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3대 위기를 넘어, 3대위기론을 넘어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한반도평화포럼 공동대표. 최근 저서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1~5)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말문을 열며
‘포용정책 2.0’이라는 표현은 지난해 9월 화해상생마당 심포지엄에서 「포용정책 2.0버전이 필요하다」라는 제목으로 발제하면서 처음 사용했다.1 새해 들어서는 한반도평화포럼 제5차 월례토론회에서 「‘포용정책 2.0’ 그리고 시민사회의 역할」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내용을 보완했다.2 이번 글은 두 행사에서의 토론을 감안하여 새로 손질한 것인데 그간 논의에 함께해준 분들로부터 크게 도움을 받은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두번째 발표 때 ‘포용정책 2.0’에 따옴표를 붙였는데, ‘2.0버전’이라는 말이 컴퓨터 용어를 빌려온 일종의 수사적 표현인데다 ‘포용정책’이라는 용어 자체도 꼭 맞는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냉전시기의 미국외교가 소련 또는 중국에 대한 적대정책에서 대화와 교섭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사용된 engagement policy의 한국어 번역이다. 이런 정책은 대북관계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출범하기 전에 클린턴 행정부에 의해 간헐적으로나마 채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포용정책’으로 번역했을 때의 주된 문제점은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껴안아준다’는 뜻으로 오해되기 일쑤라는 점이다.3 상호적인 교섭에 나선다는 engagement의 원뜻이 왜곡되고, 그 결과 흡수통일론도 북의 동포를 껴안아준다는 의미로 ‘포용정책’이라 일컬어진다.4 비슷한 예로 ‘비핵·개방·3000’도 북이 비핵화만 하면 한국이 북한을 껴안겠다는 의지를 담은 새로운 포용정책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5
번역상의 문제 외에 특별히 유념할 점은 원래의 포용정책이 곧 통일정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이 소련 또는 중국과 교섭(engage)하기로 했을 때 당연히 그것은 상대방과의 통일(unification)이나 통합(integration)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남북한 사이에서는 궁극적인 재통일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포용정책이 된다는 점이 우리가 유념할 한반도의 특이한 사정인 것이다.
이런 한반도식 포용정책의 ‘1.0버전’이 일단 완성된 형태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고 2000년 6월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는 것이 본고의 대전제이다. 이를 두고 화해상생마당 심포지엄에서 몇가지 반론이 제시되기도 했기에 한반도평화포럼 발제에서 좀더 상세하게 논했고 이 글에서도 재론할 참이다. 그런데 한동안 정지상태에 빠졌던 김대중-노무현시대의 포용정책이 재가동되더라도 그것이 과거로의 단순 복귀일 수는 없고, 말하자면 ‘2.0버전’이라 불릴 만큼 획기적으로 쇄신된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에는 폭넓은 원칙적 동의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구체적 내용으로 들어가면 온갖 이견이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나 자신의 입장을 미리 밝히자면, ‘2.0’의 새 내용이 무엇보다 남북연합 건설을 향한 의식적 실천과 더불어 ‘시민참여형 통일’ 과정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당연히 본론을 통해 논증하고 설득할 주제들이지만, ‘시민참여형 통일’이라는 표현이 곧잘 야기하는 오해나 의구심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미리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6
먼저 ‘시민참여형’이라 할 때의 시민은 시민단체 활동가로 국한되지 않음은 물론, 좁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아니라 민간기업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를 통일과정에 참여하는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게다가 정부의 핵심적 역할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북간의 화해, 협력 및 통합 노력을 정부에만 맡기지 않고 민간이 적극 개입하는 동시에 정부의 통일정책에 민주시민으로서 직접간접의 영향력을 행사함을 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북쪽에 시민참여가 없는데 한쪽만을 근거로 ‘시민참여형 통일’을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남쪽의 민간사회 자체도 ‘제3당사자’라 일컫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등의 질문이 이어지기 일쑤다. 북녘에 남녘과 같은 시민사회가 현시점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시민참여형 통일’론에 결정적인 반박이 될 수 없음은 졸고 「2007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민참여형 통일」(192~94면)에서 비교적 상세히 설명했으므로 되풀이하지 않겠다. 남쪽 민간사회의 현시점에서의 한계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 언급했는데, 실제로 민간교류의 현장에서 활동해본 인사들일수록 현실적 한계가 실감되고 ‘제3당사자’라는 표현이 공허하게 들리는 일이 흔하다.7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반도의 통일은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진행될 장기적 과정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남북연합이라는 1차단계와 어쩌면 또다른 중간단계를 거쳐서 진행되기 십상인 과정이다. 오늘의 국지적 현장에서의 실감으로 전체 과정의 성격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올해로 66년째에 접어든 한반도의 분단은 그동안 시민참여를 통해 극복되지 못한 것도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정부주도로 통일이 달성되지 못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아니, 앞으로도 한동안은 달성될 전망이 안 보인다. 반면에 당국간의 대립이 완화될수록 민간사회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하며, 남북연합이라는 ‘1단계 통일’이라도 이루어진다면8 시민참여가 더욱 획기적으로 증대되리라는 것은 결코 무리한 전망이 아니다. ‘시민참여형 통일’론을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대하는 일도 일종의 타성인 것이다.
아무튼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거의 파탄상태로 치달았던 남북관계는 2009년 8월초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방북을 고비로 우여곡절 속에서나마 대화국면에 접어들었고 한반도는 포용정책이 다시 작동하는 시기를 맞이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금년 내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을 공개적으로 예상하는 판국이다.9 포용정책의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그 쇄신의 방안을 연마할 필요가 절실하다.
