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지구시대 한국문학의 안과 밖
민족문학과 디아스포라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읽고
최원식 崔元植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 저서로 『문학의 귀환』『생산적 대화를 위하여』『민족문학의 논리』『한국 계몽주의문학사론』 등이 있음. ps919@hanmail.net
1.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이 따ᄒᆞᆯ ᄇᆞ리곡 어드리 가ᄂᆞᆯ뎌
ᄒᆞᆯ디 나락 디니기 알고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할진댄 나라 보전할 것을 알리라)1
8세기의 향가 「안민가(安民歌)」의 한 대목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경덕왕(景德王)과 충담사(忠談師)의 파격적 만남에서 기원한 이 노래의 발생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때는 강남 갔던 제비 돌아온다는 삼짇날(음 3월 3일), 왕이 귀정문(歸正門) 다락에 나아가 영복승(榮服僧)을 맞아오라 이른다. 마침 길에서 잘 차려입은 고승을 만나 데려오지만 왕은 물리친다. 이어 남쪽으로부터 걸어오는 남루한 스님을 왕이 발견하고 모신다. 스님은 남산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께 삼짇날을 맞이하여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로 이름높은 충담사라는 사실을 인지한 왕은 그에게 백성이 편안히 살도록 다스리는 이치를 밝히는 노래를 지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해서 「안민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이 노래에 감동한 왕이 즉석에서 그를 왕사(王師)로 봉하자 스님이 고사함으로써 이 만남은 아름답게 마무리된다(『三國遺事』 卷第二 紀異第二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이 노래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체제적이다. ‘임금은 아비, 신하는 어미, 백성은 아이’라는 안분(安分)의 권력논리가 전경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텍스트의 내면에는 위기의식이 팽팽하다. 인용한 대목도 그렇거니와, 그 바로 앞대목에도 주목해야 한다. “구릿 대ᄒᆞᆯ 나히 고이솜 갓나희/이ᄒᆞᆯ 머거디 다ᄉᆞ라라(륜회輪廻의 차축車軸을 괴고 있는 갓난이/이들을 먹여서 편안히 하여라).2 나라의 기초인 ‘갓난이’(아이) 즉 백성에게는 밥이 곧 하늘인데, 당대 신라가 이들을 먹이는 것이 문제로 된 사회임을 이 노래는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경덕왕(재위 742〜765)대는 ‘통일신라’의 전성기지만, 이미 퇴폐의 하대(下代)로 가는 입구였다. 『삼국유사』는 충담사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한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삼산(五嶽三山)의 신들이 때로 나타나 전정(殿庭)에서 모셨다.” 신라의 수호신들이 초대받지 않은 세속의 시간 속으로 출몰한다는 것은 상서롭지 않은 조짐이다. 권력에 주는 경고의 의미가 큰 것이다. 왕권에 도전하는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강력한 당화(唐化), 즉 ‘국제화’정책을 폈던 경덕왕은 난관에 봉착했다. 돌파구는 어디에 있는가? 왕이 삼짇날 귀정문에 나아가 영복승을 만나고자 기원한 것도 바로 이런 위기의식의 산물이었으니, 신수좋은 ‘고승’을 물리치고 남루한 재야지식인/시인 충담사를 백성(=하늘)의 소리를 듣는 파트너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 일이 일어난 해가 경덕왕 24년(765) 3월인데, 석달 뒤 6월에 왕은 승하한다. 그의 아들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은 즉위 초부터 반란에 시달리다가 결국 살해된바 이로써 중대(中代)가 종언을 고하고, 귀족들의 상호항쟁 속에 인민이 도탄에 빠지는 대동란의 하대가 열리는 것이다.
충담사 이야기 뒤에는 경덕왕이 승려 표훈(表訓)의 매개로 혜공왕을 얻는 단락이 붙어 있다. 아들을 얻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는 하느님[上帝]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대를 이으면 족하다며 나라 대신에 아들을 선택한 경덕왕의 졸렬함은 통일시대의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과 천양지차다. 당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했던 제1차 통일전쟁에 이어, 신라마저도 ‘식민화’하려는 당에 맞서 고구려·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제국 을 물리친 제2차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은 거대한 능 대신에 화장을 선택했던 진정한 영웅이었다. 골회를 동해에 뿌려주면 왜를 지키는 호국룡이 되겠다고 다짐한 문무왕이야말로 미륵신앙 최고의 실천자가 아닐 수 없다. 삼국 가운데 가장 낙후한 신라로 하여금 통일의 역사(役事)를 감당하게 만든 힘의 근원에 미래불 미륵을 현세불로 재창안해 신라를, 나아가 삼국 전체를 일통하는 대규모의 불국토(佛國土) 건설운동으로 발전시킨 미륵신앙이 있다. 소년미륵 또는 청년미륵을 자임했던 화랑은 그 운동의 중심이거니와, 미륵신앙이라는 형태로 표현된 지상천국건설사상을 바탕으로 통일시대의 신라사회는 절명의 위기를 창조적 기회로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 이후 신라사회는 타력(他力)의 정토신앙으로 탈주한다.3 ‘지금 이곳’의 실존적 감각을 여의고 구세의 다리를 건너 저 언덕, 피안(彼岸)으로, 서방정토, 내세로의 ‘휴거(携擧)’를 꿈꿨던 것이다. 마음의 디아스포라는 몸의 디아스포라를 동반한다. 지배층·지식층의 유학(留學)이 크게 유행한다. 제국의 코스모폴리탄들에게 서방정토는 어쩌면 당이라는 세계제국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자기망각 속에서 인민은 이산한다.
이 문맥에서 충담사가 매년 삼짇날과 중양절(重陽節, 음 9월 9일)에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 공양을 계속해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삼화령 미륵은 어떤 분인가? 『삼국유사』를 다시 보자.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도중사(道中寺)의 생의(生義)란 스님이 꿈의 계시에 따라 남산의 남동(南洞)에서 땅속에 묻힌 돌미륵을 꺼내 삼화령 위에 모시고 여왕 13년(644)에 절을 창건하였다고 일연(一然)은 기록한다(『三國遺事』 卷第三 塔像第四 生義寺石彌勒). 미륵 자신의 예언에 따라 땅속에서 일어나 삼화령에 모셔진 이 미륵불은 통일시대의 기틀이 마련된 선덕여왕(재위 632〜647)시대의 푯대였다. 통일 이후의 안정 속에 온 세상이 정토의 아편에 취해 미륵의 시간을 망각한 때 충담은 홀로 기파랑을 추모하고 미륵을 기억한다.
