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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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미국 분열 이후의 세계, 어떻게 대응할까

 

한반도의 새봄을 위해

남북관계의 성찰과 해법

 

김연철 金鍊鐵

인제대 교수, 전 통일부 장관. 저서 『70년의 대화』 『협상의 전략』 『냉전의 추억』 등이 있음.

dootakim@daum.net

 

 

1. 성찰: 세개의 변곡점

 

‘낡은 기대’와 ‘빠르게 변하는 현실’이 엇박자를 내면서 남북관계는 길을 잃었다. 어디서부터 엇갈렸을까? 2019년 2월부터의 남북관계 교착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여전히 근거 없는 낙관이 착시를 일으키지만, 남북관계에는 ‘원심력’이 작동한다. 2018년 갑자기 찾아온 봄에서 현재의 ‘구조화된 겨울’까지 오는 동안 세개의 변곡점을 거쳤다.

첫번째는 2018년 북한의 신년사다. 북한은 “핵무력 완성”으로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적 환경 마련’을 위해 평창올림픽 참가 용의를 밝혔다. 핵무장과 대화는 모순이고, 핵무장과 평화는 어울리기 어렵다. 수면 아래에 대결의 구조가 존재한 채 2018년 수면 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2018년의 봄은 모순으로 시작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두번째 변곡점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다. 하노이회담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이어진 장기교착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었다. 당시 트럼프 정부 내부의 혼선과 준비 부족은 이후에 상세하게 밝혀졌다. 성과를 장담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적잖았는데, 남북 모두 실패의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정보 실패’가 아닐 수 없다. 하노이회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수면 아래에 존재했던 대결의 구조가 부상했고, 2018년 봄 이전으로 정세는 역주행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정세의 구조가 결정적으로 변경됐다. 마침 미중관계의 대결이 본격화하는 시점에서 북·중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함에 따라 북중관계는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워졌다. 반면에 북한의 대남 불신은 높아졌고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남북관계의 역할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협상의 문턱을 높이고, 비핵화 의사를 취소하고, 2018년 신년사의 기조로 돌아갔으며, ‘근본 문제의 해결과 자력갱생 노선’을 강조했다.

세번째 변곡점은 2020년 1월 시작된 코로나19가 가져온 ‘보건위기’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코로나 환자가 없다고 보고한 북한은 초기부터 강력한 봉쇄와 격리 정책을 시행했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차단했고, 국내적으로도 이동을 통제했으며, 방역을 위해 경제활동을 제한했다. 북한의 ‘보건위기’는 한반도 정세의 구조적 특성을 덮어버렸다. 북한은 외교를 중단하고 교류를 차단했다. 평양의 주요 외교 공관이 철수했고 국제기구 사무소도 문을 닫았다. 제재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 선택한 관광 개방을 중단했으며 인도 분야와 사회문화 분야의 인적 교류도 봉쇄했다. 그렇게 북한은 전통적인 고립으로 복귀했다.

남북관계의 원심력은 이같은 세개의 변곡점을 거치면서 여러 층으로 쌓였다.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쌓여 있는 원심력의 구조를 하나하나 해체해야 한다. 우선 보건위기가 끝나야 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나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협력을 위해서는 북한이 정보를 나누고 공동 해결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성화된다. 북한이 2019년 5월 세계동물보건기구(OIE)에 아프리카돼지열병 발병 사실을 보고한 이후 현재까지 국제협력을 거부한 사례처럼 대응한다면, 상당 기간 외교와 경제,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가 어려워질 수 있다.