2. ‘포용정책 1.0’에 이르기까지
6·15공동선언을 1.0버전의 ‘완성판 출시’로 보더라도 그것이 오랜 기간 많은 예비버전을 거쳐서 완성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예비버전을 1.0버전으로 오인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특정 예비버전을 1.0으로 격상하거나 심지어 1.0버전보다 우월한 것으로 추켜세우는 일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폄하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최초의 공식 남북공동 문건은 1972년의 7·4공동성명이다. 여기서 통일의 3원칙이 합의되어 오늘까지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포용정책의 효시라 할 만하다. 성명의 나머지 합의사항들이 사문화되고 곧바로 극심한 남북대결의 시대로 접어들지 않았더라면 포용정책 1.0의 출발로 간주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결코 1.0의 출발일 수 없었던 것은 집권자 개인 차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분단시대의 그 시점이 포용정책의 가동을 허용할 수 없는 ‘분단체제 고착기’였기 때문임이 드러난다.10
남북관계에서 괄목할 진전을 보인 것은 6월항쟁 이후에 성립한 6공화국에서였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에 이어, 이듬해 국회에 보고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1989.9.11)은 남북연합을 거치는 단계적 통일이라는 한국정부의 기본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문건이다. 그리고 여기에 1991년말에 서명되어 92년초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라는 뜻깊은 열매가 뒤따랐다.
그러나 노태우정권의 이런 업적을 곧바로 ‘포용정책 1.0’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첫째, 7·7선언은 물론이고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도 어디까지나 남쪽 정부의 ‘방안’이며 ‘포용 의지의 표현’이지 북쪽도 함께한 상용·상종 행위는 아니었다. 둘째로, 이때의 남북연합 제안이 그 다음에 완전 통일로 직행하는 것을 설정했기 때문에 북측으로서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거부로 볼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다.
그에 반해 기본합의서는 북측이 수용한 문건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사뭇 다르다. 내용도 상호불가침 약속뿐 아니라 교류와 협력에 관한 수많은 구체적 합의를 담은 훌륭한 것이다. 다만 7·4공동성명과 마찬가지로 얼마 안 가 거의 사문화되었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아울러, 남과 북이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임을 못박은 것이 중요한 성과지만, 어떤 식으로 통일하겠다는 ‘근본문제’는 회피하고 넘어갔다는 점에서도 포용정책의 온전한 작동에 미달했다.
‘예비버전’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민간 차원의 성과들도 빼놓을 수 없다. 재야 통일운동의 선구적 주장들은 차치하더라도,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내놓은 ‘4대국보장 평화통일’ 방안은 포용정책을 일찍부터 국정목표로 제시한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은 6월항쟁 직후 1987년 8·15 기념사에서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남북연합 구상을 앞질러 ‘공화국 연방제’를 제안하였다. 그런가 하면 1989년 4월 2일의 문익환·허담 공동성명은 연방제를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봄으로써, 6·15공동선언에서 ‘근본문제’가 절묘하게 해결되는 단초를 마련했다.
아무튼 포용정책의 ‘포용’이 한쪽의 일방적인 구상이나 일시적인 접근이 아니고 쌍방이 지속적으로 교섭하고 교류하는 ‘상용’을 뜻하는 것이라면, 더구나 한반도에서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통일과 무관할 수 없는 포용이라면, ‘포용정책 1.0’이 드디어 완성되는 것은 2000년 6월에 이르러서다. 이것이 ‘실행파일’까지 제대로 갖춘 완성 버전이었음은 이후 급격히 늘어난 남북간 접촉과 공동사업, 공동행사 들이 입증해준다.11 그 성과는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이명박정부 출범 이래의 6·15 격하 움직임과 남북관계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전의 단절상태와 비교하면 여전히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개성공단이 중단 없이 가동되었고, 금강산관광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면회소가 완공되고 심지어 이용되기도 했으며, 작년 말의 서해교전 당시에도 한국경제와 국민의 일상생활에는 큰 동요가 없었다.
참여정부의 포용정책은 따로 논의할 문제지만 2007년 10월의 두번째 정상회담과 10·4선언을 예의 컴퓨터 용어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될까? 선언의 제1항이 6·15공동선언을 적극 고수하고 구현할 것을 다짐하는 데서 보듯이 10·4는 6·15를 대체하기보다 그 ‘실천강령’을 마련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6·15선언이 미처 다루지 못했던-현실적으로 2005년의 뻬이징 9·19공동성명이 나오기 전에는 다룰 수도 없었던-평화체제 문제와 군사·안보 문제를 포함했다는 점에서 1.2 정도를 초월하는 새 버전으로 봐야 옳을 듯하다. 하지만 2.0이라기보다는 1.0의 큰 테두리 안에서 1.5 정도로 개량된 버전이라 생각되는데, 그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3. 1.0버전에 대한 논란과 평가
1) 고려연방제 시비와 절차논란
6·15공동선언이 포용정책 1.0의 완성이냐 아니냐는 논란과는 별도로 그 내용에 대한 시비가 일찍부터 있었고 이명박정부 들어서는 보수 논객들의 단골 메뉴로 떠올랐다. 그중에는 명백한 오해나 의도적 왜곡이 적지 않은데 먼저 이 점을 간략히 짚어보기로 한다.
가장 흔한 공격 가운데 하나는 6·15선언이 북측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수용함으로써 헌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 없이 그러한 합의를 했다는 절차상의 문제제기가 추가되기도 한다. 예컨대 박세일 교수는 이 두가지 비판을 동시에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비록 명분론이라고 해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우리 대한민국의 公式의 통일방안이다. 그리고 북한의 공식의 통일방안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이라는 對南赤化통일론이다.
