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특별기획│한강의 문학세계
한강 소설이 우리에게 오는 방식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우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명예교수.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등이 있음.
kiwookh@gmail.com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작가 개인의 문학적 여정뿐 아니라 굴곡진 한국문학의 행로에도 뚜렷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수상소식을 전하는 노벨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한강은 “나는 한국문학과 함께 자랐다 할 수 있어요”라며 자신의 문학적 연원을 밝혔고 어떤 작가들이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냐는 물음에는 “내게는 어릴 때부터 선배 작가들이 하나의 집합체였어요. 그들은 삶에서 의미를 찾는데 때론 길을 잃기도 하고 때론 결연해지기도 했어요. 그들의 모든 노력과 모든 공력이 내게는 영감이었어요”1라고 답했다. 선배 작가 황석영이 축하 메시지에서 언급했듯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인과 한국문학이 걸어온 길 위에서 거둔 빛나는 성과”2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강의 작품들이 황석영과 자신의 아버지 한승원을 포함한 ‘집합체’로서의 선배 세대 작가들과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다름을 성별·세대별 차이로 해석하려는 논의가 적잖고, 그중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혹은 근대/탈근대 소설의 구분법에 의거해서 한국문학의 연속성보다 단절성을 부각하려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의 문학은 한국문학의 창조적 계승으로 볼 필요가 있다. 위대한 전통의 문학이라도 각각의 세대는 자신의 고유한 문학사를 새로 써야 하는 차원이 있다. 세대가 바뀌면 모든 게 바뀐다는 세대론적 발상이 아니다. 앞선 세대 작가들이 이뤄낸 성취를 요긴한 예술적 자원으로 삼되, 공동체의 주요한 역사적 사건과 문학적 주제를 자기 시대의 새로운 감각과 방식으로 탐구하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창조적 계승의 혁신작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하느냐에 따라 우리 문학의 미래가 달라진다.
한국전쟁 이래 한국문학은 4·19혁명,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혁명을 거치면서 민중적 민족문학으로서의 저력을 쌓아왔는데, 한강 세대가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1990년대 전후로 여러 층위의 도전과 혼란에 직면했다. 6월혁명으로 민주화가 달성되지만 분단체제의 제약은 계속되었고,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진보진영은 한동안 이념적 혼란에 빠졌다. 1990년대 이래 세계화 물결을 타고 서구의 탈근대주의, 후기구조주의 담론 등이 밀려들어 오면서 2000년대 초반부터 언론과 평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 ‘장편소설 쇠퇴론’이 되풀이되곤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한국문학은 쇠락 일로에 접어든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인상적인 예술적 혁신을 이뤄냈다. 탈근대문학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경우와 달리 대세를 점하지는 못했다. 앞 세대 작가들과 몇몇 남성작가도 괄목할 만한 작품들을 발표했지만, 주된 동력은 한강을 포함한 새 세대 여성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온 덕분이다. 소설 부문에 국한하더라도 은희경 신경숙 공선옥 권여선 정지아 등에서 편혜영 김애란 황정은 조해진 최진영 김금희 김유담 등에 이르는 새로운 감각의 서사가 뚜렷한 흐름을 형성했다. 이들 다수는 2010년대 ‘시(문학)와 정치 논의’를 경유하는 한편으로 2009년 용산참사, 2014년 세월호참사, 2016년 촛불대항쟁 등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당대 현실의 문제점을 감지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쌓아갔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운동이 촉발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여성작가들의 주도는 더욱 뚜렷해졌다. 이들은 민주화와 사회변혁을 위해 헌신한 선배들로부터 영감과 자양분을 얻었으되, 개별 작가 나름의 개성적 방식으로 성차별과 소수자차별 등 온갖 종류의 억압과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새로운 활력을 보여주었다.
현실과의 치열한 대면을 통해 새 세대 작가들은 문학의 창조적 새 단계를 연 것이다. 다양하고 실험적인 근대적·탈근대적 기법들이 과감히 활용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 현실을 옥죄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참다운 현실의 새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낼지 탐구하는 것이지 현실을 아예 벗어나려는 흐름과는 판다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시아권의 유력 후보이자 탈근대소설로 유명한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가 아니라 한강을 수상자로 선정한 것이 노벨문학상의 공신력을 높였다는 생각이다. 노벨문학상이 한강을 빛냈지만, 역으로 한강 문학이 노벨문학상의 격을 높인 면도 있다.
