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새 50년을 열며
계간 『창작과비평』이 창간 50주년을 맞는다. 정론을 아우르는 종합문예지로서 반세기 동안 꿋꿋하게 정진해온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희유(稀有)한 만큼 자축할 일이지만, 현재 우리의 상황은 창간 당시에 못지않게 엄중한 터라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여기까지 걸어온 길을 짚어보며 새 50년에 임하는 각오와 앞으로의 기본적인 편집 방향을 밝히고자 한다.
창비가 그동안 겪어온 고난은 전후(戰後)의 척박한 상황에서 분단 한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그리고 주체적인 민족문학의 발전을 위해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창간호)이 되고자 했을 때부터 예정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큰 결의를 실천하는 데는 혹독한 시련이 따랐으니, 판매금지와 폐간에다 출판사의 등록취소, 관련자들의 구금과 투옥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창비가 한국의 작가와 지식인에게 자랑이요 보람이 되는 길이기도 했다. 『창비』는 비빌 언덕이 따로 없던 어려운 시절 뜻있는 문학예술인, 학자, 사회운동가 등 비판적 지성인의 발표지면일뿐더러 당대의 핵심 쟁점을 놓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공론의 장이었다. 여기서 형성된 창의와 공심(公心)과 지혜를 밑거름으로 오늘의 창비가 되었으니 창비는 창비만의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또한 백낙청 창간편집인을 비롯한 역대 주간과 편집진의 각고의 노력은 물론이거니와 가난과 시대적 박해 속에서도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만든 살아 있는 대중의 숨은덕이 없었다면 오늘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창비』는 당대현실에 적실한 비평·담론과 정선된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민족문학의 산실이자 주체적 담론의 생산자로 성장했다.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서구 중심부의 최신 사상과 문예 조류를 신속하게 수용하는 일을 주된 과업으로 삼는 학문적 풍토에 맞서 『창비』는 그것을 세계체제 주변부 민중, 그것도 분단국 주민의 입장에서 비평적으로 사유하는 주체화의 과정을 수행하고자 분투했기 때문이다. 그 고투의 흔적이 숱한 논쟁의 형태로 『창비』 지면에 아로새겨져 있을뿐더러 그 결실은 리얼리즘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근대적응·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 동아시아론, 87년체제론, 변혁적 중도주의론 등의 창비담론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런 착실한 노력과 결실의 과정에서 지난해 6월에 터진 표절논란 사태는 또다른 시련이었다. 창비는 섣부른 초기대응을 반성하는 동시에 내부토론을 통해 사태의 진실에 부합하는 입장과 원칙을 공유하고 그것들을 끝까지 지켜냈다. 크게 보아 원칙을 지키는 대응만이 한국문학을 위하는 길이요 이번 사태로 상심했을 독자의 신뢰를 회복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 사태를 자기성찰의 거울로 삼고자 했고(「창비를 둘러싼 표절과 문학권력론 성찰」, 2015년 겨울호 참조), 창비가 ‘문학권력’이라는 비판을 초래할 만큼 그간 작가와 독자에게 권위적이거나 소통과 유대를 소홀히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며 앞으로 한국문학에 더욱 헌신할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창간 이래 『창비』를 이끌어온 편집인이 퇴임하고 새 50년을 시작하는 우리는 문학 중심성을 강화하는 것을 주된 편집방향으로 삼고자 한다. ‘문학 중심성’ 강화란 일차적으로는, 정론지를 겸하는 『창비』의 문예지로서의 역할을 키우는 방향, 즉 작가·독자와의 교류와 소통을 더 활성화하고 지면에서 문학부문 창작물과 비평의 비중을 늘리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것은 문학정신을 강화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의 문학이란 현실과의 관련성보다 순수한 미적 가치를 지향하는 문학주의라든가, 어떤 대의를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하려는 이념적인 문학이 아니라, 양자의 편향을 극복하고 동시대 사람들의 삶과 미래에 열려 있는 문학이다. 그러므로 ‘문학 중심성’ 강화에 사회과학에서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는 종합적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창비』는 향후 문학비평과 사회비평 공통의 ‘비평적’ 뿌리에 기초하여 우리 사회의 중요 현안과 핵심과제에 대해 문학·인문사회 공동의 작업을 시도해나갈 것이다.