그런데 6·15공동선언에서 어떠한 과정과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 두 방안의 통일론에 큰 차이가 없다는 합의를 공동선언문에 담았는지 알 수가 없다. 6·15선언이 사전이나 사후에 국회의 동의나 국민이나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6·15선언의 법적 성격이 무엇이며, 헌법일탈은 없었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헌법에는 명백히 대통령에게 어떠한 통일방안도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통일방안이어야 하고, ‘국가의 독립’, 북한지역을 포함한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는 ‘헌법수호’ 등을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는 헌법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12
6·15공동선언 제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 안과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된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과 전혀 다른 성격이며 도리어 국가연합안을 실질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점은 당일 토론에서 정세현(丁世鉉) 전 통일부장관이 상세히 지적한 바 있다. 예컨대 김일성 주석이 1991년 신년사에서 이미 ‘느슨한 연방제’를 제시하면서 북측은 “미국 초기 연방제처럼”(1991.6.2 한시해 유엔 차석대사) 연방(federation)이 아닌 국가연합(confederation)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6·15공동선언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내정, 국방, 외교에 대해서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2개의 지역정부가 협력하면서 통일문제를 풀어 나가자는 것”(2000.10.16,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이라 하여 연방제라는 호칭만 고수할 뿐 내용상 국가연합과 일치함을 밝혔다는 것이다.13 이와 별도로 남북정상회담 현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김대중 대통령의 국가연합안 설명에 동의하면서 다만 명칭을 연방제로 하자고 제의했다는 배석자(겸 문안작성 참여자)의 증언도 있다.14
6·15선언에 대한 위헌시비가 대체로 ‘고려연방제 수용’ 주장에 근거를 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박세일 교수의 지적대로 헌법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하지 않은 어떠한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도 “헌법 위반 내지 헌법 불일치”라는 것이다.
헌법학의 문외한으로서 조심스럽지만 여기서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과 제4조에 거듭 나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생각해본다. 박세일 교수는 이를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로 옮겨 적고 있는데 이는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자유민주주의’로 좁혀버릴 위험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뿐 아니라 사회민주주의, 심지어 사회주의도 원칙상 용인하는 국가다. 따라서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인민전정(人民專政)’이라든가 거대여당의 의회독재 따위를 하지 않고 시민의 인권이 존중되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곧 칸트적 의미로 ‘공화주의적’인 민주주의를 하는 체제로 봐야 한다.15
아무튼 국가연합제와의 공통성을 전제로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선언문에 포함시킨 것이 헌법위반일 수 없다. 오히려,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는 헌법 66조 3항의 이행이므로, ‘헌법 불일치’조차 아니다. 만약에 대한민국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용하겠다는 명시적 선언을 평양당국으로부터 받아내지 않고도 북측을 평화통일을 위한 교섭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합의문을 산출한 것 자체가 위헌 내지 헌법일탈이라면, 이를 가장 먼저 저지른 사람은 7·4공동성명 발표를 지휘한 박정희 대통령이요, 다음으로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한 노태우 대통령을 꼽아야 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도, 비록 재임중 아무런 남북합의문도 생산하지 못하는 기록을 세웠지만,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사망이 아니었다면 정상회담이 열렸을 것이 확실시되는만큼 ‘헌법위반 미수범’으로 분류되어야 맞겠다.
6·15선언 제2항의 합의가 이처럼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충실한 국가연합에 대한 합의요 헌법상 대통령의 평화통일 노력 의무의 수행임을 인정한다면 대통령의 독단적인 행위라는 비난도 설득력을 잃는다. 2000년 정상회담은 7·4공동성명과 같은 ‘깜짝쇼’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94년의 정상회담 합의에 비해서도 훨씬 충실한 여론수렴을 바탕으로 개최되었다. 공동선언문 자체도 비록 국회비준은 없었지만-조약이 아니므로 비준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다-여론의 압도적인 지지 속에 국회보고를 거쳤고 그해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 10·4선언의 경우는 국회에서 여야합의로 통과된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2005.12.29 제정, 2006.6.30 시행)에 근거하고 그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으니 과정의 합법성과 투명성은 더 말할 나위 없다.
2) ‘퍼주기’와 인권문제
포용정책 1.0에 대한 또 한가지 비판은 이른바 ‘퍼주기’ 논란이다. 대북 경제협력 및 인도적 지원의 구체적 내용을 두고 그 효율성이나 투명성을 엄정하게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은 필요하다. 실제로 이명박정부 아래서의 대결국면을 거치면서 장래의 교섭질서에 기여하는 바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논란을 키우기 위해 정상적인 무역거래 대금까지 지원금에 포함시키는 회계상의 무리를 저지르지 말아야 하며, 지원금 자체가 과연 ‘퍼주기’라 부를 만큼 넉넉한 규모였는지도 세밀히 따져볼 일이다. 게다가 금강산사업이나 개성공단을 시작하면서 휴전선을 북측의 군사요충지 너머로 실질적으로 후퇴시키는 등의 결정적인 ‘퍼오기’를 해온 데 대한 계산을 당연히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북지원과 관련된 논란에서도 엄밀한 계산보다는 ‘우리가 준 돈으로 핵무기를 만들었다’든가 ‘포용정책이 북측 정권의 수명만 연장시켰다’는 식의 선동이 판을 치기 일쑤다. 물론 북이 핵무기를 만든 건 사실이고 돈에 이름표가 붙어 있지 않은 이상 남에서 간 돈이 핵무기 프로그램에 보태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북의 예산규모나 무기판매를 포함한 수출대금량을 감안할 때 ‘핵 억지력 확보’의 국가목표를 일단 세웠다면 남에서 들어오는 돈이 없다고 핵개발을 못했을 리 없다.16 마찬가지로 한국이 ‘햇볕’ 아닌 ‘찬바람’ 정책을 취했더라면 북이 무너졌으리라는 주장은 남한의 실력을 턱없이 과장한 억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주장은 독일통일 이래 걸핏하면 북의 조기 붕괴를 예언해오다가 면목이 없어진 인사들의 책임전가용으로 동원되곤 한다.
