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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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대전환의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대안’서사와 ‘이행’서사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개벽의 사상사』(공저), 역서 『단일한 근대성』 『패니와 애니』(공역),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1. 미래 상실을 수긍하는 ‘대안’서사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에서 인아영은 ‘루프적 죽음’(태양의 폭발)과 ‘결말적 죽음’(우주의 멸망)을 겹쳐놓은 게임 ‘아우터 와일즈’(Outer Wilds)의 서사를 분석하며 시간의 리셋이라는 비현실적 장치에 ‘리얼리즘’의 가능성이 있는가를 묻는다. 그에 따르면 이 게임서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제거하는 장치인 리셋 가능성을 활용하여 오히려 죽음에 대한 리얼한 감각의 재현을 성취”한다. 여기서 ‘죽음에 대한 리얼한 감각’이란 어떻게 하든 “태어난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실을 결국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플레이어가 거듭 경험하는 루프적 죽음은 이 진실의 수용을 향한 “반복적 연습”이다. 문맥으로 보아 ‘리얼리즘’은 현실과 무관한 흥미 위주의 서사는 아니라는 정도의 의미인데, 논의 과정에서 루프적 서사는 그런 소박한 리얼리즘을 넘어, “과거, 현재, 미래를 비직선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재현하는 서사적 장치”로도 묘사된다.1 선형적이고 목적론적이라 비판받는 근대적 서사의 대안일 가능성이 암시되는 셈이다.

인아영의 글에서 그리 주목받지 않는 사실은 ‘아우터 와일즈’에서 죽음은 개별 플레이어의 죽음만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 서사가 숱한 루프를 거칠망정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결말이 확고히 설정된 목적론적 서사라는 점이다. 요컨대 이 게임에서 죽음은 인류의 종말이자 지구와 우주의 종말이고, 그 종말이 필연이라는 것이 세계의 핵심적 진실이다. 그러니 이 게임서사를 오늘날 기후변화를 비롯한 여러 위기에서 세상의 종말 가능성을 예감하는 우리의 ‘리얼한 감각’과 연결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심지어 당장의 위기에 제법 잘 대처하더라도, ‘언제나 이미’ 실패할 것임을 나타내는 우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종말을 피하려 열심히 노력하게 되겠지만 그 노력에 숨겨진 진정한 목적은 종말이라는 불가항력의 미래를 ‘잘’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렇다면 루프/리셋이라는 비선형적 장치는 선형적 서사의 대안이기는커녕 그에 대한 저항을 효과적으로 완화하면서 운명적 비극이라는 근사한 출구전략까지 제공하는 게 아닐까? 생존을 위한 온갖 시도로 위장된, 또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그 모든 생존 시도를 거치는, 역사적 죽음충동의 서사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다.

시간의 존재양식이 교란되는 또다른 서사를 읽어보자.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2를 여는 첫 문장 “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9면)는, 이 소설 역시 어떤 죽음 곧 미래 상실에 반응하는 서사임을 일러준다. 말세의 예언이 난무하던 그 시절, 화자는 짝사랑하던 동기생 지민과 함께 지민의 엄마가 쓴 『재와 먼지』라는 장편소설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9년 그 책을 입수하여 아내가 된 지민에게 전하는 것이 소설의 뼈대이다. 하지만 소설의 핵심은 그런 사건이 아니라 ‘시간’에 관한 다른 인식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데 있고, 그 단서가 되어줄 『재와 먼지』는 “미래가 없는 한 연인”(16면)들이 일종의 루프적 시간을 경험하는 이야기이다. 사랑이 끝났으니 삶이 의미없다고 느끼며 동반자살을 택한 그들에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두번째 삶이 주어지고, 그렇게 해서 처음 사랑이 싹튼 지점에 다다르면 다시 원래대로 시간이 흐르는 세번째 삶이 시작된다. 두번째 삶에서 연인은 가장 좋았던 순간인 첫 만남을 향해 시간이 나아가고 있음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현재를 살며, “다시 둘이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원래대로 시간이 흐르기를, 그리하여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23면) 희망한다.