『소년이 온다』: 부름과 응답의 서사
한강은 1994년 「붉은 닻」으로 등단한 후 꾸준한 문학적 혁신을 이루며 『채식주의자』(창비 2007)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이하 이 책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를 통해 자기 문학의 예술적 특징과 방식을 한껏 펼쳐 보였다. 특히 『소년이 온다』는 문학이 국가폭력과 학살의 역사를 만날 때 어떤 언어와 서사가 가능한지를 남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노벨상위원회가 한강의 수상 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언급했을 때 특히 이 소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트라우마에 ‘어떻게’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이해하려면 이 소설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살펴봐야 한다. 한강은 선배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전작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작품을 써왔다. 새 작품에 도전할 때는 전작들에서 일궈낸 소설언어와 서사방법을 활용하거나 변조하는 한편, 매번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고 자기혁신을 도모한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으로 구성된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는 한국의 사회체제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가부장적 강압과 폭력에 맞서는 소설이 분명하지만, 상투적인 페미니즘 서사와 달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노선을 따라 진행되는 예측 가능한 서사가 전혀 아니다. 소설의 주된 서술자는 어느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가 아니라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보는 남편(「채식주의자」의 일인칭 화자), 형부(「몽고반점」의 삼인칭 초점화자), 언니 ‘인혜’(「나무 불꽃」의 삼인칭 초점화자)이다. 영혜의 행동거지는 주로 이 세 인물의 관찰과 묘사를 통해서 서술되고 추측된다. 서술자들의 관점에서는 육식을 거부하고 형부와의 정사를 전혀 거리끼지 않으며, 나중에는 음식을 일절 거부하고 자신을 나무로 여기는 영혜가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나타나는데, 소설은 이 ‘불가해한’ 존재에 관한 질문을 통해 서사를 끌어간다. 말하자면 “미학적이든 정치적이든 어떤 의제(agenda)를 정해놓고 나아가기보다 존재론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발견적’ 방식”3에 의거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서도 이런 탐구적·발견적 방식이 작동하지만, 또다른 예술적 문제가 제기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한국현대사의 ‘사건’을 다룬 만큼—탈근대소설이 아닌 다음에야—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자의적으로 변형할 수는 없다.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밝혔듯 작가는 5·18광주 이야기만으로 장편을 쓰기로 작정한 후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는다는”(203면) 원칙을 세웠고 한동안 자료 읽는 데 몰두했다. 그럼에도 사실적 재현 중심의 소설과는 다른 소설을 쓰기로 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이 소설을 읽고 잔혹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더 잔혹한 것도 자료 속에 많았지만 쓰지 못했어요. 어디까지 재현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됐어요. 임철우(林哲佑)의 『봄날』 같은 경우에는 분 단위로 그 현장을 잘 옮겨놓으셨잖아요. 너무 훌륭하게 잘해놓으셔서 제가 뭘 더 보탤 게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저에게는 같이 겪자는 마음만 남았어요. 그리고 또 하나, 초를 밝히는 것. 이 소설 전체가 초를 밝히는 일이 됐으면 해서 1장에서 동호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초를 밝히고, 에필로그에서 ‘나’가 동호랑 소년들을 위해 초를 밝혔어요. 그러니까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 초를 밝히는 것, 그 두가지만 하자고 생각했어요.4
작가가 “어디까지 재현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은 재현을 잘하기 위해 오히려 절제한다는 뜻이다. 5·18광주의 주요 국면을 다섯권에 걸쳐 사실 그대로 재현한 『봄날』(문학과지성사 1997~98)과는 달리 한강은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과 “초를 밝히는 것” 그 두가지만 하기로 했다고 마치 소박한 일인 양 말하는데, 이 두가지는 사실상 엄청난 예술적 과업에 다름 아니다.
하나를 더 보태면,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동호’의 형에게 찾아가 동생에 관한 글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했을 때 들은 말이다.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211면) 그가 ‘제대로 써야 한다’고 요구할 때 동생을 포함한 5·18광주 영령들에 대한 역사적 무지를 염려한 것은 물론 나아가 극우주의자들의 왜곡과 비웃음, 모욕까지 염두에 뒀을 것이다. 5·18광주에 대한 그런 모독이 지금의 윤석열정부 시대까지 되풀이되는 가운데 용산과 세월호, 이태원 등의 참사가 일어났다. 그런데 작가에게 ‘제대로 쓰기’라는 도전은 이런 현실정치적 차원을 포함하되, 근본적인 소설 방법론의 물음이 된다. 가령 소년 동호의 삶과 그의 선택이 어떻게 제시되어야 그 누구도 모독할 수 없는 그의 존엄이 제대로 나타날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우리의 실존적 삶에서 대면할 수밖에 없는 진실과 정의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더불어, ‘같이 고통을 느끼고 초를 밝히는 것’이 문학을 통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같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얼핏 공감과 연민의 서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과 타자, 주체와 객체의 엄연한 구분을 전제한 상태에서 불쌍한 타자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식의 관념적 행위가 아니라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개인적 고통, 그 지극히 감각적인 고통”5의 탐구이다. 5·18광주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30여년 전에 죽은 광주 사람들과 생존자·유가족의 참혹한 고통을 자기 몸의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쓰는 것이 가능할까. 