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월호 이후 한국사회 무엇을 바꿀까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저서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 『연대와 열광』 『시대유감』 『좌충우돌』 등과 편서 『87년체제론』 등이 있음. jykim@hs.ac.kr
1. ‘사회를 말하는 사회’
‘◯◯사회’라는 제목을 단 책들이 여럿 출간되고 있다. 그렇다보니 『사회를 말하는 사회』(정수복 외, 북바이북 2014)라는 책마저 출간되었다. 이 책은 ‘◯◯사회’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출간된 책들에 대한 서평모음집인데, 들춰보면 『허기사회』(주창윤, 글항아리 2013), 『분노사회』(정지우, 이경 2014), 『과로 사회』(김영선, 이매진 2013), 『잉여사회』(최태섭, 웅진지식하우스 2013), 『주거 신분사회』(최민섭 외, 창비 2010), 『절벽사회』(고재학, 21세기북스 2013) 등, 그런 류의 책이 정말 많이 출간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에서 다뤄지는 책이 국내 저자의 것만은 아니다. 이미 고전이 되다시피 한 울리히 벡(Ulrich Beck)의 『위험사회』(새물결 1997)도 있고, 재독 철학자 한병철(韓炳哲)의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나 이웃 일본에서 회자된 『격차사회』(다치바나키 도시아키, 세움과비움 2013) 같은 책도 있다.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이 책에 소개된 『낭비 사회를 넘어서』(세르주 라투슈, 민음사 2014)의 원제는 ‘파괴를 위하여’이고, 『자기 절제 사회』(대니얼 액스트, 민음사 2013)의 원제는 ‘유혹’이며, 『부품사회』(피터 카펠리, 레인메이커 2013)는 ‘왜 선량한 사람들이 직장을 구할 수 없는가’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의 출판인들이 번역서의 경우 원제의 의도를 ‘◯◯사회’라는 제목을 달아서 부각시키면 더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의 마지막 장을 쓴 정수복(鄭壽福)은 출판인들의 상업적 직관 뒤에 있는 사회적 욕구를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들은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이제 벽에 부딪친 사람들은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258면) 적실한 지적이다.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그래도 일정한 안정성을 가질 때 던질 수 있다. 반면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일이 일상화되면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조망 불가능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회이론과 출판계의 간결하고 응집적인 답변형태가 바로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어느 결에 ‘◯◯사회’는 너무 많아졌고, 벌써 식상한 분위기도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를 ‘사회를 말하는 사회’로 이끈 내적 욕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세월호참사를 비롯해 육군 22사단의 총기난사사건이나 28사단의 윤일병 살해사건 등은 그런 욕구를 더 강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정부에 이은 박근혜정부 1년 반 동안 우리가 보아온 것은 민주화를 통해서 이룩한 민주적 법치국가가 ‘민주적’은 고사하고 ‘법치’국가 이하로까지 퇴행한 것이었다. 세월호참사는, 민주적 법치국가로부터의 퇴행이 기초적 안전과 공공재를 공급하던 행정국가의 (어쩌면 더 심각한) 해체를 동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은 불안을 심화하고 그만큼 사회적 조망에 대한 욕구를 강화한다.
이하에서는 ‘◯◯사회’ 계열에 속하는 저술 가운데 몇몇을 좀더 상세히 살필 것이다. 서동진(徐東振)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 김홍중(金洪中)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 엄기호(嚴奇鎬)의 『단속사회』(창비 2014), 그리고 김찬호(金贊鎬)의 『모멸감』(문학과지성사 2014)이 그 대상이다. 이 네권을 선별한 이유는 그것이 여느 저술보다 사회적 조망에 대한 욕구에 진지하게 부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여타 시도들을 향도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론 일반이 그렇지만 상기 저술들의 공통된 의도 또한 ‘사회적 초상화 그리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은 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다른 면이 있다. 초상화는 어떤 인물을 상기하는 힘이 있어야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한 배타적인 묘사는 아니다. 복수의 초상화가 가능하며, 개별 초상화는 그것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새로운 대상 이해를 견인한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그런 작업을 식상해하기보다 더 다양하게 시도해봐야 할 때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도 비평적 작업이 필요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초상화 그리기는 불가피하게 자화상 그리기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에는 자기에 대한 객관화된 상과 더불어 객관화를 수행하는 주체의 터치도 함께 표현된다. 자화상은 타자가 그린 초상화처럼 이해(理解)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와의 화해와 자기수련 그리고 실천의 방향 조정까지 함축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자화상인 한에서 비평적 검토를 수반하는 집합적인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하에서는 앞서 언급한 저술들이 인상적인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어떤 맹목과 오류 혹은 과잉을 보이는지 살필 것이다.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포괄적이며 적합한 시간지평을 가진 이론이 요청된다. 그 이론적 전망을 분단체제론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 경우 분단체제론 편에서도 새로운 개념과 논의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필자는 우선 네 저술의 문제점을 세 측면에서 살필 것이다(2절). 다음으로 그런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서 두개의 예비적 개념을 제시할 것이다(3절). 이어서 그런 개념에 입각해 네 저술에서 드러나는 단편성을 극복할 역량이 분단체제론 안에 있음을 보일 것이다(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나은 사회적 자화상에 대한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잠재력이 분단체제론에 내포되어 있음을 간략히 논할 것이다(5절).
