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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주관적 감정의 재현과 보편성
박여선 朴麗仙
영문학자.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논문 「종말적 정동의 서사를 비틀기」 「기억과 서사,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역서 『바다와 사르디니아』 등이 있음.
kirillo7@snu.ac.kr
오래전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의 거장 미야자끼 하야오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모노노케 히메」(1997)의 제작기인 그 다큐 속 어느 장면에서 미야자끼는 한 젊은이가 작업한 그림을 봐주고 있었는데, 전투 씬 배경에서 무명의 한 병사가 창을 들고 크게 점프하는 모습이었다. 별것 아닌 장면이지만 젊은이는 특별하고 개성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려 했고 그 노력을 미야자끼에게 인정받고 싶은 듯 보였다. 미야자끼는 그림을 보더니 이 병사의 움직임은 독특하고 개성적이다, 그런데 사람이 점프할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일까? 친절하게 물었고 젊은이는 어리둥절해했다. 미야자끼가 답했다. 먼저 한발 물러서 몸을 웅크린다. 점프하기 위한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리 특별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먼저 물러나 몸을 낮춰야만 한다. 무엇이 개성적이라는 건 혼자서 특별하고 독특하다는 뜻이 아니다. 미야자끼에게 개성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설득하는 힘에서 나온다. 여기서 그가 암시한 바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일반성이 아니라 수많은 차이가 수렴하는 구체적 보편성이고, 그런 의미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야말로 개성적이다. 문학으로 바꿔 말하면 개성은 주관적 은유가 아니라 보편적 상징으로 나아가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여러권의 한국소설들을 읽으면서 미야자끼가 말한 역설적 진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모든 작가가 저마다의 개성을 보여주지만, 그 개성이 지닌 설득의 힘은 작품이 펼치는 보편의 경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모든 작품이 주관적 감정의 재현을 놓고 분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다채로운 양상은 비주관으로—그것이 비개인성이든 비인간주의이든—어떤 보편의 경지로 도달하려는 시도들로 보였다. 그중 김초엽의 장편소설 『파견자들』은 주관적 감정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지려 하고 김혜진의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은 중첩된 주관적 감정들 속으로 파고든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상반된 접근방식이 매우 흥미로웠다.
김초엽 『파견자들』(퍼블리온)
우주에서 온 범람체에 공격당한 미래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김초엽의 이 소설은 인간과 다른 감각으로 세계를 느끼는 외래의 존재와 소통하고 공존을 꾀하면서 인간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어떤 가능성을 탐색한다. 균사체를 닮은 범람체는 무한히 뻗어나가는 그물망으로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데 침투당한 존재는 그 네트워크 속으로 통합된다. 인간이 범람체에 노출되면 뇌가 공격당하기 때문에 광증이 발현하고 자아가 해체되면서 고유의 자전적 서사를 잃게 된다. 범람체의 공격을 피한 사람들은 범람체에 뒤덮인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로 숨어들어 거대한 지하도시를 건설하는데, 그곳은 범람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지역적 경계 없이 모든 인종과 문화가 하나로 수렴된 세계다.
이 소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개체의 생물학적 경계가 명백하지 않다면 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이며 자아라는 감각이 우리가 당연시하는 만큼 단단한 실체인지 질문한다. 소설에서 일정한 집단적 의식을 형성한 늪 지역의 범람체가 주인공 ‘태린’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자신들과 합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 인간은 단수체가 아니고 이미 수많은 다른 생물들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을 개체라 보는 의식 자체가 주관적 감각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자아-개체, 집단의식-연결망 사이의 대립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인간중심주의와 비인간주의(혹은 반인간주의)의 사이를 점검하는 듯하다. 우리의 인간중심주의, 지구라는 행성을 외면한 죄를 간접적으로 고발하고, 인간이 다른 유기체적 감각을 지닌 존재로 변이하여 언어가 아닌 “전기신호와 화학물질을 주고받는 방식으로”(371면) 행성 전체와 소통하고 나아가 통치체제가 필요 없는 군집체제로서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 삶의 모습은 전통적 휴머니즘 가치인 ‘아름다움’이나 ‘영혼의 현시’ 같은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질서 속에 있다. 작품은 이것도 삶이라고, 행성의 모든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거대한 삶이라고 말한다. 이는 기존의 인간중심주의적 오만에 대한 기묘한 반전이자 반인간주의의 상상력을 한껏 밀어본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립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복되는 전제가 보인다. 