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서평

 

이남희 李南姬

서울대 강사, 영국근대사·여성사 전공.

 

 

역사를 만든 역사가

E.P. 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상·하, 창작과비평사 2000

 

 

1. 1780년대에서 1832년 사이에 영국 노동자들이 계급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서술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노서경·김인중·유재건·김경옥·한정숙 옮김, 이하 『형성』)은 영국노동사라는 특정 분야를 넘어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출간 후 30여년이 지나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일간지에서 비중있는 서평이 기획된 것은 책의 성가가 그만큼 높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몇몇 신문들의 평소 정치적 입장을 생각할 때, 책의 의의와 함께 톰슨(E.P. Thompson)의 탁월함을 높이 평가하는 서평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실린 것은 다소 의외였다. 또 한때 영국공산당 당원이었고 또 ‘혁명분자를 기르기 위해’ 노동자 교육운동에 전념했던 저자의 위험한 전력이나 ‘경험과 투쟁을 통한 계급의 형성’이라는 불온한 사상에 대해 우려하는 서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 사회와 언론이 그만큼 개방되고 포용력이 커진 결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이제는 누가 뭐라든 꿈쩍 않을 한국 자본주의체제의 자신감으로 읽어야 할까?

평자가 느낀 당혹감은 그뿐이 아니었다. 과연 이 책이나 저자에 대해 우리 지식계가 언제 그렇게 진지한 관심을 쏟거나 큰 영향을 받은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보면, 평자가 대학원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한 80년대 중반, 주위에서 톰슨이나 『형성』에 관심을 둔 것은 주로 영문학이나 노동사를 전공하는 몇몇 사람에 불과했다. 그나마 서로 상대방이 톰슨을 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길 정도였다. 그와 동시대의 역사가 홉스봄(E. Hobsbawm)이나 브로델(F. Braudel), 월러스틴(I. Wallerstein) 등이 우리 학계에서 꽤 널리 관심을 끈 데 비해, 톰슨을 높이 평가하는 이는 비교적 소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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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앞의 세 사람의 저술이 유럽이나 세계체제를 포괄하는 데 비해, 톰슨의 연구가 주로 영국사에 한정된 점도 그의 이름이 덜 알려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게다가 펭귄판 복사본으로 돌았던 『형성』은 베고 자기에 딱 좋을 만큼 두꺼운 분량에 쉽지 않은 문체로 씌어진 탓에 통독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톰슨의 다른 글, 가령 18세기 영국 민중의 ‘도덕경제’나 산업화와 노동규율의 관계에 대해 쓴 글들을 경제사 강의에서 접하게 되었을 때는 그래도 훨씬 이해할 만했던 기억이 난다. 톰슨의 역사이론을 본격적으로 해석한, 우리말로 된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맑스·레닌 등 이른바 ‘원전’이 아니면 맥을 못추던 시절, 톰슨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문화주의 내지 개량주의적 일탈로 받아들여졌다. 반대로 ‘본고장’에서 새로운 사조를 호흡하고 막 유학에서 돌아온 이들로부터는 60년대에 나온 ‘철 지난 유행가’를 이제야 읊고 있느냐는 핀잔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우리 지식사회에서 톰슨을 위대한 역사가로, 『형성』을 걸작이라고 평가한다면 그 이유를 한번쯤 되물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2. 지난 수십년간 서구 학계에서, 특히 영국의 산업혁명기 연구에서 『형성』은 그 논지에 대한 찬반 여부를 떠나 그냥 비껴갈 수 없는 고갯마루와도 같았다. 영국사에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동질성을 의식하는 계급으로 ‘형성’된 것이 톰슨의 주장대로 1830년대부터냐 혹은 홉스봄의 말대로 본격적인 공장제 공업화가 진전된 19세기말이냐 하는 문제라든지, 톰슨이 산업혁명의 충격이나 노동자들의 고통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 등은 그 자체로 치열한 논란거리였지만, 그 논쟁의 승패가 곧 이 책의 가치를 가늠하는 유일한 기준은 아니다. 또 단순히 톰슨이 20세기 역사가로서 가장 널리 인용된 인물이기 때문에 이 책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평자의 생각으로는 이 책을 쓰기까지 그리고 그후로도 이어지는 저자의 사상적·실천적 행보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것이 20세기 역사학의 지평을 쇄신한 ‘아래로부터의 역사’ 서술의 대표적 성취라는 평가도 그저 겉치레로 들릴 뿐이다. 이 책을 고난의 한 시대를 살아간 민중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걸출한 성과인 동시에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살기 위해 온몸을 던진 제1세계의 지식인이 겪은 고뇌와 깨달음의 기록으로 읽을 필요가 여기에 있다.

