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가벼움의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시의 우주
김정환 시집 『거푸집 연주』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김정환(金正煥)의 시세계는 “어떤 품사도 아무 방향도 위치도 없는” 언어들, 광경들, 음악들이 자유로이 운행하고 명멸하는 우주다. 이 우주가 품고 있는 단 하나의 목적은 “가벼움의 민주주의에 이르는” 것이다(「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삶과 언어의 우주 ‘너머’를 도모하는 시-우주는 자신의 기원을 재창조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다. 열정적인 시의 우주라니. 시력(詩歷) 33년의 결실인 『거푸집 연주』(창비 2013)에 암시된 김정환 시의 요체는 이러하다. 모종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불가능성을 향한 시적 모험을 추진하는 우주. 광경과 음악이 언어와 교류하며 시의 문법을 보강하는 우주. 시의 연주를 통해 삶과 언어의 배열 원리에 간섭하려는 김정환의 시는, 그러니까 ‘인간 삶의 진보에 대한 예술적 열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 김정환에게 시 쓰기란 연주의 거푸집을 만드는 연주이며, 어떤 형태로든 조형물을 생산하는 문학과 예술 행위를 그 조형물의 거푸집을 생산하는 일로 원천 소급하는 작업이다. “나를 연주하는 것 아니라/내가 연주하는 나의 연주다./우주 같은 소리.”(「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너는 나의/연주다.//민주주의여.”(「서시」)
시가 아닌 시의 거푸집을, 희망이 아닌 희망의 거푸집을, 전망이 아닌 전망의 거푸집을,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의 거푸집을 지향하는 시는 장르와 양식을 가볍게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비약하며, 동서고금의 다양한 인물과 저작과 예술작품을 가로지른다. 이 도약과 초월과 섭렵의 행위는 김정환의 시에서 시어가 연결되고 문장이 전개되는 틈새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사실 우리 시에서 김정환의 시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드넓은 예는 많지 않다. 높낮이의 아찔한 격차 역시 마찬가지다. 이 거리와 높낮이는 상상력의 그것이고 무엇보다 사유의 그것이어서, 김정환만큼 읽고 듣고 쓰고 번역하고 사유하지 않았다면 그가 창조한 시의 우주에 들어서는 순간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정환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하나의 독창적인 시-우주를 건설하는 상상력과 사유의 모험을, 시의 최소단위인 시어와 시어 사이에서부터 어지럽게 시작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시를 잘 이해하는 일급의 독자 김정환은 그가 써내고 존재하려는 곳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것은 삶에 필요한 모든 형식들을 주조하는 자리이며, “삶을 뒤집어야” “보이는” 죽음(「음악의 세계사 그후」)에 소용될 어떤 각성들을 탄생시키는 자리이다. 삶과 죽음의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사유의 거푸집을 새롭게 빚는 ‘거푸집의 사유’를 수행해야 한다. “‘너머’는 거푸집의 육화”라는 김정환 식 아포리즘이 뜻하는 바는 이것이다. 오래전부터 시가 해온, 갈수록 시만이 할 수 있는 전망의 사유이자 윤리적 사유. “생계 없다면 생이/타락할밖에 없는 시대”(「한강을 건너며」)에 김정환은 삶의 전위에 시를 다시 세움으로써 세상의 틀을 바꾸고픈 소망을 또 한번 피력한다. “나는 끝내,/지상의 미래, 전망의 거푸집의/아름다움으로 울고 싶었다.”(「전집의 역전」)
저 멀리 나아가 따라가기 힘든 김정환의 시는 어디를 향하며, 거푸집의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놀랍게도 그 답은 우리 각자의 ‘손’에 있다. “그렇게 생명은 생명의 가상현실을 벗고/서로의 손은 서로의 그릇 너머 벌써/거푸집이다.”(「조각의 언어」) 인간의 생명과 삶은 타자라는 거푸집-연주자와 깊이 결속되어 있다. ‘거푸집 연주’의 주체는 ‘나의 손’이자 ‘서로의 손’이며, 많은 경우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새삼 인식하면서 김정환은 예술의 자율성과 같은 차원에서 삶의 자율성을 승인한다. 전집과 선집이 모두 가능한 예술과 달리, 삶은 전집만이 가능하다. 삶의 전집은 오직 삶 자체로만 존재하며, 다른 판본이나 간추린 요약본을 허락하지 않는다. “노년”이라는 “가장 명징한 수난”(「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을 살아내며 김정환은 삶의 거푸집에 대한 상상을 통해 삶의 전집의 재현 불가능성을 애도하고 최대한 사유하고자 한다. 시의 우주가 계속 팽창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시(예술)의 자율성이 시를 쓰고 읽는 시인・독자에 대해/의해 가동되듯이, 삶의 자율성은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의해 가동된다. 각각의 둘의 관계는 대타적이면서 상호적이다. 주체가 통어할 수 없는 간극은 시와 삶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시의 자율성은 삶의 자율성에, 시는 삶에 온전히 상응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시의 틀을 새로 짜는 ‘거푸집 연주’와 그 모토인 ‘가벼움의 민주주의’의 역설적 원천임을 김정환은 강조한다. 『거푸집 연주』는 명철한 시집이자 뭉클한 시집이다. 해설을 쓴 황현산(黃鉉産)과 시인 사이의 시차를 둔, ‘노년’이라는 삶의 자율성을 공유하는 우정의 대화는 ‘시의 위의(威儀)’의 또다른 풍경을 목도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