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대전환, 어디서 시작할까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문학의 질문과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저서 『개념비평의 인문학』,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문학의 질문
근대예술은 예술 아닌 것과의 구별을 지워 없앰으로써 고유성을 성취한다는 랑씨에르(J. Rancière)의 말은 자칫 지나치게 명쾌하게 들릴 수가 있다. 거기 실린 무게를 실감하려면 버림으로써 얻는다는 역설이 예술작품 하나하나에 요구할 고투를 떠올려야 한다. 이 주장을 하나의 등식처럼 접수하여 근대예술의 고유성이란 구별 지우기 혹은 구별 없음이라 치환하면 예술적 고투의 현장은 더한층 멀어지는 느낌이다. 문학의 역사에도 근대적 현실에 스스로를 개방하면서 이 현실을 내부로부터 가르고 맞선 노력의 자취가 뚜렷하다. 더구나 랑씨에르 자신은 근대 이전의 예술을 규제했다고 본 진리나 윤리의 차원마저 떠안은 채 이루어진 노력이다. 한국문학사에서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제출된 담론 역시 자기 아닌 것과의 섞임과 대결을 통해 발휘되는 문학의 고유성을 간직하고 이를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촉구할 가능성으로 구축하려 한 운동이었다. 문학은 그렇듯 세계가 스스로에 던지는 가장 예민하고 난감한 질문이고자 하며 그 질문의 형식을 버리지 않은 채 답에 이르고자 한다.
해체와 유희와 조립 같은 키워드가 떠도는 사이에도 지금 이곳의 문학은 변화를 새김으로써 비로소 존재하는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 엄연한 지속성을 확인하는 데는 때로 세계문학의 현재에 눈을 돌리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전에 없던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는 번역에 힘입어 실제로 우리에게 이른바 세계문학이란 거의 동시적 경험이 되고 있으며 한국의 문학장(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세계문학의 최근 지형을 단편적으로만 보아도 “‘문학’이 윤리적·지적 과제를 짊어지기 때문에 영향력을 갖는 시대는 기본적으로 끝”났다는1) 종언론의 진단은, 영향력이야 크든 작든 기꺼이 윤리적·지적 과제를 짊어진 작품들을 오히려 돋보이게 해준다. 그 가운데 선뜻 떠오르는 사례 하나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학의 역설적 고유함을 되새기는 것이 이 글이 목표하는 바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동물
한국에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여러권의 저서가 번역된 J. M. 쿳시(Coetzee)의 소설이 그 출발점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으로 현재 호주에 거주하는 쿳시는 영어권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부커상을 두번이나 수상하고 2003년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경력으로 보아 세계문학 작가의 반열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할 만하다. ‘케임브리지 문학입문’ 씨리즈는 쿳시를 “가장 존경받고 또 가장 많이 연구되는 동시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이 특히 “탈식민주의 비평가들 사이에 열띤 논쟁의 초점”이라는 점은 아파르트헤이트로 대표되는 남아공의 지난한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2) “복잡한 관념들과 맞붙는 어려운 작가”이며 “즉각적이고 인상깊은 충격을 독자에게 미친다”는 일견 상반된 평가가 암시해주듯이,3)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킨 『치욕』(Disgrace, 1999)을 포함하여 그의 소설은 언제나 날카로운 지적·윤리적, 심지어 정치적 시험으로 독자를 이끈다. 탈구조주의 이래의 여러 담론을 환기하며 지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는가 싶으면 무겁게 쌓인 역사적 난제가 던지는 윤리적 물음과 마주하게 만들고, 그런 물음에 답을 찾으려다보면 어느새 우리 시대의 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층위에 들어서 있는 식이다. 이처럼 사유의 여러겹을 접어넣고 풀어내면서 그의 소설은 문학, 특히 장편소설의 소진되지 않은 잠재성을 예시해준다.
