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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세월호 이후, 다시 생각하는 한국문학
부모의 자리에 서서
최근 소설이 ‘세월호’를 사유하는 방식
신샛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절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의 두가지 행로—김애란과 김사과에 주목하여」 등이 있음. venus860510@naver.com
1. 세월호참사와 부모의 자리
세월호참사로 별안간 아이를 잃었지만, 부모들은 부모의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직 배 안에 갇혀 있을 실종자를 찾아야 했고, 수장(水葬)될 위기에 처한 진실을 건져올려야 했으며, 재발을 방지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총체적으로 바꿔야 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는 이 길고 긴 싸움의 진지였고 최전선이었다. 지난 한해, 오로지 누군가의 부모로서만 살아온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 한편에서는 응원과 지지를 보내며 나름의 방식으로 그 뜻에 동참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악의적인 해석을 생산·유포시켰다. 특히 세월호 인양에 드는 비용과 유가족이 받을 보상금 액수를 운운하는 정부의 공식발표는 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여론의 향방을 어느 쪽으로 유도하고자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표면화되었느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세월호 관련 보도에 대해 언젠가부터 피로를 호소해온 여론의 흐름 내에도 이미 그러한 배반의 조짐은 잠복돼 있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끔찍한 결과로부터 서둘러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세월호 ‘사고’가 ‘처벌 또는 보상’이라는 편의적인 과정을 거쳐 신속히 정리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작년에서 올해로 넘어오는 동안 영화 「인터스텔라」(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14)와 「국제시장」(윤제균 감독, 2014)이 크게 흥행한 까닭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두편의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를 구하는 데 성공한 부모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은 전지구적 재난상황에서 자녀세대를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지구를 대체할 만한 행성을 찾아 우주탐험에 나선다. 그런가 하면 「국제시장」에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몸소 통과하며 가난을 극복하고 가족을 살려낸 아버지가 있다. 자신의 삶은 방치·포기·희생하고서라도 아이를 키워내는 것이 바람직한 부모라고 믿는 한국사회의 ‘부모도덕’1)은 한국전쟁 이래로 급속한 산업화시기를 거쳐 이제는 자녀양육과 관련한 온갖 문제들을 시장의 원리가 장악해버린 현재까지도 여전히 공고한 것 같다.2) 아이 한명을 키우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을 수치화해 발표하는 나라, 투자자나 다름없는 부모가 아이의 성적, 취직, 결혼을 관리·통제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나라에서 아이의 생존가능성은 부모의 경제적 역량과 점점 밀접해지고 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지금-여기의 부모는 벌고 또 벌어야 한다. 부모노릇의 고단함은 아이를 통해 언젠가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미망으로 얼마간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왕의 부모도덕에 짓눌린 젊은 세대는 역설적으로 연애·결혼·출산의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고 인생을 계획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젊은 세대에게 아이란 고된 노동의 댓가로 겨우 마련한 삶의 기반마저 좀먹는 무서운 존재가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부모라면 어떻게든 아이의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한국사회의 부모도덕은 기묘한 방식으로 일그러져 세월호 유가족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근거로 전용됐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그들은 아이를 지켜내지 못한 부모가 아닌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파렴치하게 시신을 앞에 두고 흥정까지 하는 모양새라니.’ 두편의 영화를 보며 우리가 실제로는 하지 못한 일을 영화 속에서 해내면서 환상적 자기위안에 빠져 있는 동안, 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국가의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떠넘겨졌고, 국가의 실패 탓에 아이를 잃은 부모의 고통은 오롯이 그들만의 것이 돼버렸다. 그런데 세월호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의 모습에는 재래의 부모도덕의 틀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면모가 있다. 그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예전의 부모들과는 달리, 한없이 슬퍼하다가 대중의 관심과 공론의 영역에서 내쫓기듯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그러면 죽은 아이들을 다른 의미에서 살려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연하게 진실을 향해서 걷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부모의 길이라는 듯이,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부모로 살겠다는 듯이. 2014년 4월 16일 이전에도 그들은 부모였으나, 아이를 잃고 난 이후에 그들은 또 한번 부모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한번도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한번도 예상한 적 없는 모습으로.
