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민의 기세로부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저 바다 언제까지나/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얼마나 황홀한 일인가/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인가/그 성난 물결 단번에/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씻어내리리 생각하면.”
『길』(창비 1990)에 실린 신경림 시 「파도」이다. 짧은 시 속에 민중의 운동성과 그를 감각하지 못하는 세상의 편견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시의 부제는 ‘여의도의 농민시위를 보며’이다. 1989년 여의도 농민시위는 일제의 잔재인 수세(水稅, 농업용수 사용료)를 주요의제로 들고나왔다. 시인은 시위의 물결이 농민들을 억압해온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내”주길 기대했고, 민중의 협동적인 움직임에서 변혁적 기세가 활성화되는 것을 감각했다. 하지만 수세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2000년에나 이르러서였다.
근간에 우리는 소설가 한강이 쓴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는 말과 그것의 깊은 의미를 빛의 혁명 가운데 실감했다. 그런데 맑스는 『자본』 서문에서 유사한 어휘로 정반대의 의미를 표현한 바 있다. ‘우리는 산 자만 아니라 죽은 자에 의해 고통받는다.’ 이른바 적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사람들을 괴롭힌다. 오래된 과제가 단번에 해결되거나 완수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는 일과 더불어 시위 현장의 목소리들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이 파한 뒤에도 ‘현장성’을 확장해서 사유하고 이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내란이 일어난 지 일년 반이 지났고 새 대통령이 선출된 지는 일년 가까이 되었다. 짧은 기간에 내란의 극심한 혼란을 진정시킨 성과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내란세력에 대한 복잡한 심판의 과정, 그리고 국제관계의 평화적 질서를 위협하는 미국 주도의 비상식적 전쟁을 떠올리면 국내외로 여전히 혼란스러운 사태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게다가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코스피 지수라는 금융지표의 성장에만 집중된 언론과 대중의 관심, 미국-이란 전쟁으로 인한 생활상의 불안, 급변하는 AI기술을 목격하는 두려움 등을 떠올리면, 급한 불은 껐지만 우리가 희망했던 “온갖 더러운 것”의 소멸과 정화를 향한 기대감과 실천력은 다소 흐릿해진 면도 없지 않다.
내란세력을 명확히 응징하는 일이 여전히 중요하다. 이 시점에서 강조할 점은 그들을 벌주는 것뿐 아니라 그들이 기대온 오래된 시스템을 변혁하는 일이다. 내란에 가담한 자들이 반자주·반민주 세력이었음은 그간 우리가 목도해온 바다. 수구기득권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보여온 미국 의존적 자세와 분단체제를 재공고화하려 했던 작태들은 이들이 기대는 낡은 질서를 철폐하는 일이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공동체의 번영과도 이어지는 일임을 사유하게 한다. 또한 내란 심판의 과정에서도 여전히 내란세력에 동조적 성격을 보이는 사법권력의 문제를 떠올린다면 87년체제의 헌법을 개정하는 일이 민주주의적 가치를 수호하고 새롭게 갱신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자주’와 ‘민주’ 그리고 ‘평화’의 가치를 공동체 내부에 한층 더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민(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경험들을 통과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배우며 성장했다. 서로 남이라고 여기는 거리감 대신에 정치적 친밀성을 생성하는 집합적 주체로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남태령에서 농민과 여성과 제도정치 인사들이 만났던 장면을 특별히 기억한다. 보편적 가치를 생각하는 힘이 커지고 서로를 가깝게 여기는 마음의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더 나은 현실을 이끌, 다양성을 담지한 민의 기세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상대로 벌인 참극을 비판하며 보편적 가치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해야 한다고 한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과 그에 대한 시민들의 환영과 동조가 한 증거일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 기세에 올라타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다양한 생각과 상상을 이어나가야 한다. 민의 기세에 올라탄다는 말은 민의 힘에 기댄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완수해야 할 임무의 방향성에 ‘민의 관점’이라는 시야를 확보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민의 관점이란 내 삶을 고양시키는 일과 공동체를 바꾸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는 주권자의 시각이며, 정해진 규칙에 붙들려 있기보다 공동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전적 행위와 그 행위를 조율하는 창조적 질서를 새롭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적폐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적폐를 당연시하는 질서 자체를 상대할 한 차원 높은 현실의 질서가 요구된다. 빛의 혁명을 겪으며 여럿의 지혜와 실천적 행동에 감탄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공유함은 물론이거니와 근래 6월 지방선거에만 특별히 집중하고 있는 정치권에 들려주고픈 이야기이다.
