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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저서 『재현의 현재』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촛불과 등대 사이에서 쓰다』 등이 있음.
ssmart1@hanmail.net
이영광 李永光
시인.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등이 있음.
leeglor@hanmail.net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저서 『개념 비평의 인문학』,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황정아 지난호에 이어 문학초점 진행을 맡은 황정아입니다. 이영광 시인도 다시 함께해주셨고요. 이번호에는 이경재 문학평론가를 초대해서 함께 얘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영광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한참 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이경재 안녕하세요? 문학평론 쓰는 이경재입니다.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손보미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
황정아 이번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골라봤는데, 먼저 손보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손보미는 자기 스타일이 확실하고, 또 그것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작가죠. 스타일이라는 게 어차피 인공적이지만, 손보미는 그 인공성을 의식적으로 표면에 드러냅니다. 번역투라는 지적도 많은데, 실제로 한국어에서는 생략 가능한 대명사를 꼬박꼬박 써준다든가, 묘사할 때도 호흡을 한숨씩 늦추면서 꼬박꼬박 옮긴 듯한 문장이 눈에 띕니다. 즉각적인 스토리의 정동이 요구하는 대로 쓴다기보다, 한번 걸러져 완성된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것을 ‘쌀롱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마치 지난 세기 서구 부르주아 계층의 삶을 묘사하는 데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런 문체로 지금 이곳의 일들을 묘사하는 의도나 효과를 해명하는 것이 손보미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분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경재 저는 ‘대관람차’라는 소재가 인상적이었어요. 필연성은 없지만 세편에 대관람차가 등장하면서(「대관람차」 「임시교사」 「몬순」) 독자가 소설을 읽는 방향을 일정하게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국에는 도심에 설치된 대관람차가 잘 없어요. 소설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현실과 관련 짓기 마련인데 대관람차를 딱 등장시키면서 이건 현실 얘기가 아니야, 재현의 문법으로 읽으면 안 돼, 하고 지침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또 이 대관람차에서의 시선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통합니다.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면서 다른 풍경,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계가 지어진 시각이죠. 현실의 밑바탕이라 할 토대나 이면 같은 건 절대 볼 수 없고, 제한된 풍경들만 볼 수 있잖아요. 손보미의 글쓰기도 현실의 토대랄까, 그런 쪽으로는 절대 가지 않으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영광 저도 문장을 보고 번역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묘한 매력이 있기도 했고요. 서술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긴 시간을 다루는 소설이 많아서 그런 듯합니다. 「대관람차」도 이십년 이상의 시간을 다루고, 「임시교사」나 「고귀한 혈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인지 대체로 삶의 아이러니가 느껴졌어요. 방금 이경재 평론가께서 현실에 대한 제한된 시각이라고 했는데, 달리 말하면 손보미 소설에는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비사실을 연결 짓거나 아우르는 세계 인식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들)」 「상자 사나이」 「고양이의 보은」이 그랬어요. 만나기 어려운 사실과 비사실이 하나로 합쳐져 이뤄진 세계이고, 동화적 모티프가 가미되어 색다른 리얼리티를 산출해낸달까요.
황정아 스타일의 효과와 관련해서 「임시교사」도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 중심인물을 ‘P부인’이라고 칭하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호칭 자체가 지금 우리가 사는 공간이 아니란 느낌을 주잖아요.
이경재 한국에서는 1920년대 근대소설이 정착할 때 그런 표현을 많이 썼을 겁니다.
황정아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지금의 현실과 상당히 밀착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임시교사가 나이 들어 직장에서 잘리고 상류층의 보모가 되는 이야기인데, 그 사연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P부인은 서구소설에 나오는, 부르주아의 아이를 돌보는 몰락한 귀족의 느낌으로 그려집니다. P부인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한다는 게 「임시교사」의 독특한 면이에요. 자체 필터링이랄까요. 자기가 처한 현실에 거리를 두면서 그걸 마치 매끈한 스토리상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러니까 소설의 문체가 P부인의 자기인식 방식을 고스란히 되비쳐주면서 거기 담긴 허위의식을 드러내는데, 이 덕분에 효과적으로 아이러니가 만들어졌어요.
이경재 말씀하셨듯 「임시교사」의 소재는 지금 현실을 다루기에 적합합니다. “그녀는 ‘정식’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계속 준비했어야 했다”(116면) 같은 대목에서 젊은 시절에는 비정규직 교사로, 현재는 보모로 일하는 삶에 대한 깊은 회한과 그와 연루된 사회적 현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곧 “사는 건 그런 거지”(117면)라며 그러한 문제의식을 무화시키고 맙니다. P부인은 실제로는 보모임에도 자신이 젊은 부부의 집에 초대된 귀한 손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P부인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겨냥한 것으로 읽히지는 않습니다. 손보미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결정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이나 인물의 수수께끼 같은 면모가 노출되고, 해답이 주어지는 듯하지만 결국 그 답도 또 하나의 수수께끼에 불과하다는 식의 서사 전개가 많아요. 현실의 불가해함을 분위기 있고 세련되게 다루는 것이야말로 작품의 핵심 같아요.
이영광 「임시교사」에서 P부인이 아이러니를 지니는 건 임시교사라는 신분과 교사라는 직능, 그 사이의 거리를 실제적으로 해결해서라기보다는 해결 이전의 차원에서 하나로 뭉뚱그린 인물이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P부인이 설거지통에 덩그러니 넣어둔 찻잔을 바라보았다”(115면)는 대목으로 보아 마지막에는 P부인이 정상적으로 일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해 해고되는 걸로 보이는데요. 긴 시간에 걸쳐 자기 내면의 아이러니를 지녀온 사람이 결국은 자기가 돌보던 집의 시어머니와 비슷한 병에 걸리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설정 자체도 어떤 아이러니에 닿아 있어요.