2003년에 출간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4)는 쿳시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구성에서의 실험성이 도드라진다. 장(chapter)이 아니라 과(lesson)라는 이름으로 모여 있는 여덟편의 이야기(와 편지 형식의 후기)는 대체로 가상의 호주작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강연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소설의 상당부분은 실제로 쿳시 자신이 이런저런 자리에서 강연으로 발표한 내용이며 에세이나 팸플릿, 심지어 단행본 형식으로 출간된 바도 있다. 강연으로서의 이야기에 다시 강연이 들어가고 또 그 강연을 둘러싼 사건과 반응으로 이야기가 짜이면서 이 소설은 강연과 서사적 허구와 학술적·철학적 대화가 얽혀 들어간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된다. 각각의 과는 개별 제목을 통해 자기 주제를 뚜렷이 표방하는데, 1과 「리얼리즘」, 2과 「아프리카에서의 소설」, 3과와 4과는 「동물들의 삶」, 5과 「아프리카에서의 인문학」, 6과 「악의 문제」, 7과 「에로스」라고 되어 있다. (8과 「문에서」는 조금 다른 성격으로, 카프카적 배경에서 코스텔로의 작가로서의 신념이 일종의 심판에 부쳐진다.) 하지만 서로 다른 주제에서 퍼져 나오는 반향들이 때로 공명하여 증폭하거나 때로 밀쳐내며 굴절시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리듬이 조성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러모로 흥미롭고 독특한 이 소설의 전모를 살피기보다 3과와 4과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동물의 문제에 집중하려 한다. 이 부분은 1997년 프린스턴 대학의 강연에서 쿳시가 읽은 두번의 ‘강연-소설’(story-as-lecture)을 1999년에 『동물들의 삶』(The Lives of Animals)으로 출간한 후 다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합친 것으로, 애초의 단행본에는 쿳시의 강연에 대한 학자들의 반응도 포함되어 있었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다룬 많은 비평이 여기에 주목하고 있는바 언어로의 선회와 윤리로의 선회에 이어 ‘동물로의 선회’(animal turn)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동물’ 주제가 오늘의 세계를 사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매듭으로 등장한 사실을 반영해준다. ‘동물권’(animal rights), ‘동물연구’(animal studies), ‘동물관점의 비평’(animal-standpoint criticism) 등 동물을 키워드로 삼은 용어들 또한 널리 유통되는 중이다. 왜 동물인가. 그리고 인간과 인본주의를 둘러싼 또 한번의 근본적 전환 요구로 등장한 이 문제에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어떻게 스스로를 개방하고 있는가.
왜 동물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동물은 대체로 두가지 면에서 사회적 관심사가 되어왔다. 우선 반려동물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그와 관련된 각종 상품과 업종도 함께 늘어나고 동물을 가족의 정식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문화 혹은 라이프스타일이 확산된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이와 무관하지 않은 다른 하나로는 동물학대에 대한 경각심과 동물권에 관한 인식이 높아진 점이다. 동물실험이나 동물재료를 사용한 상품 생산, 무엇보다 공장제 사육 시스템이 동물에게 가하는 극심한 고통과 살육의 공포를 한층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면서 육식 거부를 비롯하여 동물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시스템에 대한 여러 형태의 저항도 나타났다. 이 모두는 인간이 다른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동물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동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에 힘입어 동물연구 분야 역시 활발해졌고 최근 논의들은 “권리와 보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어느 정도까지 동물들에게 적절한가를 질문”5)하고 있다. 동물연구는 (한때) 이성이 없는 존재로 생각된 대상을 다루는 점에서 여성연구와 이어지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던져진다는 점에서는 써벌턴(Subaltern, 하위주체) 연구와 맥이 닿아 있으며, 이 분야들이 그간 제기해온 여러 쟁점, 특히 ‘타자’와 ‘차이’에 관련하여 우리의 언어와 인식과 윤리의 한계를 심문하는 쟁점들을 받아 안는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경계를 꾸준히 흔들어온 것도 동물연구의 한가지 뚜렷한 흐름이다. “처음에는 영혼을 가졌는가,였다가 다음에는 ‘이성’, 그다음엔 도구 사용, 그다음엔 도구 제작, 그다음엔 이타주의, 그다음엔 언어, 또 그다음엔 언어학적 새로움 등등”6)으로 끊임없이 갱신되어온 인간의 ‘배타적’ 특징이 다른 동물에서도 발견된다는 취지의 실험과 관찰 결과들이 제출되고 있다.