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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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오늘의 한국시, 이룬 것과 나아갈 길

 

전진하는 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여성시

 

 

오연경 吳姸鏡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김수영, 신화인가 현재인가」 「팬데믹 시대의 민주주의와 지구생활자의 시」 「자본주의 악천후와 이행의 감각」 등이 있음.

korin2@hanmail.net

 

 

2010년대 중반 페미니즘 리부트는 구체적인 현실과 개개인의 경험이 이론의 귀환을 촉구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특히 SNS 공간을 중심으로 여성이 겪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는 대중의 강력한 발화는 그동안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실제의 삶과 떨어져 어느 순간부터 자족적으로 순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1 하였다. 이러한 성찰은 “기존의 한국문학에 내재한 젠더 체제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고 심문하며 문학이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쓰이고 읽히고 향유되고 유통되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긴급한 제안”2으로 이어졌다. 문학의 현재는 과거의 유산을 물려받아 구축되지만, 변화하는 현재는 과거의 문학을 재구성하며 미래를 향한 경로를 수정하라고 요청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삶과 문학은 전진하고 있는가. 사회의 공론장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혐오정치로 퇴행하는 중에도, 문학계에서는 다양한 페미니즘과 퀴어 담론이 활성화되면서 한 개인의 경험과 위치가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자각과 함께 복잡다단한 삶의 양상 속에서 여성의 문제를 탐구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을 빌리면 “젠더는 남성성과 여성성 개념을 생산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기제지만, 그런 관점을 해체하고 의문시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3 우리의 삶은 기존의 젠더 규범을 반복하며 적응하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일탈과 변화와 극복의 순간을 만들어내면서 한걸음씩 전진한다. 시의 발걸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니,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전진하는 시의 발자국을 찬찬히 따라가보려 한다.

 

 

1. 여성노동자의 갈라지는 목소리

 

노동은 오래전부터 젠더 규범이 공고하게 작동해온 분야이다. 임금노동 바깥에 배치된 그림자노동부터 노동시장 내에서의 차별에 이르기까지 젠더는 노동의 가치를 분배하고 임금체계를 구조화는 핵심적인 토대 중 하나였다. 특히 신기술이 개발되고 새로운 서비스 노동 상품이 생겨날 때마다 저임금 일자리는 여성으로 채워져왔다. 자본주의는 여성의 노동을 저평가할 뿐 아니라 새로 창출해내는 값싼 노동 상품에 여성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그러니까 ‘여성’이라는 젠더 표지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시장을 정당화하는 주요 전략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여성노동자의 현실은 소설에서 다각도로 다루어져왔지만,4 시에서는 집중적으로 드러난 경우가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동현장을 여성 화자의 목소리로 그려낸 최세라의 『콜센터 유감』(도서출판b 2022)은 눈길을 끈다. 이 시집은 신자유주의의 확장과 함께 폭발적으로 양산된 비정규직 직종에서 여성노동자가 부딪치고 겪어낸 삶의 감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

헤드셋의 검은 쿠션 사이에 끼어서 존재할 때

나는 목이 없다 좌우를

둘러볼 목이 없다 거미처럼

머리가 가슴으로부터 솟아올라 있다

입술은 심장에 연결돼 있어 말할 때마다

피가 가열된다

 

2

언니, 상담 중에 일곱 번이나 뮤트 키를 눌러서 내 목소리를 소거했어 네 번은 흐느꼈고 세 번은 욕을 했어 정말 치밀어오르게 하는 건 내 목소리가 돈이 될지 늘 생각해야 한다는 거야 언니, 누군가 내 콜을 듣고 있어 누군가 내 콜 품질을 관리하고 있어 어떤 경우를 당해도 미소가 없는 목소리는 불량품인 거야 언니,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감시가 없는 말짱한 바깥을 보고 싶어 우리가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늘 블라인드로 가려 주는 창문 너머

 

3

거미가 붙어 있다

조그만 소리가 날 때마다 한 줄에 하나씩 분배되는 콜을 받는다

거미는 가슴이 머리고 머리가 가슴이라서

가슴이 시키는 말만 할 수 있지만

 