황정아 저는 알츠하이머는 아니고 단순 실수로 봤어요. P부인이 처음에는 ‘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려 하고 그 가족의 삶에 너무 친밀하게 들어가 가사도우미처럼 되진 않으려고 애썼잖아요. 하지만 어느새 깊이 관여하게 돼버리는데, P부인은 그걸 또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식으로 느끼죠. 그래서 피고용인이라는 선을 살짝 넘어버린 결과가 그 찻잔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관람차」는 어떤 의미에서 「고귀한 혈통」과 「임시교사」의 어름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삶이 불만스럽고 “이런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봐 두려”(40면)워하던 인물이 성공적으로 상류층에 진입하는 얘기인데, 그 사람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 육아를 끔찍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여배우 P를 향한 일종의 선망과 정확히 대비됩니다. P부인과 유사하게 삶의 구체적 물질성과 거기 수반되는 울퉁불퉁하고 질척한 것들을 외면하려는 욕망이 있는 거죠. 그러다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53면)다고 마무리되는데, 여기에도 어느 정도 아이러니가 있어요. 아무 일도 확실히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 된다는 게 말이죠.
이경재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은 짧은 소설인데 작가의 소설관을 피력한 서문으로 읽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이야기잖아요. 손보미 소설의 겨냥점도 평범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삶 이면에 놓인 빈틈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낯선 기호가 갑자기 일상에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서사가 시작되는 방식이죠. 정영문 작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영광 「몬순」은 마치 줄거리를 기술한 듯한 속도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발레를 그만 둔 주인공이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가는데 몬순의 영향 때문에 고생하고 남편과 갈등도 빚고요. 뒷부분에서는 그래도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겠다, 무난하게 살아가겠다는 결심 같은 걸 피력하다가 거꾸로 되잖아요. 울잖아요. 이런 걸 보면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진실의 피할 수 없는 공격에 의해 토하고 마는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결말이 인상적이어서 이런 게 소설이겠구나, 싶었습니다.
황정아 「대관람차」에서도 화자가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리고 「임시교사」의 P부인도 울컥 불안감을 느끼고, 「산책」에 나오는 여자도 어떤 히스테리를 보이죠. 매끄럽게 줄거리만 잘 진술해도 될 것 같은 삶을 살고 싶지만 불쑥불쑥 새어나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의 매끄러움이 갖는 효과가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프레임이 되었달까요. 불안이든 눈물이든 그 프레임을 깨지는 않죠. 또 사실 불안이나 눈물이라는 게 생각보다 전복적이지도 않고요. 어쨌든 스타일 자체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는 정동을 미리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본격적으로 스타일을 내파하는 서사가 기다려집니다.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현대문학)
황정아 정이현의 전작인 『상냥한 폭력의 시대』(문학과지성사 2016)를 현실에 대한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탐문으로 인상 깊게 읽었는데,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도 그와 여러면에서 이어져 있어요. 이 소설은 두 사건을 축으로 진행되는데, 한편에는 아내 세영과 딸 도우가 관련된 학교폭력 사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남편 무원의 자영업자 온라인 커뮤니티와 관련된 또다른 사건이 있습니다. 시대마다 문제적인 공간이랄까, 대표성을 띠는 공간이 있죠. 학교는 사회 대다수 성원이 어떤 가치로 살아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고, 온라인 커뮤니티도 익명적이면서 내밀하기 때문에 역시 어떤 됨됨이나 도덕성을 시험에 들게 하는 공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당대 리얼리티가 문제적으로 압축된 지점을 포착해냈다는 생각입니다.
이영광 저는 그 두 공간의 연결이 헐거운 느낌이었어요. 무원이라는 인물은 SNS 공간에 대한 묘사와 연결돼 있는데, 그 커뮤니티에서 겪는 일들이, 가령 스토커 비슷한 ‘발새’라는 인물과 관계된 이야기를 포함해 이 소설에서 어느 정도 필요한 캐릭터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그리고 학교폭력 사건의 실체가 흐릿하게 처리되었다는 인상인데, 다른 방식으로 이 부분을 다루려 했나 싶었습니다.
이경재 저는 학교폭력은 비교적 간결하지만 밀도있게 그려졌다고 봅니다. 특히 아이들의 폭력이 사실은 어른들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시각이 유의미한 것 같아요. 유강이 폭력을 당한 원인이 축구경기에서 승부에만 집착하지 않고, 인간적인 배려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잖아요. 세영이나 무원이 보여주는 극심한 이기의 세계가 아이들의 세계에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황정아 저도 폭력의 빌미가 되는 축구경기 장면, 특히 성차(性差)가 개입된 대목이 상당히 날카롭다는 생각입니다만, 아무래도 소설의 핵심은 사건의 디테일을 짚어가면서 예상할 수 없었던 변수를 추적하는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은 하나하나가 심각한 사안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일반화된 문제기도 하잖아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사건으로서의 학교폭력을 전제하고, 사건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해서 세영과 무원과 도우라는 인물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또 그 반응에서 도덕적인 혹은 인간적인 규범이나 가치가 어떻게 시험받는가 하는 데 포인트를 둔 것 같아요.
이경재 세영의 심리를 묘사하는 대목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세영은 “남의 인생에 그렇게까지 개입하고 싶지는 않다”(45면)고 하잖아요. 내가 나쁜 짓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익을 취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일만 신경 쓰고 싶다는 건데, 끝내 그러지를 못하더라고요.
황정아 그렇죠. 이 소설은 세영이 아침에 눈을 떠서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시작해요. 세영도 그렇고 무원도 그렇고, 이 부부는 어떤 사건이 있기 전부터 이미 삶의 의미를 놓쳐버린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원도 박사과정을 중도 포기하고 상속받은 호텔 경영에 나서지만 뭘 제대로 이루지는 않죠. 두 사람 다 일종의 데까당스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영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 고민하다 일어나서는 곧바로 도우가 학원에서 치러야 하는 승급시험을 걱정해요. 이 모습이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자기 세대의 가치를 다듬고 그걸 다음 세대의 자녀에게 전수하는 과정이 양육이잖아요. 하지만 자기 삶과 자녀를 양육하는 태도가 일치하기는커녕 굉장히 벌어져 있어요. 자기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해놓고 자녀에게는 학원, 시험이 중요하다고 여기고요. 이 간극을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영광 중산층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매뉴얼은 사실 강제된 거죠. 지금 강남 부모들도 겉으로는 다 악착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내면에 공허가 있을 것 같고. 저는 이 소설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세영이라는 인물의 성격과 관계있을 것 같습니다. 세영은 가능하면 남의 일에 연루되기 싫어하는 소극적인 성격이고, 이는 분명 우리 삶의 숨은 단면을 반영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어떤 성격을 부여받은 인물이라면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해나가야 하는데, 세영은 왔다 갔다 합니다. 가령 강이 할아버지의 문자메시지를 거듭 회피하는 모습과 남편을 찾아가 호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삶의 중심이 없는 사람처럼, 자기 성격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느낌이었어요.