그런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작가도 모르지 않는다. 가령 단편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의 화자 ‘나’는 ‘영영 잃어버린 사람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소녀가 나오는 희곡을 쓰고자 하지만 중도에 멈출 수밖에 없는데, 그건 소녀의 깊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6 하지만 그런 생생한 자각이 “역설적으로 글쓰기가 출발해야 할 지점에 대한 강력한 암시”7일 수도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눈 덮인 램프’라는 제목의 에필로그는 소설 말미에 덧붙인 작가의 후기이자 소설의 핵심적인 한 부분이다. 이런 이중적이고 메타적인 성격 덕분에 작가는 자신이 직접 대면하지 못한, 만 열다섯살에 죽은 동호를 어찌하여 자기 소설의 중심으로 삼았는지를 서술하는 한편, 자신의 소설적 분신인 ‘나’가 어떻게 5·18광주 사람들의 고통의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여러 장면을 통해 제시한다. 그중 각별한 것은 ‘나’가 열두살 때 아버지가 숨겨놓은 사진집을 보다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하고, 그 순간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고 술회하는 대목이다(199면). ‘내 안의 연한 부분이 깨어졌다’는 표현은 ‘나’가 광주의 트라우마와 맞닥뜨림으로써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5·18광주에 관한 자료 읽기에 몰두하다가 꾸게 된 일련의 꿈은 작가가 광주 사람들의 고통에 사로잡혔다고 할 만큼 속속들이 그 고통을 체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사진 속 소녀처럼 군인의 총검에 명치가 찔리는 악몽을 꾸고, 누군가가 찾아와 “1980년부터 지금까지 삼십삼년 동안 지하 밀실에 가둬둔 5·18 연행자들 수십명이 있다”고 하면서 “비밀리에, 내일 오후 세시에 모두 처형할 거”(203면)라고 내게 알려주는 꿈도 꾼다. ‘나’는 “이걸 왜 하필 나에게, 아무런 힘도 없는 나에게 알려줬을까”(204면)라고 안타까워한다.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이 있는 라디오를 선물받아 ‘1980.5.18’을 입력했지만 광주가 아니라 광화문 네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꿈도 꾸는데, 이는 자신이 여전히 광주의 고통 바깥에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을 반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는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예식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며 화사하고 태연한 사람들이 낯설어 보여 “믿을 수 없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205면)라고 되뇔 정도로 광주의 고통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소년이 온다』의 인물들은 모두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민감하며 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다. 동호, 정대, 은숙, 교대 복학생(진수), 선주, 동호의 어머니 등 여섯개 장의 서술자들은 에필로그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어떤 순간, 특히 트라우마가 감지되는 순간, 고통받는 타자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이 점을 감안하면 작가를 포함한 주요 인물/서술자들이 동호를 ‘너’라는 2인칭으로 부르는 것에 각별한 의미가 담기게 된다. 작가가 지적하듯 “3인칭과 달리 2인칭은 오직 한 사람, 내가 부르는 바로 그 사람”8이니만큼 ‘너’로 불리는 동호와 동호를 ‘너’라고 부르는 ‘나’(다른 인물들과 작가)는 모두 세상에서 하나뿐인 개별자로서 관계 맺는다.9 여기서 부름의 행위가 각별하다. “동호는 죽은 소년이지만, 부르면 거기 어둠으로부터 떠올라서 존재하게 돼요. 호명하고 또 호명하면 현재 속에 가까스로 떠오르는 ‘너’예요”10라는 작가의 발언에서 왜 이 소설의 제목이 ‘소년이 온다’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호를 둘러싼 인물들이 각각의 목소리와 방식으로 동호를 ‘너’ 혹은 ‘동호야’라고 부를 때, 동호는 제3자가 아니라 그들 각각의 현재적 삶 속으로 ‘와서’ 더불어 존재하게 된다. 소설 전반에 걸쳐 모든 인물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참담한 심정일 때 동호를 불러내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정확하고 빼어난 사실적 재현이 많음에도 재현주의 서사와 차별화되며, 부름과 응답의 서사가 중심이 된다.
‘초를 밝히는 것’에서는 ‘애도의 서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지만, 여기서도 대부분의 애도서사와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혼이 되는 ‘정대’를 별개로 하면, 소설 속 인물들 다수는 혼(영혼/혼령)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와 관련된 생각을 자주 하며, 그런 만큼 초를 밝히는 일에는 초혼(招魂)의 의미가 담긴다. 1장에서 동호는 시신의 머리맡에 놓인 양초를 새로 갈아주고 난 후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들여다볼 때, 혼도 곁에서 함께 제 얼굴을 들여다보진 않을까”(13면)라고 자문하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얼굴에서 새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나갔다”(23면)고 느낀 순간을 회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죽으면 빠져나가는 어린 새는, 살았을 땐 몸 어디에 있을까”(27면)라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혼을 감지하는 듯한 순간도 있다. 동호는 ‘은숙 누나’의 손이 자기 어깨를 스칠 때 “차가운 무명 헝겊으로 겹겹이 손끝을 감싼 것 같은, 가냘픈 혼령 같은 손길”을 느낀다. 물론 그게 은숙 누나의 손길임을 알고는 “그렇지, 혼한테 손 같은 게 있을 리 없지”(25면)라고 고쳐 생각하지만 말이다.
