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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리영희의 씀과 쓰임

민주와 자주는 함께 갈 수 없는 것일까?

 

 

구갑우 具甲祐

북한대학원대 교수. 저서 『비판적 평화연구와 한반도』 『국제관계학 비판: 국제관계의 민주화와 평화』 『리영희를 함께 읽다』(공저) 『세계의 분쟁』(공저) 등이 있음.

imagine009@gmail.com

 

 

1. 삶과 가족

 

우리 시대의 혁명가 리영희(李泳禧, 1929~2010)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재현하는 평전 『진실에 복무하다』(권태선 지음, 창비 2020, 이하 『진실』. 면수만 표기한 경우 이 책을 가리킴)를 읽었다. 책장을 펼쳤을 때 먼저 눈에 들어온 장면은 선생의 딸이 공부의 길을 접고 학생운동을 하고자 했을 때 이야기였다. 선생은 장기적 안목에서 공부를 더 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해야 한다며 만류했다. 냉전세력에는 “의식화의 원흉”(4면)인 선생이 정작 자신의 딸은 공장으로 감옥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고 하는 주위의 비판에 대해 딸 본인은 아버지가 “운동을 하려면 본격적인 직업혁명가가 되라”고 했다고 회고한다(258~59면).

어떤 아버지가 자식에게 직업혁명가가 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혁명에의 의지가 우리 사회의 한구석을 차지했던 1980년대 군사독재시대였기에 가능한 대화였을 게다.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다니면서 “당파적 적대감에 불타는 증오심”과 같은 “젊음의 ‘종교’”를 가지지 못했던 리영희 선생의 “회한”도 한몫했을 것이다.1 그러나 아무리 그 시절이라도 리영희라는 문제적 인물만이 할 수 있는, 반자본주의적·반국가적 삶을 가라는 조언이었다. 다섯번의 투옥을 당했고, “모든 빛이 차단되고 겨우 한 사람 몸을 뉠 수 있는 공간인 벌방에서 22일을 견디는 것은 가혹하기 그지없는 고문”(243면)임을 경험했음에도 딸에게 감옥에 갈 위험성이 높은 직업혁명가의 길을 가리킨 것이다.

그렇게 『진실』의 저자인 권태선 ‘기자(記者)’는 “사상의 은사”(4면) 리영희 선생의 사상을 삶으로 쓰이게 한다. 냉전체제라는 우상에 맞섰던 선생의 사상과 그 삶을 온전히 드러내려는 기자정신의 결실이 『진실』이다. ‘주례사’ 평전이 아니기에, 『진실』은 “뜨거운 얼음”(20면)으로 표현되곤 하는 리영희 선생의 모순에 다가간다. 선생의 아들은 아버지가 글을 쓸 때면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친구 집을 전전했”고, “집 안에서 조금만 소리를 내도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라고 기억한다(169면). 선생이 1977년 『8억인과의 대화』와 『우상과 이성』을 쓴 이유로 감옥에 갇혀 어머니의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했을 때, 고등학생이던 선생 아들은 상주를 대신해야 했다.

『진실』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는 것이 “배신행위”로 여겨졌으며, 젊은 시절의 자신은 “가정보다 사회를 앞세운 ‘전체주의’적 성향”이었다는, “어린 영혼에게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 다가갔던 존재로서의 나”라는 선생의 처절한 자기반성문을 인용한다(338~40면).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리영희 선생의 “위대함은 성별화된 공/사 영역 분리로 인해 보살핌 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특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했을 때, 선생은 그 글을 다섯번이나 읽고 병으로 “마비된 손”으로 그 지적을 받아들이는 경이로운 “자각”을 알리는 답장을 썼다(403~404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요소이면서도 반(反)자본주의 논리가 관철되는 특이한 공간인 가족 내에서의 억압과 가족 구성원의 희생이 선생이 추구했던 사회혁명을 밀고 나가게끔 한 하나의 동력이었다는 역설과 그 불편한 진실을 치열하게 인정하는 선생의 모습을 『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2. 자주적 지식인

