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서재정 『괴물의 시대』, 창비 2026
‘괴물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구갑우 具甲祐
북한대학원대 교수
kwkoo@kyungnam.ac.kr
『괴물의 시대: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요동하는 한반도』를 읽으며, 저자 서재정을 보기 드문 진보적 국제정치학자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분과학문으로서의 국제정치학은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지구적 패권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해왔다. 따라서 주류 국제정치학에 근접하면 할수록 연구자의 진보성은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주류 국제정치학의 밖과 안에서, 이 경향을 거스르고자 했다. 이 서평을 준비하며, 1996년 저자가 역사학자 정용욱과 함께 맑스주의에 친화적인 서구 학자들의 글을 모아 편집한 『탈냉전과 미국의 신세계질서』(역사비평사), 2009년 출간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한울)를 다시 꺼냈다. 충실한 독자의 시각에서, 그의 진보적 국제정치학자로서의 여정을 반추해보고 싶었다.
『괴물의 시대』는, 국제정치를 힘을 위한 투쟁 혹은 힘의 정치(power politics)로 보는 현실주의(realism) 시각에 자유주의와 구성주의를 결합한 ‘분석적 절충주의’를 통해서 한미동맹의 예외적 지속을 설명하고 그 대안을 모색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이후 17년 만의 저서이다. 그사이, 미국의 지구적 패권은 사멸의 길을 갔다. ‘괴물의 시대’는 지구적 패권의 부재를 가리키는 은유다. ‘책머리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우리에게 두 맑스주의자 그람시(A. Gramsci)와 지젝(S. Žižek)을 떠올리게 한다. 그람시는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그 공위기에 다양한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고, 1930년대 초반 이딸리아의 파시스트가 자신을 가둔 감옥에서 썼다. ‘병적 증상’은 위기의 지표였다. 2010년대에 지젝은 병적 증상을 더 큰 공포를 자아내는 ‘괴물’로 번역했다. 지젝에게 괴물은 생명체가 내재한 극우 포퓰리즘이나 인종주의와 같은 비이성적인 무엇이었다. 이 책에서 서재정도 괴물의 시대의 한 징표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의 출현을 보며, “우리는 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읽어야 한다”(5면)고 말한다.
2004년부터 2025년까지 한반도 문제를 미국 외교정책과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분석한 글들의 모음인 이 책은 1부 ‘탈냉전이 부른 위기’, 2부 ‘미중경쟁 속의 한반도’, 3부 ‘일촉즉발의 국면, 절박한 평화’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의 세계가 왜 괴물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한 국제정치학자의 고뇌가 담겼다. 서재정은 “남북관계가 ‘적대적 두 국가’로 귀착되고, 조·미 적대관계가 고착화된 현실”을 “괴물의 시대에 나타난 병적 증상”(같은 면)으로 본다. 한반도 핵전쟁 위기도 병적 증상의 하나다(231면). 극우 포퓰리즘의 시대, 핵시설은 물론 민간시설까지도 공격하는 극단적 전쟁의 시대, 인간의 이성이 사라진 제노사이드 시대에 한반도질서 또한 병을 앓고 있다는 진단이다.
현재의 한반도질서를 비판하며 대안적 한반도질서를 모색하는 이 책은, 국제정치에서 윤리와 도덕을 배제하며 국가를 동질적 행위자로 간주하는 현실주의 가정에서 출발한다. 조선(북한)은 고정불변의 위협으로, 미국은 고정불변의 안보로 상수화하려는, 미국과 한국의 주류 안보담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이다. 저자는 “‘절대악’이라는 상수로만 존재하는 조선을 변수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절대선’이라는 상수로만 여겨지는 미국을 변수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통해 “조선과 미국을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국가들과 똑같이 취급하면 대한민국의 안보도 좀더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지 않겠냐는 합리적 대안”(11~12면)을 내어놓고자 한다. 조선과 미국을 세계의 다른 국가들과 똑같이 취급하자는, 즉 좋은 국가와 나쁜 국가를 나누지 않으려는 현실주의적 사고다. “조선을 고정된 ‘주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한국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변수로 보자는 제안이자, 미국을 한국의 동맹으로만 보지 말고 독립변수로서, 또 조선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는 변수로 보자는 제안이다.”(같은 면)
이 현실주의적 접근을 관통하는 핵심개념이 배신을 택하는 것이 지배적 전략이 되는 수인의 번민게임(prisoner’s dilemma)과도 같은 ‘안보딜레마’다. 『괴물의 시대』에 따르면, 조선의 핵개발은 “힘에는 힘으로” 맞서온 상호작용의 결과다(4장). 미국은 핵무력으로 조선을 확증파괴할 능력을 과시하고, 조선은 비핵 군사력으로 한국을 확증파괴할 능력을 과시하여 서로간 전쟁 시도를 억제하는 비대칭적 상호억제가 붕괴하면서, 조선이 핵개발의 길을 갔다는 논리다. 즉 조미 안보딜레마 속에서 핵국가 조선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2018~19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속에서 한국정부가 조선과 대화와 협상을 하면서도 안보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군사력 강화를 통한 “거짓 평화”(229면)의 길을 가게 되었다는 지적은 통렬하다.
안보딜레마의 파생개념인 ‘동맹딜레마’도 동원된다. 이 책에 따르면, 트럼프라는 괴물의 출현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결과 거대 자본과 엘리트만이 그 과실을 따먹었고, 자신들은 직장도 잃어가며 세계질서의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는 대중의 불만과 맞아떨어졌”다(284면). 반엘리트, 반글로벌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먹힌 이유다. 물론 『괴물의 시대』는 반엘리트로 포장한 트럼프식 포퓰리즘이 사실은 트럼프 지배연합을 구성하는 “테크노 자유지상주의”(286면) 세력 즉, AI자본주의 시대에 등장한 ‘새로운 엘리트’에 기반한 “아리스토포퓰리즘”(287면)임을 지적한다. 전지구적 이익을 자국의 이익과 등치했던 패권국가 미국이 ‘미국 우선’만을, 미국의 국가이익만을 내세우는 “노골적 현실주의”(278면)로 전환하게 만든 미국 내적 원천들이다. 자국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트럼프식 노골적 현실주의는 친구인 동맹국을 수탈하며, 동맹이 자국의 이익에 기여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 동맹딜레마에 직면하여, 이 책은 한국의 주류 안보담론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대안을 제시한다. “미군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주한미군의 규모와 역할에 생길 변화를 반사적으로 두려워하기보다는 한반도의 안보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할 수도 있다”(32면)는 제안이 그것이다.
안보딜레마 개념을 제안한 허츠( J. Hertz)는 국제체제의 무정부성과 국제관계에서 힘의 중심성을 강조한 현실주의자였지만, 대안 모색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비판적 현실주의자’였다. 서재정은 허츠를 ‘성찰적 이성’과 ‘해방적 인식론’에 기초해 현실주의의 한계 너머를 상상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평가한 연구를 인용한다(33면). 이 언급은 현실주의의 핵심개념인 안보딜레마와 동맹딜레마를 국제정세 분석에 활용하되 그 딜레마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온 진보적 국제정치학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우회적 고백이다. 『괴물의 시대』는 한반도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위해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와 ‘공동안보·포괄안보·협력안보’를 추구하는 평화협력 기구”(308면)를 제안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우리는 괴물의 시대에 트럼프 같은 괴물이 제공하는 역설적 기회의 창을 활용해 괴물이 사라진 시대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한 진보적 국제정치학자의 대담한 상상력을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