그물에 걸린 저의 소리를 찢고 삼키면서도

거미는 거미줄을 그만둘 수 없다

—최세라 「콜센터 유감: 뮤트」 전문

 

이 시에서 콜센터 여성노동자의 목소리는 두갈래로 갈라진다. 헤드셋의 마이크로 전송되는 목소리는 친절과 미소로 젠더화된 상품이자 상사로 대체된 가부장의 감시하에 통제되는 목소리이다. 반면 “뮤트 키”로 소거된 목소리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존재의 목소리이다. 전자는 화자를 숨 막히게 만들지만 밥줄을 보장해줄 것이고, 후자는 잠시라도 숨을 쉬게 해주지만 밥줄을 끊어놓을 것이다. 언니를 향한 날것의 호소에 드러난 이 아이러니는 “거미”의 형상으로 다시 조형된다. 헤드셋을 낀 화자는 “좌우를/둘러볼 목이 없”이 매뉴얼화된 말만 해야 하는데, 머리와 가슴이 바로 연결되어 있어서 말할 때마다 심장의 피가 입술로 올라온다. 고품질의 목소리만 내야 하는 자리에서 불량품 목소리밖에 낼 수 없는 상황은 생계를 위해 친 거미줄이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흔히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콜센터 노동은 고도화된 산업사회의 신종 노동 형태인 것처럼 등장했지만, 사실은 “집을 돌보던 ‘하우스’ 키퍼 house-keeper가 상담 콜을 돌보는 ‘콜’ 키퍼 call-keeper로 잠시 전환된 것뿐이다.”5 가정 내 돌봄을 둘러싼 오랜 불평등은 기술 정보화 시대 저임금 고강도 노동현장으로 확장되었다. 이렇듯 불평등한 현실에서 여성노동자가 체감하는 박탈감은 이 시집에서 “세라의 1시간은 75리터 종량제봉투 다섯 장 값과 같고 세라의 1시간은 미국 본사 CEO의 0.6초와 같고”(「세라의 시급」)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콜센터만이 아니라 편의점, 포장이사, 장난감 공장, 패턴실, 미용실, 대리운전, 구내식당, 택배 물류창고 등에서 화자들은 “계속 자리에서 오려지는 사람”(「세라의 시식 코너」), “사람이 스쳐 갈 때마다 우는 배역”(「대리운전」), “인간이라는 장르에서 벗어나는”(「라이더」) 존재로 간신히 버티고 있다. 이러한 여성의 현실은 아프게 와닿는 실감으로 생생하게 그려지지만 고립된 개인들의 고군분투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최세라의 이 시집은 여성이 겪는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현장과 그 내밀한 고통을 시적으로 기록한 보고서라는 점에서 뜻깊다.

 

 

2. 교차하는 삶과 새로운 앎의 경로들

 

강남역 살인 사건과 ‘# 문단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은 동시대 여성이 경험하는 현실이 이 사회가 가정하는 평균적 현실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성의 현실’을 강조할수록 계층, 인종, 국적, 신념, 지위 등 각기 다른 맥락을 지닌 개별 여성들의 삶은 ‘보통 여성의 삶’이라는 평균적 현실로 또다시 일반화될 위험에 놓인다. 게다가 여성을 젠더의 규범적 속성으로 정의하거나 여성이 특별히 취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젠더권력을 고착화하고 불평등을 강화한다. 주민현은 첫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문학동네 2020)에서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동시대 젊은 여성들의 이야기를 복잡한 삶의 맥락 속에서 펼쳐 보였다. 두번째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창비 2023)는 한국사회의 다양한 이슈부터 국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더욱 광범위한 주제들과 페미니즘적 관점을 연결한다. 이러한 확장성이 자칫 예리한 문제의식으로 심화되지 못하고 소재 차원으로 소비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지만, 이는 시적 전략 면에서 좀더 섬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이 이분법적인 권리투쟁으로 오인되어 사이비 논쟁에 휘말리는 현실에서 시가 어떤 유연하고도 역동적인 목소리로 독자에게 닿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주민현은 이 두번째 시집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부터 타자와의 관계 맺기까지에 깊숙이 개입해 있는 젠더 규범을 교차하는 삶의 경로들 속에서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인다.