제국의 시대에 반도의 시인 충담은 무엇을 기억하고자 하는가? 제국의 드높은 파도가 삼국을 해체의 위기로 몰아넣은 그때에 신라는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일변 저항하면서, 옛 고구려영토 대부분을 포기한 소국주의적 통일을 성취하였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격동적 디아스포라를 상기하면 신라의 ‘통일’이 삼국 인민 전체의 영구적 디아스포라를 막은 절체절명의 대사업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고구려·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왜에 포위된 약소국 신라가 직면한 디아스포라의 위기를 극복하게 만든 힘의 원천이 미륵신앙이다. 공포 속에 떠나야 할 땅이 아니라 고통의 이 땅이 곧 낙토라는 적극적 인식의 전환이 신라만이 아니라 반도 전체의 디아스포라를 막아낸 것이다. 충담은 다시 해체로 가는 비상등이 깜박이는 시대에, 누더기를 입고 광야에서 출현한 『구약』의 예언자처럼 속으로 절규한다. 탈주하는 영혼들이여,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라!
「안민가」는 한국문학의 가장 오롯한 원형의 하나다. 이 노래는 시간의 바다들을 건너 유전한다. 제국들의 명멸 속에서도 반도의 일정한 독자성을 간난하게 유지시켜온 힘이 ‘지금 이곳’의 실존적 ‘장소의 혼’임을 상기할 때, 남한민주화와 분단극복을 두 축으로 발진한 1970년대 민족문학운동은 새로운 미륵운동은 아니었을까?
2.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
4월혁명은 7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미륵이다. 미국이라는 피안, 서양이라는 서방정토가 남한 국민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면서 상상적 또는 실제적 디아스포라가 횡행하던 시대에 폭발한 4월혁명은 우리가 딛고 사는 이 땅에 대한 실존적 감각을 회복시켰다. 이 땅에 살기 위한, 이 땅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기 위한, 새나라 건설을 위한 남한 민중의 투쟁이 이로써 새로운 차원에서 발진하였다.
이 때문에 민족문학운동에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아주 강력한 저항이 존재한다. 디아스포라를 제어할 통일된 국민국가/국민문학의 건설을 목표로 삼은 민족문학운동은, 따라서, 민족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극도로 자제하는 데서 나타나듯이 민족문학론자들은 민족주의에 비판적이다. 그 내면에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남한 지배층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잠재해 있다. 친일파가 친미파로 의상을 갈아입고 남한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내건 50년대의 ‘민족주의’는 아주 기괴한 것이었다. ‘자유진영’의 최전위를 즐겨 자임한 그들은 세계시민의 이름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로 대표되는 임시정부계통의 적통 민족주의마저 억압하면서 ‘그들의 천국’을 건설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독재체제를,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응한 특수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로 이해할 수는 있다. 친일파를 정권의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반일적 경향을 견지한 이승만체제가, 동아시아 반공네트워크 재구축에서 일본 우익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의 변화 속에서 걸림돌이 되자, 그 대안으로 출현한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앞시기의 친미적 요소를 일변 계승하면서도 친일적 경향을 적극화하였다. 그럼에도 박정권은 이완용 내각이 아니다. 옛 총독부, 중앙청 건물이 있던 때의 세종로의 기이한 상징배치를 상기하자. 한일협정 이후 일본이 몰려오자 중앙청 앞에는 총독부가 헐어버린 광화문을 시멘트로나마 복원하고 세종로 한복판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 동상을 비록 사무라이풍이지만 건립했던 것이다.4 4월혁명을 탈취했기 때문에 혁명으로 분출된 민족주의 에네르기를 일정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체제 또한 미국의 세계전략에 새롭게 적응한 특수한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의 표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체제는 안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밖으로는 북을 타자로 조정한 불구의 민족주의였기에, 민족문학운동은 이들 ‘민족주의’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럼 민족문학운동은 식민지시대의 독립운동을 계승한 정통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가? 일면, 그렇다. 이 시기에 백범이 발견되었다.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38선을 베고 쓰러진 만년의 백범을 들어올림으로써 친미·친일·반북·반공적인 박정희체제를 비판하는 한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50년대에 평화통일을 주창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을 용공으로 몰아 처형할 만큼 레드콤플렉스가 지배하는 남한사회에서 철저한 반공에 섰던 백범을 내세우는 것은 체제측의 색깔공세를 막을 절호의 방패였던 것이다. 물론 단순한 전술적 선택은 아니었지만, 반공적 이념과 함께 주로 테러에 의존한 방법의 측면에서도 백범은 민족문학운동에 모순적이다. 테러는 조직적 반동을 초래한다는 원칙을 슬그머니 확인한 것도 백범에 대한 거리를 묻어두는 방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재발견되었다.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조직을 주장한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면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로부터 탈각하여 무정부주의로 사상적 거처를 이동한 단재는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후기 단재의 무정부주의를 드러내놓고 강조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무정부주의자 단재보다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단재를 전경화하는 방향이 자연스레 나타났다. 그럼에도 전기 단재의 지독한 국수주의와 후기 단재의 고독한 테러리즘은 역시 부담인데, 민족문학운동에서 민족주의는 이처럼 야누스적이다.
그럼 민족문학운동에서 민족주의는 검열을 의식한 ‘노예의 문자’인가? 그 측면이 없지 않다. 민족문학운동은 6·25 이후 침강한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약칭 ‘문맹’)의 민족문학운동과 일정하게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아다시피 해방 직후 ‘문맹’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주의적 과제를 과소평가한 식민지시대 카프운동의 교조성을 자기비판하면서 민족문학론을 제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는 좌익헤게모니 관철에 입각한 당시 조선공산당의 2단계혁명론에 긴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목표가 성취되는 순간 폐기되는 매우 유동적인 명목이었다.5 그 유동성은 70년대 민족문학운동에도 유전되지만, 운동이 진전되면서 양자 사이의 비연속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운동의 현실적 조건에 대한 숙고를 통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는 제3의 선택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출된 백낙청(白樂晴)의 분단체제론은 대표적이다. 민족적 현실에 충실하되 민족주의를 역사의 종말로 삼지 않는 동시에, 20세기 사회주의로 투항하지도 않는 절묘한 입지를 파지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민족문학운동은 ‘문맹’의 민족문학론과 비연속적 관계를 획득하게 된다. 이념적 금기가 오히려 이념에 대한 더욱 사려깊은 모색을 가능하게 만드는 역설은 당 없는 시대, 민족문학운동의 진정한 보람이 아닐 수 없다.
