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
세계체제 카오스와 한반도경제
이일영 李日榮
한신대 교수, 경제학. 저서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혁신가 경제학』 『새로운 진보의 대안, 한반도경제』, 공저 『한반도 평화번영론의 새구상』 등이 있음.
ilee@hs.ac.kr
1. 위기의 한국경제
윤석열정부 출범 이후 많은 국민들이 급격한 퇴행을 느끼고 있다. 우리 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감각이 퇴화했다는 불안감도 크다.1 사회 전체가 극단적 갈등 속에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식체계가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경제 부문에서도 현장의 위기감은 절박한 반면 이에 대한 인식이나 해결책 탐색은 지지부진하다.
한국경제에 대한 위기감은 크게 두 종류로 대별될 수 있다. 하나는 경제가 이미 내리막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한국경제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앞으로 15~20년 정도는 과거 일본이 걸었던 길을 가야 할 것 같다’는 우려가 팽배하다. 또 하나는 위기는 심각한데 우리 사회에 문제해결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정치역량이 너무 형편없어서 열패감만 쌓인다’ ‘모든 담론과 사실이 진영·정파에 따라 다르게 읽히고 있어서 어찌해볼 수가 없다.’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들이다.
전문 분석기관들은 항상 거시경제 변수를 중심으로 약간의 변동을 논의하는데, 대체로 좋은 신호와 나쁜 소식을 함께 제시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기 전망에서도 매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음을 부연한다. 기관들은 2024년 수출의 완만한 증가를 전망하면서도 대외적 요인에 따라 변동 폭이 커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미국과 중국의 경기 하락세, 중동사태 및 러시아·우끄라이나 전쟁, 대만·중국간 긴장, 미국 대통령선거 등이 판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위험요소로 제시된다.2
윤석열정부의 진단과 전망은 조금 독특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3년 12월 26일 국무회의에서 2023년 경제정책 평가를 내놓았다. “지난 정부와 달리” 시장경제 원칙을 지키고 건전재정 기조를 유지한 결과 2023년에 높은 고용률과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2024년에도 경제적 자유를 확대하고 공정한 시장을 만들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출을 개선하여 경기회복 및 성장을 이뤄내야 한다고 언급했다.3
윤석열정부는 ‘지난 정부와 다른’ 정책을 추구하는 데 집착하지만, 경제논리를 자의적으로 전개한다는 점, 경제 문제를 자기중심적 관점으로 강변하는 점은 특히 유난한 데가 있다. 정부의 엉뚱한 메시지는 능력에 대한 불신과 위기감을 부추긴다.
우선 2023년의 높은 고용률과 낮은 실업률을 경제적 자유 제고와 긴축재정의 결과로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전세계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가 후퇴했고 특히 한국에서는 정부의 재량적·자의적 개입이 횡행했다. 1년여 사이에 긴축재정이 고용을 증대시켰다는 주장은 경제이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재정·통화정책의 긴축이 성장·고용에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초보적인 논리관계다. 성장은 정체했는데 고용률이 높아진 것은 ‘성장 없는 고용’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팬데믹 충격으로 악화된 고용률이 고령층을 중심으로 높아진 상황을 반영한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는 통화정책 당국도 인정한 바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 당국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기 추세에 대한 강한 비관론을 언급했다. 이미 한국이 장기 저성장 구조 속에 있는데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지 않고 재정·통화정책을 통한 대증적 처방만 하는 것은 “나라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4
지금 한국경제는 세계체제 변동의 압력을 받고 있다. 애당초 일국적 거시경제 모델로는 거대 변동의 구조와 추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거시경제 분석기관들의 모델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우끄라이나, 중동은 외부요인이다. 세계체제 변동이 경제구조 전체를 흔들고 있는데도 정태적 경제모델에서는 무역·투자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적 외부요인 정도로 계량될 뿐이다. 최근 세계체제 변동은 기존의 성장모델 및 축적방식을 작동시키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어내고 있고 한국경제는 지속 가능성 위기에 부딪혔다. 반면 위기에 대한 인식·해결 능력은 부족할뿐더러 부재하기까지 하다. 이것이 한국경제 위기의 본질이다.