 

리영희 선생은 동지이자 동료에게 “주체적 학문”을 만든 국제정치 연구자로 기억된다.2 서구가 생산한 지식을 그저 받아쓰는 비자주적, 식민적 지식인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1960~70년대에 기자이자 교수로서 선생이 쓴 비판적 국제정치비평 가운데 베트남전쟁과 중국 문화대혁명에 대한 글들은 냉전의 전초기지였던 한반도 남단에서 극우반공주의를 내장한 박정희정부를 저격하는 비판의 무기이자 무기의 비판이었다. 『진실』과 함께 출간된 리영희 선집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창비 2020, 이하 『선집』)에는 2부 ‘국제관계’에 대표글 두편이 실려 있다. 베트남전쟁은—선생이 추구했던 “정명(正名)”(149면 외)을 생각한다면 ‘베트남-미국 전쟁’—선생에게 베트남 민족의 해방전쟁에 미국이 잘못 개입한 전쟁으로 읽혔다. 미국 국방부 비밀문서 ‘펜타곤 페이퍼’를 분석한 1971년 6월 『뉴욕타임즈』 기사에서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된 계기인 통킹만 사건—베트남식 명칭은 바크보만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선생은 베트남-미국 전쟁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통해 “자국의 이익만 우선시하는 미국이란 나라의 패권적 실체”(78면)를 보았고, 이 전쟁의 베트남식 이름인 ‘항미전쟁’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 그 첫 시도가 「강요된 권위와 언론자유: 베트남전쟁을 중심으로」(『문학과지성』 1971년 가을호)다. 선생에게 기자정신의 요체는 “진실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이를 표현하기 위한 용기”3였다.

선생의 기억과 달리 한국정부가 미국정부에 제안했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베트남-미국 전쟁을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전쟁으로 해석하게끔 강제했다. 선생은 냉전시대의 이 이항대립적 사고에 균열을 주고자 한 것이다. 냉전체제라는 우상을 파괴하기 위해 선생은 비판적 사회과학이 결여하곤 하는 실증의 방법을 활용했다. 『선집』에 실린 「베트남 35년전쟁의 총평가」(『창작과비평』 1975년 여름호)를 통해 우리는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선생은 사실의 확인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러나 선생은 본인 글의 한계도 알고 있었다. 1960년대 선생이 기자였을 때, 서울대 외교학과의 이용희 교수가 선생이 쓴 기사를 수업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 중단을 요청했다고 한다. “정부의 압력과 감시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다 담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147면)

베트남에 파병했던 한국정부는 1975년 4월 미국이 패배하기 바로 전날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진실』은 이 담화에서 당시 한국정부가 베트남-미국 전쟁에서 얻은 교훈 세가지를 추출한다. “① 공산주의자들과의 거래는 힘의 균형이 유지될 때만 가능하고, ② 국가안보를 다른 나라에 의지할 수 없으며, ③ 국론이 분열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204면) 리영희를 통해 한국현대사를 쓰는 책이기도 한 『진실』은 이 지점에서 미국을 따라 파병한 한국정부의 책임과 한국군에 피해를 입은 베트남인들에 대한 사과가 없었음을 지적한다. 선생도 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수교한 뒤 짧은 글을 통해, “한국인이 베트남에 돈벌이하러 가”기 “앞서서 한국은 어떤 형식으로건 사과의 표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4 이 사과는 현재진행형 의제이다.