‘문맹’의 민족문학론에 대한 비연속성이 강화된 90년대 이후의 민족문학론에도 민족주의에 대한 일정한 함몰이 존재한다. 근대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2차대전 전에는 식민지로, 다시 전후에는 분단국으로 떨어진 간난한 역사적 경험을 상고(詳考)할 때 그것은 불가피하고도 필연적이기조차 하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가장 부정적인 사회주의, 특히 20세기 사회주의가 내적으로는 강렬한 민족주의적 요구의 분출이란 성격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사회주의의 기원으로 된 레닌주의가 오히려 와해의 위기에 처한 러시아제국을 구원했다는 역설을 상기하자. 국제주의로부터 슬라브 애국주의로 유턴한 스딸린주의는 레닌주의에 잠재해 있던 민족주의의 노골화일 터인데, 동아시아 사회주의들은 스딸린주의의 현지화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나를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로 이끈 것은 맑시즘이 아니라 애국심이었다.” 호치민(胡志明)의 이 통렬한 고백이야말로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핵심을 웅변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근대·국민국가 모형에 대한 공격과 함께 민족주의 비판이 유행을 타고 있다.6 민족주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있다’고 맞받고 싶지는 않다. 민족주의가 근본적으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 다시 말하면 지구적 규모의 대동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충돌적인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데 반대하는 자는 거의 없을 터이다. ‘있다/없다’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있고도 없는’ 민족주의가 지금 이곳에서 얼마만큼 쓸모가 있는지를 따지는 근사(近思)가 요구된다. 근사란 몸(나), 집, 나라, 세계로, 가까운 데서 차츰 먼 데로 밀어나가는 실천의 원심적 확장을 뜻하는 유교적 사유의 핵심인데, 마침내 도달해야 할 천하위공(天下爲公)의 평천하(平天下)를 내다보되, ‘나’와 ‘세계’ 사이의 단위들 특히 ‘나라’에 대한 숙고는 건너뛸 수 없는 실천의 징검다리일 것이다. 자본의 포섭력이 강화되면서 가족과 지방이 해체되는 경향 속에 나라 안팎으로 디아스포라가 항상적으로 진행되는 남의 형국과, 인민을 먹여살리는 기본이 흔들리면서 야기된 참담한 탈북행렬이 이어지는 최근 북의 상황을 아울러 볼 때, 한반도에 더 멋진 나라를 세우는 작업의 중요성을 망각할 수 없다. 탈민족주의가 민족·국가 문제를 괄호치는 편향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때, 혹 백인여성들의 페미니즘이 걸었던 전철을 되밟을지도 모른다. 공민권투쟁에 나선 백인여성페미니스트들은 “성차의 편견 때문에 자기들의 투표권은 거부되고 흑인남성들만 투표권을 얻을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자 백인우월주의의 기치 아래 단결하여 남성들과 동맹하는 쪽을 선택”하였으니, “젠더와 함께 인종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을 지워버리고 젠더만 부각시키는 운동”으로 선회하였다. 인종을 괄호치고 “자매애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외치는 것이 어떻게 위험한 관념으로 전락했는가를 상기하면,7 현단계에서 민족·국가를 지우는 탈민족주의론이 자칫 지구자본의 요구에 순응하는 무의식적 도구로 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족주의 비판이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될 때 그 또한 지혜로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탈민족주의론을 해독제로 삼아 민족문학론의 몸 안에 무의식으로 각인된 민족주의를 이제는 더 명확히 의식할 필요가 커진다. 사실 민족주의도 지구자본에 대한 꼭, 저항만은 아니다. 자본은 저항적이든 침략적이든 민족주의를 도구로 자기를 관철해왔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보존하면서 폐기하는 방편이라는 점을 다시금 명념(銘念)하면서 민족주의 너머를 진지하게 사유할 싯점이 아닐 수 없다. ‘나, 집, 나라, 세계’로 확장되는 실천의 단계에서 ‘나라’ 전후에 ‘지방’과 ‘지역’을 새로 삽입하여 지방분권과 동아시아를 중요한 화두로 둔 것도 그 일환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약간의 경멸로 거론되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을 다시 생각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자끄 데리다는 가망없는 국가정치를 횡단하는 “새로운 세계주의정치”(a new cosmopolitics)를 제안하면서, 그 근거지로 “국가정치를 재조정할 새로운 피난도시들” 즉 ‘자유도시’(une ville franche)의 탄생을 꿈꾼다.8 토박이와 이방인이 주객의 경계마저 넘어서 공생하는 ‘자유도시’는 “바울 세계주의의 세속판”(the secularised version of Pauline cosmopolitanism)인데, 바울의 「에베소서」를 소의처(所依處)로 밝히고 있다.9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에베소서」 2장 19절) 일찍이 이방선교로 방향을 잡고, 아시아 로마권역의 수도인 에베소를 거점으로 기독교를 유럽으로 이월하는 데 성공한 바울의 세계주의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데리다의 제안은 자유도시의 새로운 영성(靈性)이 모호하긴 하지만 흥미롭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국가정치에 대한 절망이다. “우리가 국가보다는 도시에 기대를 거는 것은 국가가 도시의 새로운 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다.”10 ‘나라’ 밖에서 꿈꿀 게 아니라 ‘나라’와 함께 숙고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생산적이다. 민족주의와 탈민족주의를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不一不二]” 무애(無碍)의 감각으로 동시에 여의는 정신의 훈련이 관건이다.
3. ‘자유도시’를 위하여
‘본국인’들은 대체로 이 땅을 ‘버리고’ 떠난 해외동포들을 약간은 고의적인 무관심으로 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아마도, 해방 이후 미국과 다양하고도 기발하기조차 한 방법으로 연결을 맺으려고 안달한 한국 지배층의 행태와,60년대 중반 이후 몰아친, 먹고살 만한 사람들의 미국이민 물결11에 대한 속깊은 냉소에 말미암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강고한 민족주의감정이 최근에는 부메랑이 되어 우리를 치고 있다. 한국이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올라서면서 저항적 민족주의가 어느 틈에, 외국인노동자는 물론이고 해외와 북(또는 북 출신)의 동포 들에게도 무차별적인 천민자본의 공격적 민족주의로 변화되는 조짐을 곳곳에서 보여준다.
식민지화를 전후하여 주로 정치·경제적 이유로 대규모의 망명 또는 이주가 시작된 이래, 현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가 151개국 565만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인도(480만명)나 일본(260만명)의 해외동포보다 많은 숫자다. 한민족 전체(7500만명) 가운데 외국거주율이 7.5%, 중국의 1.8%를 훨씬 넘는 대단한 비율이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동포사회들과 모국 사이의 관계가 원활치 못한 이유에는 ‘본국인’들의 뿌리깊은 일국주의와 함께 분단이 개재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남북정권은 분단체제의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이란 시각에서 해외동포문제에 접근함으로써 해외동포사회의 분열을 조장한 측면이 없지 않다. 안으로는 남한 민주화가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서고 밖으로는 탈냉전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한 1989년, 한국정부가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통해, 통일을 촉진하는 남북 교류협력 증대의 매개로서 해외동포에 새로이 주목한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13 그러나 남북의 주민과 전체 해외한인동포를 포괄하는 한민족공동체론이 새로운 차원에서 민족주의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기도로만 제한된다면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 이주경험이 이미 깊어진 해외동포들에게 실제적 또는 상상적 귀속의지를 촉구하는 일은 비현실적일뿐더러 통일사업에도 유익하지 않다. 통일한반도의 출현에 대해 주저하는 주변 4강의 의구를 더욱 부추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민족공동체를 ‘문화공동체’14로, 열린 문화코드로 접근할 필요가 절실하다.