바이든 정부의 출범으로 북핵 협상을 다시 시작할 계기가 생겼다. 그러나 환경은 유리하지 않고, 해결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대결에서 협상으로, 그리고 협상에서 교착으로 전환한 지난 시기를 성찰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2. 전망: 세개의 변수

 

남북관계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먼저 핵심 변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가 상존한 지난 30년간 남북관계의 독자적 공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포괄적인 제재가 시행된 2017년 이후의 상황은 더욱 그렇다. 결국 한반도의 비핵·평화 프로세스가 움직여야 교류협력도 가능하다.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쪽은 대체로 2017년 이후의 구체적인 제재체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정확하게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미중 전략경쟁, 제재와 안보 딜레마, 그리고 북한의 자력갱생 전략이라는 세가지 환경 변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1) 미중 전략경쟁

한반도 질서는 동북아 질서와 분리하기 어렵다. 특히 하노이회담 실패 후 한반도 질서를 결정하는 구조는 남·북·미 삼각관계에서 남·북·미·중 사각관계로 전환했다. 남·북·미 삼각관계는 남북, 북미, 한미의 세 양자관계로 이루어지지만, 사각관계는 6개의 양자관계와 4개의 삼각관계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다. 미중 전략경쟁이 본격화하면서 한·미·중 삼각관계의 중요성도 커졌다. ‘사드(THAAD) 사태’로 이미 겪었지만, 앞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미중, 한중, 한미의 세 양자관계가 악순환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

나아가 남·북·중 삼각관계의 작동도 주목할 만하다. 북중관계는 북한의 대미협상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남북관계의 우선순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그만큼 중국의 역할이 커졌으며, 북한 문제를 둘러싼 한중 간의 소통과 협력이 중요해졌다.

현재 한반도 질서의 핵심적 문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중협력이 필요함에도 양국의 전략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든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을 계승하겠다고 밝혔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 조정관’으로 임명된 커트 켐벨의 보고서는 바이든 정부의 아시아 정책을 예고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과 트럼프 정부의 모순이 결합하면서 아시아 지역 질서의 유동성이 커졌다고 강조한다.1 트럼프 정부의 아시아 전략을 계승하되 운영체계(operating system)를 개선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트럼프 정부가 동맹국과 불화를 겪고 지역의 다자협력을 무시해서 인도·태평양 전략의 운영체계를 고장 냈기 때문에, 동맹국과의 협력과 넓은 연대의 형성으로 미국이 축(hub)이 되고 동맹국이 바큇살(Spoke)이 되는 전략 운영의 효율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바이든 정부는 혼돈에서 질서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은 모순적이고 전략에 일관성이 없었다. 중국과 무역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동맹국에도 관세폭탄을 퍼붓고, 군사훈련에 부정적이면서 군비통제 관련 조약을 파기했다. 대북협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신뢰가 없으면 ‘빅딜’이 어려운데, 트럼프 정부는 신뢰 구축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제재는 목표가 아니라 수단임에도 협상의 성공을 위한 중요한 수단을 활용할 의사가 없었다.

바이든 정부가 정책결정 과정을 정상화하면 그만큼 한미 간의 소통이 원활해질 수 있다. 바이든 정부 인사들이 트럼프 정부가 동맹국과의 이익 조화 원칙을 훼손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맹국의 의견을 듣고 협의하는 ‘외교’를 복원한다 해서 과연 이익 조화를 이룰지는 미지수다. 국익 우선은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이고, 미국이 자신의 이익보다 동맹국의 이익을 우선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의 혼돈이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힐 기회였다면, 바이든 정부의 질서는 한국 외교에 새로운 도전이다.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실무 차원의 합의가 있어서 쉽게 타결될 것이다. 그러나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나 주한미군의 위상 및 역할에 대해서는 한미 간에 견해차가 발생할 수 있다. 바이든 정부가 주도할 인권 문제나 기술 분야에서의 중국 견제도 한국으로서는 상당한 부담이다.

바이든 정부의 입장이 중국 견제에 대해서는 상세하지만, 북핵 문제에서는 모호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가 조기에 가동되지 않은 채 중국 견제를 위한 한미협력을 구체화하면, 한미와 북중의 대립이 심해지고 미중, 한중, 북미, 남북관계의 발전은 그만큼 어려워진다. 결국 한국 외교의 과제는 미중 전략경쟁하에서 한반도 문제를 분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핵 협상을 조기에 시작해서 전략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침 바이든 정부 외교안보 주요 인사들은 이란과의 핵 협상에서 유럽연합( EU)의 중재로 고비를 넘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풀기 어려운 분쟁’에서 다자적 접근의 장점을 이해한다. 물론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 일본과의 협력을 강조한다. 그러나 북핵 문제는 역사적 경험과 해결의 구조를 고려할 때 미중협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풀리기 어렵다. 비핵화의 협상 과정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상응 조치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핵심 당사자인 남북한과 미중의 4자회담이 필수적이다.