1924년생인 톰슨이 1993년 8월 28일 만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직후인 8월 30일자 각 신문의 부고란은 그를 “사회사가이자 『형성』의 저자”(The Times), “사회주의자, 시인, 시민운동가, 웅변가, 당대에 가장 빼어난 논쟁적인 글을 쓴 작가이자 역사가”(The Independent),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가”(The Guardian)라고 소개했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역사가였지만, 이 책은 교사, 역사가, 혁명가,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톰슨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영국의 인도 지배에 비판적인 감리교 선교사 출신 아버지와 2차대전중 불가리아에서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빨치산으로 활약하다 처형당한 형 등 영국의 반국교도(Dissent) 전통에 뿌리를 둔 가계가 톰슨의 급진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외에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로 2,30대를 바친 교사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형성』은 맨 앞장에 적힌 대로 도로시와 조우지프 그리널드(Dorothy & Joseph Greenald)에게 헌정되었는데, 그들은 톰슨이 리즈대학 개방학부에서 가르친 첫 제자들이었다. 개방학부란 노동자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목적으로 만들어져 ‘노동자교육협회’와의 협력 아래 진행된 3년 과정의 강좌였다. 톰슨은 노동자·주부·회사원·외판원 등 다양하게 구성된 학생들에게 문학과 역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고, 그 자신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톰슨이 광산의 역사에 대해 그림을 그리려고 할 때 ‘톰슨씨, 분필을 저한테 줘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학생들이 거기 있었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와 영문학을 전공한 남부 출신 ‘학삐리’가 웨스트 라이딩 공업지대의 노동자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으려면 웬만한 헌신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했는데 그는 그걸 해냈다고 당시 학생들은 회고했다.

톰슨은 개방학부를 대학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주요 목표인 대학당국과 갈등하는 한편, 잔업과 일상의 고단함에 젖어 배움의 열의를 잃기 쉬운 학생들을 북돋우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이 책을 집필했다. 그래서 자신이 가르친 학급에 대한 보고서(그는 1948년에서 65년까지 가르친 60여개 학급에 대한 3만자 분량의 보고서를 남겼다)에서 고백한 대로 “18세기말이나 19세기초에 일어났다고 내가 강의하는 내용, 예를 들어 좁은 갱도에서 누워서 작업하는 광부, 공장노동을 하는 9살짜리 어린이, 오줌 받는 통 등이 그곳에서는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자 현실”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던 그의 느낌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길 수 있었는지 모른다. 원래 20세기초까지 이어지는 영국노동사의 제1탄으로 1780년대부터 1832년 사이를 다룬 이 책을 출간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사실 이 책을 쓰는 동안 톰슨을 붙잡은 것은 교사 일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1979년의 재판 서문에서 “돌이켜보건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나는 초기 신좌파의 활동, 반핵운동에도 깊이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이 책을 쓸 수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상·하권 15면)고 고백할 정도였다. 1956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 톰슨은 이에 항의하여 동료들과 공산당을 탈퇴했고, 그후 좌파 안에서 스딸린주의적 경향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맑스주의 내부의 유명한 논쟁의 한 장인 1965년 앤더슨(P. Anderson)과의 논쟁, 1973년 꼴라꼬프스끼(L. Kolakowski) 비판, 1978년 알뛰쎄르(L. Althusser) 비판 등을 거치면서 그는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대변하는 인물로 부각됐다. 홉스봄은 추도사에서 그를 ‘좌파의 외로운 늑대’라고 불렀다.