2. 사회적 자화상들에 대한 세 비판
서동진과 김홍중의 저술은 우리 사회에 대한 빼어난 분석으로 널리 인정받았고 후속 연구자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고 있다. ‘자기계발적 주체’나 ‘속물화’ 같은 개념을 여러 분야의 글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널리 인용되고 있진 않지만, 엄기호의 ‘단속’이나 김찬호의 ‘모멸감’도 그럴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정치구조나 경제구조 면에서 우리 사회를 조명하기보다 개인들의 자기관계와 타자관계의 구조와 특징 또는 행위의 내면적 동기에 주목한다. 서동진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분석하며, 김홍중은 역사철학적으로 경사된 속물 개념을 통해 “마음의 체제”를 분석하고자 한다. 김찬호는 모멸의 경험을 우리 사회성원이 느끼는 중심 고통으로 조명하고자 하며, 엄기호는 ‘단속’이라는 동음이의어(斷續/團束)를 통해 “동일성에 대한 과잉접속”과 “타자성에 대한 과잉단속”이라는 이중적 양상을 해명한다. 이런 식의 논의는 사회과학적 분석의 장을 확장한 것이며, 그만큼 독자의 경험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부면을 넓혔지만, (1)인과분석의 면에서, (2)우리 사회의 전체적 양상을 서술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을 서로 대조하기만 해도 드러나는 단편성의 면에서, (3)그들이 그리고자 한 사회적 자화상의 효과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1) 인과관계는 주어져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경우, 인과관계는 거대한 연기(緣起)의 바다에 빠질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거나 특정 사태가 존속하는 데는 무수히 많은 원인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독립적으로 작용하기보다 서로 뒤얽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있는 분석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인과적 적합성과 비중을 따지게 된다. 이 ‘따진다’ 함은, 인과관계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론에 의해 규율되는 인과귀속(attribution) 작업의 결과임을 말해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거론된 저술들을 살펴보자. 이들 가운데 가장 긴 인과적 시간지평을 설정하는 것은 『모멸감』이다. 김찬호는 “오만과 모멸의 구조”가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신분의식, 권위주의, 집단주의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한다. “신분제의 붕괴, 신분의식의 지속”(2장 3절) 또는 “공동체의 붕괴, 집단의식의 지속”(2장 5절) 같은 소제목에서 보듯이 서로를 모욕하고 그로 인해 모멸감을 느끼는 우리의 문화적 풍습이 근대화 과정에서 발생한 문화지체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된다.
현재를 이렇게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문화로부터 설명하는 것은 익숙한 방식이다. 하지만 문화적 요인이 사회적 조건의 소멸 이후에도 지속하는 현상은 다른 현상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 자체가 설명되어야 할 것에 속하며, 그런 설명을 위해서는 이론에 기초한 경험적 조사와 인과귀속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전통’은 설명 부담을 전가하기 위해서 소환될 뿐 실제로 설명력을 갖지 못한다.
한편 『모멸감』 외의 세 저술은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 즉 자기계발적 주체의 등장, 속물화, 단속사회의 형성을 신자유주의와 관련짓는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끌어들이는 것은 꽤 설득력있는 인과귀속 전략이다. 국제적인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장점도 있다. 더구나 한국사회는 국제분업에 다른 어떤 나라보다 깊게 개입해 있는 무역국가이며, 그만큼 국제적 거버넌스와 정책 레짐(regime)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일종의 지적 알리바이가 될 위험이 있다. 비근한 예로 자살자가 우울증을 앓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가 마치 자살의 원인을 알았다는 느낌을 갖는 것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한, 자살은 여전히 설명된 것이 아니다. ‘우울증’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는 무엇인가가 이미 설명된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단어가 되어버린 측면이 크다.
신자유주의에 설명 부담을 떠넘기지 않고 그것을 통해 엄밀한 설명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마음의 체제에서 혹은 자기관계의 수준은 물론이고 타자관계에 이르기까지, 왜 신자유주의화가 어느 면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발원지인 서구보다 더 강력하고 파괴적으로 관철되었고 어떤 면에선 현저히 덜 작동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물고기가 육상생활에 적응한 과정에 대한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Stephen J. Gould)의 논의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물고기는 진화과정에서 생존조건상 뭍으로 올라와야 했을 때 중력을 견디며 육상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물고기에게 이미 중력을 견딜 만한 단단한 등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상만큼의 중력 부담이 없는 수중에서 물고기가 단단한 등뼈를 발전시킨 것은 육상생활을 예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고기의 등뼈는 바닷속의 나트륨과 칼슘 농도의 불균질성을 극복하기 위해 체내에 발전시킨 칼슘 저장소였다.1)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자유주의라는 육지에 도달했을 때, 마음의 체제에서의 변동, 자기계발적 주체의 형성, 혹은 단속하는 자기/타자관계의 수립을 가능하게 한 물고기의 등뼈는 무엇이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뒤에 보겠듯이 그것은 분단체제의 에토스였다고 할 수 있다.