『소년이 온다』에서 언급되는 혼/영혼이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인간 개체의 더없이 소중한 무엇이며 부서져서 온전함을 잃을지언정 그 개체가 죽어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소설이 남다른 면은 생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혼과 영혼,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향한 관심이다. 가령 ‘진수’는 함께 고문을 받았던 ‘교대 복학생’에게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130면)라고 호소하고, 선주는 “유난히 고요한 휴일 오후 해가 드는 창을 보다가 문득 동호의 옆얼굴이 흐릿하게 떠오를 때,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게 혼은 아닐까”(174면)라고 생각한다.
초를 밝히는 것, 촛불을 드는 것은 ‘나’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인 ‘너’를 부를 때처럼 개별자를 기본단위로 수행된다. 시신과 묘 하나하나에 초를 밝히고, 참배객마다 새로 초를 밝혀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어 경의를 표한다. 이같은 초혼의 행위 역시 부름과 응답의 서사에 속한다. 또한 촛불을 드는 것은 단순한 애도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촛불집회를 통해 경험했듯, 시대의 어둠에 맞서 진실과 정의의 불을 밝힘으로써 억울하게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행동이기도 하다. 시대의 어두운 진실을 드러내려는 문학적 기획에서 혼/영혼을 진지한 탐구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 소설은 보통의 재현주의 소설과는 확연히 다름을 보여준다.11
그렇다고 이 소설의 사실적 재현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재현방식을 한층 더 정치하게 만듦으로써 부름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느낌이다. 뛰어난 사실묘사와 치밀한 구성 등 전통적 소설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것 중에서도 정교한 시간구도와 장면배치는 특별하다. 인물들 각각의 이야기 시점은 이렇다. 1장에서 동호의 이야기는 전남도청을 시민군들이 장악한 ‘해방광주’ 시기이며, 2장은 정대가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후 혼이 된 시점부터 동호가 죽는 순간을 감지할 때까지다. 3장은 5·18로부터 5년 후, 경찰에 뺨 맞고 수모당하는 은숙의 이야기이며, 4장에서는 5·18로부터 10년 후, 교대 복학생이 자신과 진수의 고문 경험을 구술한다. 5장은 5·18로부터 22년 후, 선주의 고독한 삶과 악몽 같은 성고문의 기억을 보여주며, 6장은 동호가 죽은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동호의 엄마가 동호와 닮은 아이를 따라가면서 시작된다. 에필로그의 ‘나’는 5·18로부터 33년이 지난 후에 동호의 형을 만나고 동호의 무덤을 찾는다. 그러니까 소설은 5·18광주 당시(1장, 2장)에서 시작해서 5년 후(3장), 10년 후(4장), 22년 후(5장), 30년 후(6장), 33년 후(에필로그)로 점차 현재의 시점으로 다가오는 구조를 통해 5·18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점진적으로 펼쳐 보인다. 여섯개의 장과 에필로그 각각도 별표(*) 혹은 다른 표시들로 나뉜 부분들의 조합이다. 거의 120개에 달하는 이 부분들은 시간순 배열이 아니고 한편의 시처럼 아주 짧은 부분도 많아서 마치 쪼개진 이야기 조각 같다. 이 조각들이 각양각색의 조각보처럼 이어져 소년 동호와 인물들의 호흡 하나하나를, 그날 그곳의 사건 면면을 독자로 하여금 ‘함께 느끼게’ 만든다.
