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오늘의 한국, 변모하는 사회운동
차이와 연대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김영희 金英姬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영문학.
1. 내적 연대의 필요성
특집을 여는 이 글에 애당초 부여된 사명은 여성운동의 입장에서 전체 사회운동을 조감하는 일이지만, 여성운동 가운데서도 학술운동의 끄트머리에 연을 대어온 필자로서는 개개 운동들의 충실한 이해에 근거한 총괄을 해낼 준비는 되어 있지 못하다. 사실 누군들 이런 과제를 쉽사리 감당할 수 있을까 싶게 사회운동이 다양하고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이같은 다양성은 각 사회운동들의 자율성과 연대의 현명한 결합을 당면과제로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여성운동을 일차적인 검토대상으로 삼되, 여성운동과 여타 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직결된 이론적·실천적 문제에 촛점을 맞춤으로써, 다른 사회운동들 및 전체 사회운동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시사를 던지는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다.
사실 운동들 사이 및 개별 운동 내부의 차이와 연대라는 문제는 다른 어떤 운동보다 여성운동에서 첨예하게 두드러지고, 그런만큼 그에 대한 논의와 모색이 집중적으로 수행되어온 편이다. 여성운동은 다른 사회운동의 모태에서 태어나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한국의 여성운동은 식민지 시기에는 민족해방운동과 그리고 7,80년대에는 민주화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맺으며 출발했고, 여성운동의 ‘제2의 물결’의 진원지인 미국의 경우도 민권운동이나 반전운동 등 여타 사회운동 속에서 여성운동이 태동하였다. 그런만큼 타 운동과의 관계맺음 혹은 관계 끊어내기는 여성운동에 처음부터 중요한 실천적 문제로 제기되었고, 그에 대해 다양한 입장들이 제출되었다. 거기에다 ‘여성’이라는 한마디로 묶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여성집단이 존재하는만큼 여성 내부의 다양성과 간극에 대처하는 것 또한 여성운동의 중요한 사안이 되어왔다. 그것은 여성운동에서 갈등의 진원지이자, 여성운동의 이념과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자산이 되어왔다. 여성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이같은 고민이 다른 운동과의 연대 문제와 결합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여성 내부에서 주변집단으로서의 차이를 강조하는 경우, 가령 노동운동이나 소수민족 운동과의 연대에 한층 열려 있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운동은 안으로나 바깥으로나 차이와 연대라는 문제를 핵심적으로 떠안고 있다. 차이와 연대는 비단 운동세력들 사이의 양적 집결과 갈림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여성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이 자기 과제나 장·단기적 전망을 바라보는 시각과 직결된다. 다시 말해 전체 사회운동(무슨 통일된 조직과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라 해도)의 지향점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장기적 전망을 전체 사회의 근본적 변화에 둘수록 다른 운동과의 연대를 자기 운동의 외적 과제가 아닌 내적 과제로 삼아야 할 필요가 커진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에 대해서 총체적이면서도 환원론적이 아닌─다양한 문제들을 성별 억압, 산업주의, 노자간 모순 그 어느 하나로 환원론적으로 해소하지 않는─복합적 인식을 지향한다는 전제가 뒤따른다. 그래서 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들다는 단서를 붙인 것인데, 사실 전체 사회의 모습이 무엇이고 ‘근본적 변화’가 무엇인가부터가 논란의 대상이며,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면서도 연대 자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운동이나 입장 들도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모순들이 공존함을 인정한다면, 그 가운데 하나의 해소나 극복만으로(이같은 단독 해법이 과연 성립하는지도 의문이지만) 사회 전체의 탈바꿈이 가능한가 하는 상식적인 물음을 다시 던져볼 필요가 있겠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더 정확히 말하자면 87년 이후 활성화된 사회운동들의 다양한 움직임이 각개약진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변혁적 전망에 대한 실천적·이론적 관심이 퇴조하거나 변혁에 관한 논의가 좀체로 실감을 얻지 못하는 추세다. 