 

(2) 남북관계의 원심력

남북관계의 원심력은 이미 북핵 협상이 중단되고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던 2008년부터 2017년까지의 시기에 만들어졌다. 2018년 세번의 정상회담이 이어졌지만, 결국 2019년 2월 하노이회담이 실패하면서 다시 교착 국면으로 전환했다. 일시적으로 멈추었던 남북관계의 원심력도 본격적으로 작동했다.

남북관계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제약은 제재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대한 제재는 꾸준하게 지속되어왔지만, 2017년 북한의 핵무장 완성단계에서 그 범위와 수준이 달라졌다. 그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통과된 세개의 제재 결의안은 그 이전의 제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에는 대량 살상무기나 군수품, 혹은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큰 민감 품목을 제재대상으로 삼았다면, 이때부터는 북한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포괄적 제재로 전환했다. 석탄을 비롯한 광물 수출을 금지했고, 북한의 해외 노동자들이 모두 귀국해야 했으며,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위탁가공 수출도 금지했다. 금융 분야의 제재대상도 늘어났고, 우회해도 처벌할 수 있는 세컨더리 보이콧 조항도 정교해졌다. 포괄적 제재는 남북 교류협력의 공간을 축소했고 북중 경제협력 분야를 제한했다. 이로 인해 2018년 이후 북한은 제재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화를 벌 수 있는 관광산업에 집중했다.

인도적 분야는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구체적인 장비나 물품은 제재 면제를 받아야 한다. 제재 면제는 그동안 일관성이 없거나 과도한 유권해석이 적지 않았으며, 정세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고, 유연성이 부족했다. 바이든 정부는 정치적·군사적 문제와 인도적 문제를 분리하겠다는 입장으로, 인도 분야의 제재 면제 절차를 유연화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인권과 인도를 같은 범주로 인식하기 때문에 충돌 가능성도 있다.

한편 북한은 필수적인 인도적 지원을 중국에 의존한다. 중국은 북한과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2019년부터 식량과 비료를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다.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공급을 확보함에 따라 남북관계에서 인도 분야 협력은 진전되지 못했다. 남북관계 악화로 북한은 남북 민간교류도 허용하지 않았다. 인도 분야의 남북협력은 초기에는 주로 제재 면제의 경직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2019년 2월 이후에는 북중관계의 진전과 남북관계 악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제재 완화는 비핵화의 진전에 달려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회담에서 영변 폐기와 제재 완화의 교환이 실무협의에서 논의됐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스몰딜’을 할 바에는 ‘노딜’이 낫다는 논리로 거부했다. 결국 하노이회담은 실패했고, 제재 완화의 기회는 사라졌으며, 북한은 대남 적대 노선으로 전환했다.

안보 딜레마의 악순환도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안보를 강화했는데, 이는 상대의 안보를 자극해서 결국 자신의 안보 불안을 가져오는 전형적인 안보 딜레마에 해당한다.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는 한반도 차원의 군비경쟁으로 이어졌고, 남북 모두 ‘충분 억지’를 추구하면서 안보 딜레마의 악순환에 빠졌다. 미중 전략경쟁이 군사 분야에서 펼쳐지고 주한미군의 무기나 장비가 증강되어 한국은 상시적인 ‘연루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 차원에서 동시에 안보 딜레마가 부정적 상승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커졌다. 한반도의 평화는 이러한 안보 딜레마의 덫에서 빠져나와야 시작할 수 있다. 군비경쟁과 비핵·평화 프로세스는 양립하기 어려우므로 해결을 위해서는 적정 억지력의 수준을 검토할 때다.

