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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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사만타 슈웨블린 『피버 드림』, 창비 2021

무엇이 ‘구조 거리’를 팽팽히 당기는가

 

 

이주혜 李柱惠

소설가 leesto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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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같은 거예요.

—무슨 벌레인데?

벌레 같은 거요, 어디에나 다 있는.(11면)

 

이렇듯 모호한 대화로 시작하는 소설의 현재 위치는 어두운 병실. ‘나’(아만다)는 병원 침대에 누워 죽어가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년 다비드는 이 대화의 주도자이자 편집자이다. 다비드는 아만다에게 계속 짧은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촉구하고, 아만다는 자신에게 닥친 재앙의 원인을 탐색한다. 다비드의 말에 따르면 이 재앙의 원인은 ‘벌레’이고, 두 사람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대화를 통해 이 ‘벌레’가 언제 어떻게 발생했는지 추적한다.

어린 딸 니나와 함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시골 지역으로 휴가를 떠나온 아만다는 우연히 이웃 여인 카를라를 만나고, 카를라는 언뜻 목가적으로 보이는 풍경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태양’이자 ‘인생의 빛’이었던 아들 다비드를 ‘괴물’로 바꿔치기 당했는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를라의 남편 오마르가 비싼 댓가를 치르고 빌려온 고급 종마가 개울물을 마신 다음 날 퉁퉁 부은 모습으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던 재앙과 카를라가 잠깐 종마에게 주의를 돌린 찰나 어린 아들 다비드가 종마와 같은 개울물을 마시면서 벌어진 훨씬 더 끔찍한 재앙의 이야기가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내내 아만다는 자신의 딸 니나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타인이 자신의 불행을 땔감 삼아 피워 올린 자욱한 공포의 안개 속에서 아만다는 오로지 사랑하는 존재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아만다는 자신과 니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졌다 느슨하게 풀어지길 반복하는 그 가상의 선을 ‘구조 거리’라고 부른다.

 

카를라에게 일어난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을지 궁금해. 나는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거든. 지금 당장은 니나가 느닷없이 수영장으로 달려가 뛰어든다면 내가 차에서 뛰쳐나가 그애한테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계산하는 중이야. 나는 그걸 ‘구조 거리’라고 불러. 딸아이와 나를 갈라놓는 그 가변적인 거리를 그렇게 부르는 거지. 나는 그 거리를 계산하며 반나절을 보내.(27면)

그건 우리 어머니한테 물려받은 거야. “네가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어. “우리 구조 거리를 유지하자.”(59면)

 

세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이 구조 거리는 오직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서만(아만다와 니나, 아만다와 아만다의 어머니, 카를라와 ‘괴물’이 되기 전의 다비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안한 세계는 공포로 모성을 잠식한다. 다비드를 잃은 카를라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어머니가 되고 아만다는 꼼짝할 수 없는 몸으로 죽어가는 와중에도 오직 니나의 행방만을 궁금해한다. 결국 이 구조 거리는 팽팽하게 당겨질수록 모성을 속박하는 끈으로 작용하면서 끊어지는 순간 가혹하게 어머니를 불행의 나락으로 추락시킨다는 점에서 ‘모성 신화’를 닮았다.

카를라가 들려주는 다비드의 이야기는 아만다의 구조 거리를 바짝 조이고 휴가지의 풍경은 더이상 평화롭지 않다. 낮잠에 빠진 니나를 집에 놔두고 잠시 외출하고 돌아온 아만다는 집 앞에서 카를라를 만나고, 집 안에 다비드가 있다는 카를라의 말에 정신없이 뛰어들어가 니나를 찾는다. 이때 처음 마주친 다비드는 “피부에 흰색 반점만 없다면 평범한 보통 아이”(66면)로 보일 만한 소년이지만,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불안과 공포가 자욱하게 따라붙는다. 결국 그날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린 아만다는 니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몇년 전의 카를라도 지금의 아만다도 이 불안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불안의 원인을 알아낼 에너지도 없다. 이 어머니들은 한방울 남은 기력이나마 쥐어짜 오직 딸을(혹은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데에만 집중한다. 이게 공포와 불안에 잠식당한 사랑이 하는 일이다. 이 사랑은 앞을 보지 못한다(소설의 주 배경인 병원이 화자인 아만다에게는 온통 어둠뿐이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앞을 보고 공포의 원인을 탐색하려면 조금은 냉정한 시선이 필요하다. 소설에서 그 초연한 시선을 담당한 사람은 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인 다비드다. 다비드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만다를 재촉해 ‘벌레’가 발생했던 순간을 세세하게 복기하게 한다. 이 냉담한 시선과 가까스로 버티는 사랑이 만나 함께 재앙의 원인에 도달하는 순간 독자는 차갑고 축축한 공포의 실체와 맞닥뜨리고 비로소 전율한다.

 

바로 이거예요. 이게 바로 그 순간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 다비드. 내가 말한 것 말고 다른 일은 정말 없다니까.

그렇게 시작되는 거예요.(87면)

 

딸을 데리고 시골을 떠나는 아만다에게 진짜 재앙은 “너무 미미해서 감지하기도 어려”(91면)운 기척으로 슬그머니 다가온다. 탈출에 실패한 아만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재앙의 원인을 파고들어간 깊은 자리에서 자연이 아닌 인간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발견했을 때의 충격은 이 소설이 독자에게 투척하는 가장 소름 끼치는 공포다.

간결한 문체와 강렬한 서스펜스를 갖춘 작품들로 세계문학계의 주목을 받는 사만타 슈웨블린(Samantha Schweblin)은 이 작품으로 2015년 티그레후안상을 수상하고 2017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빼어난 공포소설에 주어지는 셜리잭슨상을 수상했다. 역자 조혜진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사만타 슈웨블린을 비롯한 1970년대생 여성 작가들이 “일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공포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현실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려낸다”(174면)라는 말로 오늘날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한 아르헨티나 문단을 요약한다. 그중에서도 『피버 드림』은 대화와 그 속의 진술로 이루어진 독특한 구조, 시종일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설과 독자 사이의 ‘구조 거리’, 인간의 탐욕이 부른 환경파괴를 고발하는 냉담한 어조 등을 통해 공포에 압도당하고 마는 나약함도 공포를 극복하려는 용기도 모두 그 근원에 사랑이 있음을 으스스하게 설파한다. 혹시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지키는 책무 중인 독자가 있다면 마음 단단히 먹고 책을 펼치길 당부한다.

이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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