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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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가키 류타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 푸른역사 2024

국제주의 국어학이 분단체제와 만났을 때

 

 

최원식 崔元植

문학평론가, 인하대 명예교수 ps9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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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고서점은 나를 금단의 지식으로 안내한 경이의 토끼굴이었다. 인사동 경문서림(景文書林) 주인장이 발밑에서 꺼내준 마분지 책 중, 김수경 역의 『조선문화사서설』(모리스 쿠랑 지음, 개척사 1947, 이하 『서설』)도 있었다.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 1865~1935)의 『조선서지』 전4권(1894~1901)은 동양학 3대 서지로 저명하거니와, 조선의 도서·문자·사상·학예·문학을 차례로 개관한 꾸랑의 박식은 지금도 놀랍다. “만일 주위의 정세가 구주(歐洲)와 같었드면 조선의 사상(…)은 필경코 인방(隣邦) 제국(諸國)에 충동을 주는 바 많었음에 틀림없다”고 조선인의 높은 이상주의적 열정을 평가하면서도, “유폐된 고도의 사상(이) 알력의 화근”(『서설』 166면)으로 전화한 지리적 폐쇄성을 지적한 푸른 눈의 통찰은 더욱 놀랍다. 바로 이 탁월한 서문을 일찍이 번역한 것이 『서설』이다. 역자의 신원은 안개였다. 곡괭이를 든 노동자를 도안으로 한 출판사 로고로 보건대 개척사도 해방 직후에 흔했던 좌익 출판사일 텐데, 「역자 후기」에 “임화(林和) 씨와 신구현(申龜鉉) 형의 간곡한 종용”(『서설』 190면)으로 1939년부터 번역에 임하게 되었다는 언술을 접하곤 이 ‘불어 귀신’도 월북했겠구나 하는 착잡함에 사로잡힌 기억이 새롭다. 그리곤 잊었다. 이러구러 한겨레 주말 서평판(2024.2.24)에서 『북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北に渡った言語学者: 金壽卿 1918~2000, 2021, 고영진·임경화 옮김)을 발견하고 놀랐다. 반세기 만에 다시 만난 김수경 그분이 김일성대학(김대)에서 북의 어문정책을 구축한 천재 언어학자였다니.

캐나다에서 김수경의 따님을 해후한 인연 따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절충주의”(16면)를 도구로 김수경의 삶과 학문을 무려 550여면의 저서로 살려낸 이따가끼 류우따(板垣龍太) 교수의 학구에 충심의 감사를 표한다. 실증은 결코 기계적 작업이 아니다. 그 학자의 학식, 교양, 그리고 최후에는 판단력 비판이 총체적으로 관여하는 학문의 육체다. 그동안 도움받은 모든 분들에게, 심지어는 한마디의 언급에조차 일일이 감사하는 자상한 논술이 감명적인 ‘맺음말’을 읽으면서, 무릇 고증력이란 인간에 대한 예의의 표현임을 새삼 깨닫거니, 사의(謝意)에 인색한 우리 학계를 반성한다.

일본에 학인(學人)이 태어났다. 무엇보다 뜻이 좋다. 냉전의 산물인 지역연구를 세계체제론으로 전복한 월러스틴(I. Wallerstein)에 호응하되 “‘월러스틴 제국’으로의 참여”(12면)에는 선을 긋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세계사의 교차로로 파악하”(14면)는 관점 곧 “개인의 행위자성”(15면)을 중시하는 “비판적 코리아 연구”(9면)로 총화한 저자의 학문적 초심이 순정(醇正)하다. 물론 그 방법론이 저서 전체를 관통한 것은 아닐지라도, 선학을 넘어서려는 후학의 기개를 보여준 것만으로도 멋지지 않은가. 마지막 문장은 또 얼마나 긴절한가.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분단 극복의 거대한 흐름을 끊어 버리면 안 된다. 책을 마무리한 지금, 나는 다시금 온몸으로 평화 프로세스의 실현을 간절히 바란다.”(486면)