남북관계의 원심력이 작동하면서 북한은 민족 담론 대신 국가 담론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우리 국가제일주의’는 2017년 11월 30일 처음 『노동신문』에 등장했는데2 2019년부터 빈도가 늘어났다. ‘국가제일주의’는 국가의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민의 헌신을 강조한다. 대체로 핵무장을 비롯한 국방력 강화에서 자부심을 찾고, 국가 담론의 등장 이후 상대적으로 민족 담론이 줄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의 원심력이 반영된 ‘국가성’의 강조로 해석할 수 있다.

2021년 1월의 8차 당대회에서도 ‘국가제일주의 시대’가 강조되면서 민족이나 통일이라는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김정은 위원장은 당대회 보고에서 “통일이라는 꿈은 더 아득히 멀어졌다”라고 평가했다. 남북관계의 원심력은 대남 관련 부서의 위상 하락과 역할 축소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아가 (당규약이 공개되어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통일 문제의 비중이 약화되고 서술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보건위기의 과정에서 북한이 대남 적대감을 국내정치적으로 동원하고 있다는 점도 우려할 만하다.

이렇듯 남북관계의 원심력은 전통적인 안보 딜레마와 군비경쟁, 그리고 북핵 문제 악화로 인한 제재로 구조화되었다. 2018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협상이 진전되면 북한의 전략도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다만 협상이 실패하면서 불신이 커졌고, 그래서 먼저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상대의 양보를 주장하면서 좀더 원칙적인 입장으로 후퇴했다. 북한은 8차 당대회를 통해 정세 악화의 책임을 한미 양국에 넘기고, 근본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3) 자력갱생 전략과 북중경제권

북한은 8차 당대회에서 제재, 자연재해, 그리고 보건위기가 경제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자력갱생을 선언했다. 자력갱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북한의 전통적인 국가전략이었다. 그러나 포괄적인 제재가 시행된 2017년 이후의 자력갱생 전략은 ‘제재 국면’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우선 포괄적 제재의 영향으로 북한의 해외구매 능력이 감소했다. 2018년 이후 수출이 급감했지만 수입은 많이 줄지 않았다. 식자재나 건설자재, 그리고 기계류 등 중간재 분야에서 수입을 중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수출입의 격차로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외화 보유량이 줄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외화를 벌기 위해 관광 산업에 집중했다. 원산·갈마지구, 양덕지구, 삼지연지구에 대한 대규모 건설투자는 숙박시설을 늘려 해외, 특히 중국 관광객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2020년 1월 코로나가 발생하자 북한은 모든 교통을 차단하고 관광도 중단했다. 관광시설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보건 분야 즉 평양종합병원의 완공에 힘을 쏟았다. 보건위기로 공식 무역뿐 아니라 북중 간의 비공식 무역도 급감했다. 코크스나 중유의 수입이 어려워지고 기계나 부품 수입 또한 감소했다.

현재 북한은 자력갱생 전략을 강조하면서 금속, 화학, 전력 생산에서의 수입 대체를 시도하고 있다. 수입해야 하는 코크스 대신 북한에 매장되어 있는 무연탄을 이용하는 ‘주체철’, 석유 대신 석탄을 활용하는 ‘탄소하나 화학’, 그리고 전력 분야에서 중유를 사용하지 않는 ‘무중유착화공법’을 내세우고 있다. 대부분의 자력갱생 기술들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수입 능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대체비용이 많이 들고 에너지 효율이 낮은 등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보건위기가 최소한 올해도 지속된다고 했을 때, 장기적인 무역 축소는 공급 총량의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공급의 급감을 과연 내부적인 자원배분의 효율화로 보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8차 당대회에서 결정한 다양한 경제관리 개선의 효과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경제관리 제도 개선으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부족의 경제’를 보완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역 축소로 중간재의 수입이 줄어들고 공급부족이 생산부족으로 이어질 경우 내부적인 제도개선의 효과는 한계가 있다.