포용정책의 추진자 및 지지자들이 북녘 주민의 인권상황에 무감각했다는 비판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이 경우도 초강대국의 봉쇄정책이 주민통제의 최대 명분으로 통하는 상황에서 긴장완화를 추구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수단 확보를 돕는 것 자체가 반인권적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 더하여 북의 인권개선을 촉구하는 공개적인 언동도 보여줘야 옳다는 주장이라면 이는 적절한 역할분담을 전제로 사안별로 대응할 문제이며, 종전의 포용정책이 그 점에서 부족했다는 비판도 수긍할 대목이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탈북자 문제도 일부 탈북자집단의 도발적 반북행위를 당국이 묵인하거나 음성적으로 지원하는 양상은 개탄해 마땅하지만,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탈북·입경 주민들에 대한 관심을 확대할 필요는 있으며 특히 통일지향적 시민운동은 그들의 경험과 능력을 시민참여형 통일의 자산으로 살릴 길을 좀더 적극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3) 통일정책으로서의 한계
아무튼 포용정책 1.0 자체를 부정하는 비판은 대부분 오해나 왜곡이지만 기존의 포용정책이 지닌 문제점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그런 비판을 활용할 소지는 충분하다. 예컨대 ‘고려연방제 수용’ 주장이 무지의 소치거나 생트집이라 해도, 우리 정부 스스로 6·15공동선언 제2항의 의의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 인식과 경륜을 갖고 포용정책을 추진했는지는 반성해볼 일이다. 물론 제2항의 일차적 의의는 통일방안이라는 ‘근본문제’에 대해 절묘한 절충적 표현을 찾아냄으로써 구체적인 교류협력과 상호신뢰구축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 어찌할지에 대해서는 ‘무책(無策)’에 흐른 바 없지 않았던 것이다.17
그로 인해 ‘퍼주기’ 논란도 한층 가열될 수밖에 없었다. 옛 서독이 동독에 훨씬 많은 퍼주기를 해서 결국 통일에 성공했다는 지적도, 독일식 흡수통일은 안하겠다는 것이 포용정책이고 보면 대북경제지원의 명분으로서는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흡수통일로 가는 건데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는 떳떳치 못한 태도로 기울거나 아니면 경협과 지원을 계속하다 보면 북도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리라는 낙관적 기대에 너무 많은 것을 걸게 된다.
물론 북이 지금보다는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노선으로 나가는 것은 불가피하고 이 과정에서 중국과 베트남의 경험이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베트남의 선례를 참고할 때 도리어 불길한 느낌을 주는 대목도 있다. 두 나라 모두 통일전쟁의 승자였고, 휴전선 너머 남한의 존재 같은 위협적 경쟁상대가 없는 정황에서 개혁·개방에 나섰던 것 아닌가. 이에 반해 북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북미관계가 정상화되며 외부의 경제지원이 증대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분단국가로서의 체제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18 그야말로 ‘퍼주는’ 것만 챙기면서 개혁은 최소화하려는 집권세력의 욕구를 제어하기가 힘들게 마련이다.
결국 6·15공동선언 제2항에 이미 제시된 남북연합이라는 해법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길뿐이다. 곧바로 통일국가로 가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대치상태를 지속하는 것도 아닌 국가연합의 결성만이 “‘통일을 지향하는 평화’를 관리하고 발전시켜나가는”19 과정에서 북측의 불안을 그나마 달래줄 수 있는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 처음 나왔고 ‘남북관계발전에 관한 법률’ 제3조 1항으로 법제화된 언어를 빌려 말한다면, “남한과 북한의 관계는 국가간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임이 맞지만 그 ‘특수관계’는 또한 ‘국가연합에 참여하는 특수한 국가간의 관계’를 겸하는 데까지 가야 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남측의 대북지원도 무작정 ‘퍼주기’가 아니라 남북연합을 준비하고 북의 변화를 확실하게 지원하는 사업으로서의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2007년의 2차 정상회담과 10·4선언을 통해 포용정책이 ‘1.5버전’으로 진화했다고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도, 국가연합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여러 조치에 대한 합의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정상간의 ‘수시로’ 만남을 비롯하여 고위급회담 수석대표가 통일부장관에서 총리로 격상되고 차관급이 맡던 경제회담은 부총리급으로 격상, 그밖에 수많은 정부간 접촉과 민간교류에 대한 적극적 조치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2.0버전’의 출범으로 보기에는 이명박정부 아래서의 급격한 동력상실을 떠나서도 그 현실인식 자체가 1.0대 버전들이 공유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4.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1) ‘냉전해소’를 넘어 ‘분단체제극복’으로
포용정책 1.0은 6·15공동선언 첫머리의 표현 그대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을 담았고 분단극복에 관한 김대중 대통령 개인의 오랜 경륜이 실림으로써 ‘통일정책을 겸하는 한반도적 포용정책’의 기본요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분단현실에 대한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에서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분단현실을 주로 ‘냉전체제’라는 개념으로 접근한 것이 그렇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 자리잡은 냉전체제가 청산대상인 점이야 더 말할 나위 없으나, 실제로 동서냉전체제가 그 주된 버팀목이었던 독일의 분단과 달리 한반도에서는 국토분할 초기부터 제3세계 특유의 대외적 역학관계와 내부적 갈등이 가세했던 것이며, 한국전쟁이라는 열전(熱戰)을 거쳐 분단이 더욱 굳어지고 분단체제라고도 일컬음직한 지구력과 자생력을 갖게 되었다. 베트남과 예멘, 독일이 모두 통일된 후까지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것도 우리 민족이 특별히 못났거나 분열주의적이어서가 아니라 한반도 특유의 분단체제가 형성된 탓이다.20