이런 이야기 조각들이 펼쳐지는 가운데, 인물들이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동호(‘너’)를 불러내고 동호와의 시간을 기억하는 부분이 빛을 발한다. 또한 여러 인물의 그런 조각들을 이어 붙여야 동호의 마지막 시간을 재구성할 수 있는 구도는 각 인물들에게 동호가 필요하듯 그 역도 마찬가지임을 방증한다. 가령 은숙이 기억하는 동호와의 마지막 순간은 그가 도청에 남기를 고집하면서도 두려워 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너를 데리고 가려 하자 너는 계단으로 날쌔게 달아났다. 겁에 질린 얼굴로, 마치 달아나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같이 가자, 동호야. 지금 같이 나가야 돼. 위태하게 이층 난간을 붙들고 서서 너는 떨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살고 싶어서, 무서워서 네 눈꺼풀은 떨렸다.(92면)
또한 은숙은 작중에서 희곡 대본이 검열로 지워져 대사를 발설할 수 없는 배우의 달싹거리는 입술을 지켜보다가 “…… 동호야” 하고 속으로 부른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102면)라는 읊조림에서 은숙 자신의 암울한 삶은 물론 동호의 시신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교대 복학생은 진수가 동호에게 반복적으로 하는 말, “적당한 때 너는 항복해라. 알겠지, 항복하라고. 손들고 나가. 손들고 나가는 애를 죽이진 않을 거야”(112면)를 듣지만, 다음 날 새벽 손들고 나오는 아이들을 한 장교가 총으로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선주는 보안사에 끌려가 성고문을 당한 이후 죽으려고 광주에 다시 갔다가 금남로에서 뒤틀린 자세로 죽어 있는 동호의 사진을 보고 마음을 바꾼다. “그러니까 그 여름에 넌 죽어 있었어. 내 몸이 끝없이 피를 쏟아낼 때, 네 몸은 땅속에서 맹렬하게 썩어가고 있었어. /그 순간 네가 날 살렸어. 삽시간에 내 피를 끓게 해 펄펄 되살게 했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173면) 동호를 불러내는 이런 명장면들 가운데서도 압권은 엄마가 어린 동호와 함께 천변길을 걷는 장면이다.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192면)
간절한 부름에 응답하듯 동호는 엄마에게 온 것이다. 게다가 캄캄한 데로 가는 엄마를 밝은 곳으로, 꽃 핀 쪽으로 이끈다. 엄마는 “못 이기는 척” 끌려 걸어간다. 에필로그에서 동호를 향해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213면)라고 기원하는 작가에게 화답하는 듯하다. 이렇게 동호가 생사와 시간의 경계를 훌쩍 넘어 엄마에게 온 순간, 독자에게는 동호뿐 아니라 전라도 사투리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 동호 어머니의 모습과 말, 그 속에 밴 사랑과 염려, 꽃 핀 쪽으로 가자는 어린 동호의 맑은 천성 등이 어우러진, 경이로운 세상이 도래한다. 그 순간 그 장면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동호, 정대, 정미, 은숙, 진수, 교대 복학생, 선주, 동호의 어머니와 두 형들, 작가—의 트라우마적 삶이 조각보처럼 펼쳐지며 우리를 감싸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충격과 오랜 세월의 고통이 절절히 와닿는다. 이렇게 『소년이 온다』가 만들어낸 세상이 우리에게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나를 넘어 당신에게로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이하 인용은 본문에 면수만 표기)가 『소년이 온다』와 연결된 작품임은 분명하다. 그 연결의 결정적인 계기가 『소년이 온다』를 출간하고 얼마 후 작가가 꾼 꿈이었음은 여러 경로로 확인된다.12 두 소설에는 각각 5·18광주와 제주4·3항쟁이라는 한국현대사의 트라우마적 사건이 주된 소재로 등장하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 아니라 비슷한 성격의 소설일 것이라고 예측하기 쉽다. 그러나 한강의 작품들이 으레 그렇듯 두 작품은 공통점 못지않게 차이점도 많은데, 두 소설 모두 근대·탈근대소설의 접경지역에 있지만 『작별하지 않는다』가 비사실 혹은 초현실이라는 탈근대적 요소들을 좀더 과감하게 활용한다.