그 훈련의 일환으로 나는 그동안 민족문학론이 소홀히 대한 해외동포들의 문학을 ‘근사’의 감각으로 읽고자 한다. 대상은 영어로 작품을 쓰는 미국동포 쑤전 최(Susan Choi)의 『외국인 학생』, 한글로 작품활동을 하는 중국 지린(吉林)의 동포작가 박선석(朴善錫)의 『쓴웃음』, 그리고 일본어로 창작하는 재일동포 켄게쯔(玄月)의 『그늘의 집』이다. 국적을 고려했지만 작품에 나타난 이주경험의 단계들도 참조했다. 쑤전 최가 한국에서 탈주하여 막 미국에 진입한 1세대를 다뤘다면, 박선석은 이미 본국과의 연계가 거의 끊어진 문화혁명시기 중국의 동포사회를 관찰했고, 켄게쯔는 ‘자이니찌(在日)’라는 조건을 고뇌하는 2세의 경험에 충실하다. 다른 계단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모두 2세다. 그것은, 이 땅을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주했더라도 그 귀환점은 언제나 모국이었던 사람들, 또는 귀국을 포기했지만 여전히 모국에 대한 강한 연계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 이주한 땅에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것을 뜻한다. 2세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이주경험의 층위들을 골똘히 사유하고 있다. 이 고투 앞에서, 나는 한국문학의 범위 및 그 편입 여부를 둘러싼 형이상학적 논의를 접고, 다만 그들과 존이구동(存異求同)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
3-1. 탈주와 진입의 경계에서
쑤전 최(1967년 미국 인디애너 생)의 『외국인 학생』15은 뜻밖에도 정통 사실주의기법으로 씌어졌다. 그녀는 왜 고전적 내러티브의 붕괴가 예찬되는 시대에 재현의 기술에 충실했을까?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가까스로 탈주하여 1955년 미국 남부의 소도시 스워니에 유학생으로 도착한 한국인 안창이 백인부르주아의 딸 캐서린 먼로와 인종/계급의 장애를 넘어 연애/결혼에 ‘성공’하는 줄거리를 축으로 삼는 이 작품은 미국판 『춘향전』이다. 말하자면 정통 로맨스다. 그럼에도 내면의 결을 살피면 꿈결 같은 천상의 로맨스가 아니라 악몽 같은 지옥의 로맨스다.
이 장편은 남주인공 창과 여주인공 캐서린의 공동전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미 첨예한 갈등의 복화(複化)를 품고 있는 이 문제아적 주인공 남녀의 만남과 연애의 과정을 현재로 놓고 섬세히 따라가는 것을 주선으로 하면서 작가는 만남 이전 두 상처받은 영혼들이 통과해온 지옥의 계절을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교직한다. 현재로 끊임없이 틈입하는 두 주인공의 과거를 통해서 한국전쟁 발발 전후의 격동하는 한반도와 미국 남부의 속물적 백인부르주아사회, 두 장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이 정교하게 탐사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연애는 한국과 미국, 두 국민의 자서전이 충돌하면서 상호침투하는 미묘한 접촉점을 이루는데, 뛰어난 연애소설이 가장 날카로운 사회소설로 되는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앞에서 이 작품을 미국판 『춘향전』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창의 이야기 즉 인물의 촛점을 남주인공에 둘 때 그렇다는 것이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도착한 창의 ‘성공담’은 이몽룡을 만나 천민신분에서 수직상승한 춘향이 이야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단서가 붙는다. 창과 춘향의 견줌은 한국을 탈주하여 미국에 도착한 이후의 창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저명한 영문학 교수요 서숙부(庶叔父)는 잘 나가는 국회의원일 뿐 아니라 창 자신도 일본유학의 경험을 지닌 엘리뜨로서 미국정보기관에서 일했으니, 그는 엄연한 한국 지배블록의 일원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의 친일경력에 괴로워하며 부르주아가족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이탈한다. 공산주의운동에 일정한 동감을 표시하면서도 그의 유일한 벗 김재성처럼 좌익에 투신하지 않는다. 미국에 협조하는 것으로 생애하면서도 미국에도 비판적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외톨이다. 작가는 이 대목들에서 매우 절제된 균형감각으로 당대 한반도의 상황을 기술한다. 정교한 재문맥화를 통해 존재의 모순 속에 비꼬인 창을 야만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이 함께 파괴되게 ‘공작’함으로써 작가는 결국 그로 하여금 미국으로 탈주케 한다. 아무리 지독한 민족주의자일지라도 창의 탈주를 ‘용서’할 수밖에 없게 만들 정도로 이 과정은 핍진하다. 그래서 창에게 미국은 희망의 땅이 아니라, 악몽의 한반도로부터 탈출할 우연한 피난처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은 탈주의 순간 자살한 최인훈(崔仁勳)의 『광장』과 접속된다. 그런데 이방인과 토박이의 위계가 엄격한 스워니 자유도시’와는 거리가 먼 이 소도시에서 영위되는 탈주 이후 창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탁월함과 비교할 때, 탈주 이전은 역시 실감이 덜하다. 그 이유는 더러더러 보이는 역사적 불일치에도 기인하지만, 탈주를 위한 변증이라는 구성적 제약에 더 말미암을 것이다.
이 소설은 캐서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창과 만나기 전과 이후로 분절되는 그녀의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을 통해 미국사회의 내면으로 육박해가는 이 대목은 이 장편의 압권이다. 부르주아의 고명딸로 태어났으되 그 속물성에 반항하며 아버지의 친구 찰즈 에디슨 교수와 조숙한 성적 유희에 빠짐으로써 지배질서 밖으로 탈락하는 캐서린의 어두운 연애는 너무나 생생하다. 사실, 내면적으로는 문제아로되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일단 수락하면서 생활했던 창보다, ‘롤리타’의 행각이라는 악마적 방법으로 타락한 부르주아사회의 속물성에 반항하는 캐서린이야말로 루카치적 의미의 문제아적 주인공에 더욱 가깝다. 독신의 영문학 교수 찰즈의 형상 또한 얼마나 절실한가. 세련된 반속주의자 찰즈가 내면에 웅크린 어두운 욕망의 심연에 지펴 헐떡이는 잔인한 장면들을 통해 작가는 부르주아 반속주의도 그 노골적인 속물주의와 마찬가지로 삶의 근원적 무의미성에 시달리고 있음을 예리하게 부조해낸다. 나보꼬프(Vladimir Nabokov)의 『롤리타』(Lolita)를 반추하고 있는 캐서린 이야기는 찰즈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창을 선택하는 결말에서 다시 반전한다. 미국사회의 타자, 아시아계 소수자와의 결혼이라는 더 심각한 문제적 상황에 자신을 밀어넣는 순간, 캐서린의 긴 반항은 완성되는 것이다.