따라서 이 현실을 극복하는 데도 그에 걸맞은 복합적이고 정교한 대응이 필요하다. 단순한 냉전체제 해소나 (남한의 경우) 극우반공주의 청산을 넘어, 분단체제 기득권세력의 자기보존에 냉전 이데올로기와 함께 복무해온 지역주의 등 각종 패거리주의, 개발지상주의, 성차별주의, 획일주의 등의 작동구조를 종합적으로 해체해가는 변혁운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실정으로는 이러한 변혁이 혁명이나 전쟁으로 일거에 달성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오로지 남북의 재통합과정에 정교하게 연계된 사회개혁 작업이 누적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는 또한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을 전문에 명시한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정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당장의 통일보다 평화정착을 우선시한 햇볕정책의 기조는 올바른 것이었고, 햇볕정책 자체가 남한사회의 민주화를 통해 가능해졌다는 ‘복합적’ 성격을 이미 띠고 있기도 했다. 반면에 불완전한 민주화의 산물인 김대중정부는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이기도 했고 권위주의적 정당운영 등 구시대적 병폐를 스스로 떠안고 있었기에, 일관된 분단체제 극복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다. 물론 햇볕정책이 더 많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초기의 압도적인 국민지지가 상당부분 유실된 가장 큰 이유는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적대정책이 채택되고 클린턴 시절의 한미공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시민참여의 꾸준한 확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장기적 ‘분단체제극복’ 과정이라는 인식이 애초부터 미약했으며, 이 과정의 핵심이자 6·15공동선언의 가장 빛나는 성취에 해당하는 남북연합에 관해서 김대중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물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고 DJP연합이 깨진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꺼낼 처지도 아니었지만, 앞절에서 언급한 포용정책 1.0의 문제점들 다수가 남북연합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인식이 얼마나 충실했는지 의문이다.
2) 참여정부의 한계와 이명박정부하의 남북관계
노무현 대통령은 국내문제에서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그리고 분단체제의 기득권을 형성하는 온갖 특혜와 반칙을 청산하려는 강한 의욕을 품은 정치인이었고 평화통일에 이바지하려는 충정도 누구 못지않았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발전과 국내개혁의 밀접한 상호연관에 대한 통찰에서는 전임자보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인상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취임 초기의 대북송금 특검인데, 투명한 법치의 부분적 증대나 대야관계의 일시적 개선으로 얻는 것보다 남북관계의 악화에 따른 국내 기득권세력의 강화가 훨씬 큰 손실이 되리라는 계산을 못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분단체제의 작동방식에 둔감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남측 내부에서 의욕만 앞세운 개혁추진이 벽에 부딪힌 것이 역으로 남북관계발전의 동력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2차 정상회담이 집권 말기로 미뤄진 것이 참여정부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2005년의 6·15민족공동행사와 김정일 위원장의 남측특사 면담, 북측 당국대표단의 8·15행사 참여와 적극적인 화해 동작, 한국이 중요한 역할을 해서 만들어낸 뻬이징 9·19공동성명 등 일련의 성과를 좀더 살렸더라면 정상회담을 앞당기거나 적어도 10·4선언에 대한 국민지지를 더 확실히 다질 수 있었으리라 본다.
결과적으로는 포용정책 ‘1.5버전’에 착수하자마자 ‘비핵·개방·3000’이라는, 상대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일방적 ‘포용’ 제의를 내건 대통령후보가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사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보수파-특히 중도·실용을 표방하는 보수파-로의 정권교체는 ‘1.5’를 더욱 개선하여 ‘2.0버전’을 준비할 좋은 기회이다. 곧, 새 정부가 남북관계의 추가적 발전을 ‘선진화’의 핵심적 과제의 하나로 설정하여 포용정책의 지지기반을 중도세력과 건전한 보수세력으로까지 확대하고 민간기업의 대북경협 참여를 적극 유도하는 가운데, 이른바 진보성향의 시민단체들은 정부와의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시민참여형 통일’ 작업에 더욱 충실해질 호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일익에 해당하는 한국사회는 (나름의 눈부신 성취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수평적 정권교체로 민주화가 완성되고 선진국 대열에 확실히 진입하는 그런 ‘정상적인’ 사회가 못 된다.21 2007년 대선은 진정한 보수파의 집권도 중도·실용의 승리도 아니었다. 본질상 그것은 1987년의 군사독재 종식과 2000년의 포용정책 출범 이래 분단체제 속의 특권적 위치가 크게 위협받고 다분히 위축되었던 수구세력이 반격의 총공세를 벌인 마당이었다. 물론 이 공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여정부에 실망한 서민대중과 건전한 보수주의자 상당수가 호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구세력은 그런 호응을 얻어내기 위해 상식과 진실을 무시한 온갖 수법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승리 이후 저들의 국정운영은 민주화와 남북화해의 성과를 훼손하고 서민경제를 위협함은 물론 법치와 절제, 재정건전성 등 보수주의자의 기본적인 미덕마저 짓밟는 일이 흔하다.22
물론 대한민국은 이들이 집권했다고 해서 독재시대로 완전히 돌아가거나 6·15 이전의 살벌한 남북대결로 회귀하기에는 이미 너무나 ‘선진화’한 사회였다. 특히 남북관계는 비록 그간의 실적이 참담했지만 여타의 위기들보다 먼저 완화될 공산이 크다. 첫머리에 언급했듯이 남북정상회담이 머잖은 장래에 성사될 조짐이 보이는데, 다만 지금 상태로는 회담이 열리더라도 두 정상이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기보다는 한쪽은 경제적 실리를, 다른 한쪽은 주로 정치적 실리를 챙기는 머리싸움의 성격이 짙게 되지 싶다.