여성운동의 경우도 크게 보아 마찬가지다. 여성불평등의 법적·제도적 시정과 기성질서 속의 여성세력화라는 개혁적 과제의 수행이 장기적 전망과 이어지기보다 실질적으로 그 자체 목적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제기되는 한편, 장기적 전망은 그것대로 불투명한 상태이다. 여성운동계 일각에서 정치권 진입 문제를 계기로 여성운동이 기성 구조에 ‘끼여들기’에 주력할 것인가 ‘틀바꾸기’에 더 중점을 둘 것인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 것도 이를 반영한다.1 물론 80년대 한때처럼 변혁이 목전의 일인 양 여기는 것 역시 심각한 오류를 수반했고, 그 가운데 하나가 개혁과 변혁을 날카롭게 나누거나 항시 대립적인 것처럼 바라보는 발상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기만 하면 저절로 변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에 자족할 일은 아닌데, 이런 믿음은 실제로 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뒤에 숨기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같은 회의가 전면화된 결정적 요인은 역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문자 그대로 전지구화된 것이며, 어쩌면 영국의 지성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가 서구문화를 진단했던 대로 이제 우리에게도 문제는 “미래의 상실, 미래가 〔지금과〕 다르고 또 더 나을 수 있다는 내실있는 믿음의 상실”인지도 모른다.2 그만큼 대안적 사회의 모습과 거기로 다가가는 경로가 불투명해진 것인데, 이런 때일수록 변혁에 대한 전망을 잃지 않되 그것을 현재의 개혁적 과제와 결합시켜낼 수 있는 안목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때 변혁에 관한 이야기는 탁상공론에 그치고, 개혁적 노력은 그것대로 체제의 궁극적인 수락이 되기 십상이다. 차이와 연대라는 두 항목의 적절한 배합이 여기서 긴요해진다. 차이만을 강조해서도, 그렇다고 일정한 긴장 없이 통합만 내세워서도 제대로 된 대응이 어려운 그런 조건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체제라는 것이 본디 복잡한 사회갈등을 양산하면서 은폐하는 경향이 있거니와, ‘세계화’로 말미암아 그런 경향이 한층 심화됨은 나날의 삶 속에서 우리가 불안하게 체험하는 바이다. 이 글에서는 성별과 노동, 환경의 문제에 주로 논의를 국한하겠지만, 우리 바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의 문제임이 한결 분명해진 인종/민족의 문제, 진전하는 남북관계 속에서 남북한 사이의 차이, 세대적·문화적 간극의 심화, ‘남한사회’라는 경계의 약화는 운동의 다양화와 아울러 연대를 요구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요즈음에는 각 운동단체에서 친환경적·친여성적·친노동적 목표를 함께 열거한다든가 다른 운동과의 이념적 연대를 표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다른 운동에 대한 지원 수준을 넘어선 지속적이고 내실있는 연대를 위해서는 다른 운동의 이슈가 바로 자신의 이슈이기도 하다는 데 착안해야 한다. 즉 ‘남’과의 협력이라는 차원에서 그치는 ‘외적 연대’가 아니라 다른 운동의 문제의식을 끌어들이는 것이 곧 ‘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내적 연대’를 한결 튼튼히 일궈내야 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각 운동들은 각자 고유한 과제에 집중하는 자율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문제의식이 상호침투하는 가운데 연대함으로써 전체 운동을 강화해나가는 도정에 오를 수 있겠다.3
지금 여성운동계에서도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주변’의 입장을 포괄하는 운동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4 그런데 이것이 당위적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여성운동의 이같은 확장이 어떻게 가능하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규명이 필요하다. 나아가 ‘여성만’의 입장을 우선한다는 한정된 목표를 설정한다고 해도 모든 주변자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을 때 그 목표를 이룰 수 없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다음에서는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여성운동이 타 운동들에 대한, 그리고 다양한 여성집단 상호간의 관계맺음에 관해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를 살펴보되, 근본적인 발상들에 주안점을 두기로 한다.