공감과 지지 못지않은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그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외로우면서도 가장 급진적인 주체성을 현시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자주 문학과 윤리에 대해 논의해왔으면서도 여태까지 상상해본 적 없는 어떤 주체성의 면모를 계시하고 있지 않은가. 주체성이란 어쩌면 하나의 장소를 가리키는 이름일지 모른다.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 그 자리에 서면 세계를 달리 볼 수 있거나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당면한 일을 함께 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장소를 포섭하여 앞으로도 내내 그것을 ‘살아내는’ 방법은 없을까. 어쩌면 새로운 주체성의 창안을 제 고유한 임무로 삼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일 테다.3) 이 글에서는 세월호참사 이후 발표된 몇편의 소설과 더불어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사유와 실천의 장소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분투의 함의를 헤아려보고자 한다. 아이를 살아남게 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시달리며 신음해온 부모에게도, 미래에 올지 모를 아이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살해해본 경험이 있는 젊은 세대에게도, 이것은 긴급한 공부일 것이다.4)
2. 잃어버린 생명, 되찾아야 할 삶
김애란(金愛爛)의 「입동」(『창작과비평』 2014년 겨울호)은 한국사회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떤 곤경에 처하게 되는지를 적실히 보여준다. 태어난 지 52개월 된 ‘영우’가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에 치여 숨진 뒤, 반년 동안 영우의 부모는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아이의 흔적을 더듬으며 살아간다. 영우를 잊지 못하는 아내마저 잇달아 잃게 될까 두려워진 남편은 아이가 쓰던 물건들을 표나지 않게 정리해보기도 했지만, 아내와는 갈등만 일으킬 뿐 그들의 삶은 회복될 기미가 없다. 차라리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베란다 밖으로 지나다니는 출퇴근 차량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던 아이, 깨끗이 치워둔 거실을 곧잘 어지르던 아이, 아이를 위해 꾸며진 방, 부모 모르게 아이가 남겨둔 낙서…… 아직도 곳곳에 아이가 함께하고 있는 그 집에 계속 산다면 부모는 죽은 아이를 영영 떠나보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 소설이 집장만을 위해 부부가 애태우며 고생하다가 경매로 싸게 나온 작은 아파트를 구입하고 기뻐했던 시절을 꽤 길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집을 떠날 수만 있다면, 죽은 아이를 떠나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집을 떠난다는 것은 우여곡절 끝에 집을 마련하게 되기까지 그들이 살았던 삶을 송두리째 지워버려야 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여서, 애초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더군다나 집값까지 폭락해서 이사를 가기에는 난처한 상황이 돼버렸다.
죽은 아이가 무시로 떠올라 괴롭지만 아이를 생생하게 기억하기에는 맞춤한 집에서 이제 그들은 매달 아파트 대출금과 이자를 상환해야 하는 엄연한 현실의 무게를 실감하며, 아이의 목숨값으로 받은 보험금을 떠올린다. 아이의 죽음을 ‘사고’로 인정하고 ‘보상’을 받는 것은 “이상하게 원장을 용서하는 결과를 낳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운전기사가 교체되고 보육교사가 자리를 옮기는 ‘처벌’이 이뤄진 마당에 어린이집 쪽에서는 “무얼 더 바라느냐고 묻는 듯” 보였고, 보험회사 직원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보험금 수령을 재촉했다.(268면) 이처럼 아이의 죽음을 ‘사고’로 간주하고 ‘처벌 또는 보상’의 구도에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이 세계의 “무감”(270면)함은 영우가 숨진 이후 어린이집에서 선물이랍시고 복분자 원액을 보내왔을 때 기어이 하나의 폭력이 되어 영우의 부모를 덮친다. 복분자액이 터져 벽면에 번진 시뻘건 얼룩은 “마치 누군가 순전히 이웃을 모욕하기 위해 갈겨놓은 낙서”(259면) 같은 처참한 광경을 이룬다. 그것을 지우기 위해 부모는 도배를 시작했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까지 말끔히 지울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까 우리를 피하고 수군댔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쭈그려 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279면)