2. 분단체제와 한반도경제
많은 사람들은 변화의 전모를 알 수 없다는 데서 불안을 느낀다. 개인이나 사회나 변화의 전체 상을 그리지 못하면 삶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경제의 총체적 인식틀로서 ‘한반도경제’를 논의해왔다.
한반도경제 담론은 분단체제론의 인식 방법을 계승한다. 분단체제론이나 한반도경제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이 논의가 민족주의에 기반하여 단일 국가체제로의 통합을 규범적으로 지향한다는 것인데 사실 그렇지 않다. 분단체제론과 한반도경제론은 기본적으로 세계체제론의 일환이다. 이들 논의에서는 세계체제를 인식의 기본단위로 삼는다. 한반도경제는 세계체제의 일환으로서의 한국경제이고, 세계경제-분단경제-국민경제의 세개 층위를 가지면서 정치적·군사적 영역과 상호작용한다.5
전세계적으로 글로벌화 논의가 진전된 것은 1990년대 초다. 한국에서는 OECD 가입, 우루과이라운드 대응과 관련하여 글로벌화 논의가 이루어졌고, 진보진영에서는 민족주의냐 계급주의냐를 논쟁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분단체제론이 제기되었다. 백낙청 교수는 1991년에 분단시대를 논의하면서 경제의 기본단위를 국민경제가 아닌 세계경제로 봐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명료하게 제시했다. 그리고 1992년에는 ‘분단체제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6
글로벌화 논의가 시작되던 1991~92년 시점에서 세계경제를 기본단위로 인식하는 분단체제론이 제기된 것은 자못 놀랍다. 글로벌화 논의는 자본주의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반영한다. 이는 세계적 범위로 연결되는 관계의 팽창, 집중화, 가속화 등과 관련된 개념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말의 대변동과도 연결된다. 글로벌화(또는 탈글로벌화)는 자본주의와 함께 발전한 민족(국민)국가, 계급 등과 같은 개념을 다시 숙고하게 하는 변화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간 일국 차원의 민족국가나 계급 개념에 입각한 방법론이 주류를 이루었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론이고 케인즈 경제학이나 발전경제학도 기본적으로 일국 모델을 기본단위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에서 제기된 경제민주화론이나 복지국가론도 일국-계급-부분 모델에 입각해 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자본, 국가, 민족, 계급, 기술, 기후 등은 모두 세계체제와 연결되어 있다. 2010년대 이후의 지정학적 갈등, 기술경쟁, 기후위기 역시 세계체제 변동과 관련된다.
분단체제론은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세계체제 분석에 힘입은 발상이지만,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구체적 현실분석을 추가해 세계체제론을 발전시키려는 시도였다. 여기에서 특히 독창적인 기여는 세계체제 하위에 특수한 국가간체제로서의 한반도 분단체제 개념을 설정한 것이다. 분단체제론은 세계체제 속에서 형성된 남북한 국가와 국가간체제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는 1945년 이후 세계체제의 영향 속에서 분단이 진행되었고 1948년 두개의 결손국가가 탄생했으며 1950~53년을 거치면서 분단이 ‘체제적’으로 고착되었다. 분단체제를 구성하는 남북한 국가는 모두 ‘정상적’인 국민국가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결손국가’(defective state)이다. 북한은 점차 왕조적 성격이 짙어졌고, 남한은 4·19혁명을 거치면서 1987년에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달성했으나 분단체제하의 민주주의는 위태위태했다. 분단체제론은 결손국가·국가간체제를 극복하는 길을 점진적·단계적 화해와 재통합, 새로운 형태의 복합국가를 이루는 데서 찾는다. 또한 분단체제 극복이 기존의 세계체제를 개선·변혁하는 데 기여한다고 전망한다.7
한반도경제론은 세계경제-남북경제-한국경제의 삼층경제의 존재와 그 연결고리에 주목한다. 한반도경제라는 삼층경제의 인식틀에 입각하면, 경제의 기본단위가 세계경제라는 인식을 좀더 확고히할 수 있다. 삼층경제는 ‘정상적’인 민족경제·국민경제체제 이외의 층위를 부각한다. 세계경제, 남북경제에 주목하면 세계체제와 독특한 관계를 맺으면서 형성된 특수한 성장·축적모델 유형을 구성하는 데 유리하다. 한반도경제론은 한국이 어떻게 불균형 성장모델을 채택하여 그 이익을 취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가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게 한다.8