최악의 경우 정상회담을 하고 난 뒤에도 상호불신이 남아 남북관계는 ‘저강도 위기상황’이 가시지 않은 채 한반도문제에서 한국의 주도력이 더욱 미미해질 수 있다. 그렇더라도 포용정책 1.0 내지 1.1버전이 일단 복원되는 사태는 환영할 일이며, 1.5버전의 부분적 복원을 더함으로써 1.1보다는 진전된 1.2 또는 1.3 버전을 출범시킬 수도 있다. 반면에 국내정치에 괄목할 진전이 이룩되어 정부가 야당과 시민사회의 의제를 한층 존중하는 자세로 정상회담에 임하게 된다면-길게 볼 때 이를 위해 필자가 지난해 제안한 바 “남북화해와 통일문제를 정부의 일방통행과 여야정쟁의 영역에서 끌어내어 시민사회의 중도적 양식과 정치권 및 관료사회의 책임있는 역량이 결합하는 심의기구 내지 합의기구”23 같은 것도 필요하리라 보지만-1.5를 오히려 개선한 (가령) 1.7버전의 개발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2.0버전의 주된 내용은 분단체제극복을 향한 시민참여의 획기적 강화와 남북연합 건설이기 때문에, 현정부의 성향이나 인적자원으로 보아 임기중 그런 내용을 담은 포용정책의 시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명박정부 아래 값진 공부를 해낸 남쪽 국민과 시민사회의 또 한차례 분발에 의지해야 할 대목이다.
3) 시민참여형 통일과정과 ‘제3당사자’
국가연합만 해도 실감을 못 느끼는 사람이 많은 터에 시민참여형 통일과정, 그것도 남한의 민간사회가 ‘제3당사자’로 개입하는 통일과정을 말하면 지식인의 탁상공론이나 시민운동가의 이상주의로 치부될 위험이 크다. 하지만 서론에서 잠시 비쳤듯이 베트남과 예멘과 독일이 통일된 뒤에도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저들처럼 통일될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도 하나의 상식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남북의 정상들 스스로 2000년에 이미 그 상식을 공유하고 한반도는 국가연합(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서 통일로 간다는 점에 합의했다. 그리고 이렇게 합의한 순간, 당국자들의 의도가 무엇이건 민간사회가 베트남, 예멘 또는 독일에서와는 다른 수준으로 개입할 공간이 열린 것이다.
남북연합의 현실적 중요성에 대해 앞절에서 논한 바 있지만, 국가연합 건설은 시민참여형 통일과정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거듭 강조할 필요를 느낀다. 국가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두고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통일이기에 일반시민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가 하면, 주변국들은 물론 남북의 당국들도 현재로서는 국가연합 결성에 큰 의욕을 안 보이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적극 나설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다.
시민참여의 방법은 여러가지다. 어차피 북측은 현체제가 지속되는한 최고지도자가 (일정한 여건이 갖춰진 시점에서) 전략적 결단을 내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할 때, 남은 과제는 남북연합을 먼저 제안했고 국가연합의 결성이 나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남측 정부의 적극적인 자세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일차적으로는 남북연합 건설작업에 역행하는 정권을 견제하는 일이며, 나아가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을 수용하는 국정운영체제로 하루 속히 전환하는 일인 것이다. 또한 민간기업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가 남북화해와 교류에 직접 나서서 국가연합 건설의 기반을 만듦은 물론, 남북관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생활현장의 곳곳에서 남북의 평화적이고 시민참여적인 재통합에 걸맞은 사회개혁과 자기쇄신을 쌓아가야 한다. 물론 북측 당국을 향해서도 ‘제3당사자’다운 독자성을 갖고 비핵화와 친환경적 발전, 주민권익의 향상 등 남녘 시민운동 고유의 의제들을 이런저런 경로로 제기해야 한다.
분단체제의 극복이 통일지상주의적 통일론과 구별되는 지점이 바로 이런 시민참여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분단체제 극복작업의 일환으로 국제무대에서도 당국에 굳이 의존하지 않는 시민사회 고유의 연대작업과 외교활동이 요구되는데, 당국이 역주행하는 시기야말로 오히려 독자적인 행동반경을 확대할 호기라 할 수 있다.