황정아 일관성이 없다고 느끼신 건가요?
이영광 결말에 세영이 마치 인질범한테 딸이 잡혀 있는 것 같은 상상의 공포에 젖어서 장례식장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예로 들면요, 딸이 아무리 소중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과잉반응이고, 손주를 잃은 사람이 치르는 장례식장에 가면서 그 정도로 두려움에 젖어 딸을 ‘구하러’ 간다는 게 잘 납득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어쩌면 저 같은 전 시대의 사람이 전 시대의 관점으로 봐서 그렇지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세영 같은 인물이 오히려 소시민의 전형에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웃음) 이상하기는 한데, 이 이상한 인물이 어쩌면 시대 변화를 담고 있는 인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이경재 ‘작가의 말’이 많은 힌트를 주는 작품입니다. 첫 문장이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끝나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165면)인데요, 2006년에 발표한 「어금니」가 바로 이 문장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도 기본적으로 중산층의 극단적인 자기보존 욕망을 보여줍니다. 중산층 가정주부가 주인공이고, 외고 나와서 과기대에 다니는 아들이 등장해요. 이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서 같이 타고 있던 여중생이 죽는데, 여자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온갖 일을 하고 실제로도 지켜냅니다. 심지어는 아들의 상처를 보고는 펑펑 울던 사람이 학생의 빈소에 가서는 울지도 않아요. 작가는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가 이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는데, 끝나는 것도 결국 이 문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까 황정아 평론가께서 말한 간극, 삶에 의욕도 없지만 또 자식은 아주 극단적으로 위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일종의 자기소외가 아닌가 싶어요.
황정아 그런데 세영에게는 날카로운 면도 있습니다. 가해학생들이 쓴 자술서라든가 가해학생 부모의 태도에 대해 정확하게 판단하죠. 학폭위에 가면 가해학생의 부모들이 “맹수에게 다리 한쪽을 물어뜯긴 초식동물의 눈빛을 하고 있으리라고”(20면) 신랄하게 말하잖아요.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무책임한 사람은 되지 않길 바라는데,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기 때문에 세영을 더 차가운 인간으로 보이게 합니다. 이 소설의 세계가 정말 처절하게 폭력적이지는 않죠. 가해학생의 부모도 눈치를 보고 더 극악한 상황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스스로 교양있고, ‘알 만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중산층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정도의 시험대를 통과하는 것만도 큰 타격이 되지 않나 생각해봤습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는 사건이 결국은 인간됨의 핵심을 확 드러내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비극성도 생겨나고요. 마지막에 세영이 “도우가 바라는 대로 뒤돌아 나가주고 싶다. 강이의 빈소에 엎드려 오래오래 울고 싶다”고 하다가도 “지금은 힘을 아껴두어야 한다고 생각”(147면)하죠. 왜 그런가 하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148면)라고 느끼기 때문인데, 이 대목이 상당히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영광 그런데 조금 무책임한 말 아닌지요? 장례식장에서 이런 심리와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신들에게 간구하겠다고 한마디 하는 것에는 어떤 자기기만이 투영된 건 아닐까요. 저는 여전히 세영이라는 인물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간구하는 밤이 언젠가 올 것이다” 하고 예언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태도와 안 맞는 것 같아요. 작가가 윤리적인 태도를 지나치게 의식한 것 같기도 하고요.
이경재 이 작품이 중산층의 위기를 정말 실감있게 나타냈다는 평가에는 동의하는데, 말씀하신 결말부 앞에 나타난 도우의 형상이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도우가 너무 도덕적인 게 설득이 안 됐어요. 소설이 너무 상투적이고 쉬워지는 느낌도 들고요. 도우의 부모인 세영이나 무원의 성격도 그렇고, 학교폭력이 벌어지는 학교의 상황도 그렇고, 도우가 그렇게 도덕적일 수 있는 여지가 이 소설에서는 잘 보이지 않거든요.
황정아 앞서도 얘기했지만 세영은 공허한 내면과 중산층적인 삶의 궤도 사이의 간극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살아가지만, 한편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식도 있어요. 그래서 마지막은 내가 다 알지만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일을 겪어 마땅하다, 어떤 더 큰 벌이 내게 주어질 것이다,라는 예감으로 읽혀요. 물론 그건 더 큰 벌에 대한 예감으로 지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또다시 안 하는 것이기도 하죠. 세영이 지속적으로 보여줬던 모습이 바로 그런 겁니다. 알면서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하지 않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을 또 아는 것. 이런 걸 다 보여주는 게 이 소설의 장점이 아닐까 합니다.
최민우 『점선의 영역』(창비)
이경재 최민우는 2012년 등단 당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실감을 느끼게 하는 문장과, 한두 단어로 인물이나 상황에 적합한 진상을 포착하는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첫 소설집 『머리검은토끼와 그 밖의 이야기들』(자음과모음 2016)에 이어 장편 『점선의 영역』이 나왔습니다. 최민우는 아직 한 단어로 규정하기엔 이르고, 이제 작가로서 입지를 형성해가는 단계로 보입니다.
황정아 최민우는 장르적인 소설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장르적인 장치를 들여올 때도 합리적이고 안정감 있는 서사를 보여줘요. 재치가 있으면서도 우직하다고 할까요. 『점선의 영역』에도 이러한 요소들이 버무려져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취업준비, 면접, 회사생활 같은 것들을 다룬 청년서사인데 할아버지의 예언이나 그림자 장치같이 사실적인 범주를 벗어나는 차원이 함께 들어 있죠.