가령 태린의 뇌 속에 있는 범람체인 ‘쏠’은 “감정이란 개체 단위로 존재하는 생물들이 주관적인 신체 감각을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낸 문화적 도구”(246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태린이 범람체와 연결될 때 그녀는 “수많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 ‘나’라는 감각이 하늘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동시에 흘러넘”(371면)친다고 느낀다. 이 작품에서 개체로서의 인간의 감정과 범람체와 연결됐을 때의 느낌은 이렇듯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된다. “통치 체제를 만들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239면)는 범람체의 거대한 연결망을 설정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 전반적으로 개체-감정-주관, 집단-느낌-비주관 같은 개념들이 다소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의 회로를 돌고 있는 듯하다. “새로운 방식의 대화는 충돌하는 의견들을 이을 뿐만 아니라 통합했다. (…) 부분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전체로 연결되어 있었다”(360~61면). 여기서 분명 작가는 어떤 새로운 질서의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전에 없던 가치를 암시하려는 것 같다. 그런데 부분과 전체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인가? 작품에서 ‘개체적 자아’가 다소 평면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그저 민주적인 듯한 이 질서도 평면적이다. 위계가 있는 인간질서의 반대급부로만 보인다. SF소설의 미덕이 실제와 스케일과 차원이 다른 세계를 다루는 데 있다면, 달라진 스케일과 차원에 따라서 다루는 관념과 관념들 사이의 배열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가장 의아한 부분이 주요 인물인 ‘이제프’의 형상화다. 이제프와 태린은 서로 사랑하는데 이 사랑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실험하려 한 것인가? 성과 나이에 속박되지 않는 비규범적 사랑인가? 이제프의 사랑이 자아 중심의 낡은 인간주의적 사랑이어서 태린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가? 이제프와 태린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아쉽다. 차라리 마지막 순간에 사랑해서 스스로 사라진 쏠과 같은 선택의 기회를 이제프에게도 허락했다면 어땠을까? 개체의 감정 재현에서 물러나려는 작가는 이제프에게 그만의 주관적 세계를 허락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 인물은 자아와 그 감정에 갇혀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 개념을 파편적으로 재현한다. 이것이 초반의 신선함이 가시면서 소설이 지루해지는 이유라 생각되는데, 이제프가 대변하는 세계는 충분히 주관화되지 않아서 태린과 범람체가 대변하는 세계에 진즉에 패배해버리기 때문이다. 작품은 애초부터 이제프가 대변하는 세계를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결정하고 있어 이야기의 긴장이 유지되지 않는다.
자아는 우리 내부 깊은 곳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 행위를 통해서만 주체화되는 것이 자아다. 우리는 자신의 활동 속에서만 존재하고 비롯되는 어떤 것을, 자아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삶을 규정하는 실체라고 인식한다. 그렇게 객관을 설정함으로써 주관으로 태어난다.1 그런데 작품에서는 인간-개체-주관, 범람체-집단-비주관의 도식이 곳곳에 놓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견자들』은 비인간주의로 점프하기 전 몸을 웅크려 동력을 만들지 않은 채 바로 도약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종국에 태린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지켜낸 삶은 (작품이 열어낸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삶이라기보다 작가가 한번 믿어보고 싶은 관념으로 남는 게 아닐까.
김혜진 『축복을 비는 마음』(문학과지성사)
『축복을 비는 마음』은 집과 집을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절박한 생존현실과 연결된 집, 꿈과 좌절 혹은 희망과 정신승리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무대가 되는 집, 황폐한 가운데에 존재가 자라나고 성장하는 집, ‘최선’이라는 실천을 통해 우리를 더 큰 윤리와 매개하는 집, 보이지 않는 마음들을 연결하는 집 등 집과 사람의 서사가 다채롭게 엮여 있다. 소설집은 절박한 상황에 빠진 인물들의 주관적 감정이 극대화된 다양한 순간들을 체화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관이 되면서 일어나는 균열들, 주관성들의 두터운 겹침 사이를 파고들면서 이러한 겹침이 만드는 삶의 무게에 적대, 증오, 억압만 있는 건 아니라는 진실을 드러낸다.
김혜진의 이야기들은 가난해진 마음을 충실히 그림으로써 때론 관습적이고 규정적인 가난 재현에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지기도 한다. 이는 작가가 주관적 감정으로 가득 찬 세계를 손쉽게 미학적으로 치환하지 않고 담담하게 보편적으로 그려나가기 때문에 때때로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위험이다. 그러나 작가는 상황에 함몰된 감정에서 더 큰 윤리로 나아가는 열림의 순간들을 작품에 배치함으로써 이런 위험들을 뛰어넘기도 한다. 숨 막히는 주관적 세계의 틈새로 잠깐 열리는 마법 같은 순간들이 이 소설집을 보편으로 이끄는 힘이라 생각된다.
「미애」의 마지막 장면이 한 예가 될 수 있을 텐데, 가난한 마음에 둘러싸여 있는 ‘미애’는 “좋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18면) 같은 것을 품을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음의 곁에 자신과 자신의 아이도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보지만 사소한 실수로 희망이 깨지고 다시 생존의 절박함에 몰린다. 가난한 마음의 감옥으로 되돌아가려던 찰나, 분명 소용없을 제안을 해맑게 하며 엄마의 손을 ‘먼저 힘껏 움켜쥐는’ 아이 덕분에 그녀는 적어도, 잠시, 그 마음에서 해방되어 아이와 연결된다.
