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다락방의 악마에게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을
천운영 장편소설 『생강』
권희철 權熙哲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인간쓰레기들을 위한 메시아주의」 「방랑자를 위한 여행안내서: 윤대녕론」 등이 있음. northpoletrain@gmail.com
한편으로 『생강』(창비 2011)은 역사의 기록이다. 『생강』의 고문기술자 안은 전학련 사건,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등에서 숱한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날조한 실존인물 이근안(李根安) 경감을 모델로 하고 있다. 검찰이 고문행위를 묵인한 것, 전두환정권이 그의 공로를 인정해 16차례 표창한 것, 그가 고문기술자로 지목되어 잠적했을 때 동료들의 조직적인 비호를 받은 것 등이 모두 한국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문학은 언제나 역사의 기록 그 이상이거나 이하이다. 『생강』은 이근안의 10년 11개월간의 도피 행적을 바탕으로 하지만, 성실한 자료 조사를 통해 고문기술자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 천운영(千雲寧)의 관심사는 아니다. 작가는 인간의 악마화 혹은 탈악마화가 벌어지는 내면의 다락방을 탐색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생강』은 이 대목에서 빛난다. 그리고 여기서 안의 딸 선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선이 안의 내면적 거울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선은 타인들의 환영하는 눈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내 목소리가 아”(48면)닌 말로 자신을 치장하고, 사랑까지도 그녀가 즐겨 읽는 하이틴 로맨스풍의 은유 속에서 시작하고 끝낸다. 선의 언어는 운동권 선배들의 상투어와 하이틴 로맨스의 상투어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선의 언어로는 사유가 불가능하다. 아버지가 고문기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그녀는 결코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다. 그저 “행복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이 훼방꾼들”(119면)이 성가실 뿐이다. 선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무능력한 것과 그녀의 말이 자신을 사유하는 데 무능력한 것은 동시적이다. 이 이중의 무능력 안에서 그녀는 결코 현실과 마주하지 않는다.
다락방에 숨어든 아버지, 어딜 가나 고문기술자의 딸이라는 오명을 붙여주는 아버지 때문에 결국 자신의 안락한 운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그제야 선은 집요하게 찾아오는 고문피해자와 대화를 시도한다. “말해봐요. 아빠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요. 알아야겠어요. 알려줘요.”(184면) 그렇게 해서 “내 몸에 연결된 무수한 줄들이 툭툭 소리를 내며 끊어진다.”(188면) 그렇게 선은 타인의 고통에 직면하고 나서야, 그 고통에 공감하고 상처받은 뒤에야, 자기 자신으로부터 또 이중의 무능력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이 점이 분명해지면, 다락방에서 흘리는 안의 눈물이 “지독한 자기애에서 나온 눈물”(238면)임이 보인다. 안의 언어는 “나는 악의 세력과 맞서는 전사가 아닌가. 너희들이야말로 악의 세력이다. 악은 제거되어야 한다”(75면)는 진부한 정치적 구호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안의 생각은 “비루한 아버지를 버리고 새로운 아버지를 모시고”(199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247면)은 욕망의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기서 안의 실제 모델 이근안이 나중에 장로교 목사가 된 사실을 떠올린다면, 악마 신경증에 시달린 17세기 화가와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 아버지를 잃고 난 뒤 자신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환상에 시달리다 성직자로 죽음을 맞이한 화가 크리스토프 하이츠만(Christoph Haizman)을 두고 프로이트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림만으로 생활을 유지하기에 재능이 부족했던 그는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이 필요했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는 악마의 도움이라도 필요했으며, 악마조차 그의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을 때 또다른 ‘아버지’인 성직자들을 따라간 것이다(「17세기 악마 신경증」). 평생토록 부모 품에 안겨 타인의 도움만을 바라는 이 가련한 사내를 보라. 20세기의 악마적 고문기술자 안에게서도 이 가련하고 무능력한 악마 신경증 환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이중의 무능력을 비춰준다는 점에서 선은 안의 거울이며, 안이 실패한 데서 선이 성공한다는 점에서 선은 안의 미래이다. 오직 상처받을 수 있는 선의 능력에서만 나오는 다음의 고백은 그러므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안의 미래의 고백이기도 하다. “죄송해요. 그러고 보니 미안하다는 말도 차마 못했네요. (…) 그렇게라도 버텨주어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이 모든 말들을 해줄 수가 없네요.”(275면) 이 고백되지 않은 고백, 미래의 고백과 함께, 한동안 「바늘」의 작가로 기억되던 천운영을 『생강』의 작가로 다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한국현대사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면서, 악과 속물, 그리고 상처받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을 보여준 『생강』의 작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