쑤전 최는 한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주인공 안창의 모델은 작가의 아버지 최창(현재 인디애너주립대학 추상수학과 교수)인데,최창의 아버지는 한국의 대표적 비평가 최재서(崔載瑞)다.16 모더니즘이론가에서 친일문학자로 전신한 최재서의 양면성을 고려하면, 아들의 탈주란 전도된 오이디푸스적 충동의 표출에 가깝다. 아버지에게 반역하지 못하고 아버지로부터 도망친 아들이 수학에 매료되는 것 또한 그 증후가 아닐까? 수학은 이데올로기의 흔적들이 임리(淋漓)한 인간학으로부터 자유로운 가치중립의 환상을 제공하는 데 알맞은 분과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범상치 않은 가족사를 상기할 때, 이 작품이 작가를 엄습한 정체성의 위기를 종자로 삼아 부풀어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2세로서 작가는 1세의 경험을 추체험한다. 이 장편은 말하자면, 자신의 기원으로 거슬러올라가는 일종의 내면적 답사기다. 그런데 그 기원은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의식 아래 잠긴 타자다. 한국전쟁 전후의 한반도라는 미지의 타자를 탐사하려는 작가의 학습열이 바로, 이 장편을 사실주의로 기울게 한 것인가? 가족사의 상처를 직시하는 작가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이 장편에서 캐서린의 이야기가 창의 이야기를 압도한다. 전자가 후자를 흡수하는 형태로 귀결된 이 소설은 결국 제국의 서사다. 로맨스를 전복한 작가의 역량으로 볼 때, 나는 그녀가 제국의 서사를 또한번 멋지게 해체할 것을 믿는다.
3-2. 이국에서 조선동포로 살기
박선석(朴善錫, 1945년 지린吉林생)의 『쓴웃음』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 이후, 격변의 중국현대사를 조선족 마을, 팔방이라는 거울을 통해 들여다본 대하소설이다. 토지개혁(1950)에서 이야기가 비롯되는 이 장편은 1995년부터 『장백산』(창춘長春에서 발행되는 조선어 격월간지)에 연재되기 시작했는데, 뚱뻬이(東北)지방 동포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중 문화대혁명(1966〜76) 초기를 다룬 부분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17
고 김학철의 후계자가 출현했음을 고지하는 이 장편은 우선, 독자를 강력하게 흡입한다. 현지 애독자는 말한다. “저는 『장백산』에 연재되는 박선석의 장편소설 『쓴웃음』을 매번 2차례 이상 읽습니다. 원래 ‘책귀신’이 아니었던 제가 어찌하여 박선석의 『쓴웃음』에 매혹되어 ‘책귀신’이 되었는가. 그것은 작가가 우리 주변에서 발생했던 사실을 너무도 재치있는 필치로 생동감있게 엮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기(期,잡지의 호-필자)를 막론하고 읽을 때마다 혼자서 웃어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때로는 크게 소리내어 웃기도 합니다.”18 요즘 소설이 누리기 힘든, 독자와의 이 강력한 교감은 이 작품이 중국동포들의 집합적 자서전이라는 점에 말미암는다. 과연 이 작품에는 뚜렷한 중심인물이 없다. 뚱뻬이지방의 동포사회 전체가 주인공인 셈이다. 그런데 이 특징이, 뤼씨앙 골드만(Lucien Goldman)이 말하는, 개인전기적 성격이 강한 19세기 서구소설의 20세기적 해체의 한 경향으로 대두한 집단적 주인공의 소설과 상통하느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중국이라는 사회주의사회에서 생산되었다는 점과 이 장편의 집합성이 아주 무관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특성은 오히려 근대소설(novel) 이전의 구전서사체와 더 연관될 것이다. 박선석은 판마당의 청중을 울리고 웃기면서 지혜를 나누는 전통적 이야기꾼에 가깝다고 보아도 좋다. 벤야민(Walter Benjamin) 식으로 말하면, 경험적 가치의 하락과 이야기의 소멸이 동반관계를 이루는 우리들의 시대에, 현대소설의 실험으로부터 희귀하게 보호된 이 무진장한 이야기의 세계가 중국동포문학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경이다. 이는 중국혁명 성공 이후의 중국사회의 격절과 중국어에 포위된 ‘조선족 말’의 고도적(孤島的) 성격의 복합에도 말미암을 것인데, 대중과 교통하는 서사의 시원적 형태에 대한 회상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작품의 실감은 중국동포사회 밖으로도 너끈히 이월된다. 나는 오랜만에, 할머니 무릎에서 이야기의 다음을 다그치는 아이의 조급성에 빠지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한국출판본은 ‘문혁’이 시작된 1966년 중반부터 이듬해 초까지 뻬이징(北京)에서 불어온 조반(造反)의 광풍이 변방의 팔방마을을 훑고 지나가는 과정에서 벌어진 지옥의 풍경을 일류의 풍자와 해학으로 서사한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서 ‘문혁’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내 집권파를 주자파(走資派)로 비판하면서 대중의 자기해방론에 입각한 빠리꼬뮌형의 새로운 권력기관을 만들어낸다는 마오 쩌뚱(毛澤東)의 ‘이상’19에도 불구하고 ‘문혁’은 계급투쟁의 외투를 입은 권력투쟁, 즉 실세한 마오의 권력복귀운동으로 귀결됨으로써 중국 전체를 항상적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몰아갔던 터이다. 작가는 그럴듯한 이론으로 포장되어 그 실상이 잘 드러나지 않는 ‘문혁’을 중앙이 아니라 먼 변방, 그것도 한족에 대한 절대적 소수자집단인 ‘조선족마을’에 들이댐으로써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혁’을 팔방 인민의 일상생활 속에 복원하는 서사전략으로 작가는 경험주의에 함몰되지 않은 채 경험적 가치 스스로 진실을 드러내게 하는 뛰어난 이야기꾼의 솜씨를 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런데 ‘문혁’을 통해 이루어진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세계에서는 일군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예리하게 보여준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문혁’바람을 타고 사청(四淸)운동20을 다시 조직하고자, 무수한 ‘아꿰이(阿Q)’를 만들어내면서 팔방의 ‘주자파’를 축출한 공작원 백명길 또한 홍위병에 의해 반동으로 몰려 ‘투쟁당하는’ 사건은 전형적이다. “백명길만 모주석 어록을 이용하던 때는 지나갔다.”(278면) 사제들(당간부들)이 『성경』(마오의 어록)을 독점하던 구교의 시대는 가고 인민마다 성경을 장악한 신교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문혁’이 낳은 망외의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조반이 조반을 낳고 그 조반이 다시 조반을 낳는 형국 속에서 홍위병도 십자군처럼 타락한다. 엄격한 정치심사 때문에 홍위병 조직에 들지 못한 학생들이 마오의 이름 아래 새로운 홍위병을 조직하면서 등장한 파벌들의 발생으로 ‘주자파’의 자식들도 역량강화를 구실로 “다투어 받어들였”(286면)던 것이다. 