2. 운동간 연대의 문제
운동간의 내적 연대가 각 운동이념의 상호침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상호침투는 다른 이념들을 병렬적으로 첨가하는 차원이 아님은 물론이다. 오히려 각 운동의 기본전제들을 재점검·수정하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참다운 상호침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운동의 문제의식이 자신 속에 얼마만큼 내면화되었는가는 각 운동이 얼마만큼 복합적 인식에 도달해 있는지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구실도 한다. 이 절에서는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 및 환경운동의 상호침투가 어떻게 이루어져왔고 그것이 어떤 면에서 필수적인지를 짚어보겠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해방 이후 오랜 단절을 넘어서 70년대 여성노동자 운동에서부터 맹아를 보이다가, 80년대 민족민주운동과 함께 급성장하면서 1987년 여러 여성단체들이 모여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이런 과정에서 전체 사회운동, 그중에서도 노동운동과의 관계 설정은 여성운동의 중요한 의제가 되었으며, 결국 여성운동은 민민운동의 부분운동으로 스스로를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 여성운동론의 독특한 논쟁구도 역시 전체운동 속에서의 여성운동의 위상과 직결된 것이었다. 가령 미국에서와 달리 자유주의와 급진주의 노선이 약한 가운데 ‘맑스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노선이 대치하는 형국을 이뤘는데, 이 두 노선은 여성문제를 전체 사회문제와 연관짓는 데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연관방식에서 견해를 달리했던 것이다. 노동운동과 여성운동의 관계에 국한하여 보자면, 두 노선 모두 계급문제가 여성억압을 낳는 중요한 고리 가운데 하나라는 데 동의하되, 맑스주의 입장이 계급적 구조의 근본적 규정성을 강조한 편이라면 사회주의 입장은 여성문제와 계급문제의 상호 독자성을 주장한 편이었다. 이러한 두 입장은 그러나 적극적인 상호대화를 통한 이론의 발전을 이루지는 못하였고, 그 결과 각기 환원론과 병렬주의를 시원하게 넘어서지 못했다. 이는 당대 민민운동의 연대가 충분한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거칠게 말하면 여성운동은 민민운동을 자기 일로 보았지만 여타 민민운동 대오에서는 여성문제를 여전히 남의 일로 치부하는 수준이었다. 짝사랑과 비슷한 형국이었으되, 민민운동의 과제가 여성운동에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었던만큼 짝사랑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같은 상호성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여성운동은 여성운동대로 ‘전체 운동’의 내용과 과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들어가기보다 이미 정해진 시각과 과제를 받아들이는 데 그치기도 했으니, 민민운동전선은 이 점에서도 참다운 내적 연대에는 미달했던 셈이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루어진 민주화의 부분적 진전과 1989년 동구권 몰락은 사회운동의 공간을 대폭 확대하는 한편 장기적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이중적 효과를 연출했는데, 여성운동도 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90년대 초엽 이후 여성운동에서도 계급문제나 사회 전반의 변혁에 대한 직접적 관심이 점차 약화되며, 사회주의와 맑스주의 노선의 비판적 대화 역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그대로 중지되고 말았다. 두 입장 모두 어느정도 정답주의에 매여 있었다면 이제 ‘정답’의 짐이 덜어진만큼 좀더 활달한 모색을 해볼 법도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노동이니 계급이니 하면 우선 식상해하는 풍토마저 여성운동계나 학계 일각에 자리잡아왔다.
그러나 여성문제는 단순히 의식이나 문화만이 아니라 물질적 삶의 조건과 관련된 문제다. 따라서 여성운동에서도 ‘노동’의 문제는 중요한 몫을 차지하며, 이에 대한 관심이 가령 문화에 대한 관심과 배타적인 관계를 갖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은 성별분업구조에 의해 구성되며, 이 구조는 온갖 여성억압적 문화를 재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더욱 굳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일과 문화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규정적이다. 다만 여성이 수행하는 노동이 바뀌어야 비로소 전반적인 문화풍토의 변화도 가능하리라는 점에서는 노동의 중심성을 말해도 좋겠다. 육아를 포함한 가사노동에 그간 어느정도 변화가 있었다면 거기에 페미니즘적 의식의 확산도 한몫을 했겠지만, 아무래도 여성취업인구의 증가가 결정적 요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문제를 중요한 논제로 삼은 기왕의 우리 논의도 그냥 묻어두기보다는 비판적 재평가를 통해 진전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예컨대 ‘80년대’ 여성운동론이 기층여성이나 생산직 여성 중심의 편향을 보인 데 대한 자기반성과 비판이 90년대 초엽부터 서서히 제기되었는데,5 이와 더불어 그런 편향을 낳은 요인에 대한 정밀한 검토가 함께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다양한 여성 계층을 골고루 배려하자는 무난한 제안에 그치기 십상이다. 문제의 진원지는 여성노동의 문제를 중심에 놓자는 발상 자체보다는, 그것을 곧장 ‘여성노동자계급’의 중심성과 동일시한 데 있는 듯하다. 그러나 노동, 혹은 생산의 중심성이 갖는 일차적 의미는 물적 재화의 생산을 둘러싼 경제적 관계가 제반 사회현상에 대해 궁극적인 규정력을 갖는다는 뜻이지, 곧바로 생산자 자체의 중심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좁은 의미의 ‘생산적 노동’ 이상으로 훨씬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가령 가사노동은 여성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이면서 이른바 생산적 활동으로도 ‘노동’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만큼 적어도 여성에 관한 한 ‘가치의 생산자’가 언제 어디서나 당연히 ‘노동자’를 뜻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잘못이다. 결국 물적 규정성이라는 명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여성노동자 중심성으로 곧장 번역해낸 단순논리가 문제인 것이다.