우리는 박정희정부가 얻은 이른바 교훈 안에, 약소국의 편에서 강대국 중심적 국제정치를 비판했던 리영희 선생의 글과 사소하지만 근본적으로 닮은 면이 있음도 보아야 한다.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정부가 화폐개혁을 통해 부정축재자의 재산을 환수해 경제건설 재원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선생은 “일종의 ‘사회정의’를” 보았다고 회고했다(117면). 미국의 압력에 밀려 화폐개혁은 실패로 끝나고, “리영희와 같은 낭만적 평등주의자로선 도저히 알 길이 없는 자본의 논리가 승리”했다고 『진실』은 기록한다(118면). ‘강한(strong) 국가’가 수행하는 평등지향적 사회개혁을 진보세력이 선호했음을 보게 하는 장면이다. 국제정치가 ‘힘의 정치’(power politics)라고 설파하면서도 약소국 중심적 시각을 견지했던 선생은 박정희정부의 핵개발도 긍정했다. 베트남-미국 전쟁에서처럼 미국의 이익이 변하면 언제든지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박정희정부가 핵개발을 선택했을 때, 선생은 “그것은 남한이 죽지 않기 위해서 취할 수밖에 없었던 당연하고 정당하고 합법적인 선택이었다”라고 썼다.5 반민주적인 박정희정부가 국가안보를 최우선의 가치와 명분으로 내세우며 정치적 반대파를 탄압할 때 선생은 고초를 겪으며 글과 몸으로 저항했음에도 “철저한 민족주의자”6였던 시절, 강한 국가를 만들어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자주의 길에는 동의했다. 기념비적 저작인 『전환시대의 논리』(1974)에서 국가안보란 특수한 개인 또는 집단의 이해관계와 연계되어 있다는 ‘반국가적’ 입장을 보여주었음에도,7 강한 국가에 대한 열망은 선생의 사상과 삶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선생이 중국연구를 할 때도 강한 민족주의적 정향을 보이는데, 이때 사회경제적 개혁을 했기에 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베트남 공산세력에 대한 기억이 소환되었을 것이다. 선생의 글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중국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다. 선생은 문화대혁명이 중국 지도자들이 벌이는 권력투쟁이 아니라 “중국 사상의 특성에 뿌리를 둔 정신(혁명) 우선주의적 사회주의”8를 건설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선생이 보기에 인간개조 실험으로 다가왔던 문화대혁명 시기에 등장한 인민들의 대자보는 민주주의를, ‘하방(下放)’은 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선생은 1969년 7월 조선일보사에서 사직했을 때 육체노동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문화대혁명의 또다른 면인 홍위병들의 “반문화적 파괴행위”9는 글에 담지 않았다(347면). 선생은 내부 사회경제적 개혁에 기반한 중국의 외교 가운데 탈식민과 탈패권을 지향하는 제3세계라는 새로운 길을 연10 1955년 4월 반둥회의를 “중공의 평화공존 외교라는 매혹적인 정책의 절정”으로 극찬했다.11 그리고 강대국의 ‘절대반지’였던 핵무기를 당시 시점에서 상대적 약소국인 중국이 보유하게 되자 약소국 중심적 시각에서 중국의 핵보유를 긍정했다. 중국식 자주의 길에 대한 동의였다. 선생이 추구했던 혁명은 미국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관료적 사회주의도 아닌 인간개조의 대망을 담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길이었다(262면). 그러나 중국이 자본주의적 지향을 담은 개혁·개방을 시작하자 선생은 중국연구를 접었다. 또한 사회주의권이 붕괴된 후에는 인간을 개조하는 혁명에 대한 믿음을 철회했다. 중국혁명의 “변질”을 궁구하지 않으려 했기에 선생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좌우 양쪽으로부터 모두 비판”을 받게 된다(같은 면). 『진실』은 문화대혁명이 재난이기도 했지만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이었다는 최근의 평가를 언급하며, 교조주의를 혐오했던 선생의 자기반성을 전향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선생이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국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문화대혁명의 가치와 한계를 동시에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353면) 선생에 대한 기대야말로 인간 리영희를 따뜻하게 보듬는 평전 『진실』의 미덕이다.

