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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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 내가 사는 곳 ⑥

 

장춘(長春)의 봄

 

 

금희 錦姬

1979년 중국 길림성 구태시 출생.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 장편소설 『천진 시절』 등이 있음.

jinjinji79@naver.com

 

 

건조한 먼지바람이 서향 베란다의 창살을 붙잡고 메마른 울음을 울면 봄이 가까운 줄 안다. 3월의 마지막 주, 개나리 살구꽃은 물기 번지기 시작한 가지 위 망울 속, 난방이 끊어질 무렵의 실내는 잠시 한겨울보다 오슬거리지만 어쨌든 봄. 그간 무겁고 둔중했던 겨울옷을 벗고 얇은 코트와 바바리와 점퍼를 옷장 안에 갈아 걸 때면 날아갈 듯 가벼운 심정이 된다.

장춘(長春). 글자 그대로는 ‘봄의 도시’지만 사시장철 봄 기온을 유지하는 명실상부 중국의 ‘봄 도시(春城)’ 곤명(昆明)에 밀려 ‘북국의 봄 도시’라는 별칭에 만족해야 하는 처지.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일년 12개월 중 난방기간만 무려 5개월 하고 반을 넘어가니(10월 20일~이듬해 4월 6일) 거의 절반은 겨울인 셈. 해서 “장춘엔 겨울과 곧 겨울이 될 두개의 계절만 있다네”라는 토박이들의 농담이 있었나보다.

장춘은 중국 동북의 세개 성, 요녕(遼寧),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 가운데 위치한 길림성의 소재지로 낮고 평탄한 송료평원(松遼平原)에 속해 서북으로는 송원(松原)시, 서남으로는 사평(四平)시, 동남엔 길림시와 동북쪽은 흑룡강 하얼빈(哈尔滨)시에 인접되어 있다. 크기는 하얼빈보다 작고 GDP 순위는 심양(瀋陽) 아래에 있으므로 요즘은 각광을 많이 잃었지만, 1930년대 한때는 ‘아시아 제1도시’라 불릴 정도로 번화한 적이 있기도 하다. 도시 전체가 일본 전문가들에 의해 1920년대의 미국 도시들을 참고해 설계된 것으로 행정, 사교, 교통, 문화, 오락 구역이 선명히 구분되었는데 무엇보다 녹화(綠化)에 비중을 많이 두어 1942년에는 1인당 녹화 점유면적이 워싱턴보다 높은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 일장춘몽의 시기가 바로 일제에 점령당해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이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나는 지금은 장춘 소속이 된 구태(九台)시 신립촌에서 자랐고 연길(延吉)시에 있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2년간 고향 마을 초등학교 교직에 머물다가 당시 대세였던 ‘하해’(下海, 1990년대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영기업에 취직하거나 창업을 하던 풍조)의 붐을 타고 개방된 대도시로 떠났다. 1998년 겨울에 고향을 떠나 2007년 봄 다시 장춘으로 돌아왔으니 강산이 한번 변하기에 약간 모자란 연수를 채운 것이다. 어설프게나마 바깥구경을 해보고 돌아온 이로서 내 눈에 비낀 장춘은 기억 속에서보다 낮고 우중충했다. 긴 겨울 탓에 행인들의 나들이옷부터 검은색, 회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있었겠지만 대도시에서 심심찮게 보았던 화려한 간판들과 높고 반짝이는 현대식 빌딩 대신 어두운 단색의 건물들이 온통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인 까닭도 있었다. 도시는 조용했고 사람들은 보수적이었으며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금방 장춘으로 돌아온 몇해는 소위 ‘대도시에서의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이곳에서 살기에는 사실 불필요한 일부 습관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기도 했지만 곧 그것도 차차 희미해져갔다.