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보는 관점의 변화와 맞물려 있으리란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과 특권의식을 재고하거나 동물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의 고통까지 성찰하는 일이 당연히 포함된다. 그런데 그에 그치지 않고 동물이 우리의 인간임 혹은 인간됨에 어떤 결정적인 계기나 내재적 구성요소임을 알아보는 문제라면 이 주제는 더한층 복잡하고 절실해진다. 아감벤(G. Agamben)에 따르면 “어떤 방식으로 (…)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과 분리되어왔는지를 묻는 것은 (…) 이른바 인간의 권리와 가치 같은 거대한 쟁점에 관해 입장을 취하는 일보다 더 긴급”하다.7)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이 구분을 통해 결정되고 산출”되기 때문이며 또 그같은 “구분 자체가 오늘날 무너지고 있기”8)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를 인간으로 인식함으로써만 인간이 되는 동물”9)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태어난 그대로의 살아 있는 자기 존재를 비-인간(동물)으로 두고 그것 이상으로 스스로를 승격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처럼 아직 인간이 아닌 상태로부터 인간을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인간 ‘내부’에서 동물과 인간 사이의 구분을 생산하는 과정을 아감벤은 ‘인류학적 기계’(anthropological machine)의 작동으로 묘사한다.
인간의 경계를 정하는 구분선의 저쪽에 동물을 세워놓는 구도는 타자성의 발생구조를 환기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바는 타자로서의 동물을 만들어내는 기제가 바로 인간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고 어떤 인간이 비-인간, 곧 동물인가를 결정하려는 시도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의 문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남의 일’일 수 없다. 아감벤이 “우리〔서구—인용자〕 문화에서 다른 모든 갈등을 관장하는 결정적인 정치적 갈등은 사람의 동물성과 인간성 사이의 갈등”10)이라 보는 근거가 거기에 있으며 이는 또한 생명정치에 대한 그의 담론과 맥을 같이한다.
인간 내부에서 동물성과 인간성의 경계를 긋는 행위가 인간이 다른 동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그래서 어쩌면 아감벤이 제안하듯이 그 경계의 중심이 비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구분하는, 따라서 우리의 인간 개념을 관장하는 기계가 더는 작동하지 않게 하는 일”11)이 궁극적으로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벤야민(W. Benjamin)의 ‘구원된 밤’이라는 개념을 빌려 그가 설명하듯이 동물의 삶을 열고 드러내어 인간의 언어로 데려가기보다 그것을 그 닫혀 있음과 말없음에 되돌려주는 일이 필요할지 모른다.12) 하지만 그와 같은 ‘작동정지’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동일성과 차이 어느 하나로 환원하는 일일 수 없다고 할 때, 아감벤의 논의가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그 관계의 면모를 충분히 파고들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런 종류의 ‘근본적인’ 제안을 두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실제 동물들에 대해 거의 말해주는 바가 없다”13)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실재하는 동물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그것이 해소해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과 인간의 불분명한 경계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동물에 관한 두 강연 중 ‘철학자들과 동물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코스텔로의 첫번째 강연(3과)은 인간의 교육을 받은 유인원 레드 피터(Red Peter)가 학술원 회원들 앞에서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Report to an Academy)로 시작된다. 유대인 카프카와 동물로 시작한 그녀의 강연은 곧이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도살기업’의 동물 살육을 비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양이 끌려가듯 살육장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동물처럼 죽었다.’ ‘나치 백정들이 그들을 죽였다.’ 이처럼 나치의 수용소를 비난하는 표현들을 보면, 가축수용소나 도살장과 관련된 말이 너무 많아서, 제가 앞으로 할 비교에 대한 근거를 새삼스럽게 제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제3제국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사람들을 동물처럼 취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제3제국이 자행한 것에 육박하는, 아니 그보다 더 타락하고 잔혹한 도살기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쪽은 토끼, 쥐, 닭, 축산동물들을 끊임없이 자기재생시키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사업이니까요. 죽일 목적으로 말입니다.(87~88면)
