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엄기호 『단속사회』, 창비 2014
단속(團束)사회에 단속(斷續)을 허하라
조일동 趙一東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지난해에 나는 사이버 공간에 취향을 매개로 형성되는 관계가 지닌 “단속(斷續)적 성격”을 강조하며, 오프라인 사회에서 맺어지는 관계와 다른 결의 역동성이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학위논문을 발표했다. 같은 ‘단속’이지만 『단속사회』의 저자 엄기호(嚴奇鎬)의 단속은 좀더 중층적이고 비관적이다. 그의 단속(斷續)은 스스로를 단속(團束)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사회에서, 단속의 갑갑함 사이로 낸 숨구멍이 사이버 공간에 접속 혹은 그와 단절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익숙지 않은 낯선 존재와의 만남을 차단하고, 이견을 가진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의 문제의식과 생각을 공적인 영역으로 가져가려는 시도를 단속(자기검열)하며, 이런 결과로 자신의 삶을 하나의 연속적인 서사로 만들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단속(斷續)의 결과로 성찰이 결여된 파편화된 말만 남게 된다고 본다. 즉 동질성과 유사성에 근거한 유대를 바탕으로 사람들은 듣고 싶은 얘기만 듣고, 남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단속사회가 “다른 누구도 아닌” 독립적 존재인 “나”를 만들자는(92면) 근대적 개인의 기획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문제는 이러한 독립을 성숙한 인간으로 여기던 사회가 승자독식의 자유경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시작된다. 이제 인간의 자유는 자기를 어떻게 관리하는가, 즉 ‘행함’에서만 찾아진다. ‘하지 않음’은 무화된다. 무언가 결과를 만들어낼 때에만 자신의 존재의의가 생긴다. 무언가를 이뤄내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개인보다 조직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래서 좌파는 조합주의를 고수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 못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기존의 형식·제도적으로 완비된 조합의 가입범주에 들기 애매한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가 생겨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좌파는 유연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고,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 지점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노동조합의 시위나 파업을 자신의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무질서한 부류의 “반도덕적인 행위이자 사회파괴행위로 낙인 찍”(229면)어버린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을 원용하여 영국의 사례를 주의 깊게 살핀다.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은 마거릿 새처(Margaret Thatcher)는 이익에서 제외된 조직되지 않은(노조에 속하지 않은) 개인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국가와 법치뿐이라 주장하게 된다. 사회 공론장에서 부당함을 호소하려는 조직된 개인을 국가불안세력으로 만들어, 이들의 정당한 ‘정치’를 법치의 영역에서 다뤄져야 하는 것으로 축소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존재의 노동과 활동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음에도 타인의 조직적 활동을 곱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어떤 식이라도 “민폐”를 끼치는 것은 독립적 개인이 해서는 안될 일이 된 것이다. 국가가 아닌 존재가 나의 안전과 편리함을 침해하는 것은 모두 민폐로 받아들여진다. ‘타인의 고통’은 나와 상관없기에 무시해야 한다. 그의 고통에 동참하는 순간, 즉 조직된 우리의 목소리로 이 고통을 직시하자고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것은 민폐가 된다. 그래서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것으로 공유하고 나의 경험을 타인과 나누는 시도는 단절된다. 저자는 이러한 개인을 두고 “타자에 끊임없이 의지하되 그 타자를 부정해야만 하는 존재”(282면)라고 지적한다. 근대적 개인은 성장하는 독립된 자아로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데, 여기서 성찰은 “새로운 정보나 지식에 비추어 이루어지는 항상적인 수정”(앤서니 기든스 『현대성과 자아정체성』, 권기돈 옮김, 새물결 1997, 65면; 『단속사회』 283면에서 재인용)을 의미한다. 당연히 성찰의 주체는 집단이 아니라, 개인이다. 그런데 개인이 홀로 성찰할 수 있는가? 성찰은 타자와의 대면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타자와의 관계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해방된 개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된다.
책은 다양한 사례를 오가며 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야기를 실감나게 전달한다. 만만치 않은 주제의식이지만 그 무게에 눌리지 않는다. 오히려 페이지가 쉬이 넘어간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책을 덮고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래서 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에필로그까지 읽고 나면 어딘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다. 왜 그럴까?
에필로그의 첫 문단에서 저자는 “누군가가 우리의 경험을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인간’이나 ‘역사’ 등 거대 범주로 환원하려 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진의를 의심해”(288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얘기다. 그런데 추상화의 영역이 너무 피상적으로 다뤄지거나, 그 과정에서 역사성이 휘발되면 이 진지한 주장은 세태 한탄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뒤로 갈수록 강조되는, 진정한 관계를 위한 곁이 되고 말걸기의 시작이 되는 ‘경청’의 필요를 역설하는 대목을 읽으며, 뭔가 중요한 것을 건너뛰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서구의 근대적 개인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학자가 개진했던 독립, 성장, 자유에 대한 논의가 다뤄지고 현대 한국사회에서 숱하게 만날 법한 사례가 풍성하게 언급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 공허함의 원인은 저자의 글에 이미 담겨 있다. 치밀하고 정치하게 현재의 문제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역사성에 입각한 추상화의 틀이 단단해야 한다. 최소한 3부의 마무리나 에필로그는 현장의 치열함에서 몇 계단 높은 지점에서 단속사회에 대한 확장된 조망을 던져줬어야 했다.
나는 그 조망점이 역사성의 언덕이었어야 한다고 믿는다. 본문에서 너무나 간단히 지나간 박정희(朴正熙)시대와 군사독재의 경험, 식민지와 전쟁의 경험처럼 한국사회에 근대적 비전이 제시되던 시기에 대한, 특별한 우리의 역사성에 대한 직시가 한번은 필요하지 않았을까. 1970년대 영국의 신자유주의 전략이 개인을 어떻게 고립시켰는지 보여주는 대목은 짜릿하지만, 그것이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한국적 맥락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하위계급 청소년이 교육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계급 재생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분석한 폴 윌리스(Paul Willis)의 글을 설명하다가, 조폭을 따르는 한국 고등학생의 ‘일진’ 문화로 건너뛰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통쾌한 비교분석이지만, 그 사이로 한국사회가 겪은 역사적 특수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빠져나간 점이 못내 아쉽다. 역사성이 부여되면 서구의 근대와 다른 한국이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동질성을 바탕으로 다름의 목소리가 단속되었다는, 저자가 보는 한국사회가 서구의 그것과는 같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서구적인 의미의 근대인이 되려 하지도,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채용해도 서구의 그것과 같을 수 없다. 우리에겐 더 철저하게 단(斷)해야 할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철저하게 조직화된 개인이 우리 사회에 한번이라도 존재했는지, 혹은 독립적 개인이 되어본 적은 있었는지 묻고 싶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나눈다는 사이버 공간의 취향 공동체처럼 단속적이나마 관계가 만들어지기라도 해야, 끊임없이 협상하고 조율하는 조직된 개인이 한국사회에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정치의 영역을 법치로 덧씌웠던 새처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달리 한국사회는 삼권분립부터 시작해서 더 많은 법치가 필요하진 않을까? 지금 개인이 노력한다고 ‘경청’이 그냥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이해를 위해선 역사적 궤적을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경청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단계가 필요하다. 오디세우스(서구의 근대적 개인)가 씌워놓은 밀납을 벗겨내자는 이 책의 멋진 마무리가 나에게 어딘지 마뜩잖은 구석으로 남게 된 이유다.