등장인물 개별자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에게, 5·18광주보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그 규모가 훨씬 크고 오래 지속된 학살과 저항의 역사를 ‘제대로 쓰기’는 더 어렵고 어쩌면 아예 다른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4·3항쟁(과 보도연맹 학살사건) 수난자들의 참혹한 고통을 감지하고 그런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지극히 감각적인 고통’으로 느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순이 삼촌」(『창작과비평』 1978년 가을호)을 비롯한 현기영의 선구적인 4·3항쟁 관련 걸작들과 보도연맹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룬 조갑상의 역작 『밤의 눈』(산지니 2012)이 이미 나와 있기에, 앞선 세대의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고 『소년이 온다』의 서사적 혁신을 활용하되, 새로운 차원의 방법과 형식 또한 필요했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은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사구조에도 반영되어 있다. 일인칭 서술자 ‘경하’가 4·3항쟁의 깊은 트라우마에 가닿으려면 제주 출신 친구 ‘인선’과 인선 어머니 ‘정심’의 고통의 감각을 거쳐야만 한다. 인선은 친가와 외가가 모두 4·3으로 수난을 당했고, 자신의 어머니가 외삼촌의 유해를 찾기 위해 4·3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에 평생을 분투했음을 최근에야 알게 된다. 그런데 경하가 정심과 인선을 경유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 고통을 온몸의 감각으로 ‘같이 느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역사적 사실은 전해질 수 있겠지만 그 참혹한 트라우마적 감각은 유실되기 쉽다. 이것이 아마 한강이 맞닥뜨린 예술적 딜레마였을 것이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무엇보다 먼저 트라우마에 다가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작품으로 직접 보여준다. 동시에 너와 나, 생과 사, 사람과 유령,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들을 돌파하는 매우 발본적인 발상들을 소설 속 현실에 실험적으로 도입한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작가의 말’에서 한강은 “2014년 6월에 이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썼”고 “2018년 세밑에야 그다음을 이어 쓰기 시작했”다고 밝히는데(328면), 그사이 발표된 세편의 소설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2015), 『흰』(초판 난다 2016, 개정판 문학동네 2018), 「작별」(『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혼/영혼과 유령의 문제이다. 『소년이 온다』의 혁신적인 면 가운데 하나는 혼/영혼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되 부름과 응답의 서사와 결합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을 심화하는 쪽으로 구사한 점이다. 정대의 혼이 화자로 등장하는 것이 파격이라면 파격이지만, 선례가 없지 않거니와 한국 전통서사에서 혼을 대하는 태도와도 부응하고, 그 자체로 상당히 실감 나기도 한다. 정대의 혼은 몸이 없지만,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윤’선배의 유령은 생전의 모습으로 후배 ‘k’ 앞에 나타난다.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이 그리 드문 것은 아니지만, 그를 대하는 k가 그가 유령임을 알고도 별로 놀라지 않고 “어쩐 일이세요?”13라고 맞이하는 것은 주목할 지점이다. 또한 여성차별적인 직장에서 겪은 갈등과 혐오와 죽음의 이야기를 유령과 나누는 과정에서 묘하게 ‘평화’에 도달하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소설 속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일화나 그것을 활용해 k가 쓰는 희곡에서 소녀의 머리에 놓인 녹지 않는 눈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지만, 그럴듯하다. 자신과 타자의 분별에 갇히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어떤 깨달음을 동반하는 평화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특이한 것은 대개의 유령서사가 산 자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구도라면, 여기서는 역으로 유령이 산 자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점이다.
『흰』에서 『작별하지 않는다』와 관련해 특히 주목해야 할 글은 ‘눈’에 관한 글들 외에도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14 하는 ‘나’의 언니와 ‘나’의 관계이다. 바르샤바에 와 있는 ‘나’는 “그 아기가 살아남아”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15하며, “그런 그녀가 이 도시의 중심가를 걷는다”16고 상상한다. 독일군이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이 도시를 자신이 아니라 두시간 만에 죽은 언니의 눈으로 보려는 것이다. 화자는 마침내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면서 “당신이 숨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결국 태어나지 않게 된 나 대신 지금까지 끝끝내 살아주었다면”17이라고 강렬하게 희구한다. 이를테면 ‘언니는 갔지마는 ‘나’는 언니를 보내지 아니’한 상황이다. ‘나’는 언니를 ‘당신’이라 부르며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자신을 언니의 대리적 존재로 여긴다. 일종의 ‘더블’인 것이다. 「작별」 역시 화자 ‘나’가 어느날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는 ‘황당한’ 설정을 제시하는데,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날 갑자기 벌레로 변하는 카프카(F. Kafka)의 「변신」이나 세 남매의 아버지가 아무데서나 모자가 되어버리는 황정은의 「모자」(『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문학동네 2008)를 생각하면 갑자기 사람이 다른 존재나 사물로 변한다는 설정 자체가 없던 것은 아니다. 「작별」의 화자는 눈사람이 된 자신의 몸이 차츰 녹아감에 따라 연인과 자식과 작별하게 되는데, 이 불가피한 과정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고(필생필멸必生必滅),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회자정리會者定離)는 다분히 불교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다만 ‘필생필멸’에서 한걸음만 더 떼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기도 하다는 의미는 담기지 않는다.18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와 이어지는 『작별하지 않는다』의 1장은 이 소설의 프롤로그이자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예고한다. 작가의 분신인 경하는 꿈을 꾼다. 눈 덮인 검은 통나무들이 서 있는 벌판에서, 뒤쪽의 봉분들이 바닷물에 잠겨가자 묻힌 뼈들이 쓸려갈 듯해 애태우는 악몽이다. 경하는 이 악몽을 처음에는 광주에 관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 광경이 마음에 걸려 아흔아홉그루의 통나무를 심고 그 통나무에 먹을 입히는 과정을 기록영화로 만들자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친구 인선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4년 후 그 꿈이 광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예고하는 꿈일 수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경하는 전작 집필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는데다 가까운 사람들과의 고통스러운 작별로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죽음 직전까지 다가간다. 반복해서 유서를 쓰는 데서 암시되듯 죽음의 칼날 아래 하루하루 살아내는 형국인데, 꿈과 무의식, 초현실과 죽음이라는 요소가 이 소설에서는 생시에 의식하는 현실 못지않게 중요한 장치로 작동할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1장에서 경하가 제주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도중 눈 덮인 길에서 건천으로 굴러떨어져 죽을 뻔한 사건은 임사체험이자 상징적 죽음이다. 건천에 누운 채 눈을 맞는 경하의 모습은 인선이 고2 때 가출해서 서울의 한 터미널 근처 축대에서 미끄러져 죽을 뻔한 일화와 짝을 이루면서, 동시에 인선의 엄마 정심이 어린 시절 언니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 널린 시신들 가운데에서 가족을 찾아 헤맬 때 시신들의 얼굴 위에 쌓이던 눈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경하와 인선의 임사체험/상징적 죽음은 4·3의 트라우마를 마주 보려면 통과해야 할 의례처럼 느껴진다.