앞서 인용한 아감벤 역시 유대인 학살과 동물의 문제를 연결시키며 “강제수용소와 죽음의 수용소들은 (…)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을 가르는 하나의 극단적이고 극악무도한 시도였을 것인데, 이 시도는 그같은 구분의 가능성 자체를 파탄시키는 것으로 끝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14) 코스텔로의 경우 두 사건 사이의 근원적 연관성이나 구조적 상동성을 이야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동일한 사태임을 주장한다는 차이가 있다. 그녀는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을 때 주변에서 이를 알거나 알지 못했던 방관자들, 그리고 희생자들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보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가 비난해왔듯이 오늘날 동물대학살을 알면서도 스스로 도덕적으로 오염되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녀 자신도 그 책임으로 고통에 시달린다.) 상당히 논란을 살 법한 이런 발언과 신념은 실제로 소설 속에서 여러 각도의 비판에 부딪힌다. 작중의 한 유대인 시인은 코스텔로가 유사성을 의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으며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지만, 신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축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해서, 가축이 유대인들처럼 취급을 받는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126면)라고 항변한다.
작가 주인공이 등장할 때면 으레 그렇듯 여기서도 코스텔로와 쿳시(곧 쿳시가 쓴 소설) 사이의 거리에 한층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코스텔로의 확신을 극화하면서 쿳시의 서사는 그녀의 관점을 승인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고 한 마이클 벨(Michael Bell)의 지적은 타당하다. 벨은 유대인 학살과 동물 주제 자체보다 유대인 학살을 사유하는 관습적인 방식을 흔드는 것이 이 서사의 중심이라는 입장이다. 그가 보기에 동물 주제는 “쇼아(Shoah, 홀로코스트)나 아파르트헤이트처럼 매우 근본적이고 도덕적으로 긴급한 삶의 문제와 관련하여 확신의 권위를 해체하고 설득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고안된 트로이의 목마”다.15) 벨의 이 진술도 코스텔로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인데 그녀는 동물 주제 그 자체야말로 어느 것 못지않게 ‘근본적이고 도덕적으로 긴급’하다고 반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대목이 관습적 사유를 흔드는 데 초점이 있다는 벨의 주장이 그만큼 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코스텔로는 이어 동물연구의 주장과 유사하게 ‘이성’을 근거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일을 반박하지만 사뭇 다른 방향에서 그렇게 한다. 동물연구의 일부가 동물에게도 의식과 이성이 있을 수 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그녀의 입장은 어떻든 이성이라는 기준을 받아들이는 순간 싸움에서 지게 된다는 쪽이다. 코스텔로는 가령 유인원들이 “인간과 이성의 능력을 공유하는 존재로서, 사람과(科)라는 더 큰 가족에 편입되어야 한다”거나 그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인간의 권리 혹은 인간에 가까운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데 반대한다(94면). 여기서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실제 증거를 고려하지 않았다거나, 어떤 성격의 의식인가 또는 인간이 얼마나 공유할 수 있는 의식인가 하는 것보다 동물이 의식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윤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16) 그러나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근거로 동물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일은 또다시 인간을 기준으로 줄을 세워 인간과 비슷한 동물일수록 좀더 많은 권리를 허용하는 식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이 “인권 담론 및 동물권 담론에 있는 인식의 결함과 모순을 드러내”고 “개별적 자격과 권리라는 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비판했다는 평가17)는 이 지점과 관련된다.
