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오인동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창비 2010
통이(通異)의 기록
정도상 鄭道相
소설가 oksknk@hanmail.net
어느 시대나 정치가 과도하게 힘을 행사하면 다수의 삶이 위험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나는 과도한 권력행사나 선전선동을 ‘정치과잉’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 8월, 2차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는 정치과잉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지금도 진행중이다.
대한민국에는 미디어에 의한 정치과잉이 나날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당한 의견마저 ‘과감하고도 떳떳하게’ 왜곡하는 힘이 국가와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시민사회세력을 비롯한 일부에서 안간힘을 쓰며 그에 저항하고 있다. 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군사조직, 당조직, 생활조직을 통해 정치과잉을 재생산한다. 그로 인해 주위 현실의 온전한 이해에 가닿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자성을 배제한 주체(主體)와 선군(先軍)의 강조만이 난무하고 있다.
이처럼 좌우, 남북, 선악의 이분법이 정치과잉을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로 인해 삶의 외면과 내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끊임없이 대립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 결과 개인의 인격마저 모순된 상태에 놓이는 경우가 나타났다. 정치과잉으로 민족의 삶은 훼손되었고, 개인의 성숙 역시 방해받았다. 이것이 분단체제가 낳은 상처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분단체제의 상처를 건너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나는 ‘통이(通異)’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통이는 서로 다른 것들이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통일보다 먼저 통이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궁지로 몰면, 더이상의 소통이나 관계맺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통이에는 쓰디쓴 인내가 필요하다. 정세 변화에 따라 약속이 파기될 때 생기는 분노, 같은 언어로 대화하면서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손실, 누군가 만들어낸 악의적인 평가들, 밑도끝도없이 떠도는 괴소문을 견뎌내는 인간적인 단련의 과정을 겪어야만 비로소 통이는 조금씩 진전하는 것이다.
그동안 남북교류에서 민간진영이 담당해온 역할은 크게 세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발견과 소개이며, 둘째는 충돌과 인내이고, 셋째는 소통과 지속이다. 최근 발간된 오인동(吳寅東)의 북한 방문기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에는 통이의 과정을 담아낸 소중한 경험이 녹아 있다.
발견과 소개는 1장 ‘닥터 오, 평양에 갑시다’에 잘 드러난다. 18년 전 선배 의사의 난데없는 제안으로 시작된 평양 방문에서 저자는 북한을 발견한다. ‘아, 우리가 무찔러야 할 적이라고만 알고 있던 이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구나’라는 깨달음은 분단체제를 발견하는 첫번째 계기였다. 평양시내부터 금강산까지 참관하면서 그는 북의 인상을 꼼꼼히 기록했다. 만경대 고향집을 비롯한 평양시내를 돌아보는 공식 일정은 평양을 여러차례 방문했어도 늘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다. 그것을 지루하게 통과해야 방문의 목적에 겨우 다가갈 수 있다. 오인동도 그 과정을 모두 거쳤다. 그후 북한 최고의 종합 산부인과병원 평양산원을 방문하고 고려호텔에서 북쪽의 의사들에게 고관절수술과 관련된 강의를 하게 됐다. 그렇다고 북의 의사들과 학술적・인간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일방적으로 보여주기만 했을 뿐, 내면의 소통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인동은 강연 도중에 벌컥 화를 내고 만다. 하지만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북한 의사들의 소박한 모습에서 그 발견은 깊어지게 되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에서 통일문제 연구단체 ‘Korea-2000’을 결성하고,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운동에 들어선다.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 대표단의 방북 당시 오인동은 의학교류를 합의했지만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다. 북의 핵개발과 그에 따른 국제적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충돌은 다양하게 발생했다. 내면의 충돌은 그런대로 견딜 수 있지만 상황의 충돌은 합의와 약속을 파기하게 만들었다. 단어나 문장을 비롯한 언어로 표현되는 민족의 위기와 실제 현실에서 발생하는 상황으로서의 민족의 위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민족의 위기는 언어로 표현되는 것 이상의 긴박감과 현실감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소통을 해야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충돌을 견디고 인내하는 자세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비인격적 언술로는 진정한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 아울러 비분강개형으로 격정을 토로하는 것 역시 교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인동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실무협상의 테이블에서는 언제나 남북 양측의 실무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충돌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단어 하나를 두고 1박 2일을 다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무적 충돌을 거치면서도 조금씩 진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계라기보다는 성과였다. 남북 민간교류의 실무적 충돌을 거치면서 남북 양측의 실무자들 역시 정치로부터 인격이 자유롭게 성숙되는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그것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계량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아울러 민간교류란 체제의 경쟁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체제의 생산물이라는 것을 북측의 실무자와 보장성원이 느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했다. 물론 성과가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고민이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북 대표단에는 언제나 보장성원이 대동하는데, 이들은 진실한 소통을 감시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실무현장에서의 충돌은 보장성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기 마련이었다. 충돌은 소심한 인습과 가면을 벗기는 내면의 행위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의 의사들이 새로운 의학지식을 배우려 했겠는가?
마침내 소통의 과정에 들어서자 비로소 지속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북한의 의사보다 남한이나 미국의 의사들과 소통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들은 저마다 가슴에 거대한 벽처럼 단단하고 완고한 이념의 성채를 세워놓고 이분법에 사로잡혀 소통보다 불통의 주장을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오인동 역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면서도 실제 소통에 나서려는 순간, 막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소통을 위해서는 불편함을 참아야 하는 그의 고민이 이 책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오인동은 무엇보다도 진심을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심은 숨겨놓고 당위만 주장하다 보면 소통은 어려워진다. 나아가 소통은 새로운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 낡은 가치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명분은 소통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장애물인 것이다.
오인동은 2009년 5월 18일, 다시 평양을 방문한다. 이번에는 오로지 인공고관절수술을 연구하는 정형외과 의사로서 시범수술을 하겠다는 목적만 갖고 있었다. 그동안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의 자격으로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오인동이 아니라 정형외과 의사로서의 오인동이었기에, 그의 감회는 남달랐다. 바로 이 지점이 민간교류의 지속성이 확보되는 순간이었다. 오인동은 평양의학대학 병원에서 17년 전에 강의를 들었던 정형외과의를 만나기도 했다. 동료와 함께 호텔로 찾아와 밤늦도록 온갖 질문을 하며 부지런히 수첩에 메모해가는 의사도 있었다. 정치상황의 변화로 수술가방을 들고 다시 평양을 찾았다가 그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오인동이 긴 세월 동안 평양의 의사들과 헤어져 있으면서도 늘 가슴 한구석에 그들을 담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속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는 것이다. 변화는 느리고 더디게 왔다. 그러나 돌아보면, 급격했다. 불편하지만 참고 견뎌내면 통이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온다. 오인동은 그것을 알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통이의 기록물이다. 그가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이 다시 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