경하의 임사체험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는 눈이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느낌, 다른 세상에서 오는 듯한 눈의 정동이다. 인선은 아흔아홉그루의 통나무를 다듬다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한다. 긴급히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봉합수술을 한 인선이 눈 내리는 병원 창밖을 내다보다가 “이상하지 눈은 (…)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94면)라고,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95면)라고 읊조린다. 이 중얼거림에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눈은 죽음을 상기시킨다. 얼어붙은 시신의 얼굴에 쌓인 눈은 녹지 않는다. 하지만 경하가 인선의 제주 집을 찾아가다 만나는 함박눈은 사뭇 다른 정동을 담고 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맺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없이 사라진다.(89면)
이 대목에서는 이 세상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순정한 평화가 느껴진다. 『흰』에서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19이라고 물었듯 이 작품에서 눈은 수시로 느낌이 변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눈의 미묘한 정동이 소설의 분위기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가령 ‘녹지 않는 눈’이라도, 시신의 얼굴 위에 쌓인 눈과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소녀의 머리 위에 쌓인 눈은 전혀 다른 정동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죽음같이 차갑고 섬뜩한 눈은 역사적 트라우마의 감각을 묘사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된다. 또한 경하가 제주공항에서 인선의 집에 도달할 때까지 만나는, 온 세상을 휘몰아 감싸는 눈보라와 함박눈은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런 눈을 헤치고 나서야 도달한 곳에서 유령을 만나게 되니 그럴 법하다.
그런데 인선이 유령으로 출현하는 방식이 흥미롭고 파격적이다. 이전에 인선이 서울에서 추락사고로 의식을 잃고 무연고 환자로 입원했을 때, 제주 집에 인선의 유령이 나타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서울의 병원에 있어야 할 인선이 제주에 온 경하에게 나타난 것, 경하 자신이 분명히 그 주검을 나무 밑에 묻었던 인선의 앵무새 ‘아마’가 나타난 것은 근대 이전 서사에서 다뤄지곤 했던 귀신에 관한 관습적 범주를 뛰어넘는다.
제주 집에 나타난 인선을 보고 경하는 “그녀의 오른손이 상처 없이 깨끗한 것”(187면)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인선은 언제나처럼 이곳에서 나무 작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고, 서울에서 내가 받은 문자와 이 섬에서 겪은 모든 것이 망자의 환상이었을 뿐”(190~91면)이라는 자신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인선이 끓인 뜨거운 차를 함께 마시며 경하는 속으로 “인선이 혼으로 찾아왔다면 나는 살아 있고, 인선이 살아 있다면 내가 혼으로 찾아온 것일 텐데. 이 뜨거움이 동시에 우리 몸속에 번질 수 있나”(194면)라고 자문한다. 이런 도교나 불교 철학에서 나올 법한 물음에 소설 말미에 등장하는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관측하려 하는 찰나 한곳에 고정되는 빛처럼”(322면) 같은 양자역학의 발상 20을 추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존재와 유령의 관계에 대한 소설 내의 여러 철학적 해석 가능성은 이분법적인 실체론의 사유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수렴하면서, 경하가 인선의 대리적 존재(‘더블’)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경하에게 나타난 인선의 유령은 마치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에서 k에게 나타난 윤선배처럼, 『흰』에서 ‘나’가 불러내는 언니(‘당신’)처럼 산 사람을 이끄는데, 그 길은 4·3항쟁의 트라우마와 수난의 역사로 향한다. 인선이 경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나무를 심고 먹칠을 하는 프로젝트—’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는 지점에서 경하의 꿈은 인선에 의해 4·3에 관한 꿈으로 재해석된다. 이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는 경하는 인선과 정심의 눈과 몸으로 4·3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에서 실증적 현실의 개연성을 괄호 침으로써 초를 밝히는 작업이 완수되었음이 암시된다. 이후 4·3의 참혹한 학살과 고문현장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물꼬 터진 양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이때부터 인선과 정심이 점점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런데 잔혹하고 참담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통과하는 이 과정에서 경하는 오히려 죽음과 악몽으로부터 왠지 모르게 차츰 놓여나는 듯 느끼는 것이 묘하다.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교대로 나눠 들고 밤의 설경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에는 이 세상 풍경 같지 않은 기이함이 깔려 있되 불길하지 않고, 오히려 온 사방의 어둠 속에서 작은 불꽃같이 빛을 발하는 ‘평화’의 기척이 느껴진다.21