(2) 우리가 다루는 네 저술은 직관에 호소하고 임의적으로 수집된 사례에 의존하는 편이다. 이런 방법론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례의 적합성이 높기 때문에 현실 조명력은 상당하다. 그렇지만 이들을 함께 읽으면 불가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한 저술의 설득력있는 주장이 다른 저술의 주장과 양립 가능한가? 각 저술이 나름의 방식으로 특장있게 우리 현실을 포착하는 면이 있음에도 각각은 우리 사회의 초상화로서 다소 편협하거나 또는 특정 부분을 과장한 캐리커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아닐까?
예컨대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기계발적 주체는 어떤 의미에서 속물적인가? 자기계발은 성공이라는 세속적 가치와 매개될 때 (한병철이 지적하듯이)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피로한 상태로 빠져들며 과잉긍정성의 무게에 짓눌리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김홍중에 의하면, 그것은 속물적인 자기 이중화와 성찰 자체의 도구화를 경유해 자기상실로까지 나아가게 되는데, 왜 그런가? 김홍중이 말하는 속물적인 자기관계가 타자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김찬호의 논의와 어떤 상응성을 가지는가? 모멸감은 수치심과 연결되는데, 속물이란 바로 그 수치와 자신을 절연하는 ‘능력’ 없이는 유지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기관계가 아니라 타자관계로부터 논의를 전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또한 김찬호의 논의를 엄기호의 저술과 대조하며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동일성에 과잉접속하고 타자성을 차단하는데, 타자에 대한 무시와 모욕은 과잉접속된 동일성에서 연원하는가? 아니면 타자성의 차단 실패로 인한 것인가?
정리해보면 이렇다. 우리 사회성원의 자기관계를 초점에 두는 서동진과 김홍중의 논의는 서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우리 사회성원의 타자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엄기호와 김찬호는 어떤 연관을 가지는가? 그리고 이렇게 논의되는 자기관계는 타자관계와 어떻게 연계되는 것인가?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이 저술들의 상대적 통찰을 융합하려면 더 폭넓은 개념적 틀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3) 서동진 김홍중 엄기호 그리고 김찬호가 그려내는 우리의 자화상은 어둡다. 우리는 모두 자기계발에 여념이 없으며, 자유의 행사가 예속으로 귀결되는 역설에 빠져 있다. 우리는 속물이 되었으며, 타자성과의 대면을 기피하는 자기단속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타자를 비하하고 조롱하고 차별하고 무시하고 침해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 타자로부터 그런 대우를 받으며, 그 결과 모멸감에 빠져 있다.
우리의 모습에 이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우리 사회를 총괄적으로 규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특정 사회집단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며, 부유층이 그렇다거나 빈곤층이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혹은 남성 또는 여성이 그렇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우리 모두가, 적어도 우리 대부분이 상당정도 그렇다는 것이다. 세월호참사 같은 사건을 생각하면 이들의 어두운 묘사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건 때문에 이들의 총괄적 규정에 대해 되물어볼 필요도 있다. 그들이 옳다면, 세월호참사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이들은 누구이며, 그 분노와 슬픔의 출처는 무엇인가?
이들이 그린 자화상이 우리 자신에게 공정한가 하는 질문에 연결되는 또 하나의 질문은 자화상의 기능 문제이다. 어두운 자기묘사는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혐오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도 후자로 흐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사회적 각성을 명시적으로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서동진은 자기계발의 의지가 아닌 자유의 의지를, 김홍중은 스노비즘의 내부에 균열을 내는 윤리적 기획을, 김찬호는 존엄한 삶을 위한 태도의 고무를, 그리고 엄기호는 타자에 대한 경청을 권고한다. 그러나 이런 각성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의 작업, 예컨대 무엇이 사회적으로 초점을 가진 과제인지, 어떤 실천적·제도적 비전이 존재하는지 밝히려는 구체적 작업에 대한 시사가 없다면, 그런 사회적 자화상은 빈곤한 것이며 애초에 의도한 기능을 충족할 수 없다.