오히려 노동의 중심성에 대한 주장은 여성이 수행하면서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에 대한 재해석과 적극적 의미부여를 요구하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이 가족관계의 주된 담지자인 데서 생겨난 ‘돌봄’ 등의 ‘여성적’ 특성을 높이 사는 문화론적 페미니즘의 논의에도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특성을 ‘여성적’인 것과 당연히 결부시키는 통념을 불식하려는 노력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왕의 남녀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그대로 재생산하고 성별분업에 대한 문제의식을 약화시킬 위험이 크다. 다만 가사노동 등 ‘비생산적’ 노동들의 덕목을 재평가하는 것은, 현재 유일하게 가치있는 노동으로 인정되는 활동을 사람들이 수행하는 다른 다양한 활동 속에 자리매김하면서 노동과 생산의 본원적 의미를 다시 묻는 데 긴요한 실마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생산노동 및 교환가치 중심주의가 그 자체로 성별 억압의 양산에 기여한다는 것이 여성운동의 핵심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라면, 성별 억압은 노동자집단 내부에 심각한 간극을 빚어냄으로써 전체 노동세력의 약화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에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사실 ‘여성’이라는 집단의 내부구성이 복잡한 만큼이나 ‘노동계급’의 내부구성 또한 복잡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노동운동은 계급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구성에 대한 이론적·실천적 탐구에 활발히 응해왔다고 보기 힘들다. 계급내 다양한 계층을 생각할 때도 ‘경제적인’ 기준에서 숙련/비숙련, 대기업/중소기업/영세사업장 식의 차이를 우선하는 편이고, 성별이라는 변수를 고려한다고는 해도 그에 대한 실질적 해결노력은 미약한 실정이다.6
민주노총(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나 한국노총(한국노동조합총연맹) 공히 여성부서나 여성위원회 등을 두고는 있으나 그런 부서에 실질적인 힘이 실리지는 않으며, 각종 집행기구나 대표직에 여성들이 참여하는 비율 역시 남녀 노동자 성비에 한참 못 미친다. 작년 한 해 사이에 서울 등 여러 지역 여성노조, 그리고 민주노총 산하 전국여성노동조합과 독자적인 전국여성노조연맹이 창립된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는데, 사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여성의 ‘성별조직’에 대한 의구심은 해묵은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노조 여성부서와 지역이나 전국 규모의 여성노동운동단체 및 여성노조가 병존하는 현상 자체는 여성운동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어떤 조직형태를 갖추느냐는 그때그때 제반 정황에 달린 문제지만,7 일반적으로 볼 때 다른 운동 속에서 여성적인 시각을 담보하는 조직과 자율적인 여성조직이 함께 존재할 필요가 여성운동에는 있다. 여성운동은 성별 억압을 일차적인 해결과제로 삼는만큼 독자성을 지니되, 또한 성별 억압이 항시 다른 억압구조와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서는 여타 운동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체로서의 여성운동은 다른 운동과 고립되어서도, 그렇다고 다른 운동에 병합되어서도 제 몫을 다하기 힘들다.
사실 여성의 조직화는 낮은 노조 결성률을 높이는 데도 필수적이며, 따라서 ‘여성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계 전체의 문제다. 새로 조직된 여성노조가 주력사업으로 내건 것도 바로 영세사업장 및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조직화인데, 기왕의 노동운동은 정규직 중심의 인력배치와 과제설정으로 말미암아 이 노동자군의 문제를 주변화해왔다. 이같은 일면성은 전체 노동운동은 물론이고 좁게는 남성노동자의 이해에도 장기적으로 역효과를 낳는다. 여성노동자들은 그 취약한 위치 때문에 전체 노동계에 불어닥칠 문제를 먼저 경험하며, 따라서 여성노동이 겪는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은 차후 문제가 전면화됐을 때의 신속한 대처를 준비해준다. 그런 점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심각해진 고용문제에 노동계가 일면 무력했던 데는 일찍부터 고용문제를 주요 사안으로 삼을 것을 요구해온 여성노동운동 진영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 크다는 지적에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8 결국 성별과 마찬가지로 계급 역시 독자적으로 작동하기보다 성별이나 인종/민족 등 다른 변수들과 항시 결합되는 범주다. 이에 대한 미흡한 인식은 곧 노동자집단 전체를 감싸안는 참된 계급의식에 미달함이다.