줄거리로만 전해지는 이 스토리에는 많은 공백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공백을 채우는 권위있는 해석이 출판사에 근무하는 화자의 외삼촌을 통해 제시된다. 연인의 “세번째 삶은 첫번째 삶과 같은 방향으로 시간이 흐르니까 그들은 다시 한번 살아가는 셈”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인식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이미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28면)라는 게 그 해석이다. 외삼촌은 이를 ‘미래를 기억하는’ 태도라고 정의하며, 실제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민의 엄마도 지민이 대학생이 된 미래를 ‘기억’했다면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지민 역시 가령 지금 옆에 있는 조카(화자)와 결혼하는 미래를 ‘기억’한다면 자살 결심을 실행하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가정의 화법이기는 했어도 미래의 결혼이라는 외삼촌의 말은 발화된 순간부터 예언적 수행성을 발휘하며 화자와 지민의 관계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 해석도 『재와 먼지』의 공백을 다 채우지 못하며 오히려 새로운 의문을 낳는다. 세번째 삶의 미래가 ‘기억되는’ 미래인 한 논리적으로 그것은 첫번째 삶에서 실제 겪었던 동반자살 시도에 다다를 뿐이다. 곧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불가능함일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인지 외삼촌의 해석은 연인이 기억하는 미래가 두번째 삶에서 희망하던 ‘가장 좋은 미래’일 거라 상정한다. ‘기억’이란 일종의 맥거핀이고 ‘미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상상’인 셈이다. 외삼촌의 해석은 요컨대 좋은 미래를 상상하되 마치 이미 살아본 미래를 기억하는 것처럼 확신을 갖고 상상하면 그것이 현실화되리라는, 서사의 수행성을 강조하는 메시지이다. 이 해석에서 결정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애초에 이 모든 시간의 뒤섞임을 야기한 ‘미래 상실’이라는 현실이다.

서사와 현실의 이런 자리바꿈을 가능하게 하고 또 그것이 자리바꿈임을 효과적으로 감추는 기제는 서사가 한껏 부풀어 오를 수 있도록 현실의 김을 빼놓는 것이다. “1972년 10월을 우리는 시간의 끝이라고 불렀다”(15면)라는 『재와 먼지』의 첫 문장은 명백히 10월 유신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 ‘끝’은 이내 민주주의의 종말도 역사의 종말도 아닌 연애의 종말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강조하는 기억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또는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같은 것과는 무관한, “죽지 않고 결혼해 지금 이렇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 연인의 모습 같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이다(34면). 서사가 현실을 구축할 수 있으려면 현실은 (환기되지만 이내 부인되는) 역사나 세계 같은 차원을 떼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는 별도의 대안적 미래 같은 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대지진과 바이러스, 심지어 우주여행과 지구멸망마저 현실화되었거나 현실화되리라 위협하는 이 시대의 ‘리얼한 감각’과 어긋나는 이 소설은 서사의 대안적 힘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힘이 발휘될 현실을 대폭 한정함으로써 선제적으로 무력화한다. 소설 자체의 서가가 헐거운 이유도 이런 자가당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 ‘두 짐 지기’로서의 이행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간 장치들이 부쩍 관심을 얻고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선형적이고 발전적인 자본주의 근대서사의 시간성이 (진짜 발전이 있기나 했고 미래가 있기는 한가,라는 식으로) 사실 차원의 개연성을 현저히 잃으면서 이제껏 비사실적으로 보이던 서사들이 재고될 여지가 크게 열린 시점이기 때문이다. SF서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앞서 살핀 대로 과거-현재-미래를 다르게 조합하거나 시간성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자본주의적 현실의 시간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주된 서사적 보루는 진위에 좌우되는 적극적 가치가 아니라 ‘대안은 없다’는 느물느물한 명제이다. 이대로라면 세상의 종말이 야기될 것이 분명할 때는 이 명제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인데, 하필 이 시점에 폐허 속에 사는 (또는 죽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 ‘대안’서사들이 부상하는 것이 우연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현실비판 의도에서 출발했다 해도 그런 서사들은 결국 ‘대안 없음’을 받아들이는 ‘반복적 연습’으로 귀결되는 건 아닐까?