코스텔로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동물의 문제에 이성이라는 범주를 개입시키는 것 자체에 저항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질적인 존재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이란 거대한 동어반복”이고 자기완결적인 “전체의 체계”이므로(93면) 이성이 들어오는 순간 그것은 최고의 원리로서 들어오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은 스스로를 상대적 지위에 두는 데 좀처럼 익숙하지 않다. “이성에서 나오는 인간의 목소리”에 맞섰던, 그 목소리와는 이질적인 “사자의 으르렁거림과 황소의 울음소리”는 결국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93면). 동물과 관련하여 데리다(J. Derrida) 역시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 더 자세히 보면 다른 생명체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그는 이어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 순수하고 엄밀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점”, 다시 말해 동물은 몰라도 인간은 확실히 가졌다고 하는 그것이 인간에게 과연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18) 그의 해체작업은 인간에게 귀속된 것이 상대적일 뿐 아니라 매우 자기폐쇄적임을 보여주려는 코스텔로와는 다른 방향이다. 그러나 코스텔로가 이 대목에서 하고 있는 것 역시, “차이가 모호해질 때, 대립의 한계가 문제시될 때, 동일성이 있다고 결론 내릴 일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관심을 증폭하고 분석을 정교화”19)해야 한다는 데리다의 요청에 닿아 있음이 분명하다.
동물이 된다는 것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끊임없이 새로 그어져온 것처럼, 우리와 타자라는 구도에서 타자의 ‘전형’으로서 좀더 주목받는 대상도 그때그때 달라져왔다.20) 이제 동물이 그 또다른 전형으로 나타나면서 타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의 인식 혹은 재현 방식을 투사하지도, 그렇다고 인식/재현 불가능으로 신비화하지도 않는 관계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오랜 질문들도 고스란히 딸려온다. 더욱이 이 경우에 타자의 ‘침묵’은 한층 깊어졌으며, 간혹 들려오는 ‘으르렁거림’과 ‘울음소리’를 곡해할 가능성도 커졌다. ‘말할 수 없는’ 대상을 대표하여 재현한다는 것이 갖는 문제성이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코스텔로의 강연이 학살이라는 면에서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을 강조하면서도 이성이라는 면에서는 동물의 이질성을 앞세우는 것도 이 문제가 동일성과 차이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방증이다.
코스텔로는 ‘박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철학자 토머스 네이글(Thomas Nagel)을 언급하며 인식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다. 네이글은 우리가 인간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보았지만, 코스텔로에게 그 불가능이란 “잘못된 실마리”(103면)에서 기인한 결론이다. 박쥐처럼 감각하는 것이 박쥐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박쥐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로 충만한 것입니다. 완전히 박쥐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로 충만한 것입니다. 완전히 박쥐로 존재하는 것은 완전히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과 같고, 그것 또한 존재로 충만한 것입니다. 박쥐 존재가 첫째고 인간 존재가 둘째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존재로 충만하다는 것은 육체와 영혼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존재의 경험을 지칭하는 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기쁨이라는 말입니다.(103면)
코스텔로의 대답은 사실상 질문 자체의 전환을 내포한다. 동물을 ‘안다는 것’이, 가령 잠자리의 감각으로 보거나 개의 감각으로 냄새 맡거나 새의 감각으로 나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 자신이 가정하는 바는 아니지만 실은 인간의 감각에 어떤 기술적 장치를 이접함으로써 동물적 감각을 경험하는 일이 장차 불가능하리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코스텔로에 따르면 그때에도 ‘존재로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한 우리는 동물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코스텔로는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동물처럼 감각하는 것을 아는 일보다 ‘살아 있다는 것’ ‘존재로 충만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한 앎으로 앞세워놓는다.
하지만 박쥐에게도 ‘존재의 충만함’이나 ‘존재의 충만함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할까? 코스텔로의 답은 또다른 ‘의인법적’ 사고가 아닐까? 이런 질문에 그녀처럼 확신을 갖고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 나에게 ‘존재의 충만함’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앎이라는 결정이 이미, 직관적으로 내려져 있어야 한다. 동물이 된다는 것과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다시 맞물리게 된다. ‘공감적 상상력’(sympathetic imagination)에 “어떤 한계도 없고” 얼마든지 다른 존재의 삶 속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할 때도, 코스텔로는 “공감은 전적으로 주체와 관련이 있고 객체, 즉 ‘다른 존재’와는 거의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분히 모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전제한다(105면).