한반도경제론의 중요한 문제의식은 남북 분단경제가 지속발전 불가능성의 위기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일국 민족경제를 택하자는 주장은 흡수통일 논의로 귀결되기 쉽다. 양국 국민경제를 택하자는 주장은 적대적 양국 전쟁상태를 고착화할 수 있다. 한반도경제론은 양자택일의 진영 논리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일국 민족경제와 양국 국민경제 이외의 체제 해법을 탐색해보자는 것이다.9
3. 세계체제 카오스의 시대
필자가 한반도경제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97년 경제위기였다. 민족모순이냐 계급모순이냐 하는 식의 논의로는 동아시아 지역 범위에서 전개된 위기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토론을 거듭하면서 1997년 경제위기는 냉전체제-분단체제와 짝을 이룬 한국경제(추격전략 모델)가 냉전체제 이완, 글로벌화 진전 등 세계체제 변화 속에서 맞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10
한편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세계체제-분단체제-국가체제는 이전과 다른 시대에 들어서 있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특히 2016년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2월 개성공단 폐쇄, 7월 사드 배치 결정, 9월 북한의 5차 핵실험, 10월 촛불집회 시작, 11월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중국의 사드 보복 개시 등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당시에는 그러한 전환적 흐름을 우선 ‘뉴노멀’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해보려 했다. 신자유주의적 글로벌화 흐름(노멀)과는 다른 흐름(뉴노멀)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11
그러나 2018년 미중 무역전쟁을 지나면서 ‘2010년대’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졌다. 정치, 군사, 경제, 과학기술 등 여러 부문에서 미중간 세계체제 차원의 패권경쟁이 진행되는 ‘카오스’ 시대의 모습이 뚜렷해진 것이다. 세계체제론에서는 세계경제·국가간체제에서의 기존 패권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이나 국면을 ‘카오스’라고 한다.12
한반도경제 관점에서 볼 때 세계경제-분단경제-국민경제는 2010년대를 거치며 분열과 침체의 카오스 시대를 맞이했다. 한국형 성장·축적체제는 자본주의의 다양한 유형 중에서 동아시아 모델로 분류된다. 동아시아 모델 안에서도 한국형 모델은 세계경제-분단경제와의 연결방식에 따라 여러 단계·유형을 갖는다. 세계경제의 카오스 속에서 한반도경제의 분열은 증폭되어왔다.
한국형 성장·축적체제의 제1단계 모델은 1960~1980년대의 양 진영으로 갈라진 세계체제 속에서 만들어졌다. 1950년대까지 한국경제는 국민경제를 논의할 기반을 갖추지 못했다. 1950년대 말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감축하고 남북 대결에 대처할 정도의 국민경제 형성을 요구했다. 5·16군사정변, 박정희정권 수립, 한일협정 체결을 거치면서 한미일 연결, 남북한 적대에 기반한 발전주의체제가 만들어졌다(한국형 모델Ⅰ).13 제2단계 모델은 1990년대 이후 탈냉전 및 글로벌화의 세계체제 조건하에서 형성되었다. 이때 중국은 세계경제에 편입되어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고, 북한은 세계경제에서 배제된 ‘네트워크의 구멍’으로 남았다. 한국경제는 세계체제와 연결된 부문을 중심으로 다시 일정한 혁신을 이루었고 새로운 성장의 모멘텀을 확보했다(한국형 모델Ⅱ). 1960~80년대에 이르러서는 성장과 분배에서 비교적 좋은 성과를 보여 ‘동아시아의 기적’의 사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들어서는 그간의 동아시아·한국형 모델이 정체·분열하는 현상들이 나타난다.14
우선 2010년대 이후 한국의 성장률은 2%대로 내려앉아 세계 경제성장률을 밑돌기 시작했고,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정체·후퇴 추세가 더욱 뚜렷해졌다.15 저성장 추세로의 전환에는 세계경제의 구조변동이 압박으로 작용했다. 2008년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중국 모두에서 과잉축적 현상이 나타났다. 중국 제조업의 축적 성과는 한국의 대중국 경쟁우위를 압박했고, 미중 경쟁이 격화되면서, 중국 시장과 반도체 산업에 편중된 수출구조가 위험요소로 부각되었다. 무역수지 악화, 원화 가치 불안정, 가계부채 위험, 인구구조 악화 등 부정적 추세가 겹쳐졌다.