얼마 동안은 내가 사는 도시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유치원생이었던 큰애를 데리고 시간 나는 대로 자동차공장단지와 영화산업단지, 인민광장 같은 지역의 주요 명소들을 탐방했다(큰애는 거의 기억을 못한다). 그애는 오히려 관평대로(寬平大路) 터미널에서 탔던 54번 궤도전차(1941년 개통)의 댕댕거리는 종소리를 기억했고, 만주국 황궁 뜨락이 될 뻔했던 문화광장에서 날리다가 놓쳐버린 가오리연과 서툰 운전 실력으로 해방로입체대교에 올랐다가 방향을 잃어 한참 헤맨 적 있는 나의 흑역사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이제는 박물관이 된 푸이(溥儀)의 황궁을 돌아볼 때에는 큰애와 여섯살 터울이 나는 작은애가 서너살 되던 무렵이였다. 여전히 나는 이 도시 주민으로서의 의무감으로 애들을 데리고 다녔고 작은애는 비싼 입장료에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마음은 호리도 알아주지 않은 채 천방지축 다른 유람객들의 꽁무니를 따라 뛰기만 했다. 1932년부터 45년까지, 청 황제 퇴위 후 만주국 황제로 등극한 푸이가 13년간 거주했던 황궁은, 해자의 너비만 총 52미터 되는 홍장녹와(紅墻綠瓦) 장엄한 자금성의 스케일과는 비교 자체가 거부되는 작은 규모였고, 건물들 또한 중국 전통 양식과 근대 서구, 혹은 일본의 양식이 혼합되어서 허술하고 조악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도 아이 교육, 취직 기회와 환경·위생 여러 부분에서 일선 도시시민들의 생활품질에 따르지 못하는 그맘때의 내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 타향에서 누릴 수 없었던 친근감과 안정감으로 인한 만족의 감정도 잠시, 여전히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고리타분한 행정 방식과 날로 경직되고 더디게 발전하는 경제 상황이 나로 하여금 진절머리를 치게 한 것이었다. 아마도 나는 다시 떠날 것이라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형제들은 물론 시부모님까지 떠나버린 지금, 나는 아직 장춘이다. 애당초 이 도시로 온 것도, 그간 이곳을 떠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도 애들 교육 때문이었다. 천진(天溱), 북경(北京), 청도(靑島), 광주(廣州), 심천(深圳) 같은 도시들을 두루 다녀보았지만 조선족 집거구역은 있어도 조선족 학교가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혹여 조선어 주말학교를 이용할 수 있거나 추후 진학이 고민되는 불안정한 사립 조선족 초등학교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 장춘에서 식구들이 먹고살 수 있는 일터를 개간해보고자 함께 돌아왔던 남편은 몇년 버티지 못하고 사업 터를 광주로 옮겼고 나는 여러 망설임 끝에 애들과 장춘에 남기로 했다. 남편의 사업이 안정되지 못한 탓도 있었고 일단 장춘의 물가가 낮아 경제적 부담을 덜 수 있는 이유도 있었는데 비중을 더 많이 두어 고려한 부분은 역시 아이들이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시름 놓고 체계적으로 다닐 수 있는 조선족 학교가 있다는 여건이었다. 민족교육이 더 중요할까, 한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더 가치있을까. 그때 남편을 따라 광주로 갔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곧 대입 시험에서 조선어 과목을 제외하겠다는 정부의 결정이 나고부터 1922년 건립되어 근 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관성구조선족소학교마저 조선어 수업을 대폭 줄이고 있는 현실이 되고 나니 이는 더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였다.

두 아이가 차례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는 사이, 나는 장춘 동남쪽의 회의전시센터 부근에서 북쪽 관성구 개선로1에 위치한 장춘조선족중학교 맞은편 아파트로 이사 왔다. 이 부근은 원체 ‘관성자’라고 불리던 옛 장춘의 본거지로 러시아와 일본 모두 선후로 이 지역에 기차역을 건설했으며 장춘의화단의 항쟁이나 만주 군벌 장 쭤린(張作霖)이 일본의 힘을 빌려 동북의 실세를 장악하게 되는 관성자 사건 같은 근대 역사현장의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신축 아파트와 ‘진선미’라는 교훈이 높게 새겨진 장춘조선족중학교 사이에 놓인 거리가 바로 백년 역사를 품은 개선로이고, 그리로 빠져나가는 골목길 상가들 중에는 간간이 조선어 간판이 걸린 슈퍼와 식당들이 끼어 있다.