‘공감적 상상력’이 나오는 순간 예상할 수 있듯이 코스텔로는 문학작품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그 가운데 테드 휴즈(Ted Hughes)의 시 「재규어」를 공감적 상상력의 뛰어난 사례로 들면서 그것이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라 개체로서의 “재규어에 구현된 재규어성”에 관한 시이자 재규어의 “살아 있는 몸을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설명한다(131~32면). 벨도 지적했다시피 휴즈의 시가 과연 그러한지도 의문이고,21) 그 시의 성취를 설명하는 코스텔로의 언어에서 그녀 자신이 비판한 네이글 식의 수사가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려는 바는 코스텔로의 비평적 역량이 아니라 탁월한 공감이라 할지라도 엄밀히 하면 ‘인간적인 것’ 안에 머문다는 그녀의 인식이다.
제가 오늘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라며 가져온 시는 이런 것입니다. 동물에게서 관념을 찾으려 하지 않고 동물에 관한 것도 아닌, 오히려 동물과의 관계맺음(engagement)에 관한 기록인 시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시적 관계맺음이 갖는 특이한 점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하게 일어난다 해도 그 대상에게는 전적으로 상관없는 문제라는 점입니다.22) 이러한 점에서, 이런 시들은 대상을 움직일 의도를 갖는 연애시와는 다릅니다. (…) 그것은 동물로서는 공유하는 바가 없는 전적으로 인간적인 경제에 속하는 것입니다.(128면)
설사 우리가 동물이 된다는 것을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동물됨을 장악하게 해주는 사건이 아님은 물론이려니와 인간됨을 벗어던지고서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다. 동물에게 가장 다가간 듯 보이는 순간은 동시에 ‘인간적인 경제’의 경계를 새롭게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코스텔로의 ‘동물 되기’는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긍정인 듯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렇듯 가능성의 한계에 대한 의식을 동반한다. 알 수 없는 타자로 신비화하지 않지만 알 수 있음의 의미와 권능을 과장하지 않는 어떤 지점에 코스텔로의 입장은 그 나름으로 확고히 서 있다.
그 지점이 아감벤이 말한 ‘말없음’으로 되돌려주기,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구원된 존재로 돌려놓기와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다. 관계맺음을 통해 어떤 ‘말’이 발생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말을 상대에게 덧씌우지 않는 점에서 ‘말없음’의 존중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코스텔로나 쿳시의 서사가 고려하지 않은 것은 그와는 다른 데 있다. 동물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공감적 상상력을 단련하고 존재의 충만함에 대한 앎을 되새기는 이 ‘인간적인 경제’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어떤 경계 긋기를 다시금 작동시킨다. 아감벤식 ‘인류학적 기계’의 작동과는 다른 이런 구분의 작동에 관해서도 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이 된다는 것, 그리고 문학
동물에 관한 강연을 중심으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를 읽으면 자칫 이 소설이 여러 견해들이 전시되고 시험되는 지적 경연장인 듯 비칠 수 있다. 그런 면에 한정한다면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야기하기, 시험하기,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라는 사건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23)라는 평가가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지적 경연으로 보더라도 물론 이 소설은 상당히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 코스텔로 자신이 펼쳐놓는 생각에 담긴 통찰과 모순, 그녀를 반박하는 대화에 담긴 정당성과 한계 들이 두루 배치되어 있을 뿐 아니라, 느슨하고 산재된 듯 보이는 인상과 달리 아프리카의 현실과 탈식민문학의 문제, 인간의 육체와 고통이라는 문제 등 동물 주제와 저변에서 연결될 수밖에 없는 다른 주제들이 서로를 변주하면서 전체적으로 단단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여러 입장이 가능함을 알게 해주는 것이나 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타당한가를 저울질하게 하는 것으로는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에 독자를 정서적으로 또 윤리적으로 끌어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코스텔로의 강연은 작중의 청중을 설득하는 데 대체로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그녀가 자신의 생각에 투여한 믿음의 강도, 아니 오히려 그 생각이 작가로서의 그녀의 삶에 ‘들어가 있는’ 정도를 보여줌으로써 이 소설은 그녀가 제기하는 질문의 중요성을 각인한다. 유대인 학살과 동물살육이 동일한 성격이라고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동일하다고 믿고 그 믿음으로 움직이는 코스텔로를 통해 동일성을 질문하는 일이 절실한 사안임을 설득하는 것이다. 유대인 학살보다 더 끔찍한 동물살육을 어떻게 용인할 수 있느냐는 그녀의 물음은, 동물살육을 자행하는 인간이 언제든 유대인 학살을 재연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 무엇보다 날카롭게 일깨운다.