4) 동북아 평화체제와 한반도 비핵화의 현실적 동력
이런 시민참여행위가 이상주의자의 헛된 몸짓으로 끝나지 않을 개연성은 국제정치의 큰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그 하나는 동북아지역의 평화체제에 대한 오랜 욕구에 부응한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합의문건이 한반도문제를 계기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2005년의 9·19공동성명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유럽에서 이미 1975년에 나온 헬싱키선언 수준에도 못 미치는 ‘낮은 단계의 신사협정’에 불과하지만,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필수적인 국제적 합의를 제공한 데 그치지 않고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 노력의 긴밀한 상호연관성을 인식하고 그 동시적 진행의 틀을 제공했다. 이로써 남북연합을 겨냥한 한국 시민사회의 활동은 곧바로 동북아의 지역협력과 평화를 증진하는 지역운동의 일부가 되며 동아시아 지역연대를 위한 운동이 한반도문제를 자신의 의제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다.24
더구나 한반도문제가 비핵화라는 당면과제에 집중됨으로써 남북연합을 위한 시민운동의 현실주의적 타당성이 오히려 더 확실해진다. 북이 완전한 비핵화에 동의하려면 이른바 체제보장에 대한 북측의 요구가 어느정도 충족되어야 할 터인데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수교 그리고 대규모 경제원조가 더해지더라도 남한의 존재 자체가 위협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앞에서 지적했다. 한반도의 재통합과정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관리할 국가연합이라는 장치가 마련되어갈 때 비로소 북측 정권으로서는 비핵화 결단을 내리고 자체개혁의 모험을 감행할-비록 완전히 안심되지는 않더라도-그나마의 여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현실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아직은 이 대목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현단계 시민참여형 통일과정의 핵심현안인 국가연합 건설작업과 북핵문제 해결의 현실주의적 인식 사이에 뜻밖의 친화성이 존재함을 불원간 확인할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5. 결론을 대신하여-민주개혁 전략의 일환으로서의 ‘포용정책 2.0’
미국의 부시 행정부 말기에 시작된 포용정책으로의 복귀가 이제 본궤도에 오른 느낌인데다 미국뿐 아니라 남측과도 대화하겠다는 북측의 전략적 결단도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남쪽 정부의 선택이지 싶다. 우리 정부 또한 종전의 대결적 자세로부터 이동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모두 반가운 변화들이지만, 시민사회의 역할을 획기적으로 늘려서 한반도에 분단체제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삼는 ‘포용정책 2.0’의 기준으로는 이명박정부에 의한 1.0 내지 1.5의 복원이 이룩된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 당장에 2010년부터라도 국정운영체계에 본질적 개선을 이루어 현정권으로 하여금 1.6 또는 1.7의 진전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견인하는 것이 일차적 과제이며, 민주화의 또 한차례 전진을 통해 국내에서는 말하자면 three-turnover test 곧 3차 정권교체의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이제 생명력이 소진되어 말기적 혼란에 빠진 ‘87년체제’를 드디어 넘어서는 일이 다음 목표인 것이다.
이렇게 보건대 한반도식 포용정책은 통일정책을 겸할뿐더러 헌법 전문에 ‘평화적 통일’과 함께 명시된 ‘조국의 민주개혁’ 전략의 일환으로 자리매겨질 때 비로소 그 뜻이 온전히 살아난다고 말할 수 있다. 1.0대에 머무는 어떤 더 높은 버전이 아니라 2.0으로 머리숫자를 달리하는 버전을 주장하는 취지가 그것이다. 이는 제대로 된 2.0버전이 가동될 때면 시민사회의 다양한 국지적 현안들이 분단체제극복이라는 큰 틀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상승효과를 발휘하는 새로운 상황을 예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미래를 위한 단련과 준비가 진행된다면 이명박정부 5년은 설령 포용정책에 많은 손상을 주었더라도 결코 ‘잃어버린 5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끝으로 한가지 덧붙인다면, 정부당국만이 아닌 민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통일과정이야말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전제한 평화적 통일이라는 헌법정신에 가장 부합한다는 것이다. 북측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따르겠다고 미리 선언하도록 다그치는 것은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으려니와 실제로 ‘자유민주적’인 방식도 아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국가연합의 내용과 시기가 자연스럽게 결정되고, 그 다음 단계가 ‘연방제’가 될지 첫 단계보다는 더 높은 연합이지만 여전히 연합제가 될지, 또 언제 어떻게 그것을 달성하고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등등을 민간사회가 최대한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당국이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유로운 민주주의 기본질서의 요체가 아니겠는가. 또 그런 경로를 택하는 것이야말로 북측 민간사회의 참여를 넓혀가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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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집 『전환기에 선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새로운 모색』, 화해상생마당 2009.9.2. 당시에 나는 온전한 발제문을 준비하지 못하고 요지문만 제출한 상태에서 구두발표를 했다.↩
- 자료집 『2010년 한반도 정세전망과 시민사회의 역할』, 한반도평화포럼 2010.1.12.↩
- 일본어로는 아예 ‘포옹정책(抱擁政策)’으로 옮기기도 하는데, 물론 강자가 약자를 일방적으로 배척하다가 교섭상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일종의 ‘껴안기’에 해당할 수는 있다↩
- 예컨대 위의 화해상생마당 심포지엄에서 ‘북한동포 구출’을 명분으로 일종의 흡수통일론을 펼친 박세일(朴世逸) 교수의 발표 제목은 「한반도 위기의 본질과 선진화 포용 통일론」이었다.↩
- 이런 오해와 남용을 피하려면 ‘상용(相容)정책’ 또는 ‘상종(相從)정책’으로 번역을 바꾸거나 차라리 ‘대화정책’‘교섭정책’으로 의역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편의상 귀에 익은 ‘포용정책’이란 단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 나 자신 이런 이야기를 여러 기회에 했고 글로도 발표해왔는데, 최근의 저서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창비 2009)에서는 특히 「서장: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 제1장 「‘5월 광주’에서 시민참여형 통일로」, 제4장 「북의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의 ‘제3당사자’로서 남쪽 민간사회의 역할」 및 제8장 「2007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민참여형 통일」을 참조해주었으면 한다.↩