또한 경기침체와 함께 소득·자산, 지역, 세대 등 여러 방면에서의 분열·불평등이 빠르게 심화되었다. 2010년대 중반 이후 시장소득 불평등, 가구 순자산 불평등 지표는 악화되었고, 비수도권 산업도시의 쇠퇴와 수도권으로의 인구 집중 또한 심화되었다. 수도권으로의 순인구 이동은 2000년대에 감소하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 증가세로 반전했으며 출산율은 2000년대 이후 정체되다가 2010년대 중반 이후 급락세로 전환했다.16
한국형 모델Ⅰ, 한국형 모델Ⅱ에서는 세계경제로의 연결이 확대되는 공간을 중심으로 혁신 역량이 증대되었다. 특히 한국형 모델Ⅱ에서는 남북 유엔 가입(1991.9), 한소 수교(1991.9), 남북기본합의서(1991.12), 한중 수교(1992.8), 6·15남북공동선언(2000) 등을 거치면서 세계경제-분단경제를 연결하고 재구성하는 확장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미중 양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세계경제 공간을 혁신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위축시켜왔다. 또한 2010년 이후 남북 경제교류는 전면 중단되었고 분단체제가 교착·강화되는 역전 흐름이 이어졌다.17 남북간, 남북 내부의 적대와 분열은 기득권을 강화하고 체제혁신 역량을 제약하고 있다.
4. 체제혁신을 위한 공화주의 경제
앞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제 한반도경제는 세개 층위의 체제적 카오스 상황에 직면해 있다. 첫째, 세계경제 층위에서는 미중 적대의 카오스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물론 세계경제가 냉전시대처럼 확연히 갈라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패권경쟁과 관련해서는 중국을 세계체제에서 분리해내려는 흐름이 강화될 것이다.18 둘째, 분단경제는 2016년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시점에서 이미 냉전시대 상황으로 돌아갔다. 1990년대 이후 북한은 독자적 핵개발과 세계체제로의 편입을 동시에 추진했지만 2010년대에는 분단체제 강화 흐름이 나타났다.19 셋째, 한국경제는 세계경제-분단경제의 압박 속에서 내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간 한국경제에 유리하게 작용했던 세계체제와의 연결, 분단체제의 상대적 안정성 조건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의 카오스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체제위기에는 체제혁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분단체제론에서는 근대체제에 대응(적응과 극복)하는 노선으로 ‘변혁적 중도주의’를 논의한다. 변혁적 중도주의의 요체는 개량 아닌 변혁을 수행하되 양 극단을 배제한 정도(正道)의 중간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양 극단은 오히려 기존 체제를 유지·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중간길은 체제를 변화시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방법론이 될 수 있다.20
이러한 ‘변혁적 중도주의’의 길은 어떤 사회사상 담론이나 개념과 연결될 수 있을까. 필자는 ‘체제를 혁신하는 공화주의 노선’을 말해보고 싶다. 여기에서 ‘체제’는 위기에 놓인 기존의 한반도경제이고, ‘혁신’은 점진과 급진, 진화와 혁명, 적응과 극복을 함께 포함하는 중간길이다. 세계경제는 1990년대 이후 시장주의·자유주의를 확장의 동력으로 삼았다가 2010년대 이후 국가주의·보호주의가 복귀하는 국면으로 전환했다. 이제 미중간, 남북간, 국내적 침체·분열을 가로지르는 중간길, 즉 공존·공화의 영역을 창출해가는 이론과 실천이 필요하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등이 근대 세계체제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공화주의는 근대 이전의 아테네 전통, 로마 전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의 ‘res publica’로 불렀다. 