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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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그 말들은 뼈를 토해놓고 말이라 할지 모른다

송경동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시인을 따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 송경동(宋竟東)의 모든 시는 산재시(産災詩)라고. 그가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모든 형태의 산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이 세계에 대한 항의다”. 시인은 묻는다. “신체가 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잘리는 것만이 산재일까”. 그렇지 않다. 산업재해는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이다(「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그의 시는 곧장 사회적 현실의 가장 아픈 곳으로 침투해서 그 아픔에 공명한다. 그리고 아픔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공동체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심지어 우리가 이미 그 안에 있음을 일깨우려 한다. 그 아픔의 중핵이 “쪼들리는 삶”이라는 물질적 근거라는 점을 상기시킬 때마다, 송경동의 시는 산재시가 된다.

송경동의 시에서 언어의 표면에 피어오르는 이미지들의 운동은 언제나 부차적이다. 그의 시는 내밀한 깨달음의 영역에 무심하고, 고도로 예민해진 감수성만이 포착할 수 있는 세련된 감각에도 무감하다. 그러나 시적인 것이 늘 그러한 영역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소박하지만 건강하고 공동체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는 슬픔과 분노의 깊은 울림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감각들이 흐트러질 때, 그때도 우리는 시적인 것을 체험한다.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창비 2009)을 읽을 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고통에 감염되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의 압권이다.

압권(壓卷)이라고 썼다. 산재시가 되고자 하는 송경동의 시론은 시집의 가장 윗부분에서 모든 작품들을 고르게 누르며 실뿌리를 뻗어내린다. 그렇게 해서 그의 시 가운데 가장 서정적인 순간에 도취되어 있는 작품들조차 우리는 결국 산재시로 읽을 수밖에 없다. 에컨대 연계된 기차가 없어 하는 수 없이 대전역 어느 구석에서 자고 가야 하는 고단한 밤, 어두운 밤하늘에 멀리 떨어져 각자 빛나는 별은 앞으로 찾아가야 할 정거장들과 혼동되고, 그렇게 해서 ‘오늘은 이 별에서 자고 가야겠다’며 전생에서 현생으로 접속하는 순간이 어렴풋이 떠오른다(「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다」). 기차노선이 별자리로 펼쳐지고 삶의 한조각이 영원의 품에 안기는 이 취한 밤의 말들조차 물품보관소 추가요금에 쪼들리면 “쪼들리는 삶으로부터 오는 모든 정신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이 떠오르고, 결국 우리는 이것을 산재시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시집의 뿌리가 움켜쥐고 있는 부드러운 흙은, 저 분노와 슬픔이 되돌아가는 자리는, 사랑이다. “저항의 세계화/눈물의 세계화를”(「멕시코, 깐꾼에서」) 태동시키는 것은 “이 불안정한 세계”가 파탄으로 내몬 “모든 사랑스런 관계들”(「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 이하 강조는 인용자)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일년치 통화기록”과 “몇년치 이메일 기록”, “가택수사”와 “통장 압수수색”으로 압박하는 경찰에게 시인은 항변한다. “그렇게 나를 알고 싶으면 사랑한다고 얘기해야지,/이게 뭐냐고”(「혜화경찰서에서」). 혜화경찰서의 저 불쾌한 장소는 그렇게 해서 한순간에 뒤집히고, 그렇게 시인은 경찰이 대표하는 무엇인가를 이긴다. 얼마전까지 용산참사 희생자들이 갇혀 있던 순천향병원의 냉동고에서, 시인은 우리 모두의 삶을 얼어붙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차가운 현실을 읽어낸 뒤 이렇게 썼다.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이 냉동고를 열어라」). 그러므로 시인이 곧이어 “제발 이 냉동고를 열어라”고 요구할 때, 그것은 온전히 사랑에의 요구이다.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와 함께 시론시라고 할 만한 「가두의 시」에서 시인은 길바닥의 절실한 삶이야말로 그 자체로 시라고 선언한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 길바닥의 시들이 사랑이다”. 그렇게 해서 슬픔과 분노가 사랑과 뒤엉키고, 삶과 시와 사랑이 다시 한몸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 손쉬운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삶과 시와 사랑이 한몸이라니, 그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봉합이 아닐까?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의 세번째 시론시 「아직 오지 않은 말들」을 음미하는 것으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보자. 이러한 간접적인 대답은 이 시가 말(시)과 뼈(삶,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있는 말보다/없는 말을 꿈꾼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해 말하는 그 ‘말’에 대한 성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 주제는 표제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에서 “나는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는 선언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아직 오지 않은 말,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 지금은 없는 그 말에서, 어떤 낭만적인 관념에 빠져들려는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지금 있는 말들이 포착하지 못한 ‘진정한’ 대상이 존재한다거나, 아직 없는 말들이 태어나면 우리가 그 진정한 대상을 소유할 수 있다거나, 그것들이 현실에 출현하기 전에 거주하는 신비한 공간이 있다는 식의 낭만적인 관념들. 이러한 관념들은 ‘현실에서 회피하는 환상’과 ‘세계를 바꾸려는 현실적 전략’을 혼동하게 만든다. 송경동의 「아직 오지 않은 말들」은 그런 낭만적 관념들을 거부하며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 말들은 뼈를 토해놓고/이것이 말이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이 구절에서 “정신은 곧 뼈다”라고 쓰며 독일 낭만주의의 산통을 깨뜨리는 헤겔을 떠올릴 수 없을까.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5장 1절 ‘관찰하는 이성’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과학인 골상학이 스스로를 무화시키는 장면을 묘사했다. 골상학은 물질적인 뼈가 그 이면에 어떤 신비로운 정신을 감추고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서, 뼈의 생김새가 곧 정신을 말해준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골상학이 그런 결론에 도달할 때, 정신과 물질, 내면과 외면 사이에 있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 것 아닌가. 골상학은 결국 뼈가 정신이고 정신이 뼈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헤겔은 사이비 과학인 골상학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물질과 대비되는 심오한 차원의 정신 같은 것은 없다. 그런 착각에서 빠져나와, 정신에서 사물을 사물에서 정신을 발견하는 것이 정신 스스로의 변증법적 운동이다.

그같은 방식으로 송경동의 시를 읽기로 하자. ‘아직 오지 않은 말들’에서 어떤 신비롭고 오묘한 이치를 상상해서는 안된다. 그 말은 오히려 뼈와 같은 것, 물질이나 외면 혹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송경동이 이 말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 ‘아직 오지 않은 말들’은 우리 내면의 심오한 깊은 곳 혹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현실의 삶, 거리에 있다. 정신은 뼈고, 뼈가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인의 첫번째 시론시를 향한 순환운동을 마친 셈이다. ‘아직 오지 않은 말’(시)의 운동은 내면의 심오한 깊이 혹은 높이가 아니라 결국 ‘뼈’(삶, 현실) 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송경동의 모든 시는 산재시가 된다.

권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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