이처럼 성별 모순에 대한 인식이 계급의식의 내실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환경운동의 문제의식 역시 노동운동 및 여성운동의 그것과 결합될 필요가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여기서는 여성운동과의 관계로 논의를 좁혀보겠다. 생산중심주의 및 현재 사회의 장기적 존속가능성에 대한 환경운동의 근본적 의문은 여성운동(그리고 노동운동)으로 하여금 체제내 분배나 권익신장 차원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한층 절실하게 일깨워준다. 여성운동 자체도 생산중심주의를 문제삼는만큼 환경운동과 연대할 여지가 충분하다. 과연 여성운동은 70년대 소비자보호운동이나 공해반대운동에서부터 환경운동에 적극 참여해왔는데, 요즈음 여성단체들은 환경운동과 연대하거나 환경관련 부서를 직접 꾸리기도 하고, 양 운동간의 좀더 긴밀한 이념적·실천적 결합을 꾀하는 생태여성론(ecofeminism)에 대한 관심도 부쩍 늘어나고 있다.9
그러나 환경운동이 일상생활과 소비의 문제를 적극 제기하면 할수록 환경문제를 낳는 구조적 요인 및 성별분업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아울러 갖출 필요 역시 커진다.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소비와 생활의 주된 담당자인 여성에게 최종적 책임을 돌리거나 가사노동의 부담만 늘림으로써 기왕의 성별분업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10 또한 산업사회 비판이 복고주의로 치닫는 것을 막는 데도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은 긴요하다. 물론 전산업적 삶의 방식이나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비자본주의 방식으로 수행되는 가사노동 등의 활동이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의 장기적 전망 모색에 중요한 자산임은 분명하다. 이런 면에서는 진보와 보수 내지 복고를 판별하는 기왕의 기준을 그대로 받아들일 일도 아니다. 환경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계급구조 철폐의 전망에 충실한 노동운동은 개발과 발전 위주의 진보 개념에 근본적 문제를 제기해온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 삶에 대한 일방적 예찬이나 그로의 복귀 시도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데, 이는 전산업사회의 봉건적 질서가 좁은 의미의 ‘가부장제’에 걸맞은 사회였음을 상기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자연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예속된 지위로 돌려놓아도 좋다는 입장이 아닌 한 말이다. 자본주의로의 진전은 여성에게 또다른 억압과 질곡을 가하면서도 가부장적 신분질서의 와해와 함께 여성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양가적 과정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운동 과제들의 결합을 파악하는 틀로 특히 여성노동 문제와 관련해 자주 쓰였던 일반과 특수라는 발상에 대해 한두 마디 덧붙일까 한다. 일반과제니 특수과제니 하는 용어의 사용 자체는 줄어든 편이지만, 그런 용어에 담긴 발상까지 사라졌다고 하기는 힘든 것 같다. 성별과 무관하게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문제와 여성이기 때문에 생겨나거나 가중되는 문제를 구분하며 후자에 대한 주목을 환기한다는 면에서는 이런 어법도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과 특수가 종종 이분법적으로 파악되면서 문제가 생겨난다. 그럴 때 노동운동의 일반과제가 바로 여성문제인 동시에 여성노동의 특수과제가 노동계의 일반과제라는 점이 가려질 뿐 아니라, 여성의 특수과제는 그야말로 특수하게 추가될 문제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성별분업만 해도 여성들의 처지에 직결된 문제지만 자본의 지배를 원할히하는 한에서는 노동자 전체의 문제다. 또한 당면 이슈가 되고 있는 법정노동시간 단축 역시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일반과제’면서, ‘생산적 노동’과 여타 활동의 비중에 제한된 변화나마 가능케 하는 점에서는 여성의 ‘특수한’ 이해에도 밀착된 문제다. 가령 가족성원들의 가사노동 분담은 현행 가사노동의 문제점을 (해결이 아니라) 얼마간 개선하는 데 필수적인데, 그러자면 최소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지경은 면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이 사회의 노동편제는 노동력생산에 전업적으로 종사하는 1인 인력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으며, 이것이 성별분업 재편에 어떤 장애물이 되는지는 일과 가정 사이에서 나날이 곡예를 연출해야 하는 대다수 취업주부의 존재조건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노동시간 단축은 또한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할 때 겪는 어려움을 더는 노력은 그것대로 추진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노동의 형태와 방식의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운동의 장기적 과제와도 맞물리는 문제다.