돌아보면 적어도 한국문학장에서 ‘대안은 없다’가 수용되는 과정 자체가 서사에 의한 반복적 연습을 통해서였다. 이른바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1990년대 문학장에서 활발히 유통된 근대성 서사가 한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3 주지하다시피 이 서사는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의 근대성 개념에 크게 기댄 것으로, 근대성을 끊임없는 파괴와 창조의 무한동력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근대의 바깥이란 없고 “근대성의 철폐를 위한 모든 시도가 처음부터 실패하도록 되어 있”4음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무한히 출렁이며 지속하는 미래로 상정한 이 ‘조증’ 서사의 효력이 소진된 지금, 여전히 우리를 근대의 시간대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미래 상실이라는 사태를 순순히 또는 기꺼이 받아들이게 해줄 ‘울증’ 서사가 필요해졌을 법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5는 ‘대안 없음’이 전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바로 그 (시간은 아니지만) 지점에서 출발한다. 대안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웃음거리가 되는 것, 이 소설의 아버지 어머니 같은 “순수한 사회주의자”가 “물정 모르는 촌뜨기”(14면)와 동일시되는 것보다 그 사태를 더 적절히 요약해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몰락 이후 대개의 후일담 서사가 쓰라린 회한과 냉소 어린 개탄의 배합을 조금씩 달리하면서도 무언가가 끝나버린 이후의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 데 비해, 이 소설은 오래전에 사망진단을 받은 사회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진행 중인 장례라는 두겹의 죽음을 등장시키고도 오히려 끝나지 않았고 끝난 적도 없다는 느낌을 전한다. 또다시 종말의 예감이 유포되고 종말 이후를 말하는 미래적 후일담들이 유통되는 상황이기에 이 점은 더욱 도드라진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사망한다는 설정부터 그렇지만 소설에서 전직 빨치산이자 현직 사회주의자로서의 아버지는 먼저 우스개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 소설의 핵심 요소인 유머는 무엇보다 평범한 ‘양민’들과는 사뭇 다른 화자 부모의 사회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언행을 풍자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 풍자가 결코 신랄해지지 않는 이유는 두가지다. 한편으로는 표면상 자본주의 현실과 사회주의 신념 사이의 간극이 ‘간극’이라 부르기도 무색하리만치 벌어져서 어떤 긴장도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유머는 거리를 만들어 비판하기보다 빨치산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력에 대한 사회적 장벽을 허물어 인물에게 다가가게 하는 기능이 더 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 현실과 사회주의 신념 사이의 간극은 저변에서 여전히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는바 아버지는 그저 풍자의 대상이기만 한 시대착오적 인물이 아니다. 이 두 층위가 함께 배치되는 것, 그리고 적절한 비율로 배치되는 것이 소설의 주된 전략이다.

빨치산투쟁, 위장자수, 투옥, 전향 같은 굵직한 이력으로 보면 ‘아버지’는 통절한 후일담의 주인공이 되어 남은 생을 속만 끓이며 살고도 남아 보인다. 그런데도 그는 한번 사회주의자는 영원한 사회주의자라는 듯이 구례라는 “이 작은 세상”에 “촘촘한 그물망”(239면)을 만들며 “시도 때도 없이 사회주의자”(14면)로 활동해온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활동에는 가톨릭농민회나 민노당같이 버젓한 조직과 관련된 것도 있지만 화자인 딸이 보기에 “동네 머슴”을 자청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아버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동네일에 발 벗고 나섰고, 동네 사람들도 그걸 알아서 무슨 일만 생기면 아버지를 찾았다.”(100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오지랖 넓게 베풀고 다른 사람들을 그 베풀기의 그물망에 동참시키기, 요컨대 아버지의 사회주의 활동은 일반적인 사람 노릇과 너무 닮아 있다. 다만 대개 세상살이와 제 앞가림에 밀리는 그 사람 노릇이 아버지에게는 늘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 다른 점인데 바로 그 차이, 많은 경우 가장 결정적일지 모를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버지의 ‘사회주의’이다.

“우리 일 제쳐두고 남 일 우선인 걸 못마땅해”(100면)하는 어머니를 단번에 진압하는 아버지의 주장은 “자네 혼차 잘 묵고 잘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심을 건 것이여!”(61면)라는 것이고, “한갑자를 살고도 턱없이 사람을 믿는 순진함—솔직히 말하자면 어리석음—이 더 못마땅”(100면)한 딸에게는 “사람이 오죽하면 그러겠느냐”, 그러니까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102면)는 논리로 반박한다. 세상사 대다수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결과가 나오든 상처 입지 않게 해주는 이 만능의 심법이 발휘하는 권능으로 아버지는 사흘에 걸쳐 자신의 장례식장을 찾은 실로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이은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사회주의 또는 이념을 인정이나 심성과 대비시키는 상투적 구도에서 벗어나 있다. 이런 게 사회주의의 전부냐 하는 질문과는 별개로, 아버지의 사회주의는 ‘사람의 도리’에 포섭되어 해소된다기보다 그것을 ‘급진화’하는 힘이며 엄연한 공적 차원을 갖는다. 그 ‘그물망’이 ‘우리가 남이가’같이 적당히 훈훈하고 적당히 부패한 폐쇄적 공동체와 다른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사회주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아버지의 남다른 사람됨이 그가 사회주의자로서 단련해왔기에 가능한 성취였음은 분명하고 그 사실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남다른 성취이기도 하다.