 

 

3. 사상의 반성

 

1980년대 초반, 리영희 선생은 “그의 책으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겪은 젊은이들에게 자신을 설명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263면). 선생의 글을 읽은 이들이 행동으로 권력에 저항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을 때, 의식화의 주범 가운데 한명인 선생은 증언대에 서야 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도의적 의무”를 생각했기 때문이다(264면). 사회적 발언이 담긴 글쓰기를 중단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성찰의 시간조차 충분히 가질 수 없었다. 정치권력은 ‘남북의 분단 현실과 분단을 유지하고 있는 제반조건’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던 선생을 다시금 옭아매고자 했다(265면). 6·25전쟁이 남침인 것은 분명하지만, “분열된 민족의 재통일을 위한 통일지향 세력과 반통일 세력의 투쟁, 현상유지 세력과 현상타파 세력의 투쟁, 민족자주노선과 외세의존·외국보호 세력의 투쟁, 민족의 실지(失地) 회복이라는 민족생존권적 접근 등 여러 측면의 해석과 정의가 가능하다”라는 리영희 선생의 다양한 한국전쟁 해석을 빌미로 삼은 인신 구속적 개입이었다(같은 면). 선생은 잠시의 휴식과 같은 자기성찰의 시간을 중단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위험”12을 수반하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별들의 전쟁’(Star Wars)이라고 불린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하면서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군비경쟁이 절정에 올랐을 때였다. 선생은 한·미·일 삼각동맹과 한반도 핵전쟁의 가능성을 염려하며 운명처럼 글을 통한 혁명을 다시금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주의 국가의 체제전환이 우연히 결합되어 나타난 한반도 격변기를 맞이하여 선생은 『진실』의 한 부제목(제6장)처럼, 본격 ‘성찰의 시대’를 살게 된다.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정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좌파의 가치를 갱신하고자 하는 성숙한 혁명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성찰의 시대를 살며 선생이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간 쟁점들은 현재도 가치를 가지는 물음들이었다. 첫째,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며 느낀, 중국식 사회주의를 희망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방법의 제시다. 셋째, 한국 민주정부의 자주의 길에 대한 기대다.

1991년 1월 비판적 정치학 연구자들의 모임인 한국정치연구회는 리영희 선생에게 ‘변혁시대 한국 지식인의 사상적 좌표’라는 주제로 강연을 요청했다. 당시 발표문은 『선집』에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목의 대상은 부제다. 강준만 교수가 이 글을 보며 “집단적 관성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을 보았다 했을 정도다.13 선생은 후기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보다는 전기 맑스의 인본주의에서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찾았다. 자신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인본주의였지 맑스레닌주의가 아니었다고까지 했다. “나의 영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레닌이나 맑스주의자가 된 것까지”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 하기도 했다(352면). 1970년대 중국의 탕산(唐山)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인민들이 보여준 이타적 협력의 사례가 곧 선생에게는 사회주의였다. 당시 중국매체들은 탕산의 협력을 “‘확장된 사회주의적 가족’을 이루었다며 신화화했다”(350면). 가족의 대표가 가지는 자율성과 자주가 가족 내의 억압과 희생을 기초로 확보되는 것일 수 있음을 선생이 생각하지 못한 때였다. 그럼에도 1985년 일본에서 북한의 공식 역사서를 보았을 때 선생은 “김일성 주석 개인의 가보(家譜)나 다름없는 서술”이라 생각했다. 가족의 비유를 현실의 국가에 구현한 대표적 사례가 북한일 것이다. 확장된 가족으로 국가가 역사책에 등장함을 보았을 때, 선생은 김일성에 대한 숭배가 “일본 국민에게 강요됐던 ‘천황숭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290면).