미중 전략경쟁 국면에서 북중 경제관계는 일시적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부분적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전환했다. 북한은 보건위기 이후에도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관광과 비제재 품목의 무역을 대부분 중국에 의존할 것이며, 중국은 식량과 비료 지원으로 북중관계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과거 남북관계 악화 시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났던 북한의 대중국 경제의존이 구조화되는 것은 우려할 만하다. 제재가 완화된다고 하더라도, 2017년 포괄적 제재 이전에 북중 양국의 중요 협력 형태였던 임금 격차에 따른 생산 분업을 재개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도 미중 전략경쟁 상황에서 국내 순환을 중시하는 ‘쌍순환 전략’을 선택했다. 국제 공급망의 위기를 적극적인 내수시장 확대로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런 차원에서 북한은 중국의 중요한 생산 거점이다. 물론 북한 입장에서 중국은 ‘수요독점’으로 부를 만큼 유일한 무역 상대국이다.

국제 공급망을 둘러싼 미중 전략경쟁이 격화될수록 북중경제권의 전략적 상호이익은 분명해진다. 북중경제권의 확대는 남북 경제협력의 수요 감소로 나타날 것이며, 남북관계에서는 각종 제품의 규격과 제도에 대한 규준을 포함하는 표준의 분단으로 이어질 것이다.

남북 경제협력은 비핵화 협상의 진전에 달려 있지만, 그 이전이라도 국제협력을 통한 우회의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남·북·중 삼각협력에서 한중협력을 우선 추진하거나 남·북·러 삼각협력의 경우 한러협력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남·북·중 및 남·북·러 삼각협력은 그동안 대체로 남북관계의 뒷받침 부족으로 진전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공급망과 시장의 분단을 막기 위해서는 북방경제권에의 전략적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남·북·중 삼각협력의 핵심 과제는 교통이다. 남북관계가 뒷받침되면 남북 양자 차원에서 경의선을 비롯한 남북철도 연결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경우는 한중협력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도 대안이다. 이미 한국도 정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제철도협력기구(OSJD)를 활용하는 다자적 접근도 검토할 만하다. 남·북·러 삼각협력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철도, 전력, 가스의 3대 협력 분야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킬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3. 3대 핵심 과제 

 

(1) 창의적 북핵 해법 

남북관계의 구심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왜 남북관계가 가다 서다 현상을 되풀이했는지, 왜 개선 국면이 이어지지 못하고 반복해서 교착 국면으로 전환했는지, 왜 남측에서 남북관계의 독자 공간을 살리자고 해도 북측이 거부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상호 군비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류와 협력이 힘들며, 남북한이 정세를 주도하기 어렵다. 핵 문제가 원심력의 구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북핵 해법은 어렵고 복잡해졌다. 과거와 비교해서 북한의 핵능력이 고도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렵다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지난 30년의 북핵 협상을 돌이켜보면 해법의 구조는 분명하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고 제재로도 한계가 있다. 협상은 어려워졌지만, 그럼에도 다른 대안이 없기에 여전히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여기서는 상세한 이행의 지도가 아니라 해법을 구상할 때의 몇가지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행과 협상의 교차병행이다. 북핵 해법의 원칙은 충분하다. 이미 1994년 제네바합의, 2005년 9·19공동선언, 2018년 북미 싱가포르 정상선언 등이 존재한다. 이제는 구체적인 이행계획이 필요하다. 바이든 정부의 외교안보팀은 대부분 이란 핵합의의 주역들이다. 이 합의는 본문이 100쪽에 가까울 정도의 상세한 이행계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로 이행을 중시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문제는 북의 핵능력이 이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완전한 비핵화까지의 이행계획서를 상세하게 작성하는 것은 합의가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려 불가능에 가깝다. 우선 북한의 핵능력을 동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멈추어야 후진에서 전진으로 전환할 수 있다. 협상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북한의 핵능력이 계속 고도화된다면, 협상이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다.