3. 분단체제의 에토스와 그것의 양가성
앞서 지적했듯이 인과관계는 인과귀속 작업에 의해서 확립된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주관성의 위기를 전통이나 신자유주의에 귀속시키는 것에 나름의 타당성이 있지만, 한쪽은 너무 넓게 설정된 인과귀속이 분석 초점을 약화시키고, 다른 쪽은 너무 좁게 설정된 인과귀속으로 인해 사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지금의 주관적 위기와 선호체계의 왜곡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좀더 폭넓은 개념틀, 그리고 더 적합성있게 설정된 시간지평이 필요하다. 분단체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런 요구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시야의 확장을 가져오긴 해도 주관성과 선호체계에 대한 분석능력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분단의 성립 및 재생산 과정은 정치·군사·외교 영역뿐 아니라 일상생활과 주관성의 형성 자체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분단체제에 주목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틀과 개념을 더 개발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1)현재주의(presentism)와 (2)연대 없는 평등주의 개념을 통해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고자 한다.2)
(1) 분단체제의 형성과 재생산 과정이 사람들에게 체험의 수준에서, 그리고 그것에 의해 조건 지어진 인지도식과 행동양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적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기초적인 이론적 가설을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다. 우선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분단체제가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양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시간적인 지평 속에서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핵심적 개념은 경험과 기대다. 우리가 살아가는 유일한 시간은 현재다. 과거는 이 현재 안에 경험으로서 현존하며, 미래는 기대의 형태로 현존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는 경험과 기대가 교차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경험과 기대가 정연하게 연계되면, 미래는 경험으로부터 쉽게 추론될 수 있고, 그만큼 미래는 경이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둘 사이의 연속성이 깨진다면, 미래는 경이와 더불어 불안으로 채워지게 된다. 코젤렉(R. Koselleck)에 의하면, 전통사회에서는 경험과 기대 사이에 연속성이 유지되는 데 비해 근대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그 연속성이 깨진다.3) 그러나 연속성이 깨진다고 해서 양자가 완전히 단절되는 것은 아니며, 양자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는 역사적으로 가변적이고 사회적으로 다양할 것이다. 이 간극의 스펙트럼을 전제할 때, 우리 사회는 간극이 상당히 넓은 쪽일 것이다. 이렇게 경험과 기대의 간극을 넓힌 것은 일차적으로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이다. 특히 내전이기도 했던 한국전쟁은 가까운 친족관계조차 위험한 것으로 만들었고, 약간의 눈치 빠름과 우둔함이 생사를 가르는 요인이 되게 하며, 우연의 잔인함이 합리성을 붕괴시키고 모든 종류의 규범적 기대를 위협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험 속에서는 현재가 과거의 무게와 미래에 대한 기획을 밀쳐내면서 압도적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런 시간감각을 ‘현재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경험과 기대의 결속이 풀릴 때, 현재는 양자 사이의 긴장이 유지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이 긴장을 유지하며 현실에 대한 충실성을 견지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한복판을 부여잡을 수도 있다. 그럴 때 현재주의는 놀라운 사회적 신축성의 원천이 된다. 경험에 속박되지 않고 기대 좌절을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현재의 급진적 가능성에 자신을 걸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성원이 지난 수십년간의 격렬한 사회변동을 견딜 뿐 아니라 주도할 수 있었던 에토스는 이런 현재주의의 긍정적 잠재력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런 신축성이 어떤 댓가를 요구할지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경험에 의해 축적된 것들이 유실되고 미래의 ‘합리적’ 기획이 어려워질 것이다. 합리성은 미래에 대한 계획과 인내심, 장기적 이익, 우회되거나 지연된 보상과 관련된다. 현재주의는 합리성의 이런 속성과 대척점에 서며, 그렇기 때문에 합리성 전반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라는 우리 속담은 아마도 현재주의의 부정적 잠재력을 잘 증언하는 말일 것이다. 분단체제의 수립과정은 이런 현재주의의 양가적 시간경험을 사회성원의 체험 속에 아로새겼다.4)
(2) 분단체제가 시간적인 지평에서 현재주의를 고착화한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어떤 에토스를 유발하는 것일까? 식민지와 전쟁을 경유한 한반도의 근현대사는 뿌리뽑힘과 고향상실을 일반화하는 과정이었다. 분단체제의 수립과 더불어 재정착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사회적 해체는 강력한 것이었으며, 그 효과는 두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다.
하나는 사회적 연대의 심각한 해체다. 식민지 총독부도 그랬지만, 해방과 더불어 나라 만들기에 나섰던 한반도 주민이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 경험한 것은 억압적이며 전쟁동원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가였다. 이미 지적했듯이 내전이었던 한국전쟁은 가족 내부로까지 침투하여 연대의 자원을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연대의 해체로 인해 아주 좁은 범위의 혈연집단을 제외하면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공동체가 소멸했다. 정전체제와 더불어 우리 사회에 남은 것은 위험하고 인색한 국가, 그리고 험난한 세계에 내던져진 가족뿐이었다.
다른 하나는 평등주의이다. 식민지와 전쟁을 경유하는 사회적 해체의 과정은 사회적 위계의 파괴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화로 사대부집단은 존재기반을 잃고 사라졌으며, 식민지시기 상층계급은 친일집단으로서 정당성을 상실했고, 농지개혁으로 인해 계급으로서의 지주 또한 거의 소멸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물질적 자원의 파괴와 이주를 야기함으로써 모든 사회성원을 뒤섞고 재정렬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 이후 남한사회에서는 모두 위계 없는 평등한 출발선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계층적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전쟁 후에도 사회성원이 가진 물질적·상징적 자원에는 차이가 존재했으며, 그것이 향후 사회변동 과정에서 차이가 확대되는 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사회심리적인 수준에서 사회적 위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우리는 화전민이다”라는 이어령(李御寧)의 전후 발언은 이런 파괴적 평준화를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사회적 연대의 해체와 파괴적 평준화의 결과로 주어진 것은 연대 없는 평등주의였다.