무엇이 일본의 인류학자로 하여금 낯선 한반도의 언어학자에 몰두하게 했을까? 나는 감히 김수경을 최고의 존칭 ‘선생’으로 부를 것이다. “언어가 자신의 취미”(75면)인 이 천재가 무려 17종의 언어에 통달해서가 물론 아니다. 강원도 통천(通川), “상민의 가계”(49면)에서 판사로 출세한 식민지 엘리뜨 집안에서 생장했으되 혁명에 투신한 비순응주의를 존경해서만도 또한 아니다. 선비는 죽일지언정 모욕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 대단한 학자를 1968년 학계에서 추방하여 무려 20년간 내친 것은 무엇인가? 이 궁핍 속에서도 선생은 학자로서 품격을 잃지 않았다. 김대를 근거지로 조선어 사업에 매진하던 선생을 전쟁 중 남쪽 선무공작대로 파견한 것은 또 무엇인가? 그 바람에 가족들이 선생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가 끝내 분리되는 광경은 차마 참혹하다. 분단체제의 희롱 속에 가족과 이산한 때나 또 곡절 끝에 잠깐씩 재회했을 때나, 남편으로서 그리고 애비로서 정성스럽기가 군자다.

그럼에도 선생이 선생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학문이다. 학자는 학문으로 말한다. 선생의 도저한 공부가 반종파투쟁(1956)으로 중도에 그친 것을 통탄하며 그 학문적 행로를 점묘하자. 꾸랑 번역에서 짐작되듯 선생은 국제주의자다.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헤겔(G. Hegel)을 전공하는 한편, 쏘쉬르(F. Saussure)를 세계 최초로 번역한(1928) 코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1903~78)의 지도 아래 언어학을 연찬한바, “김 군 한 사람을 위해서 세미나를 시작”(61면)한 코바야시는 최고의 스승이었다. 사제이자 동지인 이 아름다운 동행 속에서 “일반언어학 이론과 철학 위에 조선어학을 구축”(79면)할 선생의 보편주의가 드높으매, 더구나 맑스(K. Marx)의 세례를 받았다. 동기생 김석형(金錫亨)·신구현 등과 비밀히 독서회를 꾸려 맑스·레닌주의를 학습한바(76면), 맑스와 쏘쉬르를 통합하는 최난(最難)의 사상적 과제와 일찍이 씨름한 선진적 지식인이던 것이다.

1946년 8월 김대 초청으로 월북한 이후, 선생은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수제자 백연 김두봉(金枓奉, 1889~?)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계단에 들어선다. 백연은 연안파의 좌장으로 해방 후 북의 정계와 학계 양쪽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바, 신생 공화국의 어문정책은 건국의 핵심사업이었다. 백연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표음주의가 아니라 “동일 형태소의 동일 표기”(168면)를 지향한 주시경의 형태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높이 수행한 언어학자가 바로 젊은 김수경이었다. 한국에서는 주시경의 또다른 수제자 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가 우이를 쥔바, 표음주의를 밀어붙인 이승만(李承晩)의 한글간소화파동(1953~55)이라는 도전이 없지 않았지만,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의 절충주의를 계승한 외솔의 어문권력은 탄탄대로였다. 한글전용을 성역으로 싸안고 그 모든 바깥은 사대주의로 비난한 외솔의 독선에 비할 때, 김수경의 비판적 국제주의는 품새가 낙낙하다. “한자의 조선어 발음을 규범화하기 위해 중국 음운학의 지식과 견문을 바탕으로 창제된”(158면) 훈민정음의 국제적 맥락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 위대성을 국수의 비과학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던 김수경은 언어학적 올바름과 정치적 올바름을 통일하는 건국 초기 북의 조선어혁명 사업에 투신한 협동적 기관차였던 것이다.