- 한반도평화포럼 토론회에서는 분단국 간의 민간교류가 활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독일통일이 ‘시민참여형’에 가깝지 않았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① 분단과정이 훨씬 폭력적이었는데다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러서 민간교류가 거의 단절된 남북한과 그러한 원천적 제약이 없었던 동서독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② 양독간 민간교류가 양적으로 막대하기는 했지만 ‘통일과정’이라는 목적의식을 담은 교류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 결과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의 통일과정 자체는 거의 전적으로 정부가 주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시민참여형 통일’에 현저히 미달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 그것을 1단계 통일로 부를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제3장 108면 참조.↩
- 2010년 1월 28일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 녹화에 관한 국내 신문들의 1월 29일자 보도 참조. “연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대통령의 실제 발언이 청와대 발표에서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로 변조되어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데, 국정 최고책임자의 대외발언으로서는 후자의 표현이 더 적절한 면도 없지 않다.↩
- 분단체제의 시대구분에 대한 내 나름의 시도로 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제4장 「분단체제와 ‘참여정부’」 제2절 ‘분단시대의 진행에 대한 개관’ 참조.↩
- 1.0이 실행되고 얼마 안되어 미국에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북미관계가 크게 악화되고 남북관계마저 위기에 처했을 때 2002년 4월 임동원 대통령특사의 방북으로 남북관계가 ‘원상회복’되고 동해선과 경의선의 철도 및 도로 연결 등 새로운 사업이 시작된 것을 포용정책 ‘1.1버전 출시’로 간주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북에서도 새로운 국면을 열었음은 2002년 7월 1일의 ‘경제관리개선조치’ 발표를 봐도 실감된다.↩
- 박세일 「한반도 위기의 본질과 선진화 포용 통일론」, 자료집 『전환기에 선 한반도, 통일과 평화의 새로운 모색』, 24~25면; 밑줄은 원문.↩
- 정세현 토론문, 위의 자료집 41~43면.↩
- 임동원 회고록 『피스메이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중앙북스 2008, 99~106면 ‘연합제 vs. 연방제’.↩
-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따르면 공화주의는 전제정치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군주제라도 입헌군주정치는 공화주의적일 수 있는 데 반해, 민주제가 다수의 전제정치가 되면 반공화주의적이 된다. 대한민국 헌법의 경우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에서 ‘공화국’은 군주국이 아니라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지만,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및 1조 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과 결합함으로써 대한민국이 민주주의국가이자 칸트적 의미의 공화주의국가임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국가는 또한 헌법 제119조의 1항과 2항에 각기 명시된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경제의 민주화를 위〔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 사이에 균형을 잡는 민주공화국이며, 경제분야에서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로 전면적인 자유주의를 채택한 것이 아니다.↩
- 핵과 미사일 개발비용이 한국정부의 ‘퍼주기’ 탓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간의 대북지원 실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정세현 「北경제구조 모르고 ‘핵·미사일 개발 비용’ 논하지 마라」, 『프레시안』 2009.7.7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707100127) 참조.↩
- 졸고 「한반도에 ‘일류사회’를 만들기 위해」(2002),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89면 참조.↩
- 북의 중국식 또는 베트남식 개혁·개방 전망에 대해 나는 2007년의 정상회담 직후에도 “이 점에서만은 보수측 논객들과 공감하는” 편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북미수교가 이루어지고 남측하고 교류가 활발해진다 하더라도 남한이라는 상대가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남한의 존재 자체가 엄청난 위협인데 그 앞에서 중국식 내지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할 수 있겠는가, (…)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개혁·개방과는 매우 다른 길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졸고 「2007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민참여형 통일」,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201면) 물론 나는 남북연합이라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수측 논객들과 기본 논지를 달리한다.↩
- 임동원 『피스메이커』 742면.↩
- 분단체제의 극복이 단순한 ‘분단극복〓통일’과 구별된다는 것은 나로서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 담론이 낯선 분들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 실린 「통일작업과 개혁작업」 등 졸고를 참조해주기 바란다.↩
- ‘2회의 정권교체라는 시험’(two-turnover test)을 통과할 때 민주화가 완성된다는 헌팅턴(Samuel P. Huntington, The Third Wave: Democratization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1991)의 논지 자체가 반(半) 권위주의로의 복귀를 미화하는 혐의가 없지 않은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승리를 마치 한국 민주화의 당연한 귀결인 듯 예상하는 논의가 이른바 진보적 학자들 사이에도 적지 않았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를 ‘3대위기론’으로 온전히 해명하기 힘들다. “민주주의의 위기 이전에 상식과 기본적인 염치지심(廉恥之心)의 위기, 나아가 ‘법치’니 ‘중도’니 ‘녹색’이니 하며 한국어의 소통가치를 위협하는 언어생활의 위기가 진행되고 있는 형국”(졸고 「지난 백년을 되새기며 새 판을 짜는 2010년으로」, 창비주간논평 2009.12.30, http://magazine.changbi.com/411)이기 때문이다.↩
- 「비상시국 타개를 위한 국민통합의 길」,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260면.↩
- 이는 “한반도 복합국가 구상은 동아시아적 시각에 따라 재조정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동아시아적 시각이란 현존하고 있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동아시아적 질서의 위계적 구조를 인정하고 그 다양한 층위들의 복합 구조에 근거해 한반도 복합국가 구상을 전개하는 일이 될 것이다”(류준필 「분단체제론과 동아시아론」, 『아세아연구』 제52권 4호, 2009, 69면)라는 타당하고 막중한 주문에 대해 극히 부분적인 해답이 될 뿐이다. “동아시아적 질서의 위계적 구조” 때문에 유럽연합처럼 국민국가가 기본단위로 모인 동아시아 정치공동체나 안보공동체는-또한 느슨한 협력관계를 넘어서는 경제공동체라 해도-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며, 따라서 군사안보분야에서는 미국과 러시아까지 끌어들인 이해당사국들의 신사협정체제(‘헬싱키 모델’), 경제분야에서는 국가 차원의 느슨한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국가가 아닌) 경제권역들 사이의 유대강화 등 다층위적인 접근이 필요할 듯하다. 이 문제는 다른 기회에 더 연마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