 

내가 포착한 에리카와

그 포착을 빠져나가는 에리카 사이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라고 쓴

 

울프의 일기와 비비언 마이어의

익살스러운 사진 속으로

 

우리가 피워낸 고독한 향을 흔들고 싶다

 

에리카의 머리카락이 붉다 해도 흐른다 해도

 

우리에게는 노래하는 유쾌한 모자가 있어

뉴 노멀의 시대, 뉴 노멀의 시대, 마치

해피 버스데이 노래처럼 흘러나오고

 

제2공항 건설로 이 테이블은 대립하고

이 탁자는 쪼개질 것 같다

 

해안선을 정치적이고 상업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몸에 관하여 법적으로 죄를

물을 수 있는 이들은 또한

 

오늘의 날씨와 오늘의 막차 오늘의 홍차를 마시며

 

에리카라는 꽃의 꽃말에 따르면

오늘은 고독하겠지만

 

에리카의 뺨이 붉다 해도 희다 해도

 

에리카는 에리카

웃고 화내고 격렬하게 우리는 함께

킥보드를 타고 해안선 멀리까지 나아간다

—주민현 「에리카라는 이름의 나라」 부분

 

화자가 “제주에서 만나 친구가 된” 에리카는 피부색과 머리카락 색과 그날의 기분이 어떻든 “에리카는 에리카”, 내 옆에 있는 고유한 에리카이다.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에리카를 좋아한다 해도 “내가 포착한 에리카”에는 “그 포착을 빠져나가는 에리카”가 겹쳐 있다. 그러니까 에리카는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하나의 나라, 문화와 관습과 체제와 신념과 그밖의 많은 것들이 복합된 이국(異國)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성이라는 영토에 함께 거주하는 “우리가 피워낸 고독한 향”은 폭력과 폄하 속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생존했던 지난 세기 여성들의 삶을 애도한다. 세상이 변할 때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준이 통용되는 “뉴 노멀의 시대”가 왔다고 다 같이 노래를 부르지만, 저마다 생각하는 새 시대의 기준은 합치되지 않는다. ‘뉴 노멀’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은 제주도 “제2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양쪽으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한다. 바다의 용도를 결정하고 우리 몸에 낙인을 찍을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는데, 시대착오적 통념의 권력은 “뉴 노멀의 시대”에도 여전하다.

주민현은 이 시집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남성 중심, 인간중심의 거대서사를 드러내면서, 그 사이사이에 “불협화음의 목소리/끝나지 않는 서사”(「우리는 베를린에서」)를 삽입해 균열을 일으킨다. 시인에게 젠더는 세상을 파악하는 앎의 경로이자 세상을 바꿀 삶의 경로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집에 유독 다양한 인용과 참고문헌이 호출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담과 이브 대신 “릴리트”의 이야기를, 헨젤과 그레텔 대신 “그레텔과 그레텔”(「그레텔과 그레텔」)의 이야기를, 할리우드 여배우 헤디 라마 대신 “주파수 도약 발명가였다는 헤디 라마의 이야기”(「와이파이」)를, 플라톤 대신 “최초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를 호명하는 것은 지배규범을 재생산하는 기존의 인식론에서 벗어나 세상과 나를 설명해줄 앎의 경로를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이다. 최근 여성시인들이 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무명으로 묻혀 있던 문헌들, 여성작가들의 저서, 일상에서 쓰이는 실천적 용어들을 아카이빙하는 흐름은 인식론으로서 젠더를 활용하여 진정한 ‘뉴 노멀’을 그려보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3. 대문자 여성 너머, 여성들의 가능세계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피해자 연대나 사회운동, 권리 선언이나 거리 집회 등에서 ‘우리’라는 호명이 자주 사용되었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낼 때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된다. ‘우리’는 함께 추구하는 대의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윤리적 위치를 곧바로 선점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반대편은 악으로 단정하는 억압의 주체가 될 위험성을 지니기도 한다. 여성의 경험은 단일하지 않으며 여성의 이야기가 늘 약자나 피해자의 발화만은 아니다. 여성의 목소리는 폭력에 저항하지만 폭력은 여성의 바깥에만 있지 않다. 한여진의 첫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문학동네 2023)는 윗세대부터 후세대까지 서로 다른 여성들의 삶이 누적된 공간에서 ‘우리’를 의심하면서 ‘우리’를 기록하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양처럼 걷고 잠들며 양이 되길 바랐던 우리”는 공동체의 돌봄과 길들임 속에서 “양의 미덕”과 “내용물: 양/(※폭발 주의)” 사이를 오가는 여성으로 성장한다.(「어떤 공동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젠더 규범을 따르는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기도 하면서 그때그때의 현실이 경합을 벌이는 장이다. 이러한 경합의 양상을 세대적 관점에서 그려내는 시를 보자.