시인으로서, 웅변가로서 톰슨의 예술적 자질이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1980년대 이후 특히 활발해진 평화운동에 앞장서면서였다. 배우 풍모의 그가 은빛 머리를 휘날리며 트라팔가 광장에서 핵무기 반대를 주장할 때는 일종의 카리스마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56년의 결별 이후 감정의 앙금이 삭지 않았는지, 홉스봄은 톰슨의 반핵운동 참여에 대해 고립을 싫어하고 스타 기질이 있는 탓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항의편지 쓰기부터 신문기고, 방송출연, 일상적인 회의운영과 배지 도안까지 두루 맡아, 결국 건강을 해칠 정도였던 그의 활동은 보통 열성이나 신념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그의 평화운동 노선은 동유럽의 반체제운동과 서구의 반핵운동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었다.

좌파지식인들 사이에서 미묘한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톰슨의 가장 큰 행운은 아마도 평생 동지이자 동반자였던 부인과의 만남일 것이다. 케임브리지대학 시절 톰슨과 만난 도로시 타워즈(Dorothy Towers)는 구둣방을 하는 아버지와 교사 출신 어머니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의 교육을 적극 후원하는 분위기에서 자랐고, 일찍이 14살이 되던 해인 1939년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역사와 정치에 대한 관심을 공유했던 도로시와 톰슨은 전쟁 직후 반파시즘투쟁의 격전지인 유고슬라비아에 철도 건설을 지원하는 국제자원봉사단으로 함께 갔다. 1948년 정식으로 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사상검열이 심해진 제도권 대학에서 일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학위를 위해 더 공부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핼리팩스에 정착해서 앞서 말한 리즈대학 개방학부에서 톰슨은 전임강사로, 도로시는 시간강사로 노동자학생들을 가르쳤다. 강의 이외에 공산당 역사가 모임, 지역정치활동 등으로 정신없이 살던 두 부부는 세 아이를 키우는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학생들과 지역 사람들을 연신 집으로 불러들였다. 톰슨이 일생 동안 수입이 좋거나 안정된 직위를 갖는 대신 정치적 소신에 따라서 살았으므로 도로시가 희생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더러 있지만, 학문과 정치 양쪽으로 신념을 공유하며 일생 해로했던 보기 드문 부부였던 것은 분명하다. 톰슨이 이 책 집필 이후 18세기 연구로 거슬러올라간 것에 비해, 도로시는 이 책에서 다룬 시대의 후속시기라 할 차티즘(Chartism)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서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고 1968년부터 버밍엄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3. 여성사를 전공하는 평자의 입장에서는 여성학의 시각에서 이 책의 의의와 한계가 어떻게 평가되는지도 관심거리였다. 성(gender) 개념에 의거해 톰슨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것은 지난 10여년 사이 가장 ‘잘 나가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 중의 하나인 스콧(J.W. Scott)이었다. 스콧은 『형성』을 다룬 글(Women in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에서 이 책의 사상적·역사적 의의를 한참 칭찬한 후에, “그런데 『형성』을 다시 읽어보면 여성이 거기 서술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상한 방식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놀라게 된다”고 서두를 꺼냈다. 남자들은 바쁘게 일하고 모임을 갖고 쓰고 말하고 시위하고 기계를 부수고 감옥에 가고 경찰·관리들과 용감하게 맞서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반면, 여성들은 극히 주변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제1장에 나오는 급진적인 제화공 하디의 부인은 남편의 정치활동이 서술되는 동안 임신중이라 침대에 누워 있거나 보수파의 폭도들이 집에 난입했을 때의 충격으로 출산중에 죽는 것으로 간간이 배경처럼 언급되었다. 남성들은 행위의 일반적 주체로 등장하는 반면, 여성 중에 구체적인 활동이 드러나는 것은 휠러(A. Wheeler)나 울스턴크라프트(M. Wollstonecraft) 혹은 싸우스컷(J. Southcott)같이 특정한 인물에 한정되었고, 이들은 여성 일반과 구별되는 특별난 여성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산업자본주의가 일하는 여성들에게 끼친 전반적인 영향에 대한 관심도 『형성』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상과 같은 스콧의 지적에 대해 병상에 있던 톰슨이 글로 반박할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