북한은 8차 당대회에서 핵무기의 소형 경량화, 규격화, 전술무기화, 초대형 수소탄 등 핵기술의 고도화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밝히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사거리 확장과 다탄두 기술,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의 다종화를 예고했다. 기술 평가를 해보면 과시와 과장을 발견할 수 있지만,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핵무력의 고도화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조기에 동결을 합의하지 않으면 비핵화의 대상과 범위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합의하려다 결국 이행 국면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그사이 북한의 핵능력은 더욱 고도화되는 악순환이 지금까지 실패의 공통점이었다. 동결, 초기 이행조치, 그리고 완전한 비핵화라는 단계적 협상 전략이 필요하다. 북핵 능력의 동결을 위해서는 과감하고 적극적인 상응 조치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당면한 이행은 상세하게 합의하고, 다음 단계의 이행은 원칙만 합의해 점진적으로 이행계획을 구체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행하면서 다음 단계를 협상하는, 다시 말해 이행과 협상을 교차하면서 병행할 필요가 있다.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행의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론이다.

둘째, 영변 플러스 알파 전략이다. 협상의 재개는 실패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2019년 2월 하노이회담은 실무자들이 합의한 영변 폐기와 일부 제재 완화의 교환을 트럼프 대통령이 거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북한의 고도화된 핵능력을 고려할 때, 영변 핵시설은 과거와 달리 북한 핵능력의 일부이기에 영변에 한정할 경우 너무 낮은 수준이라는 의견은 일리가 있다. 영변이 과거의 협상을 상징하는 장소일 뿐이라는 주장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영변은 비핵화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바이든 정부가 하노이의 실패한 협상을 그대로 반복하기는 어렵다. 국내정치적 부담으로 트럼프 정부가 ‘스몰딜’로 규정한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영변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플러스 알파는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다. 동결의 대상을 넓힐 수도 있고 신고의 범위를 확대할 수도 있다. 어떻든 알파의 보완이 성공한 협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되겠지만, 여전히 영변 폐기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신속하게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고, 다음 단계로 얼마든지 전환할 수 있다.

또한 영변은 여전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국제사회는 우라늄의 채취부터 핵물질 생산에 이르는 전체 핵 공정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영변에는 플루토늄 생산시설뿐 아니라 우라늄 농축시설도 있다. 대부분의 원자력 관련 전문가들 역시 영변에 있다. 비핵화의 전체 과정에서 영변은 일부지만, 그것을 폐기하는 과정에서 비핵화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만큼 ‘전체와 연결된 중요한 일부’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비핵화 이행을 조건으로 하는 스냅백(snap-back) 방식의 제재 완화다. 제재를 완화하지 않고서 비핵화를 진전하기는 어렵다. 비핵화 조치는 쉽게 돌이키기 어렵지만, 제재는 북한의 행동에 따라 언제든지 원상복구할 수 있다. 물론 비핵화의 수준과 제재 완화의 수준을 어떻게 조율할지는 협상의 중요한 과제다.