전인민의 홍위병화라는 착종 속에 실제로 지방에서는 ‘문혁파’와 ‘주자파’의 투쟁이, 마치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의 좌우익 투쟁상황과 유사한 형태로 일진일퇴를 거듭했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인민의 조반을 부추긴 ‘문혁파’가 바로 그 인민에 의해 타격받을 것임을 우리는 ‘문혁’ 초기의 변방을 다룬 이 작품에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처럼 공적인 역사에 의해 억압된 사적 기억을 전경화함으로써 ‘엘리뜨들 사이의 권력의 교체서사’로 시종하는 지배서사를 풍자하는 하위자(subaltern) 서사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거의 모든 인물들이 모국의 기억, 아니 ‘문혁’ 이전의 기억조차 거세된 채 제시된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특징의 하나다. 영어소설 『외국인 학생』이 모국의 기억을 탐사하는 데 공을 들이는 것에 대비할 때 조선족마을을 꾸리고 조선어로 생활하는 중국동포를 그린 한글소설 『쓴웃음』의 이러한 특징은 기이하기조차 하다. 인물들은 오직 현재의 흐름에 종속된다. 그것은 아마도 당이 인민의 기억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 말미암을 것이데, 인민의 사적 기억은 당에 의해서만 호출된다. 마을의 계급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직전, 공작원이 주도하는 모임에서 마을사람들이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고백하는 제4장 「회억대비」와, ‘반동’을 잡도리하기 위해 그들의 과거 죄상을 털어놓으라고 다그치는 제6장 「투쟁」은 ‘기억의 정치’를 보여주는 압권이다. 고백된 사적 기억들에 개입하여 편집과 변조(또는 날조)의 과정을 거쳐 당(또는 그 대리자들)이 인민의 사적 기억을 공적인 역사로 강제 통합하는 과정이 핍진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기억의 정치를 기억의 황홀한 연금술로 들어올리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야기소설의 약점인 시공간에 대한 정밀한 구축이 성긴 것도 그 반영일 것이다. 시간과 장소에 대한 감각의 진전은 소설적 유물론의 핵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조선족’과 ‘한족’의 종족적 지표들이 거의 간과된 것도 그렇다. 이 경계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중국동포문학이 제대로 취급할 수 있는 독자적 영역이다. 길항하면서 상호침투하는 이 접촉권역(contact zone)의 기억들을 교차적으로 탐색할 때, 중국사회/문학, 그리고 한반도사회/문학과의 호흡 속에서 이 작품의 즉물적 제약이 한 단계 극복될 터인데, 이제 동포문학과 한국문학의 대화가 새로운 차원에서 진행될 싯점에 이르렀다.
3-3. 이국에서 그 나라 사람으로 살기
「그늘의 집」으로 2000년 아꾸따가와(芥川)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에도 알려진 켄게쯔(玄月, 본명 현봉호玄峰豪, 1965년 오오사까大阪 생)는 재일동포문학의 전개과정에서 새로운 징후를 보여준다. 오오사까의 코리아타운, 이꾸노구(生野區) 쯔루하시(鶴橋)를 자기 문학의 고향으로 삼고 있지만, 그곳을 한반도와 연관시키기보다는 일본사회 안의 작은 코뮤니티로 상대화한다. 이는 ‘일본에서[在日]’ 조선인 코뮤니티의 일원으로 살아가겠다는 2세대적 다짐과 호응하는 것인데,1세대 작가들에게 강한 모국/어에 대한 귀속성이 희박하다. 한국어번역판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세대적 차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모든 발상이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자문하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고자 하는 고민과 갈등에서 비롯”된 1세대 작가들과 달리 그는 “다양한 재일동포의 삶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로 그려내되, 재일동포의 특이성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보편성을 그려내”고자 한다는 것이다.21 그의 문학은 일본사회로의 본격적 편입이 새로운 차원에서 강화되고 있는 동포사회의 현상황을 반영한다. 일본사회가 그만큼 국제화되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세대 작가들과 달리, “우리들 세대에서는 실생활 면에서 직접적인 차별을 받는 예는 거의 드물다고 봅니다. 물론 제도 면에서 아직도 뒤떨어져 있는 부분이 많지만, 그러나 그것도 서서히 개선되고 있지요.(…) 바로 그런 점이 ‘행복한 시대의 재일작가’라는 평을 받는 이유인지도 모르지요.”(228면)
2세대 작가의 이탈의 근저에 모국의 실패가 있다. 번역판 머리말에서 그는 “재일동포라는 존재가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해, 평소 한국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메울 수 없는 거리감에 때로는 화가 나기도 (…) 했다”(7면)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이 노여움으로부터 그는 조국에 대한 ‘감상적 환상’을 거절한다. “조국은 분명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조정되고, “모국어에 대한 열등감” 역시 2세대의 모어(母語)는 일본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게 만드는 반전의 계기로 된다(230면). 그런데 2세대의 한국관 역시 소문의 벽에 갇혀 있다. “나를 포함한 2세 이후의 많은 재일동포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조국인 한국을 만날 때도 일본, 특히 일본어라는 필터를 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8면) 한국은 그에게 소문, 일본어라는 필터를 통과한 나쁜 풍문이다. 소문들의 교차 속에 증폭된 ‘본국인’과 재일동포 사이의 상호무지의 벽을 넘어설 길은 어디에 있는가?
‘소파에 누워 소설을 읽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이 말은 그의 소설에 거의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읽히지 않는 소설이란 말은 아니다. 아주 잘 읽힌다. 그런데 신경을 곤두세워도 줄거리를 놓치기 일쑤여서 자주, 읽은 부분으로 되돌아가 확인해야 할 만큼 서사의 결이 복잡하다. 리얼리즘이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 사실주의의 기율이 근본적으로는 존중되는 한국소설과는 차이를 드러내는 실험적 서사체를 그는 능란하게 구사한다. 유복한 재일동포 아버지와 제주도에서 시집온/팔려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바꾸사 노조무라는 ‘갱생한 불량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무대배우의 고독」이 특히 그렇다. “이 저주받은 땅이 낳은 저주받은 원숭이”(192면)로서 도시의 정글을 배회하는 이 스무살의 청년은 속으로 절규한다. “한번이라도 정말 절실해지고 싶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무의미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160면) 진정한 대결의 부단한 지연 속에 도시의 표면을 부유하는 이 청년은 이미 노인이다. 삶의 통일성은 산산이 부서졌다. 이 해체의 감각이 복잡서사의 근원이다.