“어음에 대한 의미의 우위성”(207면)에 주목한 소비에트언어학의 영향은 또 하나의 전기였다. 이로써 음운론 중심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대해 통사론 중심의 언어학을 구축한 촘스키(N. Chomsky)와 “의도하지 않았던 동시대성”(209면)을 획득했으니, 김수경의 국제성은 놀랍다. 국제성이 오히려 “언어의 민족적 자주성”(288면)을 발견하는 데로 안내한 점이야말로 더욱 놀랍거니, 언어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전민족적 도구임을 다시 규정한 스딸린(I. Stalin)의 어문론 「언어학에 있어서의 맑스주의에 관하여」(1950)를 골똘히 다시 해석한 선생의 혜안이 기룹다. 독재자 스딸린의 이론가적 면모는 신남철(申南澈)의 『전환기의 이론』(백양당 1948)에 실린 웰즈(H. G. Wells)와 스딸린의 뛰어난 대담을 다시금 상기시키거니와, 이 해후가 선생의 학문적 행로에 암운을 드리운 계기가 됨도 통렬한 반어다. 1950년대 말 대두한 주체의 강조에 따라 “‘일반성’은 점차 소거되고, ‘민족적 자주’가”(314면) 전면화하자, 백연의 실각 속에 형태주의와 역사주의를 결합한 언어혁명을 수행하던 국제주의자 김수경은 끝내 좌절했다. 그래도 새옹지마는 어김없다. 일찍이 주시경이 꿈꿨던 형태주의 추진의 끝 풀어쓰기(ㄱㅣㅁㅅㅜㄱㅕㅇ 등으로 적는 방식)가 김일성(金日成)의 지시로 단칼에 중단된바, 훈민정음의 결함으로 치부된 모아쓰기가 컴퓨터시대에 축복으로 된 오늘, 남과 북 양측에서 풀어쓰기가 함께 좌절한 것은 행운일시 분명타.

이 책을 통해 서울문리대 국어학에 대해 다시 깨치게 된 것도 고맙다. 학교 다닐 때, 향가 해독으로 유명한 오구라 신뻬이(小倉進平)는 들었어도 코바야시 히데오는 금시초문인데, 제자들에 대한 영향력은 코바야시가 강력했다. 심악 이숭녕(李崇寧, 1908~94)이 문헌학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오구라보다는 “재기가 넘쳐 흐르는” 쏘쉬르 보이 코바야시에게 심취했다고 고백한바(63면), 해방된 해 처음으로 열린 한글날 기념식 강연회에 김수경과 함께 참가하는 등(107면), 두분은 뜻밖에 언어학적 동반자던 것이다. 훈민정음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옹호한 심악의 강의에 김수경이 껴묻어 있었음을 새삼 깨달으매, 전용론의 희생양 최만리(崔萬理)를 변호해 해주 최씨 대종회에서 감사패 받았다고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던 심악, 김수경과 함께 일반언어학을 꿈꾼 은사의 숨은 얼굴에 새삼 느껍다. 해방 직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한글문화보급회와 대립한 조선언어학회 및 국어문화보급회의 존재가 종요롭다. 홍기문(洪起文)을 비롯한 진보파와 경성제대 출신 국어학자 이희승(李熙昇), 방종현(方鍾鉉), 이숭녕이 결합한 후자는 일국주의적 국어학이 아니라 세계 속의 과학적 조선언어학 구축을 표방한바(122~23면), 아마도 경성제대 동창 김수경과 신남철이 양자의 매개일 터. 그러나 홍기문·신남철·김수경의 월북과 방종현(1905~52)의 급서가 겹쳐 이 뜻깊은 학파가 시나브로 해체되매, 급기야 서울문리대 국어학은 분단체제에 순응한 실증주의로 축소되고야 마니 도무지 무심한 일이다.

끝으로 『조선문화사서설』 판본에 대해 한마디. 내가 소장한 개척사(開拓社)본은 1947년 판인데, 이따가끼 책에는 언급이 없다. 이따가끼 책을 보고야 범장각(凡章閣)본(1946)을 인지하게 되었는데, 개척사본은 범장각본에 침묵한다. 어찌 된 영문일까? 선생이 1946년에 월북한 점을 고려컨대, 두 출판사가 혹시 탄압을 피할 요량으로 만들어진 동일 회사일 수도 있겠다. 눈 밝은 분의 보충을 기대하면서, 아울러 번역자 고영진, 임경화 두분과 출판사에 감사한다. Last but not least.

최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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