이런 연대 없는 평등주의도 현재주의와 마찬가지로 양가성을 띠는데, 그 양가성이 연대 없음의 부정성과 평등주의의 긍정성의 단순한 결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연대 없음조차 양가적인 면을 갖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연대의 약화는 인간에 대한 사물화된 태도, 협동능력의 후퇴 같은 부정적 결과를 낳지만, 동시에 온갖 전통과 봉건적 유산 또한 함께 쓸어내는 효과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가치있는 것들이 파괴되었겠지만, 좀처럼 없애기 어려운 부정적인 것들 또한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등주의 또한 인정투쟁을 강화하고 그로 인해 시기와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반면 동료 중 나은 자가 되려는 경쟁을 부추긴다. 너무 경쟁이 격렬해서 그것에 대해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지만, 더 나은 자가 되려는 인정투쟁에 자기고양의 계기가 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열정은 산업화를 향한 집합적 에너지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또한 평등주의는 동등한 시민적 권리에 대한 요구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억제하기 때문에 민주화의 내적 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선상에서 현재주의와 연대 없는 평등주의가 함께 작동할 때 어떤 사회적 결과가 생겨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먹튀’ 현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물론이고 평범한 알을 낳는 닭의 배마저 가르는 이 근시안적이고 약탈적 태도는 지금 마주한 타자와의 유대감은커녕 그를 다시 만날 일조차 없다는 생각에서 연원한다. 이것은 현재주의와 연대 없는 평등주의의 결합이 심각한 아노미를 유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양자의 결합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양자가 함께 작동하는 사회는 놀라운 신축성과 임기응변이 강렬한 욕망과 결합하여 부글거리는 열정적 사회,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을 창출하는 역동적 사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5)
4. 사회적 자화상의 재구성
이제 분단체제론의 관점에서 앞서 논의된 저술들 사이에 잠복해 있는 내적 연계성을 밝혀보자. 이런 내적 연계의 해명은 이들이 그린 사회적 자화상이 파편적이고 단편적이었음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종합하는 유력한 이론적 전망이 분단체제론에 있음 또한 보여줄 것이다. 논의는 사회성원의 타자관계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관계의 모형을 타자관계, 즉 사회적 삶의 패턴으로부터 얻기 때문이다.
(1) 김찬호의 『모멸감』부터 조명해보자. 앞서 지적했듯이 평등주의는 동료 중에 나은 자가 되려는 경쟁을 강화하는데, 이 경쟁을 적정수준으로 제어할 연대감이 없을 경우 사회적 인정은 어려운 과제가 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인정투쟁이 격렬해진다. 이 투쟁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는 존중받을 만한 업적이 사회적으로 합의된 표준으로 부상해야 한다. 이 표준은 이의제기 없이 통용될 만한 것이어야 하는데, 인정투쟁이 격렬할수록 엄격하고 비교 가능성이 높은 것이 표준으로 선택된다. 그렇게 돈과 권력과 학벌 등이 표준으로 부상했다. 이에 비해 명예나 직업적 가치 등은 충분한 일반성을 획득하지 못했다.
표준의 형성은 존중받을 길을 열지만 동시에 무시의 길도 연다. 표준은 이미 존중된 자리를 안배한다. 이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오만해지고, 오만해진 자는 타자를 무시한다. 하지만 평등주의는 존중하기 싫어하지만 무시당하기도 싫어하는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 존중하지 않으며, 쉽게 굴복하지도 않는다. 그 결과 김찬호가 존중과 무시라는 다소 평범한 단어보다 모멸감이라는 강렬한 단어를 선택할 만큼 인정투쟁은 열렬한 것이 된다. 그런 인정투쟁의 매트릭스인 연대 없는 평등주의로 돌아가보면, 우리가 겪는 고통의 상당부분은 파괴적인 근대사와 분단체제의 에토스에 우리가 여전히 붙박여 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2) 사회적 인정표준 형성이 가능해지면, 우리는 이미 인정되었다고 믿어지는 자리에 도달하기 위한 지위경쟁적 평등주의로 나아간다. 어떤 자리 혹은 지표가 그런 것인지는 끊임없이 변동했다. 학력이나 학벌과 관련해서 본다면, 70년대에는 명문고 입학이 그런 것이었을 테고, 80년대에는 대체로 명문대였을 것이다. 90년대 중반부터는 특목고가 그 자리에 새로 가세했을 것이다. 재산의 영역에서도 가시성이 중요했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아파트 열풍에는 인정표준에 대한 집착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파트는 사회적 비교를 가장 쉽게 해주는 주택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상황에서는 인정표준을 획득하기 위해 매우 금욕적인 자기관리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기계발적 주체는 신자유주의 이후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만일 경쟁이 점점 더 첨예해지고 경쟁을 위한 투자기간이 길어지는 것이 불가피해지면, 자기관리는 총체화 경향을 가질 것이다. 