공화주의는 ‘공공·공동의 것’을 지향하며, 지배하지 않는 혼합정부·자치정부 제도와 지배받지 않는 자유시민의 형성을 핵심요소로 한다.21 역사적으로 공화주의는 때에 따라 귀족적 성격이 강하기도 했고, 민주적 성격이 강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국가주의, 다수결 민주주의가 과두적 지배로 치닫는 국면에서는 민주적 공화주의가 이에 대항하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공화주의 전통은 서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도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공화’는 왕의 부재 시 신하의 통치를 의미하는 불경과 금기의 언어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대동공화의 정치’, 즉 당파와 당쟁이 없는 화평·공영·공존의 상태로서의 ‘공화’(유교적 공공성)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의 근대 공화주의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와 1948년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통해 본격화되었다.22
한국에서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체제 내에서도 헌정체제를 역진시키려는 흐름이 순환적으로 나타났으며 경제·사회적 분열은 심화되었다. 헌정체제에 대한 공격이 임계점에 이르면 시민들이 나서기도 했다. 특히 2008년과 2016~17년의 ‘촛불’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대한민국의 헌정주의는 당초부터 공화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다. 헌정과 민주주의가 위기에 부딪칠 때, 공화국 담론은 인간의 존엄·평화·공존의 길을 부각시켰다.23
경제적 공화주의는 공존·공영을 위한 ‘공공·공동의 경제’를 만들어감으로써 카오스 속의 한반도경제를 혁신하자는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그 방책의 골격만을 얘기해보자. 첫째, 세계경제의 공화를 추구한다. 미국·중국과 협력하면서 그 사이에서 인도·태평양, 글로벌 사우스 등 제3의 공간에 파고들어야 한다. 이는 한국경제의 혁신성장 공간을 확보하는 길이다. 둘째, 분단경제의 공화를 추구한다. 현재는 남북한 적대가 극에 달한 상태이므로 제3의 매개자가 필요하다. 미중 경쟁 속에서 북한이 세계경제로 편입되는 데에는 일본·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할 것이다. 셋째, 국내 수도권·비수도권 사이의 지역간 공화를 추구한다. 현재처럼 인구나 인프라가 서울·수도권으로 계속 집중되면 결국에는 경제·사회적 붕괴에 이를 수 있다.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다. 그러나 여러 층위에서 공화주의 경제 영역을 늘려가다보면, 세계공화국으로 향해가는 길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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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학자 서복경은 한국사회가 ‘아노미’ 상태에 있으며, 이를 “마치 기찻길이 뚝 끊어진 느낌”으로 표현한 바 있다. 민주화 이후 미국이나 유럽 국가를 모델로 캐치업을 시도했으나 2008년 이후 캐치업할 모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치권의 아노미 상태가 가장 심각하고 경제, 시장 쪽도 오래전에 방향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역시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의 부재’를 꼬집는다. 서복경·양경수·이남주·이태호 대화 「위기의 한국, 전환의 과제」,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참조. 인용은 259면.↩
- 2024년 한국경제가 1.8%에서 2.2% 정도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았다. 한국개발연구원은 2.2%, 한국은행은 2.1%, 산업연구원은 2.0%, LG경영연구원은 1.8% 성장률을 전망했다. 2023년 성장률이 1% 초반대로 워낙 낮았기 때문에 2024년에는 이보다는 조금 나아지리라는 예상이다.↩
- 「尹대통령 “지난 정부와 달리 민간 활력 바탕 건전재정 기조 유지”」, 조선일보 2023.12.26.↩