4·3항쟁 및 보도연맹 학살에 관한 증언과 유골 발굴과정을 살피는 후반부의 서사도 빼어난데, 특별히 인상적인 몇 대목이 있다. 가족 모두가 죽임을 당했던 때의 정황을 15년이 지나서야 세천리 학살사건의 목격자에게서 듣게 되는 인선의 아버지 이야기, 정심이 오빠의 행방을 찾다가 알게 된 엄청난 규모의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유골 발굴에 관한 이야기 등이 생생한 증언과 기구한 사연을 통해 독자의 마음에 와닿는다. 『소년이 온다』에서처럼 이 소설에서도 이야기 조각들을 짜맞추어야 비로소 그 의미가 온전해지는 것들이 적잖다. 예컨대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 외삼촌의 기막힌 고통의 행로가 그렇다. 또한 정심이 오빠의 유골을 찾기 위해 참여해온 유족활동이 금지되고 허용된 연도를 추적하면 반공이데올로기가 헌법 위에 군림해온 분단체제의 역사적 부침이 드러나는 것도 그런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는 독자는 4·3항쟁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기까지 화자 경하의 고통스러운 마음과 긴 사유의 회로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후에는 경하처럼 인선과 정심에게 이끌려 참혹하기 그지없는 학살현장과 가슴 아픈 사연들의 눈보라 속으로 휩쓸려든다. 이 소설은 익숙지 않은 어법과 서사, 과감한 발상이 곳곳에 깔려 있어 독자인 우리에게 편안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함께 촛불을 밝혀 들고 나아간다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우리 곁에 와서 머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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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 Reactions: Han Kang, Nobel Prize in Literature 2024,” Nobel Prize, 2024.10.10. 번역은 인용자. ↩
- 「한강이 물길 튼 ‘한국 문학 세계화’ 이제부터가 진짜다」, 동아일보 2024.10.11. ↩
- 졸고 「촛불민주주의 시대의 문학」,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 26면. ↩
- 김연수·한강 「사랑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321면. ↩
- 같은 글 322면. ↩
- 한강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창작과비평』 2015년 여름호, 319면. ↩
- 김영찬 「고통과 문학, 고통의 문학」, 『문학이 하는 일』, 창비 2018, 215면. ↩
- 김연수·한강, 앞의 글 324면. ↩
- 5장의 ‘선주’도 ‘당신’이라는 2인칭으로 불리지만, 다른 인물들이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다. 참담한 고통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이 여성노동자에게 작가가 보내는 존경의 뜻으로 읽힌다. ↩
- 김연수·한강, 앞의 글 같은 면. ↩
- 하지만 인물들 모두가 혼/영혼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고, 교대 복학생은 ‘양심’을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여기는데(114~16면 참조), 이 점은 소설의 개연성 측면에서 적절하다. ↩
- 가령 한강의 2014년 만해문학상 수상소감문 「검은 침목과 시간 사이에서」(『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에 등장하는 꿈은 『작별하지 않는다』의 도입부에 나오는 꿈과 흡사하다. ↩
-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289면. ↩
- 「배내옷」, 『흰』, 18면. ↩
- 「그녀」, 같은 책 36~37면. ↩
- 「초」, 같은 책 38면. ↩
- 「당신의 눈」, 같은 책 118~19면. 강조는 인용자. ↩
- 『작별하지 않는다』에 「작별」에 대한 논평이 나온다. “이후의 진짜 작별들이 아직 전조에 불과했던 시기에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썼었다. 진눈깨비 속에 녹아서 사라지는 눈-여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게 정말 마지막 인사일 순 없다.”(25면) ↩
- 「눈보라」, 『흰』, 64면. ↩
- 문학평론가 전승민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양자적 세계”라고 주장하고 이 장면을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통증과 회복의 인간학」, 『퀴어 (포)에티카』, 문학동네 2024, 455면. ↩
- 4·3항쟁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는 소설에서 중요인물을 유령으로 제시한 사례는 적잖다. 가령 미국문학 가운데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장편 『빌러비드』(Beloved, 1987)에서 유령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예술적 요소이자 방법론으로 활용된다. 두 작품은 엄청난 규모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함축된 형언하기 힘든 고통과 참혹의 정동, 그리고 애도와 해원에의 열망을 공유하고 있지만, 유령의 존재를 활용하여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판이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