스콧의 글을 읽고 다시 이 책을 들여다보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바이블이 갑자기 이교도의 문서로 뒤바뀌는 혼란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종의 배신감을 잠시 진정하고 보면 스콧의 지적이 매우 날카로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톰슨의 저작 역시 역사적인 산물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상기하게 된다. 이 책에서 다룬 시기는 남성과 동등하게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권리의식이 있는 여성 대중을 발견하기에는 조금 이른 편이었다. 영국에서는 울스턴크라프트처럼 이미 1790년대에 여·남 평등의식을 글과 행동으로 표현한 인물이 있었던 반면, 사회개혁프로그램에 여성문제가 포함되어 제대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 이후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한 이후였다. 19세기말까지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조차 없었다. 물론 당시 상황에서 실제로 여성들이 수동적이었다 해도 서술과정에서 역사가가 성차(gender gap)에 좀더 주의를 기울여 여성을 주변화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톰슨이 이 책을 쓴 것은 아직 역사학계에서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나 인식이 본격화되기 이전이었다. 오히려 톰슨이 엘리뜨 중심의 역사에 대한 대안적 서술의 본보기를 생생하게 제시함으로써 로우버섬(S. Rowbotham)이나 데이빈(A. Davin) 같은 여성사가들이 자극을 받은 면도 있었다. 굳이 톰슨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톰슨이나 『형성』에 공격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과연 여성사의 전략에서 유리할 것인지도 생각해볼 일이다. 성차에 대한 논의가 계급담론에 의해 압도당하는 관행은 잘못된 것이지만, 여성이 낮은 지위를 점하는 것이 아직도 엄연한 현실이고 역사학계 안팎에서 계급에 대한 관심이 점차 희박해져가는 오늘날,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톰슨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참고할 만하다.

 

4. 맑스주의 역사학자 힐(C. Hill)은 톰슨이 20세기 후반의 영어권 역사가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제도권 역사학계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음을 개탄했다. 톰슨이 영국아카데미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92년이었지만, 이는 관심이 언제나 현실과 연관되어 있던 톰슨에게는 어쩌면 지극히 사소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결국은 우리 자신도 사회적 발전의 종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더욱이 오늘날 세계의 더 넓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공업화 문제, 민주적 제도의 형성 문제 등 산업혁명기에 우리 자신이 경험한 것과 여러모로 유사한 문제들을 겪고 있다. 잉글랜드에서 패배한 주의 주장이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는 혹시 승리할지도 모른다”(상·하권 12면)고 기대했다. 그러나 이제 일국적인 차원에서 그가 생각한 종류의 혁명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자본주의체제의 성격이 산업혁명 초기처럼 단순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형성』은 이제 현재의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어려웠던 시절’의 회고담으로 책장에 꽂아두기에 적당한 고전이 되어버린 것일까? 평자가 보기에 일부 지역, 일부 계층의 성공에 비례해 빈부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세계사적 현실에서, 성공한 사람들만을 기억하고 패배자들은 잊어버리는 역사를 거부했던 톰슨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도드라진다. 계급이 “역사적 관계”이고 “관계란 언제나 실재하는 사람들과 현실적인 맥락 안에서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상·하권 7면)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계급론 자체에 대해 회의하는 관점은 전면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형성』의 한국어판 출간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저 편안한 고전으로 반기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읽고 나서 어떤 이유로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야 제대로 공들여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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