평등을 앞세우는 사회주의에 대한 성찰도 함께였다. 자유와 평등의 관계에 대해 선생은 자유의 선차성을 인정하는 도약을 한다. 둘의 동격을 인정하되 “자유는 ‘인간’ 생명체의 원초적 본성이고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사회적 조건’”(354면)이라는 인식의 전환도 밝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절충된 사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선생의 성찰은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평등사회 건설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묻게 한다. 형용모순인 하이에크적 사회주의나 자유지상적(libertarian) 사회주의와 같은 상상력이 선생에게서 보인다는 해석의 과잉과 함께다. 글과 몸으로 자신의 사회주의를 실천했지만 패배를 인정했던 리영희 선생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주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선생은 1988년 9월 「남북한 전쟁능력 비교 연구」(『사회와 사상』)라는 글을 발표했다. 일차자료에 기초한 특유의 실증을 통해 선생은 남한이 북한보다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였다. “탐사보도 전문매체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는 이 논문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해온 ‘탐사보도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321면) 선생은 민주화 이후 들어선 노태우정부가 남북 교류를 통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을 때, “환영”을 표하면서도, “한반도 문제의 핵심은 현재까지 일관되게 남북의 군사대결”이지만, 이 선언에 남북의 군사대결을 완화하려는 구체적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1988년 7월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대담에서였다. 선생이 이 선언에 추가하고 싶었던 항목은, “구체적으로 40년 묵은 한국전쟁의 현 휴전협정을 협정 조인 당사자들에 의해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것이고, “그 조약 안에는 남북한 군대와 군사비의 축소(군축), 한반도에 있는 외국(미국) 기지와 핵무기의 철폐 등이 포함”되는 것이었다.14 자주를 홀로 가지는 힘을 통한 평화로 생각했던 과거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국제관계의 평등과 호혜를 의미하는 자주는 힘에 기초한 것도 홀로 가는 길도 아니다. 서로의 협력과 연대를 통해 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의 길을 가는 것이 자주다.

한편 노태우정부의 특별선언에 군사부문에 대한 내용이 없자, 군사력 균형에서 열위에 있던 북한은 핵개발의 길을 갔다. 이 선언에 대한 비평은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1988년 2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에도 그 대강이 담겨 있었는데, 혁명적 실증주의자였던 선생 또한 한반도 평화가 경제·사회·문화 교류와 같은 기능주의적 방법만으로 달성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자 했다. 핵보유를 향한 북한의 길이 현실이 되었을 때 선생이 생각한 대안인 평화조약과 비핵지대화는 2021년 현재도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안이다. 선생이 일찍이 일갈했던 것처럼 한미연합군사훈련은 방어적이고 북한의 훈련은 공격적이라는 인지왜곡이 계속되는 한,15 한반도 평화는 요원한 일이다.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 평화 과정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무엇인가를 리영희 선생이 우리에게 주었던 글을 통해 찾는다. 그게 긍정적인 선생의 ‘쓰임’이다.

선생은 민주화가 자주의 길을 가져다줄 것이라 낙관했던 듯하다. 김대중정부가 첫번째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을 때 리영희 선생의 조언은 “예속적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친선우호관계 조약으로 대치하고, 그 거리만큼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향상하는 국가관계를 추구하고 동북아지역 내 중심역할과 등거리외교를 채택하는 전략과 정책”을 모색하라는 것이었다(386면). 주한미군이 한국 영토에 존재하는 한 한반도 평화는 없을 뿐 아니라 민주화된 한국이 자주국가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선생은 반전·평화를 외치는 한시(漢詩)를 짓고, 아픈 노구(老軀)를 이끌고 미국이 벌이는 그 불의의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하려는 노무현정부를 질타하며 반전평화의 현장에 몸으로 다시 섰다. 그러나 노무현정부는 파병을 했고, 선생은 실망했다. 민주가 자주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의 소멸이었다. 선생이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주는 질문이 민주와 자주의 관계다. 민주는 자주를 만들지 못하는 것일까. 리영희 선생을 읽으며 다시금 던지는 질문이다.