 

장춘조선족중학교

장춘조선족중학교. 1956년 건립되었으며, 장춘지구에서 가장 큰 조선족중학교이다. 오늘날 24개 학급에 850여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사진: 금희)

 

많은 조선족들이 여기 장춘조중 근처의 아파트단지에 모여 살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사연을 들어보면 아이 공부시키기 위해 이사 왔다는 이유가 7~8할은 차지했다. “고3까지는 옆에서 바라지해야겠죠. 대학이야 어느 도시로 갈지 누가 안답니까마는.” 결국 폐교할 수밖에 없었던 고향 조선족 학교의 몰락을 지켜보다 못해 이곳으로 찾아든 인근 현·촌의 주민들이 가장 많았고 시장경제와 개방의 시대에 날로 거침없게 된 인구의 유동에 힘입어 이곳에 터전을 잡은 길림지구, 연변(延邊)자치주, 흑룡강과 요녕성 출신들도 적잖이 있었다. 단지 내 광장을 가로질러 드나들 때면 삼삼오오 볕 쪼임을 하러 모여든 조선족 할머니들을 먼발치에서나마 종종 볼 수 있고 야채시장에서 배추를 고를 때나 조선족 슈퍼에서 말린 고구마줄기며 쌈채소들을 구경할 때도 조선족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들과 우연히 마주쳐 한두마디 문안을 주고받을 수 있으므로 이 동네서 살아가는 일상이 짬짬이 다정스러워질 때가 있다. 내게 익숙한 언어와 먹거리와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서 얻는 위로와 공감대는 정처 없이 떠나고 싶어 흔들거리는 마음을 이제껏 다독거려 안착시키는 데 큰 버팀목이 되었다. 명동슈퍼나 연화네소고기국밥집 주인 내외에게서 아이들 대학 보내고 나면 이곳에 남을 이유 없이 떠나야 한다는 사정을 듣고 누군가 바톤을 이어받아 장사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바라는 내 마음엔 아마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이 익숙한 분위기가 늘 지속되었으면 하는 사심이 있을 것이다.

 

수년 전 글을 쓰다 ‘장춘’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흥미로운 가설이 내 시선을 끌었다. 봉금령2이 내려져 있을 때 청 왕조의 발상지인 만주땅으로 행차 왔다가 이 지역의 경치에 반해 건륭제가 남겼다는 시구 “장백산 아래 봄은 늘 있고, 이통하 강변은 다들 좋아한다네(長白山下春常在, 伊通河畔人人爱)”에서 ‘장춘’ 두 글자를 따왔다는 설과, 고대 만주 숙신(肅慎)족의 제천의식에서 복을 기원하는 단어인 ‘차아충(茶啊冲)’에서 변형·유전되었다는 설. 입증자료가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을 향한 역사적 시선이 기원전 2천여년 전 또는 훨씬 이전까지 아득하게 길어짐을 느낄 수 있어 새로웠다. 숙신과 예맥(濊貘), 고조선, 부여와 고구려, 발해왕국 등 우리 민족과 상관있는 이름들이 동북사범대학 민속박물관의 ‘동북고대민족원류 시의표(東北古代民族源流 示意表)’에 올려진 것이 나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여러 상상들을 자극하는 흥분제가 되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해부루, 금와왕, 주몽의 이야기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 어딘가에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니 이곳에서의 생활도 아무 연고 없는 나그네 삶까지는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수천년 인류 역사의 행적을 좇다보면 결국 아무도 땅의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그저 사람의 마음이 그랬다.