이영광 『점선의 영역』에서는 그림자가 없어지는데, 그림자가 일어나는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의 날카롭고 섬뜩한 설정이 떠올랐습니다. 그림자라는 메타포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여자친구 서진의 분노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굉장한 정신적 혼란 속에서 분노 자체가 그림자와 더불어 독립적으로 떨어져나가서, 이게 도시 전체에서 벌어지는 정전사고의 원인으로 오인되는 이야기를 이루는데요, 이에 대한 해석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황정아 그림자라는 모티프는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말씀하신 대로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와 같이 놓고 읽지 않을 수 없지요. 얼마나 차별화된 스토리로 만들어내느냐가 아무래도 주목할 포인트이겠습니다. 이 그림자가 처음에는 주인에게서 떨어져나가 힘없는 모습을 보이죠. 마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이나 세상이 너무 밝아서 숨을 데가 없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밝게 다 드러나야 하는 세상이라 그림자의 입지가 없어진 거죠. 그렇지만 그림자는 또 주인의 어둠 같은 것이라 앙갚음을 하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조금 무서운 모습이 되어 정전을 야기하고 세상을 아예 더 깜깜하게 만들어버리죠. 그러다 결국 다시 그림자를 되찾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작품 안에서 상당히 복잡한 양상으로 등장해요. 이런 면들이 어떻게 잘 연결되느냐가 일단 중요하겠지요.
이경재 『점선의 영역』은 현실과 접촉면이 넓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화자인 ‘나’와 서진의 사랑 이야기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열한번 실패하고 열두번째 취업에 성공하고, 서진은 계약직 인턴이었다가 밀려나고 면접 현장에서는 인격모독에 가까운 대우를 받거든요. 거기에 보일러 수리를 둘러싼 집주인과의 갈등 같은 소소한 사건들까지, 환상적인 요소 없이도 충분히 완성된 작품이 될 수 있을 정도인데요, 그럼에도 다른 작가의 흔적이 진하게 밴 그림자라는 소재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웬만한 야심과 준비 없이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자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도, 무력한 자신에 대한 혐오로도 읽힙니다. 그래서 그림자가 떨어져나간다는 것은 나약한 자신의 존재를 체념적으로 수긍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림자가 사라진 후 서진의 몸까지 보이지 않게 되는 것도 주체의 소멸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됩니다.
황정아 기본적으로 두가지 이야기가 겹쳐 진행됩니다. 서진에게서 그림자가 떨어져나간 사건이 있고, 빅데이터 분석 업체에서 일하는 화자가 개발하려는 ‘우울증 사전 예측 프로젝트’가 또 하나고요. 이 프로젝트에는 “알고리즘을 설계한 개발자도 자기가 짠 프로그램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를 도출하는지 정확히 이해 못하는”(48~ 49면) 이면의 영역, 즉 블랙박스가 존재하죠. 얻고자 하는 게 우울증 예측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합니다. 우울증이라는 게 말하자면 대낮의 영역, 일상의 영역에서 이탈해서 축적된 것인데, 그걸 데이터를 통해 파악하겠다는 거죠. 삶의 이면을, 삶의 블랙박스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서진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건 면접에서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지적을 받고 돌아오면서예요. 회사가 매끄럽게 돌아가야 하는데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건 시스템에 불필요한 요소죠. 시스템은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고요. 그렇게 억압된 것들이 귀환하는 방식으로 그림자가 정전을 야기한다거나 데이터를 가진 사람이 실종되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억압된 것의 귀환은 대개 일정한 폭력을 동반하니까요.
이영광 전체를 보면 연애 이야기인데, 구성상 할아버지의 예언으로 촉발되지요. 그리스비극을 일부 차용, 변형한 것 같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두 눈을 찌르지만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한쪽 눈을 실명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런 고통을 겪지만 결국 해피엔드에 가깝죠. 서진에게는 그림자를 잃은 사태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저주죠. 그림자가 떨어져나간 원인은 통제할 수 없는 분노였고요. 그림자는 통상 영혼의 비유로 많이 쓰이는데, 그렇게 보면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내면의 요소가 밖으로 이탈해버린 거예요. 이후에 서진은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서진은 그림자가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해요. 계속해서 발생하는 정전도 도시를 위협하는 사태인데 오히려 서진은 면접에서 받은 모욕에 대한 그림자의 복수라고 생각하고요. 그렇게 서진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나오면서 주인공과 서진 사이에 감정의 골이 생깁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인공이 한쪽 눈을 잃고 나서, 정전의 원인이 (그림자가 아니라) 전산망에 사용된 알고리즘의 오류라는 뉴스 발표에 동의하게 되고요. 그후 서진과 다시 재회하는데,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진은 그림자를 되찾습니다.
황정아 뉴스 발표는 일종의 무마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림자 없는 서진의 상태에는 확실히 아이러니가 있는데, 그림자라는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하고 부담을 더니까 그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거죠. 자기주장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감당하기 힘든 자기주장을 떨궈내버린 겁니다. 마지막에 “예언이라는 확고부동한 점이 있다고 삶이 분명해지지는 않는다. 그 점의 앞뒤에, 위아래에 다른 점을 찍는 건 우리 자신이다”라고 하면서,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점선의 영역’의 “불완전함을 껴안고 살게 되었다”(164면)고 말하죠. 이상한 건 이상한 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건 또 어려운 대로 포괄하면서 그것에 자리를 마련해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 같아요.
이영광 인간의 운명이 다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깔려 있고요. 오이디푸스한테 내려진 신탁과 여기서 할아버지가 말하는 예언은 내용이 다르더라고요. 할아버지는 “용기를 잃지 마라. 도망치면 안 돼”(16면)라고 하는데, 인간적이고 의지적인 요소까지 가미된 예언이에요. 그래서 완전한 파국으로 가지 않고 좋은 의미에서의 무마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경재 저는 결말이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최민우는 소설집의 표제작이었던 「머리검은토끼」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이베리아의 전갈」에서, 완벽하게 통제받는 사회에서 무력한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거든요. 세계가 개인의 능력과 의지로 변화되는 곳이 아니라 큰 틀에서는 정해진 곳이라는 거죠. 『점선의 영역』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세계관의 연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에는 모든 것을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데이터 회사가 존재하는 거죠. 그런데 결말에서 아까 인용하신 대로 개인의 자율적 영역을 한껏 넓혀놓거든요. 이러한 결말의 인식과 상황이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 나중에 서진이가 자기를 떨어뜨린 제작부장이 차린 회사에 직장도 얻잖아요. 그게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떨쳐내고 이 사회로 돌아온 건지, 그걸 껴안고 돌아온 건지가 애매해요. 만약에 시스템이 요구하는 것 이상을 끌어안은 거라면, 그 전의 서사가 충분히 개연성 있게 느껴지지 않아요.