 

 

4. 씀과 쓰임

 

리영희 선생은 “그의 책이 더이상 읽히지 않고 그마저 잊히는 세상을” 소망했다(416면). 두가지 이유를 추측한다. 첫째, 자신이 맞섰던 우상이 사라진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선생을 혁명가로 만들었던 도저한 낙관주의의 바탕에는 자기 사상이 잊히는 꿈이 있지 않았을까. 둘째, 자신의 글이 비극적으로 “쓰이는 운명”16을 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이 글을 통해 가고자 했던 혁명의 세상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시대가 도래했을 때, 자신의 글이 혹세무민의 한 사례로 쓰이게 될 것을 염려했으리라. 선생의 ‘씀’의 집약인 『선집』과 ‘쓰임’의 한 전범인 『진실』은, 선생의 그 염려가 기우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도 됨을 『진실』과 『선집』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강준만은 1960년대 이후 남한이 북한보다 정치사회적으로 더 민주화될 수 있었던 것은 남한에는 리영희가 있었고 북한에는 리영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선집』 10면) 확대하면 남과 북의 역사적 경로를 가른 핵심은 비판적 시민사회의 존재 유무였다. 정희진이 리영희 선생을 기억하며 “개인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시대는 불행하”다 했지만(403면), 선생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전적인 책임을 지는”17 사회 속 개인이었다. 『진실』과 정희진이 합의하고 있는 것처럼 주류에서 비켜 서 있었기에 변방의 지식인 혁명가 리영희가 탄생할 수 있었지만, 그 혁명가를 만든 원천은 부정의한 권력에 잡초처럼 저항했던 민중의 저력이었다.

책 읽기의 글쓰기가 낭비되지 않을 때는, 원래 텍스트가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가치를 담고 있을 때다. 그럼에도 텍스트를 선별적으로 읽곤 하는 반칙의 위험은 상존한다. 서평은 원 텍스트의 온전한 읽기를 방해할 수 있다. 『선집』이 원 텍스트들의 모음이라면, 『진실』은 재생산이 아닌 생산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한 혁명가의 삶과 사상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 『선집』에 모인 글들의 생산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나침반과 같은 평전 『진실』의 위력을 본다. 『진실』 은 리영희 선생의 삶과 사상이 “선생을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기를 소망”(7면)한다. 『진실』이 읽힐 수 있기를 소망한다. 리영희 선생의 사상이 삶의 신산(辛酸)이라는 땅에서 태어났음을 생각하게 하는, 고통스럽지만 행복한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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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영희 『역정』, 창비 2012(개정판), 155~56면; 『진실』 45면.
  2. 임헌영 「“식민학문 깨뜨린 학자이자 약자 향한 애정 담아낸 언론인”(리영희 10주기 인터뷰)」, 한겨레 2020.12.3.
  3. 장현철 「진실에 충성: 용기 있는 표현이 기자정신」, 미디어오늘 1999.2.10; 『진실』 180면.
  4.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006(두레 1994), 409~11면.
  5. 리영희 「통일의 도덕성: 북한의 변화만큼 남한도 변해야」, 『반세기의 신화』, 삼인 1999, 149면; 『선집』 105면.
  6. 리영희 「30년 집필생활의 회상」, 『自由人, 자유인』, 한길사 2006(범우사 1990), 364면; 『진실』 339면.
  7.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 2006(개정판), 28~30면.
  8. 정문상 「문화대혁명을 보는 한국사회의 한 시선: 리영희 사례」, 『역사비평』 2006년 11월호 222면; 『진실』 147면.
  9. 리영희 『대화』, 한길사 2005, 447면.
  10. 졸고 「리영희의 국제정치비평 읽기」, 『리영희를 함께 읽다』, 창비 2017.
  11. 『전환시대의 논리』 60~61면.
  12. 고은 「리영희론: 진실의 대명사」, 『自由人, 자유인』 379면; 『진실』 270면.
  13. 「“생애 마지막까지 염치 잃지 않은 자유인”(지식인·언론인들이 기억하는 리영희)」 중 강준만의 글, 한겨레 2020.12.3.
  14. 『自由人, 자유인』 58~60면.
  15. 같은 책 192면.
  16.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235면.
  17. 「30년 집필생활의 회상」에 언급된 싸르트르 글 “La République du silence”에 대한 권태선의 번역. 『진실』 16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