이번호 특집에서는 공동체의 역사와 기억을 담은 작품들을 살핀다. 역사적 사건과 기억은 현재의 시선에 연동되어 운동성을 띠는 잠재적 성격을 갖는다. 뒤집어 생각하면, 과거의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피면 현재 우리의 시선과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세편의 특집 글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움직임 속에서 앎으로 삶을 바라보고, 삶으로 앎을 재조정하는 작업을 펼쳐 보인다. 공동체의 시간을 사유의 지평 위에 세움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더 생생하게 만들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만들어온 특별한 가치들과 현재의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이끈다.
정주아는 두 다큐멘터리 「먼지, 사북을 묻다」와 「1980 사북」을 중심에 두고 ‘사북사태’로 명명되었던 사건을 소환한다. 탄광노동자들이 권리와 존엄을 찾기 위해 나섰던 쟁의의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건들의 복잡한 실제와 그사이 의미를 잃어간 쟁의의 본질을 되묻는다. 사북 노동쟁의를 왜 민주화운동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꼼꼼하게 따져 묻고 산업화과정에서 삶을 박탈당한 이들의 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한영인은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공동체의 역사와 기억까지도 채굴과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며 서사를 만들어내는 현상을 ‘개인서사 시장’이라는 명명하에 살핀다. ‘서사의 윤리’라는 오랜 규범이 붕괴하고 ‘서사의 경제’로 초점이 옮겨간 듯 보이는 상황에서 그는 역사적 기억을 사적 소유로 변질시키는 이 시장의 위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개인의 경험으로 환원불가능한 문학의 재현능력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윤은성은 허수경과 조정의 시를 매개로 하여 한국시사(詩史) 안에 지속적으로 그려지는 생태 공동체의 빛을 포착한다. 허수경의 지난 시편들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위기를 감각하게 하는 소외된 지역성, 인간중심 문명의 폭력성 등을 세심히 살핀다. 조정의 시를 통해서는 생태적 가치를 돌보는 실천이 사람과 자연 사이는 물론이거니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감각하게 하고 그 안의 고통을 해소하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는지를 말한다.
대화는 이남주의 사회로 문희정 이해영 정현곤이 참여하여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과 이란전쟁이라는 현실을 토대로 전쟁국가와 다름없는 미국의 면모를 신랄하게 밝힌다. 나아가 세계사적 사안이라고 할 극우정치의 준동에 대항할 수 있는 ‘변혁적 중도의 국제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전작권 전환, 남북연합의 진전 가능성 등을 구체적·현실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은 현재 시점에서 우리가 국제질서의 변화에 맞춰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할지, 또 어떻게 우리의 자주성을 증대하고 국제사회에서 ‘좋은 국가’로서의 책임을 다할지를 타진하게 한다.
지난호 대화를 통해 예고했듯 이번호부터 60주년 특별기획 ‘찾아가는 현장’이 연속 게재된다. 그 첫 순서로 인류학자 백영경 주현우가 일년 전 큰 산불을 겪은 안동지역을 찾는다. 산불로 피해를 본 지역의 주민들, 그리고 그 삶이 회복되기를 돕는 활동가들 곁으로 다가가 그들의 목소리를 주의깊게 듣고 현장의 실질적 어려움과 해결책을 고민한다. 보상금 지급 등에만 초점을 맞춘 행정 조치를 넘어 회복을 위한 마을 단위의 실천을 지원하는 노력을 강조하고, 이전과 동일한 상태로의 ‘복구’가 아닌 자치적 삶을 ‘수선’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은 특히 경청할 대목이다. 현장 가까이 가기 전에는 수신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을 전해 듣고, 여러 난경 속에서도 살아 있는 지역적 삶의 활기를 감각하게 하는 글이다.
역시 60주년 특별기획인 ‘한국문학과 K사상의 가능성’은 두번째 순서를 맞아 황석영 소설 『할매』가 세계적 생태서사의 지평을 어떻게 더욱 너르게 열어나가는지, 또 그 바탕에 어떠한 한국적 사유와 심성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연속기획 속에서 이어질 앞으로의 평론들에 대한 기대와 응원이 실리는 글이다.
또한 논단, 작가 인터뷰, 문학초점, 촌평 등 여러 지면을 통해 우리 시대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았다. 이 계절에 만나는 반가운 신작부터 깊이있는 통찰을 주는 작품들을 소개하며 다채로운 사유를 전한다. 연재 코너 ‘내 삶을 돌본 것’에서 삶의 비법을 고백해준 백온유의 산문이 잔잔한 여운을 전하며, 신작 시·소설을 담은 창작란 역시 풍성하다.
신경림의 시 「파장」(『농무』, 창비 1975)에는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저와 같은 얼굴이 늘어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줄어드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한결같이 친구인 얼굴들’이 공동체의 풍요로움을 측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줄 것이다. 이번 계절, 서로의 얼굴을 친밀하게 바라보며, 꿈꾸는 미래를 앞당겨 지금 이 자리에서 감각하는 날들이 독자들께 펼쳐지기를 기원한다.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