그는 자기계발을 위해 시간 전체, 사회관계 전부, 감정 전반을 관리해야 하며, 자신의 육체 또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과정을 투입과 산출 관계의 측면에서 면밀하게 검사해야 한다. 이 경우 모든 사회적 행위를 자본 투자와 수익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신자유주의적 개념체계는 금욕적인 행위 주체의 자기해석을 지원하고 정당화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총체적으로 관철될지는 담론이 아니라 사회적 경쟁강도에 의해 결정된다.6)
(3) 그렇다면 그런 과정이 왜 속물성을 유발하는지 보자. 연대 없는 평등주의에서 생겨나는 격렬한 인정투쟁 속에서 존중을 얻는 확실한 길은 이미 지적했듯이 인정표준의 획득이다. 하지만 인정표준을 획득한 이는 그렇지 못한 이들의 인정에 만족하기 어렵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동류 위로 올라서야 하지만, 그렇게 된 순간 타자는 더이상 나를 인정할 동류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인정표준은 그것을 획득한 자의 내적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희생으로 경험되면 주체는 보상을 바라는 심리를 갖게 되며, 그만큼 인정표준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 경우 인정표준은 주체의 업적이 아니라 주체를 예속시키는 힘이 된다. 이렇게 인정표준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것에 예속된 자에게서 우리는 허약하고 텅 빈 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7)
인정표준을 얻지 못한 사람 또한 결코 쉽게 승복하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니야” 같은 말을 흔히 듣는다. 하지만 이런 허세가 흔하다는 것은 ‘제 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못함’이 거의 보편적 경험임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8) 다른 한편 승복하지 않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때로 시기심의 징후로 보일 수 있다. 흔히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옹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정하는 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종류의 가짜 인정도 놀라울 정도로 잘 알아챈다.9) 인정표준은 이렇게 그것을 획득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모두를 내적 불안정성 속에 가두며,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속물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4) 엄기호는 『단속사회』를 통해서 “우리 사회는 사회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왜 그랬는지 잘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분단체제에 착목하면, ‘단속사회’의 계보를 더듬어볼 수 있다.
정전협정 이후 남한에서 의미있는 사회조직은 생존의 중심토대였던 가족과, 전쟁을 통해 비대해진 국가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이에 있어야 할 넓은 의미의 시민사회 영역은 파괴되거나 비워졌다. 이후 우리 사회의 발전경로를 간략히 정리해보면, 우선 국가는 전쟁국가로부터 행정국가로 확장되고 발전했다. 하지만 행정국가가 복지국가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느슨한 친족 범위를 포괄하며 개인을 보호하던 가족은 근대화의 진행과 더불어 친족을 떨궈내면서 점차 애정적 핵가족으로 축소되었고 최근에는 출산력 저하로 더욱 규모가 작아졌다.10) 더불어 가족의 평균적 복지능력도 급격히 약해졌다. 이러한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기업, 그리고 기업들이 활동하는 시장이 성장했다.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에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정규직 사원들은 그 안에서 삶의 안정적 기반을 발견했지만, 90년대 중반부터 그리고 외환위기를 계기로 이런 중산층의 기본 토대 또한 약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런 발전과정이 만들어낸 것은 결국 작고 무력해진 가족 안에 갇힌 개인이다. 감정생활과 경제생활, 양육과 교육과 사랑 이 모두를 성취해야 하는 과부하 상태의 가족은 엄기호가 비판하는 기획된 친밀성의 문제를 낳고 가족으로부터의 자유가 필요한 소통부담 상태 등을 빚어낸다. 사회적 연대가 허약한 상태에서 근대화의 심화로 인해 문화적 차이가 커짐에 따라 가족 밖에서도 소통과 상호이해는 점점 더 어려운 것이 된다. 그런 만큼 소통을 통해 상호인정에 이를 수 있으리라는 기대 또한 낮아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동일성에 대한 과잉접속과 타자성에 대한 기피라는 이중적인 의미에서의 ‘단속’으로 나아가게 된다. 인정이론적으로 환언하면, 단속은 인정의 내적 강화와 인정에 위협적인 타자에 대한 방어라고 할 수 있다.