작가는 「그늘의 집」에서 오오사까 집단촌, 그 장소의 혼을 집중적으로 사유함으로써 그 기원으로 소급한다. 70년 전, 할아버지 세대가 습지대에 처음 오두막을 지음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한 이곳에, “집단촌이 생겼을 때부터 살고 있는 화석”(24면), 서방영감을 인물의 축으로 삼아 작가는 동포사회 내부의 계급분화와 세대적 차별을 지우지 않고 그야말로 동포들을 비집합적으로 형상화한다. 서방영감 같은 일본병사 출신의 룸펜프롤레타리아가 있는가 하면, 한국말을 못하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나가야마 같은, 구두공장으로 성공한 사업가도 있다. 한국말을 하느냐 여부를 거의 의식하지 않는 아들 세대가 아버지 세대와 동거한다. 일본군 전력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60년대 말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에 투신했다가 죽은, 서방의 아들 코오이찌가 있는가 하면, 내과 개업의로 살아가는 코오이찌의 친구 다까모또가 있다. 아들 세대를 대표하는 다까모또는 말한다. “우리들은, 아니 나는, 너무나 무력해요. 적당한 돈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만족해하며 마음도 몸도 풀릴 대로 풀려버렸어요. 이 나라 하는 꼴에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토로할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질 때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술이나 퍼마시고. 그러고 나서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하루하루를 살아가지요.”(83〜84면) 이 성공한 의사의 고백은 부랑아 시바꾸사의 절규와 너무나 흡사하다. 성공한 자나 실패한 자나 아버지 세대나 아들 세대나 그들은 모두 숙명의 덫에 치였다. 그것은 거대한 일본 국가체제에 포획된 소수자의 불안일까? 작가는 이 불안이 꼭 재일동포라는 하위자집단에만 미만(彌滿)한 것이 아님을 화사한 일본부인 사에끼의 삽화를 통해 묻어두었다. 아들을 잃고 독거노인봉사회의 일원으로 집단촌을 방문하는 이 의사부인 역시 반듯한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의미의 질병은 집합적 정체성이 해체되는 단계의 소수자집단에 더욱 침투적이기 마련인데, 그래서 그들은 가난했지만 공동체가 살아 있던 과거를 추억으로 품고 무의미의 사막을 낙타처럼 횡단한다. 조선인집단촌은 이제 내부로부터 붕괴 직전이다. 이와 함께 주민이 변화하고 있다. 나가야마의 사업이 번창함에 따라, 원주민 재일동포들이 탈출한 자리에, 처음에는 한국의 불법취업자들이, 이제는 중국조선족을 비롯한 중국인들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28면). 마침내 경찰의 철거경고가 내린다. 작품은 서방영감이 경찰의 폭력에 쓰러지는 것으로 종막을 고한다. “집단촌에 숨어 사는 요괴”(37면)가 마침내 쨍쨍한 여름 한낮 강한 햇살 아래 ‘죽었다’. 이 작품은 ‘요괴’를 추방하는 축사의식(逐邪儀式)이요, 재일동포사의 한 시대의 종언에 봉헌된 진혼굿이다.
「젖가슴」은 「그늘의 집」 이후, 집단촌에서 나와 일본사회 속으로 다시 ‘이산’한 동포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의 화자 ‘나’, 유지(38세)는 아버지의 부동산회사를 물려받은 일본인 중산층으로,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재일동포 유꼬(35세)의 남편이다. 이 젊은 부부가 살고 있는 오오사까 교외의 고급주택을 축으로 삼아 전개되는 작품은 그 무대의 제한만큼 연극적인데, 이런 결합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구질구질함이 전혀 없다. 진지한 사유를 정지한 채 비연속적 현재의 표면을 미끄러지듯 살고 있는 남편에게 민족의 차이는 어떤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다. ‘쎅스리스’ 부부지만 그들은 친구처럼 다정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거의 공개적으로 외도를 하지만 그것 또한 이 부부를 갈라놓지 못한다. 서로의 사적 영역을 철저히 존중하는 이 세련된 개인주의자들은 도시화의 진전이 야기한, 일체의 집합성으로부터 해방된 개인, 과거 없는 단독자들이다.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자유도시’에 침입자가 방문한다. 유꼬의 중학시절 은사 강이 결혼한 딸과 함께 출현함으로써 이 ‘도시’에서 추방된 과거의 요괴들이 살아난다. 이시까와현(縣)에서 조선학교 교사로 오래 봉직한 전력에서 보이듯, 그는 총련계다. 조직이 교사직을 빼앗자 옛 제자들의 도움으로 맹인 딸 미화와 구차하게 살아가는 50대 전직 교사의 출현으로 유꼬의 과거가 드러난다. 언니가 북송동포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도 한때는 열렬한 총련계였던 것이다. 이미 유꼬는 이탈했다. 작가는 2년 전의 방문을 삽입함으로써 조직으로부터 쫓겨났음에도 여전히 ‘조국’에 충성스러운 이 부녀를 내면으로부터 관찰한다. 이 대목에서 유꼬와 강이 북을 선전하는 비디오를 보며 진행된 중학시절의 수업을 재현하는 장면은 각별히 인상적이다. “그 지루했던 수업을 다시 시작해요”(106면), 유꼬의 이 공허하지만 절실한 발언은 단지 옛 스승에 대한 위로인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비록 그것이 환상이었다 할지라도, 공동체의 충일한 경험으로 행복했던 과거로 두 사람이 떠나는 쓸쓸한 가상여행! 그 여행의 동반자였던 미화는 스스로 유지를 유혹한다. “완전히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나(유지–필자)는 미화와 우리들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돌아왔다.”(109면) 2년 만의 방문을 통해 이 부녀의 이탈도 완성되었음을 작가는 보고한다. 그사이 미화는 점자지도원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고, 남편이 출판사 사장의 차남인지라 아버지도 출판사 번역자로 고용되었다. 작가는 이 결혼이 한국적 취득을 조건으로 허락되었다고 간략히 덧붙임으로써 마지노선이 붕괴했음을 알린다. 이 점에서 작품 앞머리에 북송 일본인 아내들의 일시귀국 뉴스가 나오는 것은 복선이다. 이 작품은 북과의 연계 속에서 모국에 대한 강한 귀속성을 견지했던 총련계 동포, 그 마지노선의 위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북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함으로써 총련의 위기가 더욱 확산되고 있는 현재를 상기할 때, 그 선취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그럼에도 근본적으로는 동화 같은 로맨스, ‘그늘의 집’을 품고 그 지옥의 계절을 통과한 로맨스다. 복잡서사를 즐기는 작가가 이 작품에서는 단순서사를 채택한 것도 그 반증이다. 또한 유꼬와 유지의 결혼이나, 미화의 결혼도 동화적이다. 특히 아기에게 수유하기 위해 당당히 노출된 미화의 젖가슴은 이 불모의 ‘자유도시’를 ‘풍요의 왕국’으로 축복하는 로맨스적 마법의 압권이다. “미화는, 내게는 마치 법처럼 보였는데, 블라우스의 가슴 언저리에서 손가락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왼쪽 젖가슴을 출렁 하며 통째로 내놓았다.”(123면) 그런데 작가는 이 마법의 전이를 중지시킴으로써 소설적 체면을 차린다. “아기엄마로서 미화의 절대적인 존재감에 압도”(125면)된 유지의 접근을 유꼬가 거절함으로써 불모를 품은 이 유쾌한 ‘자유도시’는 한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자유도시’가 열국체제를 넘어 새로운 시민, 새로운 도시들의 연합을 이끌 종자로 될지는 차치하고, 이 동화같은 장소의 현실성 자체가 나에게는 여전히 불안하다.