코스텔로는 동물을 주제로 한 강연들에 앞서 1과에 실린 ‘무엇이 리얼리즘인가’라는 제목의 또다른 강연에서 일찌감치 카프카의 레드 피터를 언급했다. 독백 형식으로 된 그 소설에서 화자가 실제로 원숭이인지 원숭이라 믿는 인간인지, 그리고 청중 역시 학술원 회원인지 아니면 훈련된 다른 원숭이들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페이지에 적힌 말들은 더이상, 이게 내가 의미하는 바다!라고 선언하지” 않고 “우리가 누구인지 얘기할 수 있던 시절”은 지나갔다는(30면) 취지로, 리얼리즘이 소박하게 가정하던 믿음들이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하지만 리얼리즘이라면 “냄새나는 속옷”이나 “코 후비는 것” 같은 시시콜콜한 세부의 문제인데 난데없이 어째서 카프카냐는 아들의 질문에 코스텔로는 이렇게 말한다.
카프카가 사람들이 코를 후비는 것에 대해서 쓴 건 아니지. 하지만 카프카에게는 유식하고 불쌍한 그 원숭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짝을 찾게 될지 생각할 시간은 있었어. 그 원숭이가 말이다, 사육사들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해 만들어낸, 얼이 빠지고 반쯤 길들여진 암컷 원숭이와 어둠 속에 있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카프카의 원숭이는 삶 속에 들어가 있지. 삶 자체가 아니라 들어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의 원숭이는 우리가 그러하듯이, 네가 나한테, 또 내가 너한테 있듯이, 삶 속에 들어가 있어. 페이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든 그렇지 않든, 작가는 그 원숭이를 끝까지, 말할 수 없는 쓰라린 종말에 이르기까지 따라가지. 카프카는 우리가 잠자고 있는 그 틈 사이에 깨어 있어. 그래서 카프카가 〔리얼리즘이라는 주제에—인용자〕 들어맞는 거지.(47면)
여기서 말하는 ‘삶 속에 들어가 있음’으로서의 리얼리즘은 ‘동물 되기’의 공감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 동물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가르는 경계를 흔들고 그 경계가 초래하는 고통에 직면하는 일이며 또한 그 경계 너머에 있는 존재의 충만함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공감적 상상력을 최상으로 구현하는 사례가 시(詩)라면, 거꾸로 동물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일은 시인 되기 혹은 작가 되기의 가능성에 하나의 본질적 사안으로서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소설에서 ‘순수한’ 서사적 허구에 가장 가까운 8과 「문에서」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패러디하며 코스텔로 자신의 공감적 상상력이 심문에 부쳐진다. 믿음에 관한 진술서를 요구받은 그녀는 작가란 받아적는 서기처럼 믿음이 없는 존재라 항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이 쓰든 안 쓰든 믿든 안 믿든 엄연히 존재하는 고향 개펄의 개구리들을 믿노라고 진술하기도 한다. 이는 강연에서 보여준 그녀의 ‘믿음’과는 다른 느낌의 진술로서, 결말로 향할수록 코스텔로의 신념이 확신을 잃어간다는 평가도 여기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 모든 심판의 정황 자체가 하나의 가상이며 “일종의 문학적인 테마파크”(269면)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녀가 ‘문 너머로’ 직진하지 않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작가의 ‘개구리 되기’에 개의치 않는 개구리들을 믿는다는 데 대해 판관 중 한 사람은 그 또한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믿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같은 반박과 재반박은 아마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이것은 코스텔로의 자기심판이며, 그녀의 자기심판을 포함하여 이 소설 전체는 일종의 메타픽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메타픽션은 자기반영적 회로에 갇혀 있지 않다. 그것은 문학이 세계를 향해 질문하되 언제나 자기질문의 형식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의 메타픽션이다. 그렇듯 인간과 삶의 근본적인 전환을 향한 화두에 스스로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 또한 ‘리얼리즘’의 한 사례로 들어맞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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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b 2006, 65면.