 

마당엔 어른들이 모여 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솥을 들여다본다 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모는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 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검은 솥을 들여다보면 아무리 채워도 넘치지 않는 검은 물이 있다 그 속엔 대체 무엇이 있길래 솥은 한없이 검은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쓰지 않는다 솥이 없는 하루에 대해 쓴다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쓴다 마당을 둘러싼 담장 밖에 대해 쓴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에 대해 쓴다

 

계속 쓴다고 되니

 

죽은 줄 알았던 언니가 늙은 배롱나무를 들여다본다 나무 아래 고양이가 죽은 제 새끼를 핥고 있다 언니는 죽기에 너무 아까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살아 있는 고양이는 이미 죽은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제 그만 솥을 치우자고 한다 그는 이제 곧 붙잡혀 솥에 들어갈 것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쓰지 못한다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솥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마당이 연기로 가득해 경보 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한여진 「솥」 전문

 

이 시는 동성 세대간 젠더 규범의 전승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의 민담처럼 풀어놓고 있다. ‘솥’은 전통적인 가부장제하의 여성 박해사를 떠올리게 한다. 솥은 집안의 어른들이 대대로 태어난 곳이지만, 그중 누군가는 맞아 죽고 불타 죽은 비극적인 곳이기도 하다. 화자 역시 솥에서 태어난 여성이지만 “너는 주워 온 게 분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화자는 가문의 후손으로서의 정체성이 흐릿한 대신 ‘쓰는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 “솥이 없는 하루” “솥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들”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와 이모와 언니가 아닌 것들”, 즉 솥과 무관한 것들에 대해서 쓴다. 하지만 “계속 쓴다고 되니”라는 누군가의 힐난처럼 쓰기를 통해 아무리 솥을 부정한다 해도 솥은 없어지지 않는다. 화자는 자신이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 “솥밖에 모르는 사람” “솥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화자가 쓰지 못했다고 고백한 이야기, “죽은 줄 알았던 언니”와 새끼를 잃은 고양이와 “이제 그만 솥을 치우자”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억압된 흔적으로 백지에 기입된다. 그것들이 결국에는 연기를 퍼뜨려 “경보 소리”를 울리고 어른들을 쫓아낸다. 이렇게 다음 세대의 역사가 시작되면 “나는 솥의 자랑”이 될 것이다.

한여진은 ‘솥’을 부숴버려야 할 대상으로 쉽게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솥’을 악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수난받는 여성을 의심 없이 ‘우리’로 묶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의 불행은/우리의 힘” “당신의 불행은/당신의 끝”(「Beauty and Terror」)이라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이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마주볼 수 있는 눈과 귀였지”(「초기화」)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시인은 혐오와의 대결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힘을 믿는다. “순무의 적정 입수 온도는 63도이며 그 이상은 질겨진다는 것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증명하는 데 성공”한 고학력의 젊은 여성이 순무밭의 아주머니들로부터 “자네들은 정말 아는 게 아무것도 없구만 ”(「순무는 순무로서만」)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순무 김치를 받아먹는 장면에는 ‘마주 봄’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 유머러스하게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이 시집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미선 언니’는 한번도 만난 적 없지만 언젠가 마주 보게 될 상황을 상상하며 내 삶에 겹쳐보는 무수한 여성들의 가능세계인지도 모른다.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는 한여진은 대문자 여성 너머, 젠더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의 폭과 깊이를 더해준다.