이 소설의 젊은 부모는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에서 죽은 아이를 충분히 애도하고 또 자신들의 삶을 진창으로 밀어넣지 않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용을 충당하려면 아이의 목숨값을 축내야만 했다. 부모에게 그 돈은 “많다거나 적다거나 하는 세상의 어떤 잣대나 단위로 잴 수 없는 댓가”(268면)였지만, 현실의 압박 때문에 그들은 “한푼도 써선 안되는 돈”(270면)에 손을 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생명조차도 돈으로 환산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시장사회’5)의 그늘 안으로 속절없이 걸어 들어가게 된다. 이 비참하게 아이러니한 상황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게끔 이야기를 끌고 가는 김애란의 필치는 냉철하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에 공감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김애란은 그러한 비극 앞에 선 부모의 모습을 “두 팔을 든 채 벌서듯 서 있”는(280면) 형상으로 묘사했다. 최근 우리 역시 공공연하게 ‘돈’과 ‘생명’을 저울질하는 세계에서, 두 팔을 들고 무력하게, 그러나 뭔가 크게 잘못했다는 심정으로 서 있었다. ‘생명보험금’이라는 말이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생명이 돈과 교환될 수 있다는 악의적인 농담에 우리가 이미 익숙해져버렸다는 증거일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달리 말해야 정확하리라. 2014년 4월 16일에 우리는 아이들의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삶’을 잃은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아이들의 ‘삶’을 되찾아야 한다고. 죽은 아이들의 ‘생명’ 그 자체는 회수될 수 없다. 그러나 미래의 아이들이 제대로 살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면, 죽은 아이들이 미처 살지 못한 ‘삶’은 다른 아이들의 ‘생명’을 통해서라도 살아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무감한 세계의 폭력과 함께 ‘아이를 잃은 부모’가 필연적으로 견뎌야 하는 것은 무정한 시간의 흐름일 것이다. 이대로 망각해버리고 말면 그 무엇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호참사를 계기로 세계를 바꿔야 한다는 열망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표현해왔다. 망각에 맞서야 한다는 절박함에는 우리가 힘을 합쳐 보관해둔 거대한 기억의 더미가 언젠가 어떤 힘을 발휘해 이 세계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으로 해낸 일은 결국 별로 없다. 냉정히 말해, 우리의 기억하기는 노란 리본 같은 기념물 이상의 무엇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단순히 기억하고만 있는 것은 아이들의 ‘삶’을 되찾는 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김영하(金英夏)의 「아이를 찾습니다」(『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가 묘파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기억의 불충분함이다. 그렇다면 기억을 넘어선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윤석’과 ‘미라’ 부부는 혼잡한 마트에 갔다가 세돌이 갓 지난 아들 ‘성민’을 잃어버렸다. 매장 내에 방송을 하고 아동보호시설을 찾아다니고 마트 근처 주택가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후로 십일년간 윤석은 오로지 아이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만들고 돌리기 위해 살았다. 미라는 정신분열증에 걸렸고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이렇게 오래 아이를 찾지 못할 줄 알았다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거나 아파트를 팔아버리는 결정을 그리 쉽게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모두 뒤늦은 후회에 불과하다. 아픈 아내를 돌보면서도 전국의 공사장을 떠돌며 고된 일을 하고, 잠이 모자라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전단지를 돌리는 일상을 유지해오던 윤석에게 어느날 아이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다. 아이를 잃어버린 후 실종아동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둔 유전자정보 덕분에 거짓말처럼 아이가 돌아온 것이다. 이 소설이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대목부터다. 아이가 돌아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이의 부모가 되는 데 실패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 소설의 부모는 아이를 잃어버린 십일년 전 시점에서 한발도 나오지 못했다. 집 안 어디에나 나뒹구는 전단지에 파묻혀 사는 그들의 삶은 과거라는 무덤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윤석은 삶에 찾아올 만한 변화들을 아이를 찾은 이후로 모두 유보해왔다. “도배도, 수리도, 건강검진도 모두 성민이를 찾은 후로 미뤘다. 문제들이 산적된 채 썩어갔다.”(118면) 십년이 넘도록 고여 있기만 한 부모의 삶에서 풍겨져 나오는 악취가 부모에게는 아이를 찾기 위해 헌신한 삶의 표징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십대 청소년이 돼 돌아온 아이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윤석의 이기적인 욕심, 즉 “아들이 돌아오면 보여주고 싶었다. 보아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가”(113면)는 아들 성민의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 지나간 걸 어떻게 바꿔요? (…) 여기서 살고 싶지 않아요. (…) 여긴 너무 싫어요”(132~33면) 같은 반응에 무력하고 난처하다. 이 소설에 따르면 돌아올 아이와 함께 살아갈 준비를 해두지 못한 부모는 그들이 설사 유전적으로 분명한 부모일지라도 부모가 될 수 없다.