이영광 주인공이 눈 하나를 바치는 과정도 그렇죠.
황정아 저는 다소 산만한 이야기를 비교적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디테일 면에서 재치나 통찰도 엿보이고요. 그렇지만 시스템의 완결성을 주장하거나 완결을 추구하는 시스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식의 세계관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점선의 영역이 있고 그걸 수용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정작 이 작품의 ‘점선의 영역’은 뭘까, 그런 게 있나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마무리가 덜 치밀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애초에 마무리가 중요한 서사가 아니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죠.
최승호 『방부제가 썩는 나라』(문학과지성사)
이영광 최승호 시인의 시세계는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인간의 욕망, 그 욕망에 내재된 인간의 어리석음, 이런 것을 비판하는 시세계를 일관되게 추구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태주의적 관심, 종교적 성찰을 통해 욕망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문제의식을 꾸준히 밀고 왔고요. 『방부제가 썩는 나라』에서 이러한 세계가 더 깊어졌어요. 박물지적 상상력을 비롯하여 기본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시집이나 근자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시인의 변모를 간추린다면 관찰에서 통찰로, 비판에서 성찰로, 풍자에서 연민을 수용하는 쪽으로 옮겨왔습니다. 말은 간결해지고 함축도가 높아졌는데, 까칠함을 유지한 채로 선승의 면모를 띤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황정아 저도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체적으로 문명비판, 사회비판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고 그 범주 안에서 어떤 독자적인 방식으로 시세계가 펼쳐지는지 주목하면서 읽었습니다. 사회비판도 그렇지만 문명비판의 차원까지 넘어갈 때는 예측 가능하고 익숙한 비판이 되거나 너무 추상적이 될 위험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피해가는지도 궁금했고요.
이경재 선승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시집의 첫번째 시가 「대파」잖아요. “누워 있는 대파는 대파될 것이다/대파되지 않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구절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풍자에서 연민으로 갔다고 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풍자가 더 전면화되고 신랄해지지 않았나, 그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대파로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풍자의 거점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으면 허무주의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재벌 4세는 모르리라」 같은 시에서는 광산촌이나 달동네 사람들의 삶도 덩달아 희화화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시인이 이 세상에 무척 화가 난 듯한 느낌이랄까요.
이영광 연민으로 갔다기보다는 연민의 시선이 늘어났다는 정도의 생각입니다. 허무주의적인 느낌도 있는데, 통상적인 허무라기보다는 무애(無㝵)한 면모를 띠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하층민의 삶을 희화화한다기보다 그냥 객관적으로 제시한다고 봐요. 어떤 가치판단이나 정서적 시선의 개입을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죠.
이경재 희화화는 좀 제가 셌던가요. 연민의 결여로.(웃음)
황정아 생태주의적 문제가 꽤 많이 언급되잖아요. 「내 눈에 지느러미를 다오」에서 상어의 지느러미가 떨어져나간 상황에 대해 “지느러미 없는 눈으로 바라본다”라고 하거든요. 공감하지 않으려고요. 공감하면 괴로우니까. 담담한 제목 같은데 그 안에 반어적인 섬뜩함을 담아냈어요. “지느러미 없는 눈”이라는 구절을 읽으면 ‘팔다리 없는 눈’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 눈으로 인간을 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인간적인 시각을 상대화함으로써 그 너머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밖에도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먹고 있는가를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눈길을 끕니다. 생태주의적인 문제의식과도 통할 텐데, 먹는 일의 끔찍함이랄까 부패랄까, 이런 것들을 환기하는 시도 있고요. 동물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점이 눈에 띄는데, 이 또한 우리의 물질생활에 대한 문제제기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경재 동물들이 인간의 욕망이나 누추한 삶을 비유하는 소재로 등장하지요. 생태계와 관련해 연민과 공존의 대상으로 언급되거나 어떤 어리석음의 표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내 눈에 지느러미를 다오」에 “바라는 것 없이 바라보려고 애쓴다/바라는 것이 바로 고통이기 때문이다” 같은 불교적 인식이 들어간 역설적인 구절이 나오는데요, 이 애착이라는 게 고통이기도 하지요. 지나친 연민을 자제하려는 다소 냉정한 태도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최승호 시인이 한편의 시를, 시상을 조직하는 방법 혹은 기법으로 쓰는 것이 대체로 이런 아이러니 같습니다. 결국 동물 이야기가 대체로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로 설정되어 있는데, 아이러니와 알레고리, 그리고 몇몇 날카로운 비유가 시인이 꾸준히 추구해온 작법입니다.
황정아 연민과 관련해서는 「아픈 개미가 있다」가 떠오르네요. 이 시도 동물을 등장시켜서 사람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상당히 독특한 파토스를 만들어내더라고요. 무리를 개미에 비유하는 건 상당히 흔하지만, 이 시는 일관되게 개미 얘기인 척, 비유가 아닌 척 진행되고 마지막까지도 그냥 “아픈 개미가 있다”로 마무리됩니다. 실은 너무 직설적인 비유지만 바로 그래서 또 묘하게 파토스와 연민을 불러일으키지요. 풍자를 위한 유머코드도 넓게 깔려 있어요. 세련된 ‘아재개그’랄까요.(웃음)
이경재 기본적으로는 언어유희를 동반한 풍자가 주를 이룬다고 봤는데요, 몇몇 시는 어조나 파토스가 달라요. 특히나 노년 혹은 죽음을 다룰 때 연민이랄까 공감의 정서가 훨씬 강하게 드러납니다. 「어두운 죽음의 마을」에서 “마을은 언제나 산 사람들의 기쁨보다/죽은 사람의 슬픔으로 무겁다”라는 구절, 「돌들의 시간」에서는 “돌미륵은/돌로/돌아갈 것이다” “부도비도/돌거북도/돌의 골짜기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고요. 「흰긴수염고래의 노래」에도 그런 정서가 느껴집니다.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연민, 공감의 정서를 다른 시에서 보이는 신랄한 풍자와 연결시키면 모종의 허무주의와 만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영광 메시지가 뚜렷하게 드러난 시도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적확한 비유나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통해 시적으로 정확하게 만든 시도 있죠. 저는 이런 시들이 재밌었어요. 「슬픈 진화」는 코끼리 얘깁니다. 비유로 치자면 원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이라는 장자의 가죽나무 비유를 코끼리에 결합시켰어요. 코끼리는 애초에 태어날 때는 엄니가 없고 자라면서 엄니가 나면 사냥당할 운명에 처해지는데, 그걸 모르고 커가잖아요? 진화의 과정 자체가 살해당할 운명에 다가가는 것이라는, 깊이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보니, 밀렵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실제로 아예 엄니가 없는 코끼리들이 태어나기도 한답니다. 이 사실을 대입해 읽어도 이 시는 시로 성립해요.