일반과 특수 식의 발상은 여성운동 내에도 존재한다. 범여성적 여성문제(흔히는 중산층 중심의 문제)가 ‘일반적’으로 존재하고 거기에 노동계급이나 소수민족 여성의─그리고 국제여성운동의 차원에서는 ‘제3세계’ 여성의─‘특수한’ 문제가 더해진다는 안이한 사고가 숱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여성운동 내부의 차이에 대응하는 어려움을 말해준다. 운동 내부의 차이가 운동들 사이의 관계와 직결되는 문제이며, 내적 차이를 제대로 사고하는 것은 곧 여성집단 내부에 들어와 있는 여타 위계적 구조와 성별구조의 맞물림에 대한 복합적 인식을 요구한다는 점은 이미 분명해졌다. 이를 바탕으로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관한 입장들과 몇가지 유의점을 정리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짓기로 한다.
3. 여성들 사이의 차이
근자에 와서 한국 여성운동이나 여성학계에서는 차이에 대한 논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여성운동에서 말하는 ‘차이’는 남녀의 차이와 여성들 사이의 차이로 대별된다. 따라서 ‘차이의 페미니즘’이라는 말도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가 ‘평등의 페미니즘’과 달리 여성적 차이와 특성을 긍정하는 입장으로 여기서는 여성들 사이의 공통점과 자매애를 강조한다면, 또 하나는 오히려 여성들 내부의 다양한 차이들에 주목하는 경향이다. 여기서는 후자에 논의를 한정하겠는데, 다만 이처럼 둘이 상반되어 보이지만, 여성 혹은 여성들의 독특한 ‘정체성’에서 운동의 입지를 찾는 공통된 경향도 이 두 흐름 속에 공히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한국 여성운동론에서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게 된 배경에는 여성운동의 다변화와 주체의 다양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간 여성운동은 성애와 문화, 몸, 그리고 최근에는 싸이버공간이 부각된 데서도 드러나듯 그 접근방식이 더욱 다채로워졌으며, 운동의 주체도 가정주부와 젊은 여성들,11 그리고 여성학 연구자 등의 증가로 층이 한층 두터워졌다. 그러면서 여성들 각자의 처지와 입장, 감수성의 차이가 한결 분명히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그같은 차이를 감싸안으면서 상호 이해와 연대를 꾀할 필요 또한 커졌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식민주의 경향의 페미니즘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외국이론의 수입이라고 그저 냉소할 일은 아니다. 세계가 혹은 더 좁게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삶의 실상으로 보나 페미니즘의 국제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속도(아직은 쌍방향적 혹은 다방향적 교류에 값하는 수준은 아니지만)로 보나 ‘외국이론’과 ‘우리 이론’을 배타적으로 구분하기가 더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남녀 이분법 및 여성을 단일집단으로 설정하는 데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비판과 인종과 민족적 지배구조를 문제삼는 탈식민주의는 우리로서도 참조하고 활용할 법하다.12 그렇지만 무비판적인 적용이 슬기로운 활용에 미달함은 물론이니, 이론 자체의 문제점과 한계는 그것대로 극복해야겠으며 또한 서구와는 좀 다른 남한 여성운동의 걸어온 길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하겠다.
남한 여성운동의 노정과 관련된 문제부터 간단히 짚어보면, 이같은 이론들을 포함하여 서구, 특히 미국의 논의가 유입되면서 거기서 흔히 이야기되는 ‘평등에서 (남녀)차이로, 그리고 다시 평등과 차이의 이분법의 해체로’라는 운동의 수순이 우리의 경우에 그대로 대입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남한의 여성운동은, 계급적 차이에 주로 국한하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유념하면서 출발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비단 우리 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기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긍정적 유산을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여성운동에도 기여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그 유산 가운데 하나가 여성들의 차이에 주목하되 다양한 차이의 병렬적 인정에 머물지 않고 그같은 차이를 낳은 구조적 모순 및 그것들과 성별 모순의 관계에까지 사고를 밀고나가려는 문제의식이다. 그럼으로써 여성억압에 대해서도 전체 사회에 대해서도 좀더 복합적·총체적인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경향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구조적 인식 자체를 본질주의적 결정론이라 부정함으로써, 차이를 낳은 다양한 요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는 논자들의 경우마저 그 요인의 병렬적 조합에 만족하게끔 부추기는 것이다.