그는 십일년 전의 과거에서 난데없이 미래로, 그것도 홀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 미래에는 미쳐가는 아내와 자기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는 아들이 있다. 둘 다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윤석은 성민의 눈으로 집 구석구석을 다시 본다. 그의 눈에도 이제 이 집은 낯설고 기괴하다. (…) 이 이상한 미래에서 내가 수행해야 할 사명은 뭐지? 도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 내일부터는 뭘 해야 하지? 그는 한번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민이만 찾으면, 성민이만 찾으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그 이후를 상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지나고 보니 어찌어찌 견뎌졌다.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은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120면)
아이들의 ‘삶’을 되찾으려 한다면 ‘잊지 않겠습니다’처럼 기억하기를 다짐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윤석이 만들어놓은 전단지 속의 사진과는 전혀 판이한 모습으로 나타난 성민이의 경우처럼, 우리가 기억하는 ‘생명’을 잃은 아이들의 모습과 우리가 되찾은 ‘삶’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의 모습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윤석이 아이가 성장했을 때를 가정해 포토샵으로 만든 사진을 보며 지나치게 매끈해서 “영정사진”을 떠올렸다는 대목(112면)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윤석은 아이의 ‘생명’을 잃었다. 운이 좋게도 그는 아이를 되찾았지만, 그 아이는 새로 태어난 아이, 그래서 유전자 정보만으로는 부모라고 주장하기가 궁색해지는, ‘부모’로서의 자격을 질문하는 아이, 부모에게 자신의 ‘삶’을 요구하는 아이였다. 김영하는 ‘아이의 실종’이라는 소재에 무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문제를 겹쳐 ‘잃어버린 아이’와 ‘되찾은 아이’가 서로 다른 아이일 수 있다는 예리한 통찰을 제공했고, 그럼으로써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다.6) 이 소설의 아버지는 아이를 두번 잃어버린다. 첫번째 실종은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유괴에 의해서였지만, 두번째는 잃어버린 아이를 기억하느라 미처 미래를 상상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제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에 머물면서 풀어야 할 숙제는 분명해졌다. 과거를 기록하고 보관하고 기념하는 아카이브로서의 기억만으로는 ‘미래’에 올 아이의 삶을 준비할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낳는’ 기억의 형식을 개발해야 한다.
3. 미래를 낳는 기억, 신체에서 모체로
기억은 어떻게 미래를 낳을 수 있나. 트라우마에 대한 수많은 기록과 연구가 일러주는 바대로, 잊기 힘든 고통스런 과거의 경험에 붙들려 있는 사람의 경우, 장차 모든 것이 더 나아질 것이라 희망하는 발전적·선형적 시간관이 파괴된다. 기억하는 한, 미래를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니체(F. Nietzsche)라면 이를 두고 파멸을 자초하고 있다고 개탄할 것이다. 일찍이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해가 되고 마침내는 치명적이 될 수도 있는 불면과 되새김질, 역사 감각”을 경계하면서 망각의 조형력(造形力)에 주목했다.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시켜 자기 것으로 만들며,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7)인 조형력은 니체 특유의 생리학적 비유를 따르자면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8)으로, 과거를 ‘소화’해 미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니체적 의미의 망각은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듯 수동적인 태도로는 성취될 수 없다. 프루스트(M. Proust)의 마들렌처럼, 수동적일 때는 오히려 기억에 발목이 붙들려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망각은 새로운 삶에 대한 열정 가운데 일어나는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달성되는, 기억에 대한 적극적 저지이며 일종의 창조적 행위에 가깝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지 못하거나(기억의 손상) 그것과 단절된 상태(기억의 부재)로 ‘망각’을 이해하는 우리의 언어사용 관습을 고려할 때, 니체가 이야기하는 망각의 창조적 기능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세월호참사를 기억함으로써 달라진 세계의 건설을 꿈꾸는 이들의 관점에 선다면, 니체적 의미의 망각이란 곧 ‘미래를 낳는 기억의 한 형식’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니체가 ‘망각’과 나란히 특정한 기억의 한 형식으로서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을 이야기한 이유도 짐작해볼 수 있다.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이란 ‘나는 하고자 한다’ ‘나는 하게 될 것이다’ 같은 문장이 가진 미래지향적 약속을 기억하는 행위다. 다시, 니체를 따라 말해본다면, ‘아이들의 삶을 구해야 한다’ ‘아이들의 삶을 구할 수 있다’는 문장을 되뇌는 의지, 그럼으로써 우리 자신과 거듭 무언가를 약속하고 실행하는 의지가 (미래의) 아이들의 삶을 구한다.9)
박민규(朴玟奎)의 「대면(對面)」(『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은 위에서 살핀 니체적 의미의 ‘망각’이 미래를 낳는 극적인 순간을 서사화해 보여주는 한 사례다. 이 소설의 주인공 ‘라까’는 그의 여섯살 된 아들 ‘량’을 잃었다. 아이의 죽음에 납득할 만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아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기에 시신을 묻을 수도 없었던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일이 신의 뜻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일 테니 신에게 아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직접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시신과 함께 순례에 나선 라까는 신과 대면할 날만을 고대하며 몸의 고통을 견딘다. 그러는 동안 문득문득 아이가 떠오르기도 했지만 라까는 죽은 아이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울 새가 없다. “기억을 쓸 힘마저 몸을 던지는 고행에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195면) 순례길의 안내자 역할을 해준 ‘밀차’가 어느 지점에서 더이상은 갈 수 없다고 했을 때, 혼자서라도 신을 만나러 계속 가겠다는 라까의 결의는 단호하다. 그에게는 그 길이 아이를 장사 지내러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부모에게 죽은 아이를 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신의 얼굴 앞이다. 그 신은 누구인가.