2) Dominic Head, 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J. M. Coetzee, Cambridge UP 2009, 서문 ⅸ면, 95면.
3) 같은 책 서문 ⅸ면.
4) J. M. Coetzee, Elizabeth Costello, Penguin 2003. 국역본으로는 왕은철 옮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들녘 2005)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국역본을 인용하고 본문에 면수만 표기하되 필요한 경우 약간의 수정을 덧붙이기로 한다.
5) Kari Weil, “A Report on the Animal Turn,” Diff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21:2 (2010), 2면.
6) Cary Wolfe, Animal Rites: American Culture, the Discourse of Species, and Posthumanist Theor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2면.
7) Giorgio Agamben, The Open: Man and Animal, trans. Kevin Attell,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4, 16면. 제목에 암시되어 있듯이 아감벤의 이 책이 핵심적으로 겨냥하는 바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세계를 결핍하거나 존재 계시의 잠재성 바깥에 있는 동물과 비교하여 설명한 하이데거의 논의다.
8) 같은 책 21~22면.
9) 같은 책 26면.
10) 같은 책 80면.
11) 같은 책 91면.
12) 같은 책 81면.
13) Kari Weil, 앞의 글 12면. 이런 평가의 직접적인 대상은 들뢰즈와 가따리가 말하는 ‘동물 되기’지만, 그들이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구분 중지와 인간적 의미화의 바깥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감벤의 논의와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14) Agamben, 앞의 책 22면.
15) Michael Bell, Open Secrets: Literature, Education, and Authority from J-J. Rousseau to J. M. Coetzee, Oxford UP 2007, 222면.
16) Norm Phelps, “Rhyme, Reason and Animal Rights: Elizabeth Costello’s Regressive View of Animal Consciousness and its Implications for Animal Liberation,” Journal for Critical Animal Studies 6:1 (2008), 6면 참조.
17) Elizabeth Susan Anker, “Elizabeth Costello, Embodiment, and the Limits of Rights,” New Literary History 42:1 (2011), 176면.
18) Jacques Derrida, The Beast and the Sovereign, Vol. 1, trans. Geoffrey Benningt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56면.
19) Jacques Derrida, 같은 책 16면.
20) 이 점과 관련하여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등장하는, 그러나 충분히 목소리를 부여받지 못한 여성인물 매리언 블룸을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을 써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고 설정된 점은 의미심장하며, 여성-(탈)식민주체-성소수자-동물 등으로 연결되는 타자의 연쇄를 떠올리게 한다. 코스텔로는 강연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존재하는 동물을 이해할 수 없을 리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 역시 가상인물임을 감안하면 이 대목의 함의는 더 깊어진다.
21) 마이클 벨은 코스텔로가 D. H. 로런스의 시를 통상적으로 오독한 나머지 휴즈를 로런스보다 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벨에 따르면 휴즈의 「재규어」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멜로드라마적인 반면 로런스의 시야말로 근본적인 타자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발휘된 공감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이다. 그밖에 로런스와 동물에 대한 벨의 흥미로운 논의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했으나, 로런스에게는 모든 개별 피조물이 각기 통약 불가능한 존재의 충만함을 갖는다는 생각과 함께 어떤 ‘생명의 위계’가 있다는 생각이 모순적이면서도 상호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공존하고 있었음을 지적해둔다. Bell, 앞의 책 223~24면.
22) 이 대목(“they remain a matter of complete indifference to their objects”)이 번역본에서는 “대상에 완전히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로 되어 있으나, 대상에게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게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일이라는 의미로 옮겨야 한다. 그밖에도 몇가지 수정을 거친 인용임을 밝혀둔다.
23) Derek Attridge, J. M. Coetzee and the Ethics of Reading: Literature in the Even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4, 2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