- 「이창용의 작심 비판 “재정·통화정책에만 의존, 나라 망하는 지름길”」, 서울경제 2023.5.25.↩
- 필자가 한반도경제론을 논의해온 과정은 세 시기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1997~2007년에는 일국주의 접근법의 한계를 인식하고 분단체제론의 세계체제 인식과 비판적 지역연구의 문제의식을 수용했다. 둘째, 2008~15년에는 경제체제와 정치체제를 포괄하는 체제와 국가제도를 탐색했다. ‘한반도’라는 체제적 관점과 ‘네트워크 국가론’을 제기하면서 체제 구성요소로 거시체제로서의 ‘한반도경제-한국경제-북한경제’, 발전모델로서의 ‘더 좋아진 동아시아 모델’, 미시체제로서의 ‘지역’과 ‘혼합형 조직’을 논의했다. 셋째, 2016년부터는 2010년대에 진행된 체제전환 징후가 경제체제, 정치·군사체제, 과학기술체제의 상호작용을 의미한다는 점을 논의했다. 이를 통해 한반도경제를 세계체제-남북분단체제-국내체제가 상호작용하는 공간이자 복합체제인 것으로 정식화했다. 졸고 「한반도경제론의 전개과정」, 『중국사회과학논총』 제2권 제1호, 2020.↩
- 분단체제 인식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분단시대의 계급의식」(1991)과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1992)라는 글은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작과비평사 1994)에 수록되어 있다.↩
- 백낙청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36~42면 참조.↩
- 한반도경제론은 ‘북한학’ ‘북한경제’ 인식의 한계도 보완할 수 있다. 북한 일국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경제의 회복, 1990년대 이후 북한경제의 급속한 후퇴와 격렬한 군사화 등은 설명하기 어렵다.↩
- 사회학자 백승욱도 세계체제 관점을 한국사회 분석에 적극 적용하고 있다. 그의 논의의 핵심적 특징은 세계체제를 ‘얄타체제’(강대국 간 협조의 단일세계주의)로 규정하는 독창적 해석, 얄타체제 형성에서 독일·폴란드·우끄라이나 문제와 중국혁명의 역할의 중시, 20세기 중도자유주의에 대한 적극적 평가 등이다. 다만 한반도 분단체제는 논의·고려하지 않은 채 우끄라이나전쟁, 대만위기, 한반도 핵위기를 ‘연결’하여 분석한다. 백승욱 『연결된 위기』, 생각의힘 2023 참조.↩
- 이에 따라 위기 극복의 지향점으로 ‘개방-혁신-연대의 한반도경제’라는 대안모델을 제시했다. 이일영·이남주·이건범·전병유 「한국형 신진보주의 경제 이념」, 『동향과전망』 2005년 여름호 참조.↩
- 뉴노멀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형태의 디지털혁명, 세계금융위기 이후 장기 저성장 추세 등을 지칭하는 용어로, 2013년경부터 미국과 중국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필자는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한반도경제의 핵심 요소를 미중간 적대적 경쟁의 세계체제, 4차 산업혁명의 기술체제, 저성장·불평등화의 성장체제 등으로 논의한 바 있다. 이일영·정준호 『뉴노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7 및 졸저 『뉴노멀 시대의 한반도경제』, 창비 2019 참조.↩
- 월러스틴은 세계체제의 헤게모니 교체를 패권국가의 기술적 우위 감소, 임금 상승, 체제유지 비용 증가,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 세계전쟁 등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는 헤게모니 국가의 이윤율 저하, 과잉축적, 금융적 팽창, 투자 지역 이전, 경쟁 세력의 등장과 경합 등의 과정을 통해 국가간체제의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카오스’가 발생하고, 새로운 축적체제하의 헤게모니 국가가 등장한다고 보았다. 지오바니 아리기·비벌리 J. 실버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 최흥주 옮김, 모티브북 2008.↩
- 4·19혁명에서는 아래로부터 국민적 차원의 정치·경제체제 형성의 의지가 분출되었다. 이 때문에 1960년대에는 장면정권이나 박정희정권 모두 경제적 ‘자립’을 강하게 의식했다. 4·19혁명을 통해 자유주의, 민족주의, 발전주의 등 다양한 이념이 표출되었으나 박정희정부는 국가주도 발전주의를 강화했다.↩
