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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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초점
 

신은 인간을 어떻게 길들이는가

김경욱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정주아 鄭珠娥

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역사철학적 소설 다시 읽기: 최인훈 『광장』론」 「벌레 혐오증의 역사: 이승우론」 등이 있음. har00@snu.ac.kr

 

 

3541대중문화 시대의 출발이라 일컬어지는 1990년대, 김경욱(金勁旭)은 당대의 문화적 흐름을 재빨리 문학의 장(場)으로 끌어들이는 기민함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에는 영화, 드라마, 팝송, 인터넷 게임 등 장르적 경계를 넘어선 다양한 대중적 ‘취향’이 도입되었다. 개인적 호오(好惡)의 감각에서 출발하는 대중문화 세대의 글쓰기는 마치 정치와 문학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금번 여섯번째 소설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2011) 출간하고 어느덧 등단 20년을 바라보는 작가 김경욱의 행보를 더듬어보면, 그 선언적인 전환에 응당 따랐어야 할 고민이 마치 뒤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작가를 붙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세계에 대한 자기중심적 재편의 욕구를 갖지만 그 의지의 지향이나 책임의 문제는 외면하는 시대, 다양성을 보이되 상호소통의 가능성은 닫힌 모나드(Monad, 단자)들의 집합이 되어버린 시대에 보편은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느냐는 고민이다.

김경욱의 소설이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문제삼는 ‘관계’적 사랑의 테마에서, 타인의 삶의 양상을 읽고 이를 반성적 현실 인식으로 수용하는 ‘윤리’적 사랑의 테마로 이동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미 다섯번째 소설집 『위험한 독서』(문학동네 2008)에서 그는 독서 행위란 텍스트에 자신을 비추어 의미를 길어낼 때에만 보편으로 이르는 길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경우 작가란 세계라는 텍스트에 자신의 형상을 비추어낸 일차독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는 텍스트 내의 제왕 자리를 내놓고 텍스트 밖으로 떠밀려나온 작가가 마주친 진짜 세계, 즉 독해가 도무지 불가능한 이 괴물과 대면하는 순간의 두려움과 그럼에도 진실은 주관이 구획한 범주 밖에서만 읽어낼 수 있다는 집념 위에 마련된 신 대 인간의 전장(戰場)이다.

전통적인 소설관에 따르면, 세계와 인간의 항전을 그릴 때 그 초점은 승부의 행방이 아니라 인간의 장렬한 패배로 인해 부각되는 세계의 냉혹함에 있다. 텍스트 내부의 평면적인 완결성을 지향하는, 혹은 주관의 의도대로 구성된 세계를 전부라 믿는 순박함은 ‘사물만을 찍는 사진사’(「러닝 맨」), 건축물만 찍을 뿐 ‘촬영자의 시선을 사진에서 지우려고 드는 사진사’(「연애의 여왕」) 등의 인물로 제시된다. 이같은 순박함은 「99%」 「러닝 맨」 「허리케인 조의 파란만장한 삶」 등에서 정체불명의 적과 마주하면서 깨어져나간다. 프레임 밖에서 조우한 적의 형상은 작중 인물들의 욕망과 의혹의 형상을 닮아 있으며, 이들은 인물들의 내면에서부터 자라난 두려움을 먹고 자란다. 결국 적을 통해 인물들이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약점이나 속물성 등 외면하고픈 내면적 어두움뿐인데, 이 반복적 자기응시로 인해 인물들은 점차 황폐해진다. 이때 세계는 그저 거울처럼 조용히,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서 항복을 받아낸다. 표제작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역시 세계의 냉정한 침묵 앞에 무릎을 꿇는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은 성추행당한 손녀를 위해 신의 뜻을 대신하여 응징에 나선다. 신의 심판을 실천한다는 그의 명분과 결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결단은 악의 세력의 참회도, 혹은 신의 응답도 끌어내지 못한다. 그에게 남은 것은 쇠약한 육신과 출구 없는 가난이라는 캄캄한 절망뿐이다. 어느순간 시력을 잃고 손녀를 등에 업은 채로 어둠속에 망연히 멈춰선 주인공의 절망 앞에, 세계는 그저 무응답으로 일관하며 오로지 의지의 헌납만을 요구하는 괴물 같은 모습으로 군림하고 있다.

세계의 침묵에 잠식당한 생은 그저 무력한 인내로 견뎌야 하는 시간이 된다. 이 소설집의 여러 작품에 드러난 ‘밥상’의 모티브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명과 삶을 지속시키는 가장 원초적인 기계적 ‘반복’의 절대성이다. “신은 인간을 채찍이 아니라 시간으로 다스린다”(「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10면)는 한 등장인물의 자조처럼, 원치 않아도 밥을 짓고 먹어야 살 수 있다는 단순한 반복의 섭리는 시간(세계)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근본적인 무력함을 잘 나타낸다. 작가는 이 밥상의 반복성이 갖는 위력을 한편으로는 세습되는 빈곤함으로(「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갈등도 무력화할 수 있는 이해와 수용의 원천으로(「아버지의 부엌」) 제시하면서 비판과 희망의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놓고 있다.

침묵과 반복을 통해 세계가 절대적 신성으로 인간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 이 소설집의 어두운 전언이다. 그러나 그 전언이 도리어 출구 없는 어둠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인간을 절실하게 원하고 껴안게 되리라는, 한줄기 작은 빛에 대한 기대의 또다른 표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정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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