어디까지나 애도 속에 회고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에 그가 사회주의자로 살기 위해 자본주의 세상에서 감내해야 했던 날선 갈등과 모호한 협상들이 세세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런 가운데 유난히 생생한 대립은 남동생(작은아버지)과 딸(화자)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데, 두 사람은 아버지가 한때 (본의 아니게) 잘라낸 혈육이고 따라서 ‘그물망’으로 이어내기 가장 어려운 상대이다. 인연을 끊으리라 결심하며 가출한 사춘기의 화자를 돌려세운 사람이 작은아버지라는 사실은 그래서 우연이 아닌데, 이때 작은아버지는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210면)라는 말로 빨치산의 가족으로 사는 가중치의 버거움에 공감을 표한다. 이 표현은 결말 가까이에서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옛날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한 어깨에 두 짐을 지고 살아왔구나. 작은아버지나 나는 유약해서, 혹은 세상이 좋아져서 한 어깨에 두 짐 못 지는 거라고, 스스로 나자빠진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260면)로 다시 등장하며 반향을 만든다. 아버지의 ‘두 짐 지기’를 생활을 돌보고 삶을 이어가는 것과 신념을 품고 사상을 실천하는 것으로 풀이하면 그로부터 ‘근대의 이중과제’를 연상해도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듯 두 짐을 지며 곱으로 사는 것, ‘적응’하는 시간을 또한 ‘극복’하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 시간성을 교란하는 어떤 기발한 대안보다 더 개연성 있는 이행서사일 것이다.

 

 

3. 서사와 장소, 그리고 다시 리얼리즘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과정은 화자인 딸의 심경 변화와 겹쳐 있다. 그런데 소설의 중심에 아버지가 있기는 해도 화자의 변화가 아버지에 대한 (뒤늦은) 이해로 다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혁명가였던 내 부모에게는 연애도, 옷도, 화장도, 별 의미 없는 사치에 불과했다. 그 틈에 끼어 나는, 혁명가도 아닌 나는, 신념도 없는 나는, 일상의 평범한 대화를 맛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고 늙어가는 중이었다”(123면)는 토로에서 알 수 있듯이 사상과 생활의 간극이라는 문제는 부득이 화자에게도 전이되고 아버지의 경우보다 더 격화된 양상으로 진행되었을 공산이 크다. 엄밀히 ‘당사자’가 아닌 화자에게 사상은 훨씬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삶과 유리된 사상은 결국 삶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기 마련인데, 그 점이 더없이 신랄하게 그려지는 작품이면서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다 담기지 않은 변화의 스펙트럼을 실감하게 해줄 서브텍스트가 「소멸」6이다.

제목에 부응하듯 구체적 맥락을 상당히 지운 이 소설에도 아버지와 딸이 등장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삶이란 소멸을 준비하는 삶이었다. 떠나기 위해 기억을 가벼이 하고, 이 땅 위에 어떤 애착도 만들지 않았다”(81면)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묘사의 핵심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147면)라고만 나오는 아버지의 심경이 한 극단에 이르렀을 때 어쩌면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아버지의 딸로서 「소멸」의 ‘여자’ 역시 세상에 뿌리내리지 않은 채 다만 “자기 유전자에 기록된 모든 가능성들을 현실화함으로써 자신을 소진시키고, 그 소진을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힘을 모두어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것”(89면)으로 삶을 대신하고자 한다. 순수한 죽음충동의 서사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에는 구체적인 맥락이 주어지지 않아서 오히려 관념성의 본모습이 선명하다. “여기 사람들은 자꾸만 또 온다고 한다. (…) 미움이든 우정이든 은혜든, 질기고 질긴 마음들이, 얽히고설켜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들이, 나는 무겁고 무섭고, 그리고 부러웠다”(197면)는 『아버지의 해방일지』 화자의 얼마간 이미 얽혀버린 마음은 ‘여자’의 차가운 소멸 의지와 대비될 때 한층 의미가 살아난다.