소설에 따르면 “금융과 자본이 지배하던 세계”에 나타난 “전부를 가진 자”(200면) 중 하나가 영생을 얻기 위해 시행한 유전자조작 연구의 결과로 “영생하는 세포”(201면)가 탄생했는데, 그 세포가 팽창을 거듭하여 마침내 온 세계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신체로 성장해버렸다. 말하자면 “전부를 가진 자”의 후손을 신으로 모시고, 사람들은 그의 신체 위에서 집을 짓고 밥을 먹고 잠을 자게 된 것이다. 이렇게 박민규는 ‘자본’에 신체를 부여하고 그것의 거대한 확장을 ‘세계’이자 그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신’으로 상상하게 하며 더 나아가 그 신체의 생장과 소멸을 상상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자본주의적 원리 내에서만 파악되고 사유되는 지금-여기의 상상력의 한계를 내파하기 위한 작가 특유의 설정으로 보인다. 심지어 ‘고용과 해고’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결정짓는다고 여겨질 만큼 자본주의가 자연화(naturalization)돼 있는 지금-여기에서 이러한 설정은 ‘자본’이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우리의 삶을 외부적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신의 머리가, 세계 그 자체와 맞먹는 크기의 신체와는 달리, 아직 사리분별도 어려운 작은 아이의 것이라는 결말부의 전언은 거의 공포스럽다. 이 세계를 규율하는 논리는 그토록 미성숙하고 무책임하다는 뜻일까. 무구한 신의 얼굴 앞에서 라까는 량의 죽음에 관해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가 없다. 세월호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정확히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라까에게 신과의 대면을 위한 순례는 죽은 아이를 묻기 위한 일종의 제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아이를 묻게 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죽은 아이를 묻기 위해 라까가 신의 머리를 송곳으로 잘라내는 장면이다. 하나의 세계를 참수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이 장면을 거친 뒤, 라까는 죽은 아이를 신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묻는다. 이제 도래할 세계의 사람들은 숙명처럼 아이를 머릿속에 묻고 살게 됐다. 바로 그들이 생산하는 생각이 지나간 세계와 도래할 세계의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미래가 탄생하는 적막의 순간을 깨우는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다. 잔향(殘響)으로만 만난 미래의 아이는 량처럼 이유 없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말미에 이르러 우리는 이 소설이 내장하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 “라까는 량을 낳았으되/량을 낳은 것은 누구인가”(214~15면)와 만나게 된다. 생물학적으로 량을 낳은 것은 라까지만, 사회학적으로 량을 낳은(고용한) 것은 자본이라는 신이다. 그 신은 량의 죽음(해고)까지도 관장하는 것이니 도대체 우리시대 생물학적 부모의 권리는 어디까지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은 세월호참사 이후 1년 동안 이 사건 배후에 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가 난마와 같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된 우리가 똑같이 받아 물을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있으나, 또다시 아이들을 낳고 죽이는 것은 도대체 누구(무엇)인가.’
박민규의 소설은 ‘자본’의 ‘신체’에 죽은 아이가 묻히면서 끝난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소리와 함께 세계는 바뀌었다. 이제 이 대목에서 이어 읽어볼 만한 소설은 황정은(黃貞殷)의 장편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일 것이다. 이미 지적된 바대로 이 소설의 “핵심적인 물음은 우선 생명의 문제”10)이기 때문이다. 작중 ‘나나’는 임신 이후 자신의 몸이 ‘신체(身體)에서 모체(母體)로’ 바뀌었다고 느낀다. ‘신체’가 (죽은) 아이를 생각하는 ‘모체’로 변신할 때, 그 몸이 경험하는 세계는 이전과 달라진다. ‘모체’로서의 몸은 죽은 아이를 기억하는 몸(무덤)인 동시에 태어날 아이의 삶을 예비하는 몸(자궁)이다. ‘신체에서 모체로’, 어쩌면 이것이 세월호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지금-여기를 배경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이야기의 얼개가 아닐까. 우리는 아이들을 세계의 머리에 묻고, 아이들을 기억함으로써, 세월호 이후의 세계를 생각한다. 그렇게 모체로서 생각에 잠길 때, 지금-여기와는 다른 세계가 오고, 아이들의 삶은 되찾아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에서 세간의 오해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는 세월호 유가족의 행보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응답으로도 읽힌다. 세월호참사 이후 발표한 산문에서 황정은은 “세월은 돌이킬 수 없게 나를 어른으로 만들어버렸다”11)라고 했고, “유가족들의 일상, 매일 습격해오는 고통을 품고 되새겨야 하는 결심, 단식, 행진, 그 비통한 싸움에 비해 세상이 이미 망해버렸다고 말하는 것, 무언가를 믿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다 같이 망하고 있으므로 질문해도 소용없다고 내가 생각해버린 그 세상에 대고, 유가족들이 있는 힘을 다해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간, 세월이라는 장소에 모인 사람들을, 말하자면 내가 이미 믿음을 거둬버린 세계의 어느 구석을 믿어보려 하고 있었던 것”12)이라고 적었다. 『계속해보겠습니다』가 허무주의에 맞서는 모체(들)의 이야기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가장 심각한 허무주의자는 ‘소라’와 ‘나나’의 엄마 ‘애자’일 것이다. 