차이는 여성집단의 복합적 구성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은 될지언정 종착점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의 강조에 만족할 때 차이 뒤에 존재하는 권력과 지배 관계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13 차이의 문제는 사실 노동자계급이나 흑인 등 소수민족 여성,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제3세계’ 여성 들이 서구의 주류 페미니즘을 비판하며 제기한 문제이기도 한데,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이런 불만을 수용하는 한편으로 그 근본적 문제의식을 무마해버리는 혐의가 짙다.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주변부’ 여성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여성들 사이의 처지가 다르니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내부의 차이로 현상(現象)되는 바 여성집단을 가로지르는 여러 구조적 모순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들 상호간에는 그냥 다양성이 아니라 지배/피지배 관계가 존재하며, 따라서 여성들 다수를 감싸안는 여성운동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 내부의 권력관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다른 운동의 과제를 내면화하고 다른 운동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수립하는 것을 여성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떠올리는 셈이다. 민족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려는 제3세계 여성들의 선택을 페미니즘의 미발전 상태 정도로 치부했던 서구의 주류 페미니즘의 시각과는 실로 선명히 대조되는 발상이다.14 차이를 낳은 갈등구조 속에 각자가 위치해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같이 규정된 위치가 갖는 함의를 반성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문제의식은 다른 입장에 대한 관용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의 수정과 (필요하다면) 폐기까지도 요청하는 것이다.
또한, 차이들 사이의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차이들에 대해 경중을 가려서, 가령 성별과 계급, 인종/민족 등 구조적 모순에 따른 차이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심과 주변의 해체만을 내세울 때 이같은 상식마저 위계적 사고로 도외시된다. 그런 가운데 세대·이념·신원에 따른 다양한 차이가 부각되고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면서도 정작 소외된 계층의 여성들의 침묵이 강요되고 심지어 그런 침묵마저 인식 바깥으로 밀려나는 결과가 빚어지기도 한다. 세계화의 작동은 여성집단 내부의 계층적 간극을—여기에는 단순히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교육·지역·언어 상의 불평등도 겹치는데—갈수록 심화할 조짐이며,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때 여성운동은 대다수 여성에게 ‘남의 이야기’로만 여겨질 수조차 있다.
이처럼 차이들에 주목하면서도 여성들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담보해내는 힘든 과제는 여전히 남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여성 범주 해체가 ‘여성’운동의 성립 자체를 위태롭게 할 뿐 아니라, 흑인여성의 문제제기도 그들만의 정체성, 그것도 이중삼중의 희생자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운동의 분열과 파편화에 일조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 글에서 말한 ‘차이의 페미니즘’의 두 경향은—일부 예외적인 논자를 제외하고는—대체로 ‘정체성의 정치’(identity politics)에 속한다 할 수 있는데, ‘차이’(difference)가 ‘정체성’(identity)과 만난다는 것이 언뜻 역설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남성과의 차이든 백인여성과의 차이든 그것을 통해 각자 ‘여성’ 혹은 ‘흑인여성’의 정체성을 구성하려 든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결국, 여성들 사이의 차이점뿐 아니라 공통점을 배려하는 일이 여성 연대에 긴요한데, 그렇다고 다시 그같은 온갖 차이를 제거하고 남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여성 연대를 꾸리는 것은 차이 문제에 대한 그간의 힘겨운 고투를 되돌리는 처사일 뿐이다. 여성들의 정체성에 주목할 때는 이런 다름 대 같음의 선택지에서 벗어나기 힘든만큼, 이 난국을 푸는 관건은 어쩌면 정체성에서 권력관계에서의 위치로 시각을 전환하는 데 있겠다.15 여성은 무슨 고유한 특성 혹은 독특한 정체성을 공유함으로써 여성이 아니라, 성별 위계관계에서 종속적 위치에 놓인다는 점에서 다같이 여성인 것이다. 다만 그런 위치가 개개 여성들의 삶에서 구현되는 방식이 제각기 다른 것이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에 대한 관심과 연대의 요청이 결국 여러 모순들이 맞물리는 구체적 권력관계 속에서 여성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과제와 떠나 있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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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숙 「여성의 정치적 주류화에 대한 입장」, 『한국여성단체연합 제14차 정기총회 자료집』, 2000 참조.↩