또 하나의 편집방향은 ‘현장성 강화’이다. 이 방침은 40주년 때 제기된 ‘운동성 회복’과 ‘창비표 글쓰기’를 계승·심화하면서, 우리 시대 기득권 바깥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이들의 이야기와 관점을 경청할 뿐 아니라 그 입장에서 우리 사회 전체를 성찰해보려는 취지이다. 이 작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종래의 ‘논단과 현장’란을 각각 별도의 코너로 독립시켜 그 성격에 맞게 글을 배치하고자 한다. 또한 운동성과 현장성 강화의 편집방침에 따라 이번호부터 두가지 연속기획을 시작한다. 하나는 소수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고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기획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수호세력인 보수·수구세력의 실제를 해부하는 기획이다.
우리의 삶은 현재 세 차원의 체제—87년체제, 분단체제, 자본주의 세계체제—상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시민의 힘으로 쟁취하여 건설한 87년체제가 새로운 체제로 도약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만도 못한 체제로 귀결할 위기, 남북관계의 악화로 분단 한반도가 남북 공동의 재앙을 맞거나 각자 더 나쁜 상태로 전락할 위기, 그리고 인류와 지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가 그것이다. 우리 앞의 위기가 이렇듯 최소한 세 층위가 겹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활로를 찾는 일은 여간한 능력과 지혜를 요하는 게 아니다. 이러한 삼중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일이야말로 창비의 새 50년의 주된 과업일 것이다. 우리는 지난 50년간 쌓아올린 경험과 내공을 바탕으로 또 한번 뜻있는 이들의 지혜를 모으는 실천적 집단지성의 구심이자 대전환을 일궈낼 ‘창조와 저항의 거점’이 되고자 한다. 이 어려운 길을 용감하게, 그리고 정성을 다해 갈 때 험난한 길을 앞서간 선배들과 오늘의 창비를 있게 해준 수많은 분들의 은혜에 보답이 되리라고 믿는다.
‘50주년 특별기획: 창비에 바란다’에서는 본지 편집위원 6인이 국내외의 문인과 연구자, 시민운동가, 편집자 등을 만나 그동안 『창비』를 읽어온 소감과 평가를 담았다. 본지와의 인연이나 눈여겨보는 꼭지는 서로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은 창간 이래 본지가 자임해온 ‘창조와 저항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이 여전히 유효하며 최근에는 더욱 절실해졌다는 점이다. 각자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는 분들로부터 받은 애정어린 고언과 편집방향에 대한 제언을 모두 소중히 새겨 새 50년의 밑거름으로 삼으려 한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여섯분께 감사드린다.
특집 ‘대전환, 어디서 시작할까’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시대 역행적이고 중층적인 위기의 기본적인 성격을 문학과 정치·사회의 구체적인 문맥에서 세심하게 짚음으로써 반동적 흐름 속에서도 대전환을 일궈낼 실마리를 찾고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한기욱은 어떠한 전제 없는 문학의 열린 길을 갈 때만이 창조적 가능성을 포착하고 시대의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음을 역설하면서, 우리가 사는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을 변혁적 주체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어서 문학의 아토포스(비장소)론에 이르는 최근 문학논의의 흐름을 짚고 백무산의 시와 김금희의 소설을 비롯한 현재의 한국문학이 자본주의체제의 근본을 성찰하면서 시대적 삶의 진실을 드러내는, 문학의 아토포스가 구현되는 현장임을 보여준다.
이남주는 현재 한국사회의 위기국면이 분단체제 유지에 사활을 건 수구세력의 도전에 민주개혁세력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민주적 거버넌스를 단계적으로 무너뜨리는 수구세력의 ‘점진 쿠데타’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권과 시민사회가 87년체제의 극복을 비롯한 ‘대전환’의 기획을 공동으로 세워나가는 동시에 다가오는 총선에서 각각 자기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 함을 역설한다. 백영경은 1987년 이래 우리 사회에서 성장해온 소수자 운동과 담론이 최근의 민주주의 퇴행 속에서 공격받고 있다고 진단하는바 소수자 운동과 담론을 인권보호 차원에 국한하는 경향을 그 원인으로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은 누구이며 ‘인권’의 적용을 제약하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묻는 일을 통해 소수자 인권·시민권이 한국사회 전반의 전환과 결부된 핵심과제임을 주장한다.