애자는 남편 ‘금주’를 잃고 자살을 시도한 이후 아직까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데, 그녀는 두 딸에게 “세계란 원한으로 가득하며 그런 세계에 사는 일이란 고통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자초해서 그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필멸, 필멸,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13면)다고 말한다. “그런 것이 인간의 삶이므로 무엇에도 애쓸 필요가 없”(12면)다는 애자의 말에 소라는 자주 현혹된다. 소라가 나나의 임신에 “어쩌려는 걸까, 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어쩌자는 거야, 하고 화가 나”(23면)는 것은 애자에게 감염된 허무주의적 기질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엄마에 대해 소라가 갖고 있는 감정은 애증에 가까워서, 소라는 애자에게 이끌리는 만큼 그녀를 미워한다. 그래서 소라는 애자와는 다른 엄마, 아들 ‘나기’뿐 아니라 옆집에 살던 소라와 나나까지 제 손맛으로 키워낸 ‘순자’를 각별하게 따르고 챙긴다.13) 소라와 달리 나나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99면)는 애자를 일관되게 경계해왔다. 그래서 삶과 세계에 대한 의욕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애자를 요양원에 보내겠다는 나나의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다. 애자와 격리되는 것을 주저하기에는 뱃속의 아이가 빠른 속도로 나나의 몸을 바꿔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에서 모체로의 전환”(124면)을 본격적으로 실감하면서 나나는 어릴 적 나기가 가르쳐준 남의 고통을 생각하고,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게 된 백모(伯母)의 압도적인 고통을 생각하고, 모세의 집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를 생각하고, 순자와 애자를 생각하고, 세계의 멸망을 생각한다. 모체가 된 나나의 눈에 띄는 변화는 그녀가 모든 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제목 앞에 생략된 목적어가 있다면 그것은 ‘생각’일 텐데, 제대로 생각하는 나나의 습관은 곧 소라에게로 옮아가서, 편부모 가정의 아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편견에 대해 나나가 고민할 때, 이제는 소라가 먼저 “건강한 게 뭔지 생각해. 제대로 생각해, 하고”(200면) ‘제대로 생각하라’는 주문을 되돌려줄 정도다. 생각하기를 거듭한 끝에, 나나는 아이의 아버지 ‘모세’와 결별하고 소라와 나기, 그리고 순자 가까이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한다. 생물학적 부모라면 별다른 노력 없이 아이의 부모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모세,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가족에게 설명하기 번거롭고 불편한 애자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자는 모세,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부담을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떠맡기는 모세의 집안 분위기와 나나는 타협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나의 그런 결정과 동시에 이 소설은 미래의 아이들을 낳고 기를 새로운 부모도덕의 밑그림을 그린다.
엄마가 되는 것처럼 어떤 각오가 필요할 만큼 무서운 일이라도 그 변화를 기대하는 나나와, 나나 곁에서 이제 막 시작된 사랑의 기척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소라, 그리고 ‘너’로 지칭되는 한 사람을 향한 끈질기고 거대한 사랑에 삶을 통째로 내어준 나기. 애자의 말마따나 “행복해지려고 하”는(137면) 자매와, 멸망을 향해 가는 세계(‘너’)를 분명한 필멸의 예감 속에서도 기다리는 나기가 합체해 생겨난 새로운 부모도덕의 이름은 “나비바”(203면)다. 언뜻 아이의 태명처럼 보이기도 하는 ‘나비바’에 대해서라면, 이 소설에 제시된 정보를 살펴보건대 아직 부정의 형식, 이를테면 ‘애자처럼 자기 삶을 파괴할 만큼 누군가를 전심전력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남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무감하지 않다’ ‘허무주의에 감염돼 있지 않다’는 방식으로만 겨우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새로운 부모도덕을 따르는 이들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모체로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죽은 사람을 일상 속에서 자주 떠올리거나 꿈에서 만나고 또 그들을 제사 지내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진 세대의 연속성에 대한 감각은 특별히 언급해둘 만하다. 나나가 애자의 이야기 속에서만 만나본 외할머니를 꿈에서 만난다거나, 소라와 나나 자매가 격식을 갖추지는 못했어도 아버지의 기일에 소박한 제사상을 차린다거나, 죽었을지도 모를 ‘너’에게 나기가 계속 엽서를 보내는 것이나, 피난길에 가족을 잃은 순자가 전쟁 후 자신을 잠깐 키워준 할아버지의 무덤을 매년 찾는 장면 등에서 돋보이는 그 감각은 현재의 삶을 ‘죽은’ 과거와의 연속선상에서 바라보고, 또 그러는 가운데 미래를 도모하게 해준다. 또한 그 감각은 불행의 경험을 통해 뒤집어쓴 고통의 껍데기를 까고 자기의 ‘본래’로 돌아갈 수 있고(“아기를 갖고 나나의 껍데기는 조금씩 부스러지고 있다. 나나는 본래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192면), “옛날 이불을 여러채 자르고 잇대어서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이불을 만들어”(197면) 태어날 아기에게 줄 ‘오래된’ 선물을 미리 마련하고, 어머니를 키운 증조할아버지가 살던 오두막집이 있는 광경을 상상하다가 이내 “내 나이를 알 수 없게 되어버”(168면)리는 능력과 연동돼 있는 것이다.