이란 핵합의에서 제재 해제는 합의를 어기면 제재를 되돌리는 스냅백 방식을 활용했다. 스냅백 조항은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의 조건부 합의다. 만약 하노이회담에서 스냅백 방식을 통해 영변 폐기의 댓가로 제재 완화를 합의했다면, 지난 2년 동안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을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트럼프 정부가 스냅백 조항을 이란 핵합의를 파기하는 근거로 활용했기에, 스냅백에 대한 북한의 불신이 과거에 비해 높아졌으리라는 점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스냅백은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의 안전장치이고, 합의를 이행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넷째, 협력적 위협감소(CTR) 프로그램의 활용이다. CTR은 과거 구소련의 비핵화를 위해 미국이 예산을 지원해서 해당 지역에 새로운 산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원자력 과학자, 핵기술자, 주민들의 직업전환 교육 등을 제공했던 방식이다. 비핵화의 과정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즉 영변을 포함해서 원자력 단지나 주요 장거리 미사일 기지가 밀집한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협력단지를 만들고, 관련자들에게 직업전환교육을 제공할 수 있다. 비핵화로 얻을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북한이 구체적으로 알게 할 필요가 있다. 제재 완화에는 절차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CTR 프로그램이 적용되는 지역을 포괄적 제재 면제가 이루어지는 경제특구나 북한이 그동안 준비해왔던 수출가공구역 등으로 활용 가능하다. 비핵화에서 물질, 시설, 무기만큼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지식의 비핵화는 가장 어려운 과제이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CTR 프로그램이 정말 중요하다. 미국은 CTR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있고, 이 과정에 한국도 적극적으로 참여해봄직하다. 북한은 비핵화의 미래를 이 지역에서 구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북한에 핵을 포기하는 댓가로 제공하는 상응 조치는 북핵 협상에서 매우 중요하다. 상응 조치는 크게 세가지다. 한반도 평화체제, 외교관계 정상화, 경제관계 정상화(제재 해제)다. 이들 조치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비핵화의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법제도적 평화와 사실상의 평화로 구분할 수 있다. 법제도적 평화는 크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나눌 수 있고, 사실상의 평화는 초보적인 수준의 군사적 신뢰구축에서 시작해 군비통제까지를 포괄하는 단계적 개념이다. 법제도적 평화와 사실상의 평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가운데 종전선언은 말 그대로 휴전 상태인 전쟁을 끝내자는 정치적 선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났다’라는 선언은 매우 간단하지만, 선언의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북한은 말뿐인 종전선언이 아니라 실질적인 종전 조치들을 요구하고, 미국은 종전선언에 상응하는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평화협정으로 가는 과정에서 잠정조치인 종전선언의 효과는 낮은 수준과 높은 수준으로 얼마든지 구분할 수 있다. 종전선언은 비핵화의 과정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자, 평화체제의 입구다. 선언의 실질적 효과에 대해서는 북한의 비핵화 수준을 반영해서 결정할 수 있다.  

다만 과도기적 조치인 종전선언은 많은 과제를 던져준다. 우선적으로 휴전관리체제를 종전관리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유엔사의 역할과 기능도 달라져야 하고, 남북한 간의 군사적 신뢰구축 수준도 높아져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로 나아갈 수 있다.

평화협정은 약속이고, 약속을 이행해야 평화체제가 완성된다. 평화협정의 체결 시점은 비핵화의 완성 시점이 아니라, 가능하면 비핵화의 완성을 촉진하기 위해 앞당길 필요가 있다. 분쟁에서 평화로 전환한 대부분의 사례에서 평화협정은 합의 당시의 관계를 반영해서 합의 수준이 결정되었고, 여러번에 걸쳐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다. 평화협정은 평화의 끝이 아니라 또다른 시작이며,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불신의 고개를 여러번 넘어야 한다. 그동안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당사자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남북한과 미중이 함께 참여하는 4자협정이 바람직하다.

 

(3) 남북 녹색협력

남북관계의 미래에 대해서는 수많은 청사진이 있다. 관계 개선의 시간보다 교착의 시간이 길었기에 이행의 시간은 언제나 짧았고 구상의 시간은 길었다. 시대가 변하면 당연히 구상도 달라져야 현실성을 가진다. 남북한의 경제력과 기술 격차를 고려할 때,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해야 할 구상이 있고, 달라진 현실을 반영해 보완해야 할 구상도 있다. 지금까지는 고려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과제도 있다. 바로 지속 가능한 녹색협력이다. 선진국들은 앞다투어 저탄소 친환경 경제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장기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바이든 정부는 녹색경제에 상당한 정책 우선순위를 두어 출범하자마자 빠리기후변화협정에 복귀했으며 친환경산업에 대한 공적 투자를 구체화하고 있다.