- Williams, Towards 2000 (Chatto & Windus 1983) 4면.↩
- 예전의 민족민주운동 전선이 문제가 많았던 대로 다양성을 담보하는 가운데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시도였다면, 최근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은 다양성을 사상하고 최소한의 공통과제를 중심으로 집결하는 연대방식이었다.↩
- “성평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담론이 아니라 사회의 주류에서 배제되어온 주변자의 입장에서 모든 사람의 평등·평화·인권·복지로 나아가는 이념적 패러다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천명이나(남인순·윤정숙·강인순 「80〜90년대 여성운동의 평가와 세기 전환기 여성운동의 전망과 과제」, 『세기 전환기 여성운동과 여성이론』, 한국여성연구소 10주년 기념 씸포지엄 자료집, 1999, 12면), 여성학계를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는 ‘차이를 바탕으로 한 연대’의 주장은 이같은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 한국여성단체연합의 91,92년 하기정책수련회에서 부분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졌고〔이승희 「‘90년대 진보적 여성운동의 진로」(1991) 및 이미경 「전환기의 한국사회와 한국여성운동의 과제」 (1992)〕, 이와는 다른 입장에서지만 여성학계에서 좀더 전면적인 비판이 제출된 바 있다(조주현 「여성 정체성의 정치학: 80〜90년대 한국의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12권, 1996).↩
- 외국인노동자의 유입으로 인한 인종/민족 문제에 대한 대응 역시 그 절박함에 비해 매우 미온적인 대처에 그치고 있다. 성별과 인종/민족은 이제 한국 노동계급의 내부 분화 및 갈등의 중요한 변수로 고민되어야 한다.↩
- 여성조직이 다른 사회운동과의 관계에서 독자조직과 연합적 연대, 단일조직 속의 편입 가운데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는 역사적·사회적인 다양한 변수에 따라 달라지며, 독자조직의 형태를 취할수록 페미니스트적 의식이 강화된다는 통념이 맞는 것은 아니라는 M. Molyneux의 지적도 참조할 만하다(“Analysing Women’s Movements,” C. Jackson & R. Pearson, ed., Feminist Visions of Development: Gender, Analysis and Policy, Routledge 1998, 70〜73면).↩
- 민주노총과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등 4개 단체가 합동으로 개최한 ‘여성노동운동 방향에 대한 워크샵’(1999) 발제문인 조순경 「여성노동시장의 변화와 여성노동운동」, http:// women.nodong.net/data/kctu/990111.htm 참조.↩
- 여성생태론의 여러 갈래에 대한 소개는 문순홍 「생태여성론, 그 닫힘과 열림의 이론사」, 문순홍 편 『생태학의 담론』(솔 1999) 참조.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이념적 결합이 반드시 두 운동 사이의 연대를 낳는 것이 아님도 유의하자. 가령 근본생태주의와 급진주의적 여성운동론의 결합은 오히려 여성조직의 분리주의를 낳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 생활과제 중심으로 진행되는 여성환경운동의 이같은 역작용에 대한 지적으로는 강수영·김선미·안지영 「한국 여성환경운동의 평가와 전망」, 『여성과사회』 7호(1996) 76면 참조.↩
- ‘영페미니스트’ 혹은 ‘제2세대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이들은 주로 대학이나 싸이버공간에서 활동하는데, 근자에 나온 한 책에서 대학내 ‘성정치’ 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진술을 읽을 수 있다(달과 입술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동녘 2000). 여기서 다룰 여유는 없으나, 세대간 연대와 재생산 문제 및 싸이버공간의 가능성과 위험 역시 여성운동의 연대 구축에 있어 새롭게 주목할 문제다.↩
- 탈식민주의적 시각은 여성들 내부의 지배구조를 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더 강조하는 편이지만,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나머지 지배의 역학관계를 흐려놓는 면도 있는데,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좀더 소상한 논의를, 졸고 「한국 페미니즘 이론의 반성」, 『비평』 2호(2000) 406〜11면에서 시도한 바 있다.↩
- 해체론의 발상에 기대면서도 차이라는 구호가 특권이나 모순, 억압이나 종속의 개념들을 대치하면서 무책임한 다원주의로 탈정치화를 부추긴다고 비판하는 논의로는 Linda Gordon, “On ‘Difference’,” Genders 10호(1991년 봄) 91〜92면 참조.↩
- 이미 1975년 멕시코 세계여성회의에서부터 1980년 코펜하겐 회의에서도 선진국 여성들과 제3세계 여성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난 바 있다.↩
- ‘정체성’ 주장이 다른 집단과의 공통된 입지보다는 독특한 차별성을 배타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연대와 상호작용을 어렵게 만든다는 비판으로는, J.D. Mandle, “How Political is the Personal?: Identity Politics, Feminism and Social Change,” http://research.umbc.edu/ ~korenman/wmst/identity_pol.html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