 

중국 대부분 지역이 갑자기 덮쳐든 코로나19의 노도에 몸져 앓은 뒤, 지난겨울 제로코로나 방역정책이 종결되고 올해 장춘의 봄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느낌이었다. 창문도 맘대로 열고(먼지만 아니라면) 행적코드나 건강코드 없이 아파트단지 출입도 자유롭게 하고 아침부터 귀 따갑게 울려 퍼지던 ‘핵산검사(PCR검사) 동원령’도 사라지고 모든 식당과 가게, 학교, 직장에서 사람들이 일상을 회복하면서 도시는 드디어 긴 동면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일년 전인 2022년 3월 11일, 하얀 눈발 흩날리던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 도시는 삼년간의 코로나19 사태 이래 가장 심각했던 전면봉쇄 조치를 무려 48일 동안 실행했는데 아파트마다 확진자 상황이 달라서 내가 살던 아파트는 5월 중순에 가서야 겨우 봉쇄가 풀렸다. 정부가 제공한 대형슈퍼의 구매 앱에서는 한번도 구매에 성공해보지를 못하고 야채와 과일, 고기까지도 위챗 채팅으로 사서 먹었다. 매일 한번씩 진행되는 핵산검사만이 단지 내 광장에 내려갈 수 있는 합법적인 이유였고 그외의 시간들은 모두 집 안에서 지냈다. 광장무 음악 소리도 유치원 율동 선생님 구령 소리도 그치고, 늘상 북적거렸던 놀이터와 운동장, 정자 벤치에 하얀 방역복을 입은 관리일꾼 몇 외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구경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아파트 안으로 안치될 수 있는 것인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장춘대교

장춘대교. 그 밑을 흐르는 강이 건륭제가 찬사했던 이통하이며, 장춘포위작전 때 굶주림에 시달리던 난민들이 밤을 틈타 기어 넘어간 다리이다. (사진: 금희)

 

지난한 인내의 기간, 어떤 나이 많은 이웃들은 1948년의 장춘포위작전3을 기억했다. 5월부터 10월까지, 장장 5개월 철통장벽으로 포위당하는 동안 도시 내 모든 나무껍질이 벗겨지고 아스팔트 역청까지 땔감으로 쓰였다고 하는데, 국공 양군이 대치하고 있는 중간지대에서는 오도 가도 못하고 내몰려 굶주려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빈 들을 덮었다고 했다.

다행히 그같은 극한상황은 아니어서 봉쇄기간 동안 한 동에 사는 주민들끼리 모처럼 서로 야채와 담배와 과자와 뉴스거리와 인심을 나눴다. 곧 지나가겠지, 먼지바람 멈추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만 옷장 한편에서 이젠가 저젠가 눈치를 보는 봄 원피스는 올해도 갑자기 올라가는 기온 때문에 급히 꺼내진 반팔 여름옷에 밀릴지 모른다. 장춘의 봄은 황당하게도 사실, 정말 짧다. 그럼에도 어쨌든 봄. 모질게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오는 생명은 항상 각별히 감사하고 반가운 법이다.

 

* 이 글의 지명 표기는 중국어 원음이 아닌 조선족 사회의 관용에 따랐다.

 

 

  1. 1898년 러시아가 장춘 최초의 역인 관성자(寬城子)역을 건설하면서 임시로 모랫길을 깔고 이도구(二道溝)라 명한 것이 개선로의 전신이다. 1935년 소련이 장춘과 하얼빈을 잇는 중동철로남부선을 만주국에 팔아넘김으로써 이 길은 일제의 군용도로가 되었는데, 1946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항일의 의미를 기념하여 개선로라 개칭하게 되었다.
  2. 중국에서 특정 땅의 개간·경작 또는 출입을 금지하던 일. 중국 왕조는 치안 유지를 위하여 변두리나 풍수해 지역, 소수민족과 한인(漢人)이 인접한 지역 등에 민중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3.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에 의해 장춘이 점령·포위된 사건.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과 민간인이 있던 도시 전체를 철조망으로 둘러막은 후 통행과 식량 보급을 완전히 차단했다. 중국공산당이 대도시를 점령한 최초의 사례이자 국공 간 세력 균형의 변화를 보여주는 전투다. 이 시기를 다룬 중국 작가 리 파수오(李發鎖)의 『위곤장춘(圍困長春)』에서는 아사한 사람 수를 5만 8천여명으로, 대만 작가 롱 잉타이(龍應台)의 『대강대해(大江大海)1949』에서는 30만명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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