이와 대비해서 「산무동 320-1번지」의 마지막 장면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철거를 앞두고 버려진 황폐한 산무동에서 여러채의 빌라를 소유한 장 선생과 세입자들 사이를 중재하는 주인공은 “빈곤과 곤궁이 굴러다니는 골목에서 푼돈을 줍고”(169면)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는 존재다.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들을 살피고, 예전에 이 동네에서 거둔 어미 잃은 새끼 고양이 호수를 돌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밀린 월세를 받으러 재민 엄마에게 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받은 돈 일부를 다시 조의금으로 되돌려준다. 남편 작남의 뭐 하러 그랬냐는 핀잔에 주인공은 호수가 보고 있다고, 우리를 뭐로 보겠느냐고 답한다. 작가는 이것이 마치 주인공이 임시변통으로 대꾸한 말에 불과하고 실상은 “그 빌라에 누군가 살아야지만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으므로”(171면) 최선을 다하고 죽을힘을 다할 결심에서 그런 것이라 덧붙이는데, 이 마지막 몇줄이 다른 방식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호수가 보고 있다는 말이 아주 빈말이 아니기 때문인데, 실상 호수의 존재는 돈 받으러 간 날의 서사를 내내 간섭했고 주인공의 신경을 지배했다. 호수가 보고 있는 것이 맞다면, 보고 있는 호수를 주인공이 본 것이라면, 이는 호수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더 큰 네트워크를 상상하고 작은 실천을 통해 현실화한 것이 된다. 이 연결의 느낌은 주인공을 자기중심적으로 몰아가는 절박한 상황을 넘어 열린 길로 안내하는 열쇠가 되었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주인공의 최선은 보잘것없지만 작지 않고 그의 싸움은 더 큰 윤리로 넘어가는 큰 싸움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생존위기에 처한다는 건 자신을 적대하는 세계의 피해자 혹은 희생자가 되도록 몰리는 것과 같다. 이렇게 떠밀린 인물들은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메커니즘을 들여다볼 여유 없이 희생자 감정에 갇히게 된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이들의 마음에 세워진 주관적 세계와 적대하는 세계의 대립이 온 마음을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김혜진의 소설집은 다양한 주관적 세계가 적대적으로 생성되고 감정들이 얽히는 양상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그 사이로 비켜나가며 현재에 집중하고, 결국 “고작 이런 것”(100면)밖에 안 될 결말일지언정 자기만의 온전한 싸움을 싸워보려 한다.
「자전거와 세계」의 ‘현지’와 「목화맨션」의 ‘만옥’은 이 싸움이 때로 얼마나 소심하고 비루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갑작스레 찾아온 폭우에 날것으로 드러난 “진짜 세계”(204면)를 마주하며 “고르지도 펀펀하지도 않고, 피해야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들은 끝도 없이 나타”(202면)나는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타야 하는 현지가 자신을 옥죄던 모든 주관적 세계 사이를 헤쳐나가는 순간, 분명 그녀는 성장한다. 하지만 서른살의 성장이 “고작 이런 것”이라는 사실은 씁쓸하기도 하다. 「목화맨션」의 늙은 만옥은 그나마 기대할 미래의 시간도 없어 더 쓰라리다. 낡고 보잘것없는 맨션에 투자했다 실패한 그녀는 집을 팔면서 “지난 시간 동안 저 낡은 집이 자신에게 선사한 좋은 일이란 고작 이런 것이고, 이제 이것마저 지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 집을 팔면서 자신이 각오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100면) 되는 순간을 마주한다. 만옥이 각오해야 하는 것은, 맨션의 세입자 ‘순미’와 함께 지난 8년 동안 쌓아 올린 관계, 무너져가는 현실 속에서 서로를 확인해주며 함께 만들어낸 ‘우리’ 속에 존재했던 ‘좋았던 시절’의 자신을 배반하는 일이다. “고작 이런 것”의 아이러니가 오래 남는 작품이다.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축복을 비는 마음」은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주관적 감정들의 겹침 사이 드러나는 마법 같은 순간을 가장 잘 보여준다. 입주청소를 하는 ‘인선’은 희생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세상과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고 맞서는 ‘경옥’ 사이 어디쯤에서 “몸이 남아나지 않”(246면)을 것을 알면서도 ‘집주인이 절을 해야’ 마땅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청소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경옥의 질문에 인선의 대답은 “축복을 비는 마음”(270면)에서다. 이 순간 그녀의 청소는 그냥 청소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마음을 여는 행위이고 그녀가 집 안의 구석구석 남긴 마음의 파동은 이사 온 사람들의 마음과 동기화될 잠재성으로 머무른다. 인선이 그렇게 축복을 쌓는 동안 그녀의 “소질”(250면)이 드러나고 “실력”이 쌓여서 “신기루”(269면)처럼 느껴지는 창업의 상상은 새로운 현실로 연결된다. 보이지 않기에 더 많은 것을 연결하는 이 에너지를 움켜잡아 쉽고 보편적인 은유로 담은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자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미덕이라 보인다.
우리는 흔히 주관적 시점을 사물이나 상황의 객관적 상태에 대한 왜곡이라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주관적 시점이 관계에서만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이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주관이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좋은 문학은 언제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런 경험의 특이성을 구체적인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전달한다.
의 특이성을 구체적인 지평에서 보편적으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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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라보예 지젝 「마르크스, 객체 지향적 존재론을 읽다」, 슬라보예 지젝 외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 최진석 옮김, 문학세계사 2019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