교양서로서 ‘근대’ 관련서를 세 부류로 나누어 그 특징과 한계를 분명하게 짚어낸 김백영의 테마서평은, 본지가 늘 공들이는 촌평 등과 함께 이번에도 역시 책읽기에 좋은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창비신인문학상’ 작품공모에 예비작가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아울러 가을에 있을 ‘대산대학문학상’ 작품공모에도 문학을 사랑하는 대학생들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린다.
이번호를 마감으로 편집위원 체제에 작은 변화를 주려 한다. 자문위와 편집위를 통합하면서 새 위원들을 영입하여 편집위의 역량을 강화할 것이다. 또한 상임편집위와 임기제를 도입하여 권한과 책임을 더욱 명확히 함으로써 날카로운 과도기를 통과하고 있는 한반도의 환경에 새로운 자세로 임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林奎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