‘땅 위에 어떤 애착도 만들지 않았다’는 「소멸」의 묘사는 아미타브 고시(Amitav Ghosh)가 서사 능력에 관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고시는 서사, 또는 스토리텔링이 오늘날 전지구적 정치에서 핵심을 차지한다고 말하는데, 그 근거는 지금 우리에게 닥친 위기의 실상, 곧 “지구에서 실제로 고갈된 것은 지구의 자원이 아니라 (…) 의미7라는 데서 기인한다. 의미의 고갈에 대항할 서사 능력을 그는 “인간이 필시 동물을 비롯한 다른 많은 것과 공유하는 한 가지 특성, 즉 장소에 대한 애착의 산물”(283면)로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발전과 진보의 시간성으로 장소의 의미를 줄곧 지워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미래 없음’을 수긍하는 서사들이 자주 시간성의 문제, 곧 시간을 되돌리거나 반복하거나 건너뛰는 데 집중하는 것도 ‘장소에 대한 애착’이 이미 상당히 훼손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고시가 강조하는 것은 자연과 생태의 비인간 존재들에게 의미와 생기를 복원해줄 서사지만, 엄연히 장소와 생태의 또다른 구성원인 인간이나 특별히 인간적인 장소로서의 ‘고장’ 역시 의미의 고갈을 못지않게 겪어왔다. 그 점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구례라는 ‘지역’의 서사임에도 주목하게 된다. ‘작가의 말’에서 정지아는 “성장기의 나는 먼 데서 기적이 울릴 때마다 그 기차가 가닿을 서울을 꿈꾸었다. 지금보다 더 멀리 더 높이.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267면)이라 적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다시 말해 장소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며 ‘성장’하려는 욕망은 동경과 조바심을 거쳐 종국에는 우리 내면에까지 어떤 폐허를 만든다. 「소멸」의 여자가 보여준 얼어붙은 내면풍경은 사상의 관념성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성장서사의 관념성을 되비추는 ‘음화’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며 이제 그 말기국면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차츰 실감으로 자리 잡을 때 자본주의의 서사는 그 지속 불가능성 자체를 서사화하는 데서 돌파구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대안은 없다’는 서사는 이 체제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데서 이 체제의 종말(과 그것이 초래할 모든 파국)에서 벗어날 방도도 없다는 데까지 대담하게 확장된다. 우주개척과 메타버스처럼 한층 기술화된 자본주의적 미래서사로 보이는 것들 역시 실은 종말과 파국을 암암리에 가정하고서야 소구력을 갖는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앞질러 포기하지 않고 거기서부터 이행의 단초를 발견하는 서사가 중요해진다. 어딘가 없는 장소의 상상이나 장차 도래할지 모를 폐허의 환기가 아닌, 엄연히 남아 있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복원함으로써 서사의 역량을 실현하려는 노력. 그것을 다시 리얼리즘으로 호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1. 인아영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서사 속 죽음과 루프적 시간의 리얼리즘」,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인용은 모두 405면.
  2.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이후 이 소설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3. 당시의 근대성 서사가 “근대의 역량을 거의 무한동력에 가깝게 확대하고 그 경계를 거의 영속성에 가깝게 확장하는 해석을 제시했으며, 이런 해석을 통해 근대 ‘너머’나 ‘이후’ 또는 ‘바깥’에 관한 서사들의 다시쓰기를 수행”한 점에 관해서는 졸고 「근대성의 판타지아: 1990년대 한국문학의 근대성 담론」, 『개념과소통』 2020년 여름호 참조. 이 ‘조증’ 서사를 받아들이는 입장이 다분히 비극적 체념의 태도를 띠었다는 사실도 기억해둘 만하다.
  4. 황종연 「모더니즘의 망령을 찾아서: 마샬 버먼, 『단단한 것은 모두 녹아 날아간다』에 대하여」, 김성기 엮음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4, 224면.
  5.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이후 이 책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6. 정지아 『봄빛』, 창비 2008. 이하 이 소설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7. 아미타브 고시 『육두구의 저주: 지구 위기와 서구 제국주의』, 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 2022, 111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괄호에 면수만 표기.

황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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