확실히 켄게쯔는 디아스포라문학의 새 국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곰곰이 살피면 주장과는 달리 그의 소설 역시 1세대처럼 정체성의 위기를 핵으로 삼는다. 다만 다른 차원으로 진행된 위기일 뿐이다. 일본이라는 거대국가체제에 속절없이 흡수되는 소수자의 불안에 뿌리박은 허무주의와 어떻게 싸우는가, 재일동포문학이 당면해온 이 ‘세계사적’ 문제는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에 새나라를 건설하려 고투해온 한국문인들의 싸움과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다. 모국과 제국의 경계에서 하위자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이중정체성을 묻는 존재론적 사유를 수행하지 않을 수 없는 미국과 중국의 동포문학이 벌여온 힘겨운 투쟁 또한 저 언덕의 불이 아니다. 개혁정권 10년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새 정부의 탄생으로 한국민주주의가 뜻깊은 진전을 기록하면서, 분단시대의 해소가 새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무력에 의한 신라의 반쪽 통일이 다시 재현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여 우리는, 그동안 남과 북이 각기 추동했던 일방적 흡수통일도 아닌, 남과 북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성숙한 공생에 입각한 통일에 대한 낙관이 비관에 승리하는 전망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 지점에서, 한국문학은 해외동포문학을 거울로 민족주의적 함몰을 해독하고 또 후자는 전자를 거울로 탈민족주의적 탈주를 돌아보는 상호균형을 위해 더 늦기 전에 만날 때가 되었다. 차이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차이에 투항하지 않는 황금의 고리는 어디에 있을까? 상호이해의 전진 속에 토박이와 이방인의 경계가 사라지는 대동세상을 내다보며 각기 자기가 속한 사회의 경험에 충실한 문학/사회를 생산/창조하려는 도정에서 함께 만나는 일이 ‘지상(地上)의 길’을 건설하는 작업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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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完鎭 『鄕歌解讀法硏究』(서울대출판부 1981)71면과 80면. 원래 내 입에 익숙한 것은 梁柱東의 해독이지만(『古歌硏究』 재판, 博文出版社 1954), 양주동의 해독을 일보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ᄒᆞᆯ디’에서 행갈이한 김완진의 해독이 더 시적이라 이를 취했다.↩
- 홍기문 『향가해석』(평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1956) 122〜23면.↩
- 특히 통일 이후의 정토교신앙에 대해서는 에다 토시오(江田俊雄)가 『삼국유사』의 여러 기록을 통해 정리한 것이 유용하다. 『朝鮮佛敎史の硏究』(東京:圖書刊行會1977) 144〜47면.↩
- 경복궁은 복원되는데 박정희의 서툰 현판을 단 시멘트 광화문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을까? 독재자를 복제한 ‘구리 이순신’ 대신에 영웅의 진면목에 핍진한 우리의 조각상을 가지자는 논의는 왜 나오지 않을까? 키치적 상징물이 아니라 나라의 얼굴을 다시 조형하는 세종로의 재배치가 절실하다.↩
-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최원식 「프로문학과 프로문학 이후」, 『민족문학사연구』 제21호(2002년 하반기) 10〜17면 참조.↩
- ‘탈민족주의’를 비판한 것으로는 유재건 「통일시대의 개혁과 진보」(『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와 백낙청 「한반도에 ‘일류사회’를 만들기 위해」(『창작과비평』 2002년 겨울호) 참조.↩
- 벨 훅스 『행복한 페미니즘』(박정애 옮김, 백년글사랑 2002) 129〜31면.↩
- Jacques Derrida, On Cosmopolitanism and Forgiveness, trans. by Mark Dooley and Michael Hughes, Routledge 2002, 4〜5면.↩
- 같은 책 20면.↩
- 같은 책 6면.↩
- 1960년 현재 한국계 미국인은 약 1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아시아계 이민을 촉진한 1965년 하트-쎌러법(the Hart-Celler Act)이 통과하면서 한국계 미국인이 1985년에 50만명에 이르도록 폭증하였다. Lan Cao and Himilee Novas,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Asian-American History (A Plume Book 1996) 252면.↩
- 정영훈 「한민족공동체 형성과제와 민족정체성문제」, 『재외한인학회 연례학술대회 발표논문집』(재외한인학회 2002) 2면.↩
- 이종훈 「한민족공동체와 한국정부의 역할」, 『재외한인학회 연례학술대회 발표논문집』 27〜28면.↩
- 같은 글, 30면. 그는 한민족공동체가 ‘다국가 다국적 민족공동체’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치공동체보다는 ‘문화적·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면서, 문화공동체 형성의 장애로 “각 지역공동체의 문화적 이질화”를 들고 있다. 나는 ‘이질화’를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존이구동(存異求同)의 정신으로 교류를 확대·심화한다면 그 차이는 오히려 풍요로운 자산이 될 수도 있다.↩
- 문학세계사에서 상·하권으로 1999년에 출간된 것을 텍스트(최인자 옮김)로 삼는다. 원본(Susan Choi, The Foreign Student: A Novel, Harper Perennial 1998)도 참고하였다. 이 작품에 대한 분석으로는 유희석 「한국계 미국작가들의 현주소」(『창작과비평』 2002년 여름호) 참조.↩
- 이 작품 하권에 붙인 최인자의 해설 「이방인의 사랑」, 285면.↩
- 박선석 『쓴웃음』 제1권(파주: 자유로 2000).↩
- 남영전 「광란의 연대」, 박선석, 앞의 책 13면.↩
- 小島晉治·丸山松幸 『中國近現代史』(朴元 옮김, 지식산업사 1996) 222면.↩
- 사청운동(1964〜66)은 마오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농촌의 사회주의교육운동으로 ‘문혁’의 전초전이다.↩
- 玄月 소설집 『그늘의 집』(신은주·홍순애 옮김, 문학동네 2000) 227면.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면수만 표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