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김기원추모사업회 엮음 『개혁적 진보의 메아리: 경제학자 김기원 유고집』, 창비 2015
용기있는 지식인이 남기고 간 메아리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ilee@hs.ac.kr
그가 돌아가셨다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책을 보면서도 표지에 나온 얼굴이 친근할 뿐 ‘유고집’이란 부제가 여전히 낯설다. 최근처럼 답답하고 복잡한 정국에서라면 또 그분의 일갈이 곧 들릴 것 같다. 그의 남겨진 목소리가 ‘메아리’라니…… 본질로 직격하여 폐부를 찌르는 송곳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김기원(金基元, 1953~2014) 선배님. 그는 나와 얼마만큼 연배 차이가 있지만 권위 따위를 앞세우지 않는 친구 같고 또 스승 같은 분이었다. 뒤돌아보니 그와 만났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첫 장면은 대학원에 막 들어가서인데 조교실 안쪽 어느 자리에 앉아 계신 모습이었다. 그때는 그저 두꺼운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경제사 전공을 하는 ‘샌님’인가 싶었다. 우리 사회에 제자리를 제대로 지키는 꼬장꼬장한 ‘샌님’이 얼마나 희귀한지는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 선배세대를 공연히 낮추어 보는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후배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던 너그러운 선배들이 있었다. 철없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부끄럽고 죄송하다.
김기원 교수는 미군정기 귀속재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하고 이후 재벌 문제를 연구했다. 그와의 만남이 좀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것은, 소액주주운동을 둘러싸고 시민단체 간에 논쟁이 이어지던 2000년대 중반쯤이었다. 당시 소액주주운동이 재벌개혁의 수단인지 주주자본주의의 일환인지 하는 식으로 대립각이 형성되었다. 평자는 이와 관련한 어느 토론 자리에서 사회를 맡은 적이 있는데, 열기의 뜨거움을 감당하기 어렵다 싶었던 적도 있었다. 마침 김기원 교수를 조용히 뵐 기회가 있어 속사정을 여쭈어보았다. 본인도 논쟁구도의 일각에 있었기에, 그렇게까지 날 선 대립의 본질이 뭘까 싶어서였다.
그의 대답과 설명이 아련히 기억에 남아 있다. “재벌 문제는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 그대로예요. 당장 정답이 있는 게 아니고 쉽게 풀릴 일도 아니지만 기교를 부리지 말고 상식적으로 접근해야 할 일이에요. 큰 욕심을 내자는 게 아니고 있는 법부터 잘 지켜야지요. 우리 교수들부터 월급 이외의 다른 돈과 힘에 굽실거리지 말아야 해요.” 솔직하면서도 명료한 그의 성품을 닮은 대답이었고, 두고두고 되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말씀이었다. 그의 유고집을 살펴보니 그때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 문제는 그의 홈그라운드 같은 분야이다. 경제, 경영, 법 등 여러 영역이 교차되는 복잡한 분야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명료하게 골격을 그릴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경제민주화는 경제독재를 바로잡는 것이고 재벌의 무능과 부패를 바로잡는 일이다. 재벌은 외부적으로 전횡을, 내부적으로 독재를 행하고 있다. 이를 제어하려면 공정거래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와 함께 사회적 복지를 확충해야 한다.
그는 정계·관계·법조계·언론계·학계, 특히 검찰이 자율성과 품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재벌개혁의 첫걸음으로 특정경제가중처벌법의 실효성을 강화하고, 떡값을 받지 않아도 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도록 법조계와 학계에서 우선 자긍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부끄러운 현실에 대한 자성을 촉구하는 간절한 절규로 읽혔다.
그는 재벌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연구의 지평을 계속 확대했는데, 그 족적은 유고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실인식에 충실하려는 용기와 지식인으로서의 기개를 느끼게 된다. 그는 재벌개혁, 즉 자본의 개혁과 함께, 또는 그와는 별개로 노동개혁도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한다. 그는 개혁하지 않는 진보의 모습을 직시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권력화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확대되는 현상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현대차, 2000년 대우차, 2009년 쌍용차의 경우에서, 대기업 노동자가 특권을 상실할 때 발생하는 격렬한 저항의 특징을 잡아냈다.
이에 따라 그는 ‘개혁적 진보’의 포지션을 세웠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대기업 노동조합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의 특권 축소를 근본적 해결책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대안의 큰 방향도 제시했다. 임금격차를 줄이고 재벌개혁과 사회적 복지 확충을 꾀하며,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의 임금은 동결·삭감하고 대신 퇴직연령을 연장하는 보상을 해주자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87년체제의 함정’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내 눈에는 이 대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 그가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가는 도중에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87년체제’나 ‘분단체제’ 같은 개념을 참고했던 것 같다. 듣기로 그는 창비 안팎의 지식인들이 모인 세교연구소에 직접 연락하여 회원 되기를 자청했다고 한다. 통상 그 정도 연배와 명망을 지닌 교수가 낯선 이들의 공부모임에 참여하겠다고 먼저 제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경제학자가 문학인, 인문학자와 함께 배우겠다고 하는 것도 드문 사례에 속한다. 덕분에 세교연구소에 참여하고 있던 나는 그와 대화하고 여러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에 대한 셋째 기억이다.
이 시기에 그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개혁적 진보에 관한 것들이다. 이는 유고집에도 자주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지형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혁과 수구의 구분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보-보수는 시장과 국가의 상대적 양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개혁-수구는 시장과 국가의 질에 관한 문제다. 그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진보파가 꼭 개혁파는 아니다. 주사파는 북한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수구파이고,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특권 문제를 외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재벌개혁을 외면하는 진보학자는 수구파에 해당하고, 새누리당의 소수 쇄신파는 오히려 개혁적 보수파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과 실천을 위해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비평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감탄한 적도 많다. 물론 이의가 있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2012년 야당의 대선패배에는 주류와 비주류가 함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나, 당시 문재인 후보의 의원직 사퇴와 친노세력 공직 사퇴 같은 카드를 던져 최선을 다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낮게 평가한 것이나, 유시민·김부겸의 대구 출마는 별 감동을 얻을 수 없었다거나 하는 세세한 논평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이나 통합진보당의 낙후된 문화, 야당 내에 존재하는 운동권의 관성적 행태, 정체불명의 실용주의나 중도노선 등에 대한 지적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의 통일경제 연구는 체계적인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북한 전문가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포괄적·종합적인 개념화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북한체제를 ‘김씨왕조’라는 틀로 보자고 제안한다. 북한을 왕조체제하에서 계획경제를 기본으로 하고 일부 시장경제가 형성된, 일종의 복합경제체제라고 규정한다. 물론 이론이나 담론은 수많은 현실분석의 단련 속에서 만들어져야 하고, 그가 제시한 개념들에 대해 비교론적 검토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관습과 권력과 연구비를 따라 형성된 북한학과 경제학 연구의 자폐적 장벽과 지치지 않고 싸웠다. 그가 던진 도전장에 담긴 용기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다.
그의 주장에 대해 이런저런 찬반 토론을 벌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고집이 기능적 전문인의 벽을 깨려는 지식인의 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음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흩어져 있던 그의 목소리가 모여 두고두고 울리는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생전 그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면서 다시 한번 추모의 마음을 가다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