남북한의 녹색협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는 개발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북한을 규제회피지역으로 활용하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가령 남한에서 강모래 채취가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그러한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산업의 대북 이전 구상도 바람직하지 않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남북협력이 아주 중요하다. 동북아 지역 전체의 통합전력망을 의미하는 ‘슈퍼 그리드’ 구상에 북한을 포함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렵다. 낙후된 북한의 송배전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북한의 전력 사정을 고려하면, 일정한 지역에서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에너지 자립을 추구하는 마이크로 그리드 방식이 적합하다. 물론 환경을 파괴하는 방식의 신재생에너지는 피해야 한다. 환경친화적인 방식으로 북한에 수상 태양광시설이나 해상 풍력단지, 조력발전소 등을 만들 수 있다. 소수력 발전의 경우 남북 수자원 협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우선 접경지역 중심으로 남북 녹색협력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과 관련해서도 개발지향적 접근에서 탈피해 지속 가능한 녹색평화지대로 접근해야 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우 생산뿐 아니라 효율적인 저장·배분 체계를 발전시키고, 녹색에너지 산업의 기반과 새로운 에너지 공동체 운영의 모범적인 사례를 만들어 남북협력을 대비할 필요가 있다.

 

 

4. 다시 봄을 기다리며

 

정세는 변하고, 질서는 복잡하며, 예측은 어려워졌다. 낙관은 상투적이고, 비관이 현실적이다. 향후 한반도의 새로운 봄을 위해서는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북핵 문제의 해결은 알고 보면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와 공동번영의 기회를 만들어 동북아 지역질서를 변경하는 일이다. 과거와 미래, 대결과 협력이 공존하는 남북관계의 이중적 상황에서, 현상을 인정해야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 극복의 의지 없이 현상을 유지하려고만 한다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도 분명하다. 특히 현재와 같은 질서 전환기에는 더욱 그렇다. ‘거대한 전환’의 의지가 없고 운명의 자기결정권을 망각하면, 가끔 찾아오는 봄날을 살리지 못하고 구조적 제약 속에서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채 익숙한 대결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면서 남북관계의 국내정치화도 우려할 만하다. ‘북풍’이나 색깔론에 관해서는 시대착오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정치적 영향력도 사라졌다. 다만 색깔론은 민주주의 광장의 확성기 소음처럼, 시대의 과제를 논의할 기회를 앗아간다. 또한 국력과 어울리지 않게 외교적 상상력의 빈곤을 낳는다. 색깔론이 과거 독재체제의 부정적 유산 정도가 아니라,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우익 포퓰리즘’으로 진화할 가능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며, 성숙한 시민들의 연대를 중시해야 한다.

갈 길이 멀고 넘어야 할 산은 높은데, 다시 봄이 올까? 기회를 살리지 못했기에 기회의 창은 더욱 좁아졌다. 그래도 기회는 또 온다. 언젠가 올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의 실패를 성찰하고, 전략의 일관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해하기보다 장기적인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 30년 동안 풀지 못한 북핵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할 방법은 없다. 이 점을 인정하는 것이 해법의 출발이다. 북핵 문제는 ‘결과로서의 비핵화’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비핵화는 한반도에서 전쟁에서 평화로, 제재에서 협력으로, 분단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이다. 멈추지 않고 한걸음이라도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대북정책 결정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한반도의 질서 변화에 따라 남북관계는 양자관계로만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동북아 질서 변화 속에서 남북관계를 봐야 하며, 외교와 국방, 경제를 포괄적으로 조율해야 한다. 그러자면 대북정책의 결정구조를 효율적으로 개혁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제도 설계도 중요하고, 부처 간 조율과 협력의 체계도 개선해야 한다.

셋째, 달라진 질서 변화를 인식해야 한다. 과거에 사로잡힌 낡은 기대에서 벗어나 상황의 엄중함을 인정해야 해법을 마련할 수 있다. 한반도의 질서 변화를 깊이 이해하는 복합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국내외적으로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노력은 언제나 중요하다. 매우 안타깝지만, 대북정책의 초당적 협력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도 다수의 합의를 모으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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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urt M. Campbell and Rush Doshi, “ How America Can Shore Up Asian Order: A Strategy for Restoring Balance and Legitimacy,” Foreign Affairs 2021.1.12 참조.
  2. 정영철 「북한의 ‘우리 국가제일주의’: 국가의 재등장과 ‘체제 재건설’의 이데올로기」, 『현대북한연구』 23권 1호, 2020 참조.

김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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