4. 부모 되기의 새로운 ‘길’과 ‘힘’
아기로서의 ‘나’와, ‘나’의 앞세대와 뒷세대, 나아가 몇겹의 세대를 건너온 헤아릴 수 없는 나이의 ‘나’까지 상상해내는 그 능력은 우리를 유구한 인간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 그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턴가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결혼이 인륜지대사로, 출산과 육아가 인생의 과업으로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떨어져 나왔고, 혈통과 가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세대의 연속성 속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닫아버렸다. 어떤 도덕적 규범은 외관상 우리를 옭아매고 억압하는 폐습 같아 보여도, 막상 그 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특정한 사유의 통로에 접근하기가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부모가 된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그 사유의 통로가 저절로 열리는 것은 아닐 테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연스레 부모가 됐던 시절에 비해 훨씬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겨우 그 사유의 입구에 다다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여기의 우리는 대개 정신적으로 난임(難妊)이거나 불임(不妊)에 가깝다.14) 안간힘을 다해야만 모체로서 생각할 수 있다.
『계속해보겠습니다』에서 달이 나오는 태몽을 꾼 나나가 지구의 멸망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다가, 그러나 세계는 그리 빨리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이것저것 제대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계속해보겠”다고 이야기하는 마지막 장(224~28면)은 ‘삶을 아끼는 마음’으로 충만하다. 이제 이 글의 도입부로 다시 되돌아가보자. 온갖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저 부모들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사유해야 할 어떤 주체성의 모습을 현시·계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말이다. 백낙청(白樂晴)은 “서양의 개념을 근거로 윤리와 도덕을 구별하다보면 원래 동아시아 전통에서 말하던 도덕, 즉 도(道)와 ‘도의 힘’으로서의 덕(德)에 대한 사유가 실종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고,15) 이에 덧붙여 한기욱(韓基煜)은 “세월호 이후에는 그런 의미의 ‘도덕’이란 용어를 되살릴 필요가 절실해진다”는 요청을 제기했는데,16) 우리는 이제 ‘부모의 도덕’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사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아이를 기르고 있건 그렇지 않건, ‘장소로서의 부모’의 자리에 설 때, 우리에게 열리는 새로운 ‘길’〔道〕과 그로 인해 갖게 되는 ‘힘’〔德〕이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말이다. 바로 이런 취지에서 세월호 이후의 소설들은 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이 작품들은, ‘아이를 잃은 부모’라는 장소를 떠나지 않으면서 달라진 세상으로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모든 세월호 유가족들의 간절한 외침이 불러일으킨 공명(共鳴)이다. 이제 이 세계 곳곳에서 ‘부모’라는 장소-주체가 더 발생하고 확장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닫아버리고 후회한 사유의 길 하나가 거기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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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모도덕’은 ‘상도덕’ ‘공중도덕’ 등을 참조해 필자가 만든 단어인데, ‘도덕’이 사회 구성원들의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의 준칙을 의미한다고 할 때, ‘부모도덕’은 ‘부모’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합의의 결과로서 ‘부모’의 삶을 조형하는 원리가 된다.
2)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생존지상주의가 1997년 IMF사태 이후에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닐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한국전쟁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신적 삶에 생존지상주의가 뿌리내리게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박완서의 『도시의 흉년』과 같은 소설이 보여주듯이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겪은 신체에 각인된 생존에 대한 강박은 자녀세대를 과도한 열정과 억척스러움으로 길러내는 부모-주체들을 광범위하게 탄생시켰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박완서 소설에 나타난 ‘먹는 인간’의 의미」(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5) 본론 3장 참조.