 

 

4. 유머는 삶의 승리다

 

여성시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해 위악과 욕설을 동반한 전복적 발화를 방법론적 전략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적 금기를 뚫고 내면의 정념이나 섹슈얼리티를 표출하는 발화 방식은 한국 여성시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루어냈다. 한편 여성의 몸에 맞지 않는 기존의 언어 질서와 불화하는 여성시는 파편화되거나 분절된 언어 또는 환상성의 언어로 독특한 모험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성취와 모험은 최근 젊은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더 분화되고 진화한 모습으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6 그런데 페미니즘 리부트를 전후하여 등단한 여성시인들의 시에서 이전까지 잘 보지 못했던 목소리가 등장했다. 겉으로 보기에 친밀한 태도와 부드러운 어조로 감지되는 이 목소리에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아침의 오믈렛에, 짭짤한 비스킷에, 심지어 튀김옷 반죽에도 비밀스럽게 존재하는 설탕. 설탕을 잽싸게 뿌려 넣는 어떤 사람의 손. 아침을 만드는 사람의 손. 안주를 만드는 손. 여자. 여자의 손. 여자들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런 세계의 손. 여자가 가진 손. 레이디 핑거스. 쿠키의 이름. 알코올중독자 중에도 여자가 많은데 누군가 그들에겐 각별히 키친 드링커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내 위장을 들여다볼 검시관은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알코올중독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임유영 「오믈렛」 부분

 

임유영 시인의 등단작에 “천진과 능청”이라는 심사평이 더해진 것이 그 특별함을 설명해준다. 임유영의 첫 시집 『오믈렛』(문학동네 2023)을 포함하여 앞서 살펴본 주민현과 한여진의 시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유연한 태도, 거기에 깃든 웃음기와 유머는 이전의 한국시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거의 모든 음식에 아주 소량씩 들어가는 설탕처럼, 이들의 시에 “한데 섞인 흰자와 노른자의 중립적인 맛”(임유영 「오믈렛」), “슬픔을 넣어 맛있게 끓인 찌개”(주민현 「둥근 탁자」)의 맛,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두부의 맛을 더해준다. 이 맛은 “여자들의 손. 묶인. 찔린. 찢긴. 손. 희고 검고 누런 세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 묶이고 찔리고 찢긴 사람이 몸속 깊은 곳에서 꺼낸 상처에 관한 농담 같은 것이다. 유머는 여성의 자유가 없는 곳에는 부재하고 성평등이 이루어진 곳에서는 희극 예술로 융성한다.7 수치심을 내면화하는 대신 유머를 배우고, 분노와 혐오 대신 마주 보기를 선택하고, 자기를 잃는 대신 자기를 보충할 언어를 발굴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승리다. 젊은 여성시인들의 시가 무해함, 안온함,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왜소한 주체를 그려내고 있다는 세간의 평들은 이들 시의 바탕이 되는 삶의 승리를 보지 못한 것이다. 과거 여성시의 유산을 들고 삶의 폭력과 싸우며 오늘에 피어난 이 시들은 미래의 자랑일 것이다.

 

 

  1. 백지연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 『창작과비평』 2017년 여름호, 20면.
  2. 김보경 「‘하는’ 여성들」, 『문학동네』 2020년 가을호, 102면.
  3.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 조현준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5, 74면.
  4. 김애란 「하루의 축」(『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김숨 「그 밤의 경숙」(『국수』, 창비 2014), 황정은 「복경」(『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구병모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문학과지성사 2015), 이서수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2022), 김혜진 『축복을 비는 마음』(문학과지성사 2023) 등이 있다.
  5. 김관욱 『사람입니다, 고객님』, 창비 2022, 341면.
  6. 이러한 사례로 강지혜, 권박, 문보영, 백은선, 이소호, 임승유, 조혜은 등의 시를 떠올릴 수 있다.
  7. 테리 이글턴 『유머란 무엇인가』, 손성화 옮김, 문학사상사 2019, 157면.

오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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