황규관은 1980년대에 번성했다가 이제는 퇴조한 듯 보이는 민중시의 면면을 재조명한다. 임성용 송경동 박소란 김해자 백무산 등 근래 발표된 주목할 만한 민중시들과 ‘시와 정치’ 논의를 아울러 다루면서 민중시의 본질이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사실 재현의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잠재력을 원시언어의 자유로운 힘으로 표현하는 데 있음을 강조한다. 황정아는 문학이 윤리적·지적 과제를 감당하는 본보기로 J. M. 쿳시의 장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논한다.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에 주목하면서 동물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결국 우리 자신을 보는 관점의 변화와 맞물려 있음을, 그리하여 인간과 삶의 근본적 전환을 향한 화두를 품고 있음을 지적한다. 본지는 앞으로도 세계문학을 본격적인 비평의 차원에서 다룰 예정이다.
이와 더불어 창작란도 50주년을 기념해 알차게 마련했다. 올 한해 시란은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100인의 신작시로 꾸린다. 봄호에서는 그 1차분으로 24편을 게재한다. 다채롭고 웅장한 한국시의 족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등단순으로 배치했음을 밝혀둔다. 소설란에서는 그간 장편 집필에 전념해온 황석영의 신작단편을 싣는다. 현대사가 낳은 상흔과 치유의 가능성을 그리는 일상적이고 담담한 필치가 오히려 의연하게 다가온다. 이기호 조해진 최정화의 단편도 각각 고유한 어법과 개성으로 지면을 풍성하게 해준다. 아울러 본지를 통해 중편 「씨앗불」로 등단한 공선옥이 실험적인 작풍의 중편으로 다시 독자들을 찾는다. 소설란은 올 한해 중단편 특집으로 꾸릴 예정이다.
올해 문학초점은 시인 김소연과 평론가 백지연이 이끌어간다. 그 첫회 손님으로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 등 전방위적 활동을 펼쳐온 김정환이 참여해 근작 시집과 소설집 6권에 대해 흥미로운 토론을 벌인다. 작가조명에서는 소설가 전성태가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으로 주목받은 중국교포 작가 금희를 인터뷰하고 작가의 이력이나 소재에 가려지기 쉬운 작품세계를 세심하게 짚는다.
대화는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하는 연속기획의 첫 순서로 한국 종교문화 연구의 권위자 강인철과 종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쳐온 박노자가 개신교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종교의 ‘보수성’을 놓고 벌인 토론을 지상중계한다. 두 사람의 토론에서 한국 종교 일각의 수구적인 이념성의 문제가 충분히 실감될 것이다. ‘논단과 현장’에서 분리 독립한 ‘현장’은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보는 연속기획의 첫 순서로 김도현의 글을 싣는다. 이성주의와 노동능력 중심의 근대 사회에서 소외돼온 장애인이 온전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 평등과 자유에 기반한 새로운 연대의 실험에 다름 아님을 주장한다. 촌평란도 정성들여 마련했다. 일일이 언급하지 못하지만 품이 많이 들었을 필자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본지의 자랑 중 하나인 촌평란은 계속 유지하고 더 발전시켜갈 예정이다.
대학생 문사들의 등용문인 대산대학문학상이 제14회를 맞아 당선작을 발표한다.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앞으로 우리 문학의 기대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창간 50주년을 기해 발행인과 편집인, 편집주간을 비롯해 편집위원회가 개편되었다. 백낙청 편집인과 김윤수 발행인 그리고 백영서 편집주간이 퇴임하고 강일우 창비 대표이사가 발행인 겸 편집인, 한기욱이 편집주간, 이남주가 부주간을 맡는다. 신임 발행인 겸 편집인은 본지의 발행과 관련한 법적인 책임과 재정적 지원을 담당하며 편집권은 편집주간을 중심으로 하는 편집위원회에 일임하는 새로운 체제의 출범이다. 편집위원진에서는 최원식과 고세현, 이장욱이 물러나고 소장 역사학자 김태우와 문학평론가 한영인이 합류했다. 백낙청은 명예편집인, 김윤수 백영서 염무웅 이시영 임형택 최원식은 편집고문을 맡게 된다. 그동안 노고를 아끼지 않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새 편집진을 꾸리고 새 50년을 맞이하는 창비에 독자 여러분의 질정과 한결같은 성원을 바란다.
한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