3) 이광호는 「남은 자의 침묵—세월호 이후에도 문학은 가능한가?」(『문학과사회』 2014년 겨울호)에서 “문학의 문제는 ‘사건’ 이후에 문학적 주체들의 재정립 문제”(323면)임을 온당하게 지적한 바 있다.
4) 이 글은 『문학들』 2015년 봄호에 발표한 「아이 없는 세계에서—2014년 겨울의 한국소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고 있다. 최근 발표된 주목할 만한 소설들에는 ‘아이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고, 거기에는 세월호참사, 군대에서 일어난 따돌림과 총기난사 사건, 어린이집 폭행사건, 그리고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로 떠난 김군 사건 등 수많은 아이들을 허망하게 잃어버린 2014년의 현실이 고스란히 겹쳐져 있다. 그 글의 말미에 나는 “언젠가 내게 올지도 모를 한 아이를 상상하며, 잠재적 살인자가 된 심정으로”(306면) 글을 맺는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끝내 살인자가 되지는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씌어졌다.
5) 마이클 샌델은 ‘시장경제를 가진’(having a market economy) 시대와 ‘시장사회가 된’(being a market society) 시대를 구분한다. “두 개념의 차이는 이렇다. 시장경제는 생산활동을 조직하는 소중하고 효과적인 도구다. 이에 반해서 시장사회는 시장가치가 인간활동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어간 일종의 생활방식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와이즈베리 2012, 29면.
6) 이 소설의 이와 같은 논점은 이경재 「과거, 미래, 그리고 현재」(『자음과 모음』 2015년 봄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된 바 있다. “미래에서 온 아이가 타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미래야말로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진짜 타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사유할 수 없을 때, 기억은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282면)
7)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책세상 2005, 293면.
8)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2, 396면.
9) 진은영은 기억의 정치학을 위한 철학적 이론을 제안한 논문(「기억과 망각의 아고니즘—기억의 정치학을 위한 철학적 예비고찰」, 『시대와 철학』 21권 1호, 2010)에서 니체적 의미의 ‘기억’과 ‘망각’을 소개하고, 외상적 기억과 망각의 싸움을 “흔적의 기억과 본래적 의지의 기억(약속의 기억) 간의 싸움”(177면)으로 정리한다. 이 글에 따르면 집단적 외상 기억으로 인해 피폐해진 삶의 복구는 니체적 의미의 ‘능동적 망각’으로서 가능하다.
10) 한기욱 「야만적인 나라의 황정은씨—그 현재성의 예술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15년 봄호, 242면. “소설의 중심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주된 모티프는 나나의 임신이고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새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전면에 대두된다.” 한기욱은 『계속해보겠습니다』가 제기하는 몇몇 문제들을 두루 자상하게 짚고 있는데, 우리는 그중에서 임신과 생명의 모티프가 갖는 함의와 관련해서만 논의를 진전시켜보기로 한다.
11) 황정은 「가까스로, 인간」,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93면.
12) 같은 책 96~97면.
13) 황정은 소설에 등장하는 노동과 그로 인해 병들거나 죽는 몸의 형상이 갖는 함의에 대해서는 차미령 「2010년대 소설의 사회적 성찰—황정은 소설에 주목하여」(『문학동네』 2015년 봄호)를 참조. 덧붙여, 비교적 후경화돼 있기는 하지만, 황정은은 몸의 고통을 야기하는 노동의 반대편에서 경건하게 지속되는 노동의 세계를 그리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왔는데, 차미령은 아렌트를 따라 그 노동을 ‘손의 작업(work)’으로 명명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는 고통스러운 노동에 시달려 부서지고 흘러내린 몸을 ‘정신적으로’ 가지고 사는 ‘애자’의 반대편에, 도시락을 싸고 김치를 담그고 만두를 빚고 이불을 만드는 ‘작업’의 주체로 ‘순자’를 세워두었다. 그리고 사실상 순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들, 즉, 허무주의와 결별하고 ‘모체’가 되는 소라, 나나, 나기를 모두 길러냈다. 우리의 문맥에서 보자면, 순자라는 캐릭터가 품고 있는 이 ‘부모’로서의 면모는 각별히 중요하다.
14) 현대사회에서 출산은 원칙적으로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이에 관해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출산을 단념해야 하는 쪽으로 우리의 삶이 내몰리고 있을 때, 그것은 강요된 것이며 사실상 선택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레나타 살레츨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박광호 옮김, 후마니타스 2014) 참조.
15) 백낙청 「우리시대 한국문학의 활력과 빈곤」,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126면.
16) 한기욱, 앞의 글 2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