황정아 「파리채」는 “파리의 생각은/온통 부패뿐이다/내 생각도 온통 부패뿐이다”로 시작해서 “얼마나 힘껏 파리를 내리쳤는지/파리채가 부러졌다”로 끝납니다. 저는 이 시에서 일정한 자기희화화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문명비판에 골몰하는 시적 자아에 대한 거리두기랄까요. 시집 전체로 보면 문명에 대한 사유나 사회비판이 자기성찰의 통렬함과 결합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민의 정서를 환기하기에는 더 적절하기도 합니다. 복잡한 자의식이 개입되면 시가 쓸데없이 꼬일 수가 있으니까요. 이 시집은 그런 게 없다는 점이 장점이면서도 다른 한편 다소 단순한 구성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공감 가는 시편도 있고 인상적인 대목도 있었지만 그 울림이 그리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영광 동식물의 생태, 그것과 물질적으로 연결된 인간 삶의 형편, 그리고 그것을 관찰한 결과로서의 시가 이 시집에 담겼습니다. 결국 시작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태도는 더욱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치적 맥락에서 어쩌면 그런 현상들 뒤에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정치적 맥락과 연관있지만 직접적인 메시지들을 시에 넣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것 같고요. 시대와 사회 문제들을 이런 방식으로 제시하겠다는 미학적 태도일 수 있겠습니다.
이경재 문명비판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삶과 일상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이 시집에서 더 전면화되지 않았나 합니다. 시집에 등장하는 동물들도, 그런 문명이나 생태주의적인 관점보다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된 것 같아요.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창비)
이영광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는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별로 얼굴이 조금씩 다릅니다. 1부 ‘종이감옥’에는 뚜렷한 사회적 자아가 등장해 바깥의 현실이나 그것과 연결된 내면의 생각과 정념을 드러내는데, 현실의 알레고리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부 ‘눈동자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는 최근 몇년간의 예민한 이슈와 사건을 다룬 시편들이 많은데, 그 사건들이 던져준 충격만큼이나 화자의 목소리도 직접적인 동시에 격정적이에요.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말하다보니 다소 서술적이기도 하고요. 3부 ‘주름들’에서는 대체로 지난 시집에서 이어지는 테마를 다룹니다. 가족들의 죽음, 남은 가족들에 대한 이런저런 심회를 적은 시편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이 좋았던 만큼 3부의 시들이 호소력이 컸습니다. 4부 ‘하느님은 부사를 좋아하신다’의 시들은 성찰적이랄까요. 시적 소재를 외부에서 끌어오는 인유의 방식을 취할 때가 많아서 지금 여기 발밑의 현실을 다룬다기보다는 정신의 여행 또는 비행을 하는 시편들에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황정아 전체적으로 반듯하고 강건한 서정시이면서 사회적인 주제를 많이 다뤘다는 생각입니다. 폭력, 아우슈비츠, 전쟁, 위안부, 세월호 같은 고통과 재난에 관한 시가 많았고, 그런 점에서 증언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말하는 「문턱 저편의 말」 같은 시도 눈에 들어왔어요. 흔히 나희덕 작품을 두고 생태라든가 모성, 여성성을 많이 얘기하는데 이번에는 그 점이 특별히 두드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경재 이번 시집에서 부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혔습니다. 가장 뛰어난 작품이 모였다는 게 아니라 나희덕 시인의 시세계에서 이번 시집이 놓인 위치를 잘 보여주는 지점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에서는 세월호나 방사능유출, 심지어는 대학구조조정 문제까지 시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또, 1부에 있지만 「파일명 서정시」가 시인의 변화된 지점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파일명 서정시’는 구동독 정보국이 시인 라이너 쿤쩨(Reiner Kunze)에 대해 수집한 자료집입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정보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숲에서 지빠귀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옷자락에 잠든 나방 한마리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가 전통적인 서정시의 항목들이라면, “고치다 만 원고 뭉치”나 “국경을 넘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나희덕이 새롭게 등재한 서정시의 새로운 영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황정아 시쓰기 자체에 대한 시도 상당히 많은데, 저는 서두에 실린 「눈과 얼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뭇가지처럼 허공 속으로 뻗어가던 슬픔이/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내 몸에서”라는 구절의 대조가 상당히 뚜렷합니다. 슬픔이 떨어져나가서 결국 치욕이 되거든요. 뒷부분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에 이어 “얼음 조각과 얼음 조각이 부딪칠 때마다/얼음 조각이 태어나고/부드러운 눈은 먼지와 뒤엉켜 눈멀어가리라”로 마무리되는데, 치욕은 더 자잘한 치욕이 되지만 슬픔 자체는 퇴색되는 것이 슬픔의 표현이 갖는 위험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사회적인 슬픔이 갖는 위험이기도 하죠. “서정시마저 불온한 것으로 믿으려”는 이들을 비난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파일명 서정시」)인 서정시의 어떤 고요한 불온성을 이야기하는 것과 보완적으로 읽히기도 하고요. 「나날들」도 서정시와 사회성의 결합이 상당히 돋보이는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이나 맥락을 제시하지 않는데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전반에 대한 실감을 꽤 생생하게 전합니다.