5. 나르시시즘도 자기혐오도 아닌……
지금까지 2절에서 논의한 세 비판 가운데 첫째(인과분석 문제)와 둘째(단편성 문제)가 분단체제론의 전망 속에서 어떻게 해명되고 종합될 수 있는지 논했다. 이제 셋째 문제, 즉 사회적 자화상의 효과를 검토해보자. 좋은 자화상은 앞서 지적했듯이 자신에게 공정할 뿐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르시시즘과 자기혐오 모두를 피하고, 그럼으로써 더 나은 방향감각을 고무한다. 분단체제론이 그런 요구에 어떻게 부응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긴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결론을 대신해 그런 지적 전망이 분단체제론 안에 함축되어 있음을 간략히 제시할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이 한반도 주민의 삶에 가한 근본적 제약에 주목해왔다. 이 제약은 지정학적이거나 지경학적인 제약처럼 객관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주관성 안으로 범람해 들어온다. 그렇게 해서 주관화된 제약은 우리의 선호체계 속에도 관철된다.11) 이렇게 사회의 구조적 제약의 영향 아래에서 선호가 그것에 맞추어 변경된 경우를 “적응적 선호”(adaptational preferenc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12)
우리가 다룬 자기계발적 주체, 속물성, 동일성에 대한 과잉접속과 타자성의 차단, 오만과 모멸의 구조 등은 적응적 선호의 양상을 상이한 이론적 전망 속에서 비판적으로 해부하려고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작업이 자기혐오의 경로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제약과 선호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둔감한 채 적응적 선호 자체에 대한 분석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맥락을 이해하긴 어렵지 않다. 이런 논의들은 87년체제가 정체 상태에 빠지고 그로 인해 분단체제의 에토스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한 시기에 대한 관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13) 민주정부 10년이 민주화의 면에서보다 신자유주의화의 면에서 뚜렷한 ‘성과’를 냄에 따라 민주파 내부의 세력균열과 지적 혼동을 야기했고, 그로 인한 정치적 패배가 민주주의의 후퇴, 남북관계의 적대성 강화,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심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변화는 현재주의와 연대 없는 평등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강화하며, 개인의 내면에서 병리적인 자기관계와 타자관계를 강화했다. 사회구조 수준의 퇴행이 적응적 선호를 강화하고 다시 적응적 선호가 구조적 제약을 증대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 작업은 그런 적응적 선호의 강화에 휘말려 함께 침강하지 않는 부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런 부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요청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시간지평을 이런 악순환이 두드러졌던 최근 시기보다 더 넓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적응적 선호 개념 이면의 메시지, 즉 구조적 제약이 약화되면 그것에 조응해서 적응적 선호로부터 탈피가 일어난다는 것, 더 나아가 그 과정이 빠른 속도의 자기강화적 개선으로 나갈 수 있다는 데도 공평하게 주목하는 일이다.
이렇게 시야를 넓히고 달리하면, 4·19혁명이나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적 틀을 형성한 6월항쟁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다. 더불어 4·19혁명이나 6월항쟁처럼 제도화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해도 기회의 제약에서 풀려날 때 대중의 잠복된 능력이 행동으로 전환되는, 그것도 매우 폭발적 사건으로 응집된 많은 예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부마항쟁이나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경우도 그렇지만, 가까운 예로 2008년 촛불항쟁을 생각해보라. 2002년 월드컵, 여중생 ‘효순이·미선이’ 추모집회, 탄핵반대 집회를 통해서 가다듬어진 새로운 집회문화, 민주정부 10년 동안 낮아진 집회비용(‘약화된’ 집회 통제능력), 정보통신기술 발전에 힘입어 향상된 전달능력 등이, 일단 기회가 열리자 우리 자신에게도 놀라울 정도로 유쾌하고 재기발랄한 선호 표현과 그것에 입각한 행동의 자기강화적 증폭을 경험하게 한 바 있다. 촛불집회 몇개월 전에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확실히 급격한 변화였는데, 이런 사실은 사회적 에너지가 조합되는 방식에 따라서 우리 사회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말해준다.14)
그러므로 시간지평을 넓혀서 적어도 분단체제의 전개과정 전반을 시야에 끌어들이면, 우리가 처한 사회적 제약과 선호체계의 관계를 더 역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사회성원이 보여온 퇴영적인 모습뿐 아니라 혁신에도 균형감있게 주목함으로써 현재 선호에 대한 속물적 긍정과 자기혐오적인 비판 모두를 벗어날 수 있다. 더불어 분단체제론이 강조해온 것, 즉 분단이라는 매우 근본적인 기회구조의 제약을 바꾸는 일의 중요성과 그것을 위한 실천적 초점을 명료하게 가다듬는 작업의 중요성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15)
글머리에 적었듯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벽에 부딪혔을 때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로부터 여러 종류의 ‘◯◯사회’론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의 경로에 우리가 빠져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함께 살고 싶은 사회는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 더 나은 공동의 삶에 대한 질문을 잃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가 더불어 살고 싶은 ‘다른 세상’은 어떤 것인가? 명칭이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귀일할지 알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 최저선은 더이상 세월호참사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일 것이며, 원(願)을 크게 세운다면 분단체제 너머의 ‘일류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는 인정투쟁이 상호인정으로 지양된 사회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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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ephen J. Gould & Elisabeth S. Vrba, “Exaptation—A Missing Term in the Science of Form,” Paleobiology (1982), v. 8, n. 1, 4~15면 참조.
2) 분단체제의 에토스는 여기서 논의되는 두가지로 한정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룬다. 또한 논의를 제대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분단체제 자체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분석, 그리고 그 변동과정에서 분단체제의 에토스가 구성/재구성되는 양상을 다뤄야 할 텐데,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 또한 다른 기회로 미룬다.
3) 라인하르트 코젤렉 『과거가 된 미래』,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14장 참조.
4) 여기서 다룰 수 없지만, 이런 에토스가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속에서 어떤 변동을 겪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박정희체제 시기의 발전주의 시대에 기대의 안정화가 일어난 방식에 대해서는 졸고 「분단체제와 87년체제의 교차로에서」, 『창작과비평』 2013년 가을호 466~89면 참조.