- 동아시아 모델의 핵심적 특징은 ‘공유적 성장’(shared growth)이다. ‘1960~65년체제’로 부를 수 있는 제1단계 한국형 성장체제에서는 타국과 비교해서 ‘공유적 고성장’(shared high-growth)을 이루었다. ‘1987~92년체제’로 부를 수 있는 제2단계에서는 ‘비공유적 고성장’(unshared high-growth)이 나타났는데, 이는 ‘좋은 불평등’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의 2010년대,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러 측면에서 ‘비공유적 저성장’(unshared low-growth)의 특징들이 표출되었다.↩
- 연평균 성장률은 2001~2007년에 5.19%에서 2011~19년에 2.94%로 낮아졌다. 2023년 성장률은 1.4%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2009년 0.8%, 2020년-0.7%에 이어 세번째로 낮은 수치이다. KOSIS 국가통계포털 참조.↩
- 한국경제의 위기·분열 추세에 관한 지표는 정준호·이일영 「한국형 성장 체제의 전개와 위기」, 『동향과전망』 2023년 가을·겨울호 참조.↩
- 2010년 5·24조치로 개성공단 이외의 남북 경제협력이 전면 중단되었고, 2016년 2월에는 개성공단마저도 폐쇄되었다.↩
- 예를 들면, 이미 중국이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고리를 차지한 전기차·이차전지 산업에서는 중국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안보 차원에서 중요한 반도체·통신 산업 같은 경우 미국은 중국에 대한 기술우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이남주는 윤석열정부의 분단체제 재공고화 시도를 논의했고(이남주 「문명 전환 시대, ‘한국’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백낙청은 ‘흔들리는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시도가 결국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백낙청 공부길 087, 088」, 유튜브 백낙청TV 2023.12.1, 2023.12.8.). 필자는 미중 패권경쟁의 세계경제 변동 속에서 분단체제는 진퇴를 거듭하고 있다고 본다. 2008~17년에는 강화, 2018년에는 이완, 2019년 이후에는 다시 강화되는 흐름이다. 분단경제 층위만 보면 2010년 5·24조치 이후에는 1990년대 이전으로 회귀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63~64면 참조.↩
- 공화국 담론의 개념 요소로는 혼합정체, 전사공동체(시민군제), 토지균분 공동체(토지균분제), 시민·공민윤리(시민적 덕성), 공화주의적(적극적) 자유 등이 거론되기도 한다. 졸고 「공화주의적 커먼즈의 이론과 정책에 관한 시론적 탐색」, 『동향과전망』 2023년 봄호 및 조승래 『공화국을 위하여』, 도서출판 길 2010 참조.↩
- 상해임시정부와 제헌헌법의 공화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인물은 이승만(1875~1965)과 안창호(1878~1938)이다. 이승만은 군주정에 대항한 초기의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 일제 이후 공산주의에 대항한 반공적 공화주의자로 평가된다. 정상호 「한국의 보수·중도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서 공화주의의 가능성과 한계」, 『동향과전망』 2024년 봄호 참조. 안창호는 평등한 신공화국 건설과 동양평화·세계평화의 동시 추진을 주장한 변혁적 중도의 공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강경석 「도산의 점진혁명론과 그 현재성」, 『개벽의 사상사』, 창비 2022, 188~94면 참조.↩
- 최선의 입헌민주주의는 공화화된 민주주의, 단순한 선거민주주의를 넘어서는 공화주의적인 입헌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단, 공화주의가 민주주의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장은주 「왜 지금 ‘공화’인가?」, 『민주주의와 인권』 제23권 제1호, 2023 참조.↩
-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은 세계경제를 자본제=네이션=국가의 삼위일체 접합체로 보고, 이를 극복한 제4의 교환양식으로서의 어소시에이션이 중심이 된 ‘세계공화국’을 논의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