이영광 「나날들」에서는 자기를 포함한 인간의 삶을 짐승의 삶으로 보고 있어요. 시의 앞부분과 중간에 독백투의 대화로 삽입된 부분이 다른데, 이 중간의 대화가 보여주는 비논리적인 연결이 독자성 강한 발화로 등장하면서 모종의 시적인 모호함을 만들어내요. 진술에 그치는 부분은 좀 평범한데 이런 시도들은 좋아 보입니다. 일일이 묘사하지 않아도 미묘하고 역동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고 할까요.
이경재 앞서 다룬 최승호 시집과도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인데, 정서가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표출 방식은 최승호가 적극적인 데 반해 나희덕은 좀더 절제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황정아 「이 도시의 트럭들」은 최승호의 「내 눈에 지느러미를 다오」와 주제 면에서 연결되는 것 같네요.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로 시작해서 “커브를 돌 때마다/휘청, 죽음 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로 끝나는데, 삶을 반납하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생의 끔찍함이 육박하는 시입니다. 요사이 육식문화를 비판할 때 보통은 공장식 사육에 초점을 두는데, 이 시는 좀 다르게 접근해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요구되는 유통에 초점을 맞춘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트럭들”이 너무 많이 싣고 간다는,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 같은 문제를 포착하는 시선이 이채롭습니다.
이영광 주제적 관심의 다면화, 확장이라는 점에서는 분명 긍정적으로 읽힙니다. 주제 선택과 시적 형상화 사이의 간격을 개성적으로 좁히는 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큰 에너지가 투여되어야 하고 자기에게 맞는 기법과 목소리의 개발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그런 노력이나 적극성, 의욕이 확연히 느껴집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흙 묻은 밥을 먹었다」에서 “부서져내리는 흙에는 국경이 없다/이 흙 묻은 밥에도”라는 마지막 구절은 잠언적이면서도 재난에 대한 우리의 인식 혹은 어떤 공감의 태도를 잘 아우른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욕심 내지 않으면서 한 지역의 문제를 세계적 보편성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인식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세월호 생존학생들이 법정 증언하는 「문턱 저편의 말」을 보면 재판정의 목소리를 그 자체로 들여오는데요, 이런 기법적·방법적 시도는 그 자체로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시인의 목소리로 도저히 흉내내거나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서 나오는 말들이기 때문에 이렇듯 육성을 사용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런 주제를 작품화하는 과정에서 시인이 기울이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게 최선의 결과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탐구해봐야겠지만요.
황정아 서두에 말씀하신 것처럼 3부의 시들은 죽음과 늙음, 육체까지 다루는데, 아버지를 회고한 「나평강 약전(略傳)」도 잔잔하게 퍼지는 느낌이 좋았고, 반면 「금환일식」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부드러운 월식에 빗대고자 했으나/아주 격렬한 일식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라는 구절은 구체적 서술 없이도 전달되는 격렬한 감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영광 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남겨진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삶을 통해 다시 돌아보는 자신의 모습, 어머니의 생애와 연루된 자신의 모습이 3부에 두루 들어 있어요. 이런 시를 쓸 때 평이한 서술이나 진술에 의지하지 않고 「금환일식」처럼 자연현상에 빗대어 쓰거나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에서처럼 틀니 같은 객관적 상관물을 들여오면 시가 더 애절해지고 깊어지지요. 어떤 기법적 효과나 수사적 선택의 중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황정아 그런 시적 가공으로 깊어지는 시들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인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 점에서 ‘파일명 서정시’라는 표현은 시를 감시하고 분류하는 외부의 억압만이 아니라 서정시 안에서도 ‘파일명 서정시’로 일컬어질 수 있는 틀이랄까 이미 닦여진 길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파일화할 수 있는 특징들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파일명 서정시』에 실린 모든 시들이 ‘파일명 서정시’에 맞선 싸움을 여러 전선에서 벌이고 있는 것이겠지요. 독자로서 그 싸움이 더한층 격렬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김이강 『타이피스트』(민음사)
황정아 오늘 이야기할 마지막 작품은 김이강 시인의 두번째 시집 『타이피스트』입니다. 앞서 읽은 두권의 시집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시집이었습니다. 저로서는 공감보다는 차이를 더 의식하게 되기도 했습니다만,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영광 앞쪽에 놓인 긴 분량의 시들은 의도적인 비문이 많고, 인칭의 혼란도 있어요. 문장 내용을 보면 사실관계들이 부정확하고, 인과관계가 논리적이라기보다 자유롭게 설정되어 있는데, 이런 걸 감안하고 읽어야겠습니다. 특히 앞부분에서 그런 혼란이 자주 느껴졌어요. 비유나 역설을 담은 소위 시적인 문장보다는 서술적인 문장도 많고요. 다소 산만한 진술이 이어지기도 하고 행간이 멀어서 시상이 자주 끊기기도 합니다. 시간과 공간, 인물과 행위, 사고와 의미, 이런 것이 일부 탈골되어 있어서 뭔가 혼란을 잡아주는 이미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긴 시들에서 문맥의 무질서도가 다소 높았던 것 같은데,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의 시에서는 간혹 혼란스럽기는 해도 발화의 힘이 느껴졌어요. 익숙한 서정시에 가까운 짧은 시편도 있었는데, 이런 시들은 호감을 주었지만, 서로 다른 결의 시들이 한 시집에 공존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경재 김이강의 시세계는 1930년대 이상(李箱)이나 후반기 동인이었던 조향(趙鄕) 같은 초현실주의 시인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여요. 전화기와 해변의 이미지가 기이하게 병립하여 전개되는 「해변 속의 너」는 조향이 자신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작품으로 꼽은 「바다의 층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바다의 층계」(1958)에 등장하는 “모래밭에서/수화기(受話器)/여인(女人)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그림자”처럼 전화기와 해변이 맥락 없이 연결되어 있거든요. 김이강의 시에도 초현실주의의 주요한 기법인 자유연상, 내면독백, 몽따주, 편집광적 기법 등이 다양하게 구사되지만, 그중에서도 조향이 강조한 ‘데뻬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이 전면적으로 사용되는 것 같아요. 사물이나 존재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하고 새로운 창조적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 데뻬이즈망인데, 이번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에 이러한 기법이 구사된 것으로 보입니다. 과도한 해석일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김이강은 일정 부분 자각적으로 한국문학사의 초현실주의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시작 활동을 하는 것 같아요.