5) 외국인의 시선으로 이런 양가성을 잘 표현한 다니엘 튜더의 한국문화론 제목은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문학동네 2013)다. 이 책의 영어판 원제는 한층 더 시사적인 ‘불가능한 나라’(Korea: the Impossible Country)다.
6) 즉 신자유주의 문화가 자기계발적 주체를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자기계발적 주체 혹은 금욕적인 자기관리적 주체의 자기해석을 신자유주의 문화가 지원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문화적 영향력을 이런 관점에서 다룬 글로 졸고 「개념의 신자유주의화: 자본 개념의 확장에 대하여」, 『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08년 제13호 253~77면 참조.
7) 이런 인정표준에 대한 집착의 예로 한 대학생의 리포트에 담긴 다음과 같은 발언을 들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수능점수는 475점어치의 ‘상품권’과 같았다. 상품권은 그 범위 안에서 물건을 살 수 있지만,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10만원권 상품권을 가지고 쇼핑을 할 때 어떻게든 남김없이 다 쓰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수능점수가 재수까지 해서 힘들게 획득한 상품권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내가 살 수 있는 최대의 가격표가 붙어 있는 서강대 경제학과와 연세대 인문학과에 사용했다. (…)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던 물건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143면에서 재인용.
8) 이런 태도에는 미국의 코미디언 그라우초 막스(Groucho Marx)의 유명한 농담, “나는 나를 회원으로 받아주는 클럽에는 가입하고 싶지 않아요”의 역설이 스며 있기도 하다.
9) 우리는 미묘한 한 순간의 표정에서도 무시 또는 불인정의 징후를 포착한다. 송경동의 시 가운데 일부를 그런 예로 들고 싶다. “어느날/한 자칭 맑스주의자가/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노동자 출신이라고 말해주었다/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창비 2009, 16면. 강조는 인용자).
10) 가족에서 친족집단의 사회경제적 의미가 거의 상실됐음을 보여주는 지표의 하나는 자신이 보험료를 내는 보증보험이 친인척이 해주던 연대보증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 시점은 대략 1990년대 초반으로 볼 수 있다.
11) 백낙청(白樂晴)이 말한 바 있는 ‘후천성분단인식결핍증’은 분단체제의 제약이 인지적인 수준에서 관철되는 예이다. 같은 선상에서 분단체제의 제약은 선호처럼 심미적 수준이나 가치 같은 규범적 수준에도 관철될 수 있다.
12) 적응적 선호의 고전적인 예는 라 퐁뗀(Jean de La Fontaine) 우화의 하나인 ‘신 포도’이다. 이 이야기에서 여우는 높이 열린 포도를 따 먹으려고 여러번 시도했다가 거듭 실패한 다음 포도를 포기하며 “저 포도는 실 거야”라고 말한다. 여우는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소망함으로써 생기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호를 바꾸는 쪽을 택하는 셈이다. 소망하는 바를 얻을 기회의 제약에 직면해서 기회구조를 바꿔나가려고 하기보다 선호를 바꿈으로써 내적 갈등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더 상세한 논의는 Jon Elster, Sour Grape: Studies in the Subversion of Rationalit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제3장 참조.
13)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87년체제론에 대해서는 졸편 『87년체제론』, 창비 2009 참조.
14)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자기강화적 변화의 예가 최근에 드러난 것은 오히려 보수적 정렬의 측면이었다. 박근혜정부의 인사(人事)정책, 특히 윤창중의 청와대 대변인 임명이나 채동욱 검찰총장 찍어내기를 생각해보자. 윤창중의 능력과 성향에 대해서는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지만 임명을 강행했는데, 그것은 관료와 여권 전반에 능력보다 충성을 보상한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한 것이었고, 채동욱의 경우는 충성하지 않은 데 강력한 징벌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영장만 있다면 우리 사회성원 가운데 누구의 신상도 완벽하게 털어낼 수 있는 검찰총장이 숨겨진 개인생활로 인해 사임한 사태는 모든 관료와 정치인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임기간 중 숱한 군기사고에도 김관진 전 국방장관이 국가안보실장으로 영전한 일 또한 과오는 도외시하고 군사이버사령부 운영 등에서 드러난 충성에만 보상하는 예로 보인다. 이런 식의 신호는 국가관료 전체가 보상과 처벌회피를 위해 대통령을 향해 정렬되게 한다. 더구나 관료제나 군대는 본래 위계적 조직이기 때문에 이런 정렬은 자기강화적 과정을 거듭하며 거의 한순간에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가 보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세월호참사에서 관료들이 보인 무능력한 대처나 육군 22사단의 총기난사사건, 그리고 28사단의 윤일병 살해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5) 이와 관련해서 분단체제론의 다른 축들을, 예컨대 남북관계에 대한 전망을 새롭게 한 ‘포용정책 2.0’이나 정치적 프로그램을 규율하고 세력연합의 가닥을 잡아나가는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논의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 백낙청 「‘포용정책 2.0’을 향하여」,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71~94면(『2013년체제 만들기』, 창비 2012, 95~123면), 백낙청 「2013년체제와 변혁적 중도주의」, 『창작과비평』 2012년 가을호 15~35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