황정아 꿈속 같은 공간, 선명하다가도 희미해지는 공간이 많이 등장하는데, 시간 자체도 모호하고 불투명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시공간뿐 아니라 기억과 이미지들의 결속들을 해체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접속시키는데, 이 접속의 이음새를 지워버려서 빈 공간으로 두거든요.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고요. 어딘지 어리둥절하게 만들면서 덧없는 느낌도 자아냅니다. 구심력이 약해서 항상 어디론가 새어버리는 것 같달까요. 「서늘한 식당에서」에서 “흐린 꿈속에서 헤매는 동안 너는 조금씩 선명해지고 (…) 너는 다시 흐려지면서 다가오는 것”이라는 대목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런 분위기가 시집 전체를 감싸는 듯합니다. 「메리언배드」의 “그런 후에라도 닿는 곳이 있다면/감쪽같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면”이라는 구절도 그렇고요. 어딘가에 닿는 일과 사라져버리는 일이 다르지 않은 것, 그런 게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이 시인의 시쓰기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이영광 초현실주의와 관련있다는 견해에 공감합니다. 특히 짧은 시들에서 데뻬이즈망 기법이 여러번 시도되는데, 「분수대 근처」에서는 한자리에 있기 어려운 소재들의 관계와 배열을 바꿔서 생겨나는 효과가 썩 잘 느껴지지 않아요. 이야기가 들어간 시들에서는 무맥락의 맥락이라는 차원에서 자동기술을 연상하게 하는 문장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인상적인 수작을 꼽자면 「기린 산책」입니다. 이 시는 문장이 잘 벼려져 있고 어떤 시적인 문맥을 이루는 데 성공한 것 같아요. 룸펜 예술가의 처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드러내려고 하는데, “강가로 갈 거라면/몸을 접고 앉을 각오로” “회사원이라면 양복을 입을 각오로/옷장을 열어야 하겠지만” 같은 문장에는 재미있는 긴장도 들어 있고요. 「네가 잠든 동안」도 강한 파토스를 느끼게 합니다. 김이강의 시에는 쉽게 파악되는 시의 테두리를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본능으로 벗어나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서울, 또는 베를린의 겨울에 대한 생각」은 매력적인 시입니다. “머릿속에서 짧은 문장 몇 개를 정갈하게 배열하고” 나서 엉뚱하게 “바닥을 닦”아요. 이런 식의 혼란이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뒷부분의 “베를린에서 머무른 이래로 그 애는 단 한 번 서울로 왔지만/이제는 멀리서 서울의 날씨를 궁금해하는 날”에 이르면 주체와 대상의 위치관계가 조금 애매해지면서 이 혼란이 생산해내는 시적인 의미가 손에 덜 잡히게 됩니다.
황정아 아무래도 1부를 좀더 긴장하면서 읽었는데요, 「등대로」의 경우 시간적인 탈구와 중첩이 흥미로운 효과를 자아냅니다. “성훈이가 걸어간 길을 잊을 수 없다”고 시작되지만 그다음에는 “그가 웃는다”라는 현재형으로 이어지면서, 과거의 그 일이 잊힐 수 없다는 느낌이 커집니다. “사람들이 오래 바라보는 일을 잊을 수 없다고 그가 말한다”는 일종의 비문처럼 느껴지는 대목도 눈길을 끌지요. 과거를 탈구해 현재와 겹쳐놓아서 기억을 강화하는 효과가 나옵니다. “결국 면접관을 죽이러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 역시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미래’지요. 이 대목에서도 시간은 잘리고 다르게 이어집니다. 이밖에도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처럼 연인 혹은 친구 같은 구체적인 대상이 있는 시들에서 아무래도 목소리가 더 생생해요.
이영광 『타이피스트』는 개성이 강한 시집입니다. 꿈의 기록, 동시에 무의식의 기록일 수도 있지요. 시쓰기는 어찌 보면 의식과 무의식의 협업일 텐데, 그 비율을 얼마나 예민하게 조절해나가는가가 중요하겠죠. 우리가 쉽게 공감하고 호감을 느끼는 시는 아무래도 의식이 강하게 통제된 작품들인데, 무의식의 에너지가 많이 투여된 시들은 갸우뚱하게 만들긴 해도 그 에너지가 시로 변하는 과정이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이경재 마지막에 놓인 시 「브라티슬라바」를 보면, 김이강 시의 또다른 뿌리는 김춘수의 무의미시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의 수도로서 실존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런 지명을 가진 장소가 실존할 리 없는데”라고 태연하게 말해요. 이 시에서 브라티슬라바의 구체적인 공간성은 모두 증발된 상태이고요. 이러한 특징은 초현실주의의 변종으로서 김춘수가 오랜 기간 시도했던 무의미시와 유사해 보입니다. 관념이나 추상어를 배제한 채 시각적 이미지에 집중하는 모습도 그러한 관련성을 더욱 주목하도록 만듭니다.
황정아 그런 경향들이 단순화에 대한 저항일 수는 있겠는데, 거기에도 어떤 기계적인 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단순하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복잡해지는 건 아니니까요. 감각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가 왜 꼭 탈구와 해체의 방향이어야 하나 의문도 들고요. 시집을 읽는 과정에선 굉장히 여러가지 시도가 보이고 하나하나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덮고 나면 그것이 결국 ‘감각’의 층위에 국한된 경험이었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감각과 연상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어느 순간 의미나 사유의 자유와 만나게 되어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이 훨씬 담대한 실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자, 어느덧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요, 두분과 이야기 나누면서 많이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영광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 많았던 것 같고요. 두 차례 좌담, 유익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이경재 각인각색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좌담이었습니다. 6권의 책이 끊임없는 자기갱신을 통하여 자기만의 빛깔을 찾아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간 후에는, 때로는 자신있게 때로는 주저하며 던진 제 발언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고 